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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13-25)

맑은샘77 2015. 1. 28. 14:05

2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2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마서 7:13-25

 

 

[율법과 죄의 관계]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율법과 죄의 관계]

13 그렇다면 선한 것이 나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단 말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죄인 것으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 죄는 선한 것을 이용하여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죄는 계명을 통해 한층 더 죄의 참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14 우리는 율법이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영적이지 못하며, 죄의 노예로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은 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을 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을 원하지 않는 것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17 그런데 이제는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살고 있는 죄입니다. 18 나는 내 안에, 다시 말해서 나의 죄악된 본성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바람은 내게 있지만,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19 나는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20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행하고 있다면, 그 일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살고 있는 죄입니다. 21 그러므로 나는 이런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은 나에게 있지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22 사실 나의 속 중심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23 그러나 나의 몸의 여러 부분들에서는 다른 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내 몸에서 작용하고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내겠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반면, 죄악된 본성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서론

 

이 본문은 로마서 중에서도 해석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학자들 간에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논쟁의 초점은 첫째, 본문 중에 나오는 ‘나’는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주인공이 바울이냐, 아니면 제삼자냐 하는 것을 놓고 서로 의견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이 이야기가 ‘언제’의 경험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바울이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가 예수 믿기 이전에 체험한 것이냐, 아니면 예수 믿고 나서 체험한 것이냐, 아니면 어떤 특별한 경우에 체험했던 이야기냐 하는 것을 놓고 서로 의견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중생한 사람의 영적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중생 받은 다음 몸소 체험한 내적 모순과 갈등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바울의 문제가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구원받은, 중생한 성도의 영적갈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은혜의 한 단면이다. 7장의 말하는 화자는 예수 믿는 사람이요, 구원받은 사람의 이야기이다.

바울이 이렇게 깊이 고민하는 것은 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 믿기 전,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에는 그렇게 고민한 사람이 아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이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을 가감 없이 내어놓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토의내용

 

1. 율법 앞에서 자기의 죽음을 맛보는 사람은 자기 속에 또 다른 일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 19절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나는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 21절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은 나에게 있지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 22절 /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사실 나의 속 중심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율법은 죄를 죄가 되게 하지만, 선과 악에 대하여 분별할 수 있는 은혜가 있다. 율법의 거룩함을 깨달은 사람은 그 말씀대로 행하고, 선을 행하고자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바울이 깨달은 한 법이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의 대립하는 원리, 지배원리, 한 원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소원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임을 알기에 구원받은 우리는 그에 합당하게 선을 추구하며 하나님 뜻에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고 완악해서 악이 함께 있고, 죄의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는다.

[참고]

-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2.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율법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으로 믿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하고 싶어 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와 반대로 귀찮은 것, 부담스러운 것, 벗어버리고 싶은 것으로만 여긴다면 율법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다시 말해, 십계명에 대해 당신은 어떤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십계명,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시고 주신 말씀이다. 5~10계명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라 생각한다. 다만 1~4계명은 좀 더 세밀하고 폭넓게 적용하길 원하시는 것 같아 온전하게 지키기가 쉽지 않다.

 

[ 참고 ] 십계명

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 2계명.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 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 6계명. 살인하지 말라. / 7계명. 간음하지 말라. / 8계명. 도둑질 하지 말라. /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 10계명.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라.

 

 

 

3. 율법에 대해 아주 위험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종종 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율법에서 해방되었어. 이제 율법은 필요 없게 되었어. 우리는 은혜 시대에 살고 있어. 그러므로 율법을 가지고 부담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야.” 이렇게 율법을 경시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이것이 왜 잘못되었습니까? 다음의 글을 참고하십시오(참고/ 요 14:21).

 

영의 눈이 열려 주의 법을 새로 깨닫는 자는 특별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분명히 아는 은혜, 선을 간절히 행하고 싶어 하는 은혜, 율법을 즐거워하는 은혜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마음에는 이 세 가지 은혜가 뒤따라옵니다. 7장에 나오는 ‘나’라는 주인공은 바로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고/ 요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내 계명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고,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말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죄에 무게에 짓눌려 지킬 수 없음에 괴로워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닮고 뜻에 따르는 것이 당연하듯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당연히 우리도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마땅하다.

 

 

 

4. 그런데 참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은혜 받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선을 사모하고 즐거워하는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자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는 갈등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모순은 무엇입니까?

 

․ 15절 /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을 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18절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나는 내 안에, 다시 말해서 나의 죄악 된 본성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바람은 내게 있지만,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 19절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나는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우리의 육신에는 선함이 없어 선을 행하지 못한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에 선만 행하는 그런 존재로 지으셨으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어 선과 악을 판단하고 행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우리는 죄를 짓고,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아닌 줄 깨달아 회개하고, 다시 선을 행하게 하신 것을 감사해야 한다.

 

 

 

5. 지금 당신에게 똑같은 갈등이 느껴집니까?

 

 

 

6. 두 번째 모순은 한지붕 밑에서는 살 수 없는 판이한 두 개의 소원, 성향, 법이 자기 안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 개의 자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참고/ 18, 23, 24절).

 

․ 17절 /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런데 이제는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살고 있는 죄입니다.

 

(참고/ 18, 23, 24절)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18 나는 내 안에, 다시 말해서 나의 죄악된 본성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바람은 내게 있지만,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23 그러나 나의 몸의 여러 부분들에서는 다른 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내 몸에서 작용하고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내겠습니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만큼 인간의 내면이 죄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절실하다.

 

 

 

7. 다음의 내용을 읽고 당신의 생각을 말하십시오.

 

우리의 몸에는 연약성이 있습니다. 부패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에 죄가 쉽사리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우리 몸은 죄의 작업장과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 몸은 죄가 활동하는 장소입니다. 이때 ‘내 속’은 ‘내 영혼’도 아니요 ‘내 새로운 자아’도 아닙니다. 그것은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몸입니다. 연약성을 가지고 있는 육체입니다. 이 속에 죄가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는 초대받은 손님이 아닙니다. 월세를 내는 하숙자도 아닙니다. 그는 무단 거주자입니다. 도무지 쫓아낼 수 없는 무법자입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불청객입니다. 이 죄가 우리 몸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성화를 이루고, 주님의 제자로 산다고 하는 사람은 착각 속에 빠진 사람이요, 교만하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해주고, 인간의 연약함을 깨우쳐주고 있다. 성화는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이다.

 

 

 

8. 세 번째 모순은 악한 소욕에 굴복하는 패배를 맛보는 모순입니다.

 

․ 23절 /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그러나 나의 몸의 여러 부분들에서는 다른 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내 몸에서 작용하고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9.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 자기 안에 심각한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그 모순은 세 가지입니다. 이율배반의 모순, 갈등의 모순, 패배의 모순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실존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생한 사람으로서 이럴 수가 있느냐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모순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내면을 보면서 절망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14, 24절을 주의해 봅시다.(참고 / 롬 5:1, 6:6, 7:6)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4 우리는 율법이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영적이지 못하며, 죄의 노예로 팔린 몸입니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 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내겠습니까?

 

(참고 /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참고 /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의 몸이 무력하게 되었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참고 /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를 가둔 율법에 대해 죽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문자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우리는 의인이요, 또 죄인이다. 믿음이 없는 형편없는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의 모습이요, 자신에게 실망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사람의 고백이다.

 

 

 

10.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바울이 보았던 그런 자기모순이 없습니까? 절망이 없습니까?

 

나 역시 바울과 같은 자기모순과 죄로 인하여 절망감에 빠진다. 바울의 고백은 나의 더러운 모습이 마치 죄악에 팔려간 것과 같음에 대한 탄식이다.

 

 

 

11. 다음의 내용을 읽어 보십시오. 공감합니까?

 

이런 모순의 의미에서 ‘오호라’의 탄식은 긍정적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 탄식이 없는 신앙생활이 비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호라’의 탄식은 우리가 가끔 체험해야 할 불가피한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호라’의 탄식은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터져 나오는 탄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때 오는 갈등과 가책과 고통과 회개의 눈물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에는 죄가 거하고 있습니다. 이 죄가 처음에는 방문객처럼, 머물다 떠나는 손님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죄가 우리 속에 있기는 하지만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거나 믿음이 약해지면 갑자기 죄가 주인 행세를 하려 듭니다. 불행하게도 그의 무서운 손아귀에 꽉 잡히면 영락없이 끌려갑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스스로 죄짓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죄에게 끌려갈 수 있는 약점을 누구나 지니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오호라’하고 탄식할 만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호라’의 탄식이 전혀 없는 신앙생활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오호라’가 전혀 없다면 그는 거짓 믿음을 가졌거나 버림당한 사람일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원하는 대로 행하지 못하는 모순이 있습니까?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으로 갈등합니까? 당신에게 이와 같은 갈등이 있다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는 탄식이 있어야 옳은 것입니다. 이 탄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탄식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의 의지대로 만들어 내는 제품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큰 모순이 있는데도 ‘오호라’의 탄식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12. ‘오호라’하고 탄식하던 바울이 어떻게 금방 ‘감사하리로다’하고 소리칠 수 있습니까? 중간에 접속사도 하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급작스러운 전환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큰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이런 전환이 가능한 것입니까?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자복함으로 비로소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순간 감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음을 고백하자. 나의 힘으로는 안 되는데, ‘감사하리로다’ 주님을 앞장세우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갈 때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 있게 하신다.

 

 

 

11. 다음 글을 소리 높여 읽으십시오. 그리고 찬송가 182장으로 주님을 찬송합시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 때문에 고통하고 괴로워하다가도 금방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뻐하면서 할렐루야를 외쳐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상한 마음을 싸매시고 눈물을 씻겨 주시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의 약함과 허물을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주시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죄를 범해도 용서받을 수 있도록 의의 옷으로 감싸 주시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한 번 범한 죄를 다시 범하지 않도록 성령으로 우리를 무장시키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새롭게 다시 세워 주시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울다가도 즉각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괴로워하는 자리에 오래 머물면 안 됩니다. 재빨리 십자가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오호라’의 은혜가 있습니까? 즉시 ‘감사하리로다’의 은혜로 들어가기 바랍니다.

 

250장.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1.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

2. 죄악을 속하여 주신 주 내 속에 들어와 계시네 십자가 앞에서 주 이름 찬송합시다

3. 주 앞에 흐르는 생명수 날 씻어 정하게 하시네 내 기쁨 정성을 다하여 찬송합시다

4. 내 주께 회개한 영혼은 생명수 가운데 젖었네 흠없고 순전한 주 이름 찬송합시다

[후렴]

찬송합시다 찬송합시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

 

 

 

 

 

 

출 처 : 옥한흠 다락방 시리즈 14 - 로마서2(6장~1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