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5302

한경직 목사와 신사참배

한경직 목사와 신사참배 어디까지 개입하셨을까? 일제는 1938년 이후 교회 입구에 ‘종교보국’과 ‘황도선양’을 부착하게 했다. 전쟁이 점차 확대되어 감에 따라 조선은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兵站基地)로 편입되어 갔고 당시 식민 지배에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던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1)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를 만듦으로써 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하여 그들의 침략 정책 수행에 이용하고자 했던 일제는 1939년 9월 신의주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을 결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조선 야소교장로회 총회 제28회 회록>에 수록된 ‘국민정신총동원 장로회 연맹’의 결성식 순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결성식’(1939.9..

People/People 2021.08.10

기독교신앙과 민족주의 한경직목사

기독교신앙과 민족주의 한경직목사 한경직 목사의 유고와 유품자료를 정리한 김은섭 목사에 따르면, 한경직(1902-2000)이 노년에 살았던 남한산성 ‘한경직 우거처’에 들어서면 은빛 십자가와 “나라사랑”이 새겨진 작은 돌이 방문객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의 침실 장롱에는 태극기가 붙어 있었는데, 그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침대 곁에 있는 십자가와 장롱에 붙은 태극기를 가장 먼저 바라보았을 것이라 한다. “십자가와 태극기는 한경직의 삶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두 상징이라.”는 김은섭의 설명이다. ​ 1. 일제 강점기시대(1910-45),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민족에 대한 사랑 ​ 1) 오산학교에서 배운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 ​ 한경직의 민족의식은 민족에 대한 사랑에서 싹이 텄고, 그의 민족사랑은 ..

People/People 2021.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