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일반/책을잡자

박완서 울린 이해인 수녀의 한 마디 "땅을 보세요"

맑은샘77 2011. 4. 2. 12:11

박완서 울린 이해인 수녀의 한 마디 "땅을 보세요"

  •  입력 : 2011.02.26 03:02 / 수정 : 2011.02.26 04:59
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

강인숙 지음|마음산책|248쪽|1만6000원


"제가 수녀님을 알고 지낸 지 몇 년이나 됐나 꼽아보니 1988년이 기점이 되는군요. 그 해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아' 소리가 나올 만큼 아직도 예리하게 가슴이 아픕니다. 그때 저는 '죽으면 먼저 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온통 하늘나라 일에만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수녀님은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죽어서 어떻게 될지는 죽어보면 알 게 아니냐, 땅을 보아라, 땅에서 가장 작은 것부터 민들레를, 제비꽃을, 봄까치꽃을….'"

23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강인숙 관장이 일제시대 문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꺼내보이며“전화가 없던 시절엔 다들 편지를 참 많이도 썼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고(故) 박완서 선생이 2005년 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편지다. 1988년은 고인이 평생 해로한 남편과 훤칠한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해다. 지난달 고인이 타계한 뒤 이 수녀가 고인의 편지를 서울 평창동에 있는 영인문학관에 보냈다. 문학관에서 고인의 편지를 다른 소장품과 함께 고이 간직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강인숙(78) 영인문학관장이 문인들이 주고 받은 편지 49통을 추려 책으로 묶었다. 편지 한장 한장마다 강 관장이 편지를 보낸 문인의 사연을 소개하는 해설을 붙였다.

책에 실린 편지 중에는 읽으면 마음이 아린 사연도 있고, 가슴이 후끈해지는 연서도 있다. 소설가 박범신(65)씨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부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밤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눈을 감으면 요강 뚜껑으로 물 떠먹던 옛날 어느 시절인가가 생각난다. 그때 어떻게 당신과 내가 함께 있지 않고도 불행하지 않았던가. 생은 우리가 백번 겸손해도 좋을 만큼 깊고 뜨겁고 목이 멘다. (꾸룩… 꾸루룩―목이 메이는 소리)"

강 관장은 문학평론가다. 이어령(77) 전 문화부 장관과 평창동 산자락에 살면서 2남1녀를 낳아 길렀다. 건국대 국문과 교수 시절인 1978년, 남편이 운영하는 문예지 '문학사상'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직원들이 큼직한 박스를 내버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뭘 버리냐"고 묻는 강 관장에게 직원들은 "문인들이 보낸 육필 원고와 그림인데, 사무실이 좁아 쟁일 곳이 없다"고 했다.

23일 문학관에서 만난 강 관장은 "그런 소중한 자료를 왜 내버리나 싶어 그 길로 자료를 내 집에 가져다 쌓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외국에 가보면 문학관이 참 많은데 우리는 기록이 모두 흩어져 버려 변변한 문학관 하나 없어요. 그때 내버릴 뻔한 자료 중에 김동인 선생의 해묵은 명함이 있었어요. '누가 나만큼 저 명함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싶었어요. 나라도 꼭 모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처음엔 방 한 칸이 차고, 그 다음엔 방 두 칸이 차고, 3남매가 집 떠나고 나니 침실과 서재만 빼고 온 집안이 꽉 찼지요."

강 관장은 2001년 살던 집을 헐고 영인문학관을 지었다. 육필 원고·초상화 등 그동안 모은 2만5000여점을 차곡차곡 쟁이고, 계절마다 전시회를 꾸려 일반에 공개했다.

그때만해도 편지는 강 관장 부부가 직접 문인들과 주고 받은 수백 통이 전부였지만, 차차 주위에서 "우리 집에 옛날 편지가 많다"고 가져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시인 겸 무용평론가인 김영태(1936~2007)씨는 "나는 이제 나이 먹어 힘겨우니, 나 대신 소중하게 보관해달라"면서 별세하기 전 3년 동안 서재에서 찾아낸 옛 편지를 계절마다 열 통, 스무 통씩 총 300여 통 문학관에 기증했다.

현재 영인문학관이 소장한 문인들의 편지는 총 2000여통이다. 강 관장은 "나이를 먹을수록 편지에 담긴 문인들의 속내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헤아려 진다"고 했다. 박완서 선생이 아들을 잃었듯 강 관장도 외동딸이 낳아 기른 손자를 잃었다.

강 관장은 시대상과 필자의 내면이 잘 드러난 편지를 추려 이번 책을 엮었다. 책에 넣지 않은 편지가 궁금했다. 강 관장은 "아주 내밀한 편지가 한 100여통 된다"고 했다.

"그건 이번 책에 없어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대중에 공개하지 않을 겁니다. 이 나이가 되니 사람이 이쁘고 불쌍해요. 다들 죽을 운명을 가진 존재니까요. 당사자가 허락하지 않는 한 공개하지 않지만, 다만 나는 문학도니까 반드시 후대를 위해 보관은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