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일반/책을잡자

인지심리학은 말한다 "당신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맑은샘77 2011. 4. 2. 12:07

인지심리학은 말한다 "당신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 입력 : 2011.03.05 03:03 / 수정 : 2011.03.05 11:32

책 펼쳐보니
동영상 속 패스 횟수 맞추는 퀴즈

 

고릴라가 중간에 어슬렁 거려도 참가자 절반 이상이 발견 못해 '인간은 보려는 것만 본다' 증명

 

'착각 않는다는 착각' 사례 소개… 지력의 박약함과 위험성 꼬집어

보이지 않는 고릴라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대니얼 사이먼스 지음|김명철 옮김|김영사|408쪽|1만4000원

1997년 하버드대의 젊은 심리학자 두 명이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으로 일약 유명해졌다. '인간은 자신이 보려 하는 것만 본다'는 명제를 간단한 실험으로 명쾌하게 입증한 것이다. 고릴라 실험은 인지심리학의 고전이 됐고, 실험을 설계한 대니얼 사이먼스(Simons)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abris)는 각각 일리노이대학과 유니언대학의 교수가 됐다. 이 책은 두 사람의 공저다. 자신들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고릴라 실험에서 출발해 인지심리학의 고전을 종횡무진 인용하며 인간의 지력이 얼마나 박약한지 조리 있게 설명했다.

2일 오후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을 찾은 프로농구 팬들이 단체로‘헉!’소리를 삼켰다. 하프타임을 이용한 동영상 심리실험에서 관중 절반 이상이 고릴라를 못 보고 지나친 것이다. 주최측이 느린 속도로 동영상을 다시 틀자 곳곳에서“저걸 내가 왜 못 봤을까”탄식이 나왔다. /사진=김용국 기자 young@chosun.com, 그래픽=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따지고 보면 고릴라 실험은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니라 섬뜩한 구석이 있다. 2001년 2월 하와이 근해에서 고릴라 실험을 현실에 옮긴 듯한 대형 사고가 났다.

미군 핵잠수함 그린빌호가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심해에서 수면으로 급부상했다. 힘차게 솟구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일본 어선이 바로 위에서 조업 중이었다. 북극해 유빙을 뚫을 수 있게 설계된 핵잠수함이 밑에서부터 들이받았으니 어선은 두 동강 났다.

그린빌호는 최첨단 음파탐지기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사고 직전 사령관이 직접 규정대로 잠망경까지 봤다. 어선을 못 볼 이유가 없었다.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그 방향에 배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보려고 하는 사물에 주의를 집중한 나머지 다른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마는 '주의력 착각'이다. 저자는 주의력 착각의 원인을 진화에서 찾는다. 넋 놓고 눈뜨고 있을 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빛과 소리가 웅웅대는 만화경이다. 인간은 삼라만상을 전부 눈에 넣으려 애쓰는 대신, 재빨리 의미 있는 사물이나 패턴을 파악해 한정된 주의력을 쏟아붓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고릴라를 놓치는 것은 그 와중에 나타난 역작용이다.

문제는 인간의 기대를 뛰어넘는 '돌발상황'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보행자를 친 운전자들은 "거기서 보행자가 튀어나올 줄 몰랐다"고 하소연한다. 의사가 수술도구를 환자 몸속에 넣고 꿰매는 바람에 환자가 폐색전을 일으켜 세 차례나 엑스레이를 찍은 사례도 있다. 수많은 의사들이 엑스레이를 들여다봤지만 저마다 자기 전공에 맞는 병인(病因)을 찾는 데 골몰하느라 정작 사진 정면에 떡 하니 찍힌 수술도구는 놓쳐버렸다.

주의력만 박약하면 얼마나 좋을까. 기억력도 못 미덥긴 마찬가지다. 대개의 인간은 자기 기억을 확신한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매번 똑같이 재생되는 DVD가 아니다. 바람 불 때마다 유동하는 모래 언덕에 가깝다.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자신감 착각', 모르면서 안다고 우기는 '지식 착각', 우연의 일치를 놓고 얼토당토않은 이론을 만들어내는 '원인 착각', 훈련을 통해 지력을 몇 곱절 증대시킬 수 있다고 믿는 '잠재력 착각'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지력이 박약한데도 그런 줄 모르고 자신 있게 행동하는 데서 각종 사건·사고가 발생한다. 1984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살던 22세 여대생 제니퍼 톰슨이 자취방에 침입한 흑인 남자에게 성폭행당했다. 톰슨은 범인이 빈틈을 보인 사이 잽싸게 이웃집으로 달아나 경찰에 신고했다. 여러 용의자 중에서 한 사람을 분명하게 범인으로 지목했다.

이 재수 없는 사나이가 바로 로널드 코튼이었다. 코튼은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교도소에서 자기가 진범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수감자를 만났다. 피해자 톰슨은 두 수감자를 비교한 뒤 "코튼이 범인"이라고 다시 한 번 자기 주장을 확인했다.

사건 발생 11년 뒤 DNA 검사가 이뤄지면서 코튼은 비로소 누명을 벗었다. "내가 진짜 강간범"이라고 주장했던 그 남자가 진짜 강간범이었다. 목격자 진술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사례다. 톰슨은 코튼에게 사죄했다. 두 사람은 현재 형사재판 개혁모임에 나란히 나타나 연설하는 관계가 됐다.

이 책의 결론은 한마디로 "너 자신을 알라"다. 아인슈타인은 "세상에는 무한한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우주,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무지"라고 했다. 우리 중 절반은 '고릴라를 보고도 못 봤다고 우기는 존재'라고 겸손하게 인정하라. 그 순간 비로소 인간은 고릴라를 뛰어넘는 존재가 된다.


☞ 인지심리학이란

인간이 사물을 지각하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등의 정신 활동이 진행되는 동안의 심리 과정을 탐구하는 학문. 경험과 실험을 주된 방법으로 활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