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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자기개발

맑은샘77 2011. 3. 19. 00:02

설교자의 자기개발

 

 

설교자의 소명

 

예수님은 목회자를 양성하시기 위하여 12제자를 모집하여 신학 교육을 시작하셨습니다. 3년 과정으로 예수님이 교수가 되시어 삶의 현장에서 진리를 가르치시며 실천신학을 실습시키셨습니다. 유일한 교과서는 자연과 말씀이었으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그러나 11명의 제자만이 졸업하게 되었고 한 명은 퇴학(가롯 유다)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3년 교육을 마치고 제자들을 목회현장으로 보내시며 감명 깊은 훈화로 신학교육을 시작했던 첫 번 소명지는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다 현장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대답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고기 잡던 베드로를 부르시고 제자를 삼던 첫 번 소명 당시에는 '너는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베드로를 부르셔서 '네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의 소명이었고 그때부터 베드로의 목회의 길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생각하면 베드로는 주님이 특별히 택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네가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는 질문을 하시고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할 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고 또한 베드로는 교회를 섬기는 최초의 목회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의 길은 사랑으로 헌신하는 길입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 일을 하도록 예정하시고 부르셨다는 확신입니다. 나는 이 일을 위해 태어났고 사는 목적이 여기 있으며 죽어도 이 일로 죽는 것이 최대의 영광이라는 확신입니다.

 

먼저 목회자는 소명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소명감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확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아는 마음입니다. 소명은 자기 하는 일이 귀하고 즐겁고 쉽게 느껴지는 마음입니다.

 

나는 굶어도 천대를 여기고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비교되어지지 않고 이에 대하여 한 번도 후회하는 일이 없는 상태가 소명 받은 자의 확증입니다.

 

목회자가 즐거움과 기쁨으로 일하며 생의 보람을 여기서 찾고 모든 삶의 의미를 느낄 때 바로 소명받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시킬 때에는 능력도 주시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 목회의 길은 자랑스러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소명받은 목회자의 사역은 일생동안 양을 먹이는 일입니다. 양을 먹이는 일은 목회의 최대 사역입니다. 양을 먹이는 양식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 나셨고 짐승의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먹는 양식이 다릅니다. 교회는 빵이나 먹이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구약에 구제는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밭에서 곡식을 베거나 감람나무 열매를 따러가 포도를 딸 때에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적 의미는 객, 고아, 과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인생 나그네,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고아들, 예수님을 모르는 영적 과부들에게 신령한 양식을 먹이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주어야 할 양식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요리하여 저들 심령 속에 받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설교 준비입니다. 설교란 신령한 양식을 요리하여 저들을 구미에 맞추고 소화될 수 있도록 맛있게 만들어 주는 요리사와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음식점과 같습니다. 신령한 음식점입니다. 설교에 신령한 맛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사람들은 찾아옵니다. 맛없는 음식점에서는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맛을 내는 기술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발할 때 교회는 성장하게 됩니다.

 

나는 신학교 시절에 오장동에 있는 냉면집을 간 일이 있습니다. 낡은 건물인데도 그 냉면을 먹으려고 신사 숙녀들이 붐비고 있었습니다. 마담 얼굴을 보니 밉상이었으나 오직 음식 맛이 좋아 소문이 나니까 이렇게 모여들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음식점과 같습니다. 건물이 초라하고 목사 인물이 부족해도 신령한 맛이 있으면 사람이 모일 것이 아닙니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그마한 다락방에서 교회를 시작하여 이 사실에 확증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 성장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설교의 맛을 높여야 합니다.

 

설교는 음식을 준비하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영양가 높은 순수한 음식재료(성경)를 준비하고 정성껏 조미료(세상 지식)를 섞어서 불로 익혀서 식구들에게 나누어 먹이면 건강에 좋아 가정이 행복하여 지는 것처럼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는 설교 준비할 때 하나님 말씀을 설교 재료로 삼고 땀과 눈물로 반죽을 한 다음 기도로 하나님의 깊은 시은소에 들어가 성령님의 뜨거운 불에다 준비한 설교를 구워서 안팎을 골고루 익혀서 따끈따끈한 때에 교인들에게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정성껏 설교를 하여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로고스)을 알아듣는 말씀(레마)이 되도록 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설교의 중요성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수단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뜻대로 사람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이 대대에 이어지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스라엘 왕국 건설과정에서 사무엘을 부르시고 예언하게 하셨으며 예레미야, 아모스, 에스겔 모두 하나님 말씀을 통해 일해온 선지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이 설교가 되어지므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에 사역은 설교로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일, 치료하는 일, 설교하는 일 중에서 설교하는 일이 최우선이었다는 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증거입니다. 에수 그리스도는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오셨고, 병 고치는 일은 두 번째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중요하게 여긴 설교를 우리는 중요시 하면서도 심방이나, 다른 용무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말씀 전하는 것이 선지자와 예수님에게 최우선일 뿐 아니라 사도들에게도 최우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 두 번은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고, 한번은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양을 먹이는 일에 2/3 이상 그리고 양을 치는 일은 1/3 정도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양을 먹이는 일은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이고 양을 친다는 것은 교인들을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설교에 목회의 2/3 이상을 연구하고 기도하는데 투자해야 합니다.

 

'사도가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집사를 우리가 택하여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사도행전 6:2-4)

 

복음의 궁극적 목적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것도 현실적인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설교의 발전사를 상고하여 보면 기독교의 복음과 설교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설교가 포사이스는 '기독교의 성쇠는 설교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복음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실 설교된 복음이며, 설교는 그 시대에 나타나는 구속적 사건입니다.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방법과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왕국은 침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메시지에 충실할 때 하나님의 왕국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전진하였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성장과 발전이 크게 이루어진 시대가 다섯 세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다섯 세기는 위대한 설교가 있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 첫 시기는 베드로, 바울의 사도행전 1세기의 시대요, 둘째가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4세기요, 셋째가 앗시시의 프랜시스의 13세기이며, 넷째가 루터, 칼빈이 활동하던 16세기와 다섯째 스펄죤과 휫필드의 19세기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설교가 쇠퇴해 가던 때는 언제나 기독교회도 침체해 있었습니다. 암흑시대와 14세기, 15세기, 17세기와 18세기에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설교가 약화되어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강단의 설교와 그 시대 역사는 성쇠를 같이했습니다. 설교는 기독교의 발전과 일치합니다. 설교가 있는 곳에 복음이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과 함께 살고 말씀과 함께 죽는다는 포사이스의 말은 설교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생명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시대 교회는 그 시대 목회자가 선포하는 말씀 그대로이며, 강단의 설교 이상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는 강단에서 선포하는 설교에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설교로 시작되었고 초대교회는 베드로의 설교로 문을 열었으며 그의 설교에서 초대교회는 요원의 불길처럼 왕성해 갔습니다.

 

목사의 일생의 사역이 강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강단은 목사의 생명이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본질인 것입니다. 목사에게 강단의 실패는 목회의 최대 불행이며 부르신 소명에 배신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생명을 걸고 설교를 연구하고 개발하여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의 내용

설교는 열심히 외쳤다고 설교가 아닙니다. 무엇을 전하였느냐 하는 그 내용이 중요합니다. 설교는 성서를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을 나타내거나 자기 주장을 교인들에게 펴기 위해서 강단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한 한 인간의 설명은 적게 붙이고 성서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고 표현하기 위해 강단에 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한 것이라'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나오는 청중의 머리 속에 무엇이 남아야 하느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나고 그리스도의 왕국이 그리워지고 오직 예수만이 나의 전부요,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도 영광이라는 자세에 서는 것입니다.

 

카이퍼는 성서적 설교내용은 '오직 성서'와 '성서의 전부' '성서를 순수하게' 증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서에 기초를 두지 않는 설교는 바른 의미에서 설교라 할 수 없습니다. 설고가 성경을 떠나면 교인은 교회를 떠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정치를 논한다면 구태여 그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경제, 문학, 철학의 전문가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스펄죤 목사는 16세기부터 위대한 설교자로 부름 받는데 1850년 1월 6일 눈보라 때문에 길이 막혀 골목에 있는 작은 교회를 찾아 갔을 때 목사는 나타나지 않고 남루한 옷을 입은 초라한 집사가 강단에 올라서서 이사야 45장 22절을 펴서 '땅끝의 백성들아 여호와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읽은 후, '여러분 눈보라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세상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우러러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눈을 뜨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그후로부터 그가 입을 열어 설교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 보고 구원받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야말로 성서의 중심이요, 설교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성서는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하셨으니 실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성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속죄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에 의하면 신약은 구약속에 숨었고 구약은 신약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전 성서의 중심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또 예언된대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므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케리그마입니다. 설교중심은 케리그마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는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전해진 말씀에 의하여 구현된 말슴의 현실이다'라고 맨닝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석되지 않으면 바르게 해석되지 않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필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요, 대시아다' 그리스도의 대사는

1. 그 교서대로 충분히 말한다-대사의 권한은 교서를 변경치 못한다.

2. 그 교서의 전부를 전한다-대사가 임의로 전할 수 없다.

3. 그 교서를 효과적으로 말한다-대사는 일국의 대표이니까 적당한 때에 좋은 방법으로 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필립 부룩스가 60세 때, 그의 서랍에 한통의 편지가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주일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듣노라면 목사님은 잊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과 십자가를 생각하고 은혜를 받습니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의 박력있는 음성과 양의 동서와 시의 고금을 누비는 해박한 지성은 듣는 이들을 감탄하게 합니다. 그러나 돌아갈 때 남는 인상은 참 말 잘한다는 생각으로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섥의 위기는 전하는 내용상에서 위기였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슴의 내용이 케리그마로 증거될 때 힘이 있었고, 거기에서 외도할 때 힘을 잃었습니다.

 

지난해 목회실습을 하러온 대학원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대화하는 중에 조그마한 변두리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꽤똑똑한 학생은 현실 교회를 비판하고 그가 본 대교회 목사님 설교는 내용이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오히려 자기는 충실한 내용으로 설교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네는 그렇게 내용있는 설교를 하고 있는데 교인이 몇이나 모이느냐고 물었습니다. 3년전 부임시 50명이었는데 지금도 50명 정도 모인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내용이 풍부한 설교를 하는 후배를 격려하고 이런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 내용없는 목사의 설교를 한달 동안만 강단에서 그대로 하고 나를 만나라고 부택했습니다. 그는 내용없다는 목사의 설교를 하였더니 교인들이 처음으로 은혜받았다고 하고 한달을 계속했더니 우리 목사님이 달라졌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설교의 내용을 이해 못하고 내용도 없는 설교는 은혜롭다고 하는 이 속빈 교인들을 한탄하면서 강단에 서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설교내용은 문학적 수식어나 철학적 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성서의 말씀을 현재 교인들 심령 속에 재화육되도록 전하는 성력이 역사했느냐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소리가 크고 유창한 언어일지라도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설교는 울리는 꾕과리에 불과합니다.

 

예수게서는 '성령이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영광을 나타내리니 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셨습니다.

 

바우만 박사는 설교를 목적에 따라 네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전도-구원, 2 교훈적-교육, 3 목회적-개인치료, 4 예언적-사회정의

 

그러나 모든 설교를 다 이런 공식으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의 설교에서 구원과 교육과 치료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교회 성장과 관계된 설교는 1번과 3번의 설교가 선포되는 곳에 일반적으로 교회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설교자의 지성 개발

 

필립 부룩스는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서 명성을 얻은 후에도 설교학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습니다. 지성개발에 있어서 훌륭한 목사는 일생 동안 학생의 자세로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먼저 훌륭한 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가 설교 준비를 않고 잠을 자면서 계시를 기다렸습니다. 꿈에 하나님께서 계시하기를 너는 게으르다고 책방했다는 것입니다.

 

스펄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배우기를 그만 둔 사람은 가르치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연구에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강단에서 수확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이어서 필립 부룩스는 설교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설교자는 항상 설교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진리를 탐구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설교는 그가 얻는 진리로부터 저절로 나타날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이 말하기를 다시 사역을 한다면 자기는 두 가지를 바꾼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지금 연구한 것보다 세배로 더 연구할 것이며, 다른 업무를 줄일 것입니다. 나는 너무 많이 설교했고 너무 적게 연구했습니다. 둘째로 바꿀 것은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3년만 주님을 섬긴다면 나는 그중 2년은 연구와 준비로 보낼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에 크게 성공한 목사들의 장서는 평균 5,000권 이상이라고 하며, 저 자신도 신학교 시절부터 읽고 준비하면서 6,000권 이상의 장서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타고나는 것이지 노력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필수적인 불가결한 자질은 천부의 것입니다. 입도 귀도 눈도 천부의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도 천부의 것이지 내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미숙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유능한 설교자란 끊임없는 자기 개발로 되어집니다. 빈틈없는 연구노력과 날카로운 지적 관심과 광범위한 독서를 통하여 얻은 결실입니다.

 

책은 설교자의 도구입니다. 존 오만은 위대한 설교자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펜을 손에 잡고 독서해야 합니다. 책은 도구이지 장식품이 아닙니다. 그 책이 도움이 된다면 책을 구입하는데 아낌없이 투자하여야 합니다.

 

스펄죤은 12,000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기가 읽어야 할 책이 없어지면 못내 아쉬워하였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목회자의 능력은 그의 서재를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목회자의 은밀한 골방의 기도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서재를 보면 그의 목회를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가끔 동역자들의 교회에 집회를 가면 서재에 들어가 보곤 당황하는 때가 많습니다. 책이란 방 한구석에 꽂혀있고 그것도 주석도 없고 월부로 구입된 문학전집류나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한심하다기보다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신령한 영감을 얻는 것도 지난날 신령한 하나님의 종들의 저서를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순교자의 전기, 자기를 부정하고 일생을 헌신한 성자들의 생애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개발합니다. 그리고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어떤 후배가 이 목사님은 어디에서 그런 신령한 영감을 얻고 설교하느냐고 묻기에 나는 독서를 통하여 얻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전국 순회를 마친 어느 교단 총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거의 예외 없이 교인들이 자기 담임목사의 설교에 불만이 있고 교회는 그 설교자의 장서가 결함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독서하지 않고는 위대한 설교자가 된 일이 없습니다.

 

⑴ 설교자는 조직 신학을 완전히 이해하고 머리 속에서 정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서를 복음적으로 이해하고 증언할 수 있는 조직신학의 양서가 있어야 합니다. 성서를 성서로 해석한 정통적인 신학 입장에서 쓰여진 책을 정독하여야 합니다.

 

⑵ 성경 말씀을 매일 기초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서의 어느 한 부분을 계속적으로 원전을 상고하며 연구하고 깊은 영감을 발굴해야 합니다. 학문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넓은 시야에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며, 신령한 골짜기에서 흐르는 생수와 아름다운 향기를 호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에는 무진장한 보화가 숨겨져 있으므로 광맥의 줄을 찾고 감격하여 울며 꿀송이보다 더 달고 오묘함을 실감해야 합니다.

 

⑶ 유명한 설교가의 설교집을 읽어야 합니다. 교회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설교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설교자에게는 설교집을 많이 읽는 것처럼 설교개발에 도움을 주는 책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설교집을 감추어 놓고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유명한 설교를 소화하고 이용하는 것은 창작이 됩니다. 설교집을 통하여 한 인간을 알게 됩니다.

 

비쳐 목사에게 설교 준비하는 시간을 물었을 때 약 40년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의 나이가 40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 칼빈, 웨슬리, 스펄죤, 비쳐, 제임스 스튜어트, 엘무트 틸리케, 킬리케, 포스틱, 부룩스, 위런 위스비, 로이드 죤스, 빌리 그레함의 설교들을 읽으면서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저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많이 읽고 들으므로 설교 개발에 큰 도움을 얻게 됩니다. 평생 다른 사람의 설교집을 읽지 않는다는 교만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의 설교를 듣지 않으므로 자기 설교의 수준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⑷ 폭넓은 독서를 하여야 합니다. 고전적 문학작품, 베스트 셀러의 신간, 에세이, 사상서들, 잡지 그리고 이단으로 지목되는 저서를 읽어야 합니다. 어느 면에는 이단이 되었으나 어느면에서는 깊은 진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신앙에 맞는 책만 읽고 다른 사상을 정죄하기를 일삼는다면 설교자로서 성숙할 수가 없습니다.

 

 

설교자의 영성개발

 

설교자가 성서를 떠나서 설교할 수 없듯이 또한 설교자는 성령과의 관계 없이 설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기에 성령의 감동없이는 성서를 이해할 수가 없고 설교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이해할 수가 없고 설교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설교를 준비할 때 영감을 주며, 실제 설교할 때 열정을 주며, 설교가 행하여진 후에는 모든 의미있는 열매들을 맺게 해줍니다. 죤녹스는 '참된 설교는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벵겔이 딤후 3:16절을 주해하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것은 다만 성경을 기록할 때에 저자들이 영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독경함으로서도 영감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입김이니 성경은 사람에게 유익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성경에 3중의 관계를 가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① 하나님의 성령은 저자들이 기독할 때에 영감되었고,

②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또 들을 때에 성경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고,

③ 성령이 하나님의 빛을 던져주므로 우리가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됨이라.

 

⑴ 성령과 성경

 

성령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우리가 완전한 성령의 감동을 이야기할 때는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닌 성경 전체가 감동된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성경의 말씀은 성령의 은혜를 받기까지는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다 경험하는 사실은 말씀이 이전에는 건조무미하였고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으나 언젠가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말씀은 생명이 되고 자신의 메시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합니다.

 

성령은 이와 같이 말씀에 생기를 불어 넣어 우리 영혼이 살아있고 하나님 말씀에 직면케 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생활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사이에는 영광스런 결합이 존재합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구약 성경에서 인용하는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에서 '이는'이란 성령과 말씀과의 놀라운 결합을 주고 있습니다. 능력있는 설교는 성경말씀 하나, 혹은 구절, 혹은 한 장이라도 그것이 성령에 근거를 둔 설교일 때라고 믿습니다. 말씀은 성령께서 활용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져야 합니다.

 

오늘날 강단의 능력이 약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우리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문을 열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웅변에 능한 설교나 지적인 설교를 축복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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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공 한신목회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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