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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벧전15 하나님의 구원사역 3장 18~22절

맑은샘77 2011. 1. 26. 18:35

벧전15

하나님의 구원사역 3장 18~22절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제목下에 한 주한미군의 훈훈한 사랑의 얘기가 며칠전 신문에 실렸습니다. '폴 토마스'라고 하는 미군 소령이 그의 부인과 함께 서울의 동방 아동복지원에서 자원 봉사활동을 하면서 '강태직'이라고 하는 아이를 알게 되었는데 그 아이는 소뇌가 위축되고 신경장애가 있어서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할 뿐 아니라 자폐증상으로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소령은 부인과 상의 끝에 아이를 입양하여 전문적인 치료를 받게하자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6개월가량 열심히 치료를 받았습니다. 아이는 조금씩 걸을수 있게 되었고, 20개 정도의 단어를 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들부부가 봉사활동차 찾아갔던 평택의 한 보육원에서 박선옥이라는 아이를 만났는데 태직군이 자신의 친누나처럼 따르고 반기면서 떨어질줄 몰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또 한번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에 오게 된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자신의 2남 1녀와 태직군 혼자서 어울리는 것은 무리일것 같다는 판단에 따라 결국 그들은 이 박선옥이라는 아이마저 입양하기로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토마스는 얼마있지 않으면 중령으로 진급되기로 결정되어 있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진급을 포기하고 올해 전역을 해서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얘기는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다 주고 있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다닐 때면 극동방송을 자주 듣습니다. 며칠전에 한 프로에서 그 프로를 진행하는 자와 진행을 돕는 보조진행자 사이에 얘기를 듣고 마음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진행자가 그 보조 진행자에게 옆집에 누가 사는 지 아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의 대답이 저는 바빠서 사실 옆집에 누가 사는 지 잘 모르지만 가끔 자신의 어머니가 옆집분들에 대해 얘기를 하시기 때문에 그 분들이 어떤 분인지는 알고 있다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인지 모릅니다. 이웃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저께는 한 아파트에서 수개월전에 남편을 잃고 아이들 마저 자신의 곁을 떠난 것을 비관해서 자살한 한 여인의 시체가 아파트 그녀의 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체는 무려 5개월 이상 지나서야 발견되어진 것입니다. 아파트 우편함에는 지난해 여름부터 쌓인 우편물이 가득하고, 베란다에는 몇개월째 여름옷이 걸려 있었지만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이 없이 수개월 동안 방치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을 향한 오늘 우리들의 현실일는지 모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희생하면서 이웃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면 그것이 영웅이 되어 버리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코 우리들에게 무관심할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관심은 참 놀랍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은 죽어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 보여주신 관심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관심과 사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8절 읽을 것-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완성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전기나 자서전,혹은 위인전을 읽어보면 그들의 활동이나 그들이 쌓았던 공적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기록을 해 놓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그 분의 죽으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 분이 이 땅에 태어나신 목적은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그 분이 죽기 위해서 태어나야만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18절에서는 말하기를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그 분이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이유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고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도'라는 말에 우리가 주의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도'라는 말은 원래 희랍시대의 왕의 비서의 역할을 강조하던 단어입니다. 고대 희랍시대의 왕들은 비서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 비서 가운데서 수석 비서가 왕을 알현하러 오는 사람들을 왕 앞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즉 비서는 왕을 만나러 온 사람들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 비서의 역할을 가리켜서 '인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우리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앞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앞으로 전혀 인도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주님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하셨습니다.

전방부대를 가보면 눈에 자주 띄는 文句가 있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 전방부대에는 곳곳에 지뢰를 매설해 두었습니다. 또 과거 6.25당시에 매설해 두었던 지뢰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직까지 그대로 묻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길이 나있지 않은 곳으로 가면 지뢰를 밟을 수도 있기 때문에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글이 곳곳에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길은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는 지뢰밭과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길이 아닌곳으로 갔다가는 사고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영원히 지옥으로 추락하고 말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는 죽음으로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영(靈) 즉 聖靈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토록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자는 구원함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결코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영원토록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그것을 노아의 사건을 통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시대의 부패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나 계획하는 그 모든 것들이 악할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냥 내 버려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시켜 배를 만들게 하셨고 배를 만드는 오랜기간동안 노아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에게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강팍해질때로 강팍해진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하나님의 경고을 말씀을 들을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배가 완성되어진 날부터 40주야동안 비를 내리셨고 지면에 있는 그 모든 것을 쓸어버리셨습니다.

그 때 살아남은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 배를 준비해서 그 배 안으로 들어간 노아와 노아의 가족 8명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한자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한자의 "배 선(船)자는 배 '주'(舟)와 여덟 '팔'(八)과 입 '구'(口)로 이루어 졌는데, 원래 중국사람들이 글자를 만들 때 그 글자가 뜻하는 말의 형태나 어떤 사실이나 사건에 근거해서 글을 만든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배 선(船)자도 중동지방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에 방주를 만들어서 8명이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 분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우리가 논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중요한 것은 분명 성경은 배를 탄 노아의 여덟식구가 구원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세상을 뒤덮은 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는 그 죽음의 현장에서 노아의 가족들이 구원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방주를 탔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오직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를 했습니다. 방주안에 있는 사람과 방주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방주 밖에서 착한일을 많이 한 사람이 살았습니까? 방주 밖에서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그들이 홍수로 부터 건짐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 선한 행위로 결코 구원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주 안에 있었느냐? 아니면 방주 밖에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아시대 하나님의 물심판앞에서 유일한 구원의 길은 방주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애에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21절 읽을 것-

노아시대 사람들이 방주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들이 지불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늘날은 배를 타려면 그 삯을 지불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배는 삯을 따로 지불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그저 그 배를 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방주에 타지 못한 사람들은 비가 내릴 때 과연 무슨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설마' 무슨일이 있을려고?, '설마' 홍수가 날까?,'설마' 며칠오다 말겠지…. 그러다가 모두가 그 물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도 이 장면을 분명히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 물속에서 아우성을 치다가 죽어가는 죽음의 현장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저 물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았구나!"

베드로 사도도 이것을 가리켜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례받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사역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는 여름철 학생회 수련회를 가거나 아니면 성경학교를 마치고 교사들과 함께 하루정도 바닷가를 갈 때입니다. 사실 저는 수영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 수영장에 1달간 회원권을 끊어서 다닌 적이 있었는데 이틀가고 중이염이 들어서 그 뒤로 부터 다시는 수영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영을 배우지 못했는데 학생회 수련회를 가면 마지막날 수영하는 시간이 있는데 아이들이 고의로 옷을 입은 채로 저를 물에 빠트리곤 했습니다. 그러면 수영을 못하는 저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물을 잔뜩 먹습니다. 걔 중에 좀 짓굿은 아이들은 제가 급히 머리를 들어올리려 하면 손으로 머리를 누릅니다. 그 때 저는 조금 재미있게 표현을 해서 말한다면 "아!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세례가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물속에 수장되는 것입니다. 물에 수장되어서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다시 물속에서 건짐을 받아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시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건은 오늘날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예표입니다. 오직 방주을 통해서만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주를 거부했던 사람들은 모두 물속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방주안에 있었던 노아의 가족만이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이 약속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지며 영원히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직 이 약속에 근거해서만이 우리가 구원함을 받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우리주님이 어떤 분이시길래 그 약속이 효력을 지닙니까? -22절 읽을 것-

그분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마침내 우주를 통치하시는 영광스러운 자리로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천사들과 권세자들과 능력들에게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선한 행실로,자신의 공덕으로,구원을 받기를 원하지만, 구원의 길은 오직 한길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흡사 노아의 시대를 방불케합니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부패할대로 부패해 있고 죄악이 관영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시대에 노아를 통해 곧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셨듯이 오늘 베드로 사도를 통해 우리들에게 또 다시 이 말씀으로 일깨우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노아시대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 아니 여러분의 심령에 자리잡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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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깨람들의수다
글쓴이 : 정광고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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