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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성서주일설교 (4) ▒ 주의 법을 사랑 하는자

맑은샘77 2010. 12. 11. 22:08

4. 주의 법을 사랑 하는자

 

시119장 절 ~ 절

 

한국교회에서 해마다 12월 둘째 주일은 성서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달력을 받아보시면 12월 둘째 주일은 성서주일이라고 기록하여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것은 성서주일을 잘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관한 말씀도 잘 전하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성경에 대한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성서주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만 금년부터는 말씀만이라도 전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고 지키는 일에 앞장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중요성이야 다 인정하지만 막상 성경에 대하여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요리문답을 통하여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딤후 3장 16절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성경이 나와 어떠한 관계에 있으며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를 생각하여 본다면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성경 중에 가장 긴장으로서 176절까지 있습니다. 시편 119편은 전체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는 시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 119편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내용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위대성과 그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말씀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생명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참된 행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성서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본문 165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에는 다가오는 21세기의 찬란한 빛을 받기도 전에 여러 가지로 불안과 염려에 휩싸여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며 염려과 걱정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평안과 장애물이 없으리라는 축복이야말로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무엇이며 그 말씀이 우리들 각자의 삶에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위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어떠한 자일까요?

I.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죄를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평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보통 평안이 아니라 큰 평안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주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평안을 누구에게 빼앗기고 있습니까? 이미 상고하여 본 말씀 로마서 3:23절을 복습하여 보시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죄 때문에 평안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죄로 인하여 불안과 근심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주시므로 참된 평안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 안에서 죄를 정복하는 삶이 날마다 이어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되며 거기에 참된 평안이 깃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119:9절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 이다'고 하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청년을 말했습니까? 어린아이들이나 장년들은 해당이 안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한참 혈기왕성하고 정과 욕심이 강할 나이가 바로 청년들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유혹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러한 유혹에 청년들이 넘어갈 위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험이 많은 청년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에는 그 죄의 유혹을 능히 이기고도 남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장년들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들을 죄의 유혹에서 이길 수 있으며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119:20절에 보니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항상 사모하고 마음이 상할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말씀이 잠시라도 떠나면 여지없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대로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잠시라도 떠나 있으면 안 됩니다. 다윗이 말한대로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하였으니 말씀에 거하는 생활만이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계시록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II.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위로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죄가 많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정말 위로가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환난풍파가 끊이지 아니하는 세상을 살다보면 따뜻한 말 한마디의 위로로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위로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우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사람의 말이나 도움으로서는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119:50절에 "이 말씀은 나의 곤난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한 주간도 이 세상에 나가서 살다가 여러 가지로 상처받고 오늘도 상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찾아 나왔습니까? 이 시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시고 위로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욥이 당하였던 그 고난을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정말 사람의 입술로 형용하기 힘든 고난이었지만 그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 힘을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말씀을 전하면서 살전 4:18절에서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무엇으로 위로를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말로서는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슬픔에 잠긴 자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의 위로 받으려고 기대하지 말라 괜히 또 다른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벌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바른 위로가 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새 힘을 공급받습니다. 그리하여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저 천성을 향하여 믿음의 경주장에서 잘 달려갈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위에서부터 나옵니다. 저는 여기서 구호 하나를 제창하고자 합니다. "From Above" "위로부터"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위로부터 나옵니다. 우리의 위로도 위로부터 나옵니다. 우리의 소망도 위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위엣 것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119:97절에서 시인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 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주의 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98절 이하에서 밝히 설명하고 있습니 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지혜를 얻기 때문에 주의 법을 사랑하고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지혜를 얻는 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98절에는 원수보다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원수의 특징은 갖은 모략과 간사한 계략을 총동원하여 상대방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원수가 제 아무리 간사한 지혜를 총동원하여 우리들을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 원수의 지혜를 능가하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깊이 연구하며 묵상하는 지혜가 세상의 그 어떤 지혜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한 것입니다.

99절에는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은 가르치는 자입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낫지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지혜를 얻은 자는 스승의 지혜를 능가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배우지 못하고 실력이 모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스승보다 나은 실력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의 영원한 스승임을 알고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도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고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였습니다. 100절에는 노인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노인의 지혜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랜 기간동안 경험을 통하여 익힌 산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들이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터득한 지혜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도 옛부터 내려오는 어른들의 산 지혜를 아직까지도 그리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경험이 부족하고 나이가 어리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은 지혜는 경험적인 지혜를 능가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 중의 지혜요 보배 중의 보배가 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 164절에서는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에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꼭 일곱 번의 회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의로운 말씀이기에 이 말씀을 늘 양식으로 삼고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의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태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우리가 성경 다독부에서도 성경 읽기를 장려하고 주보에도 성경공부란을 통하여 성경을 묵상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얼마나 참여하였습니까? 더군다나 162절을 보면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 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군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에 적들로부터 얻은 전리품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즐거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이와 같습니까? 사실 우리가 재물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말씀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라고 하였습니다. 얻어먹었다는 말속에서 예레미야는 고난 가운데서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한 심령으로 사모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모하고 갈급한 심령으로 받은 그 말씀이 예레미야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말씀을 사모하고 받는 태도가 어느 정도입니까? 정말 얻어먹는 심정으로 말씀을 받고 있습니까? 얻어먹는 다는 말속에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의 양식을 먹는 것도 배가 부르면 투정을 부리고 밥맛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양식도 심령이 가난하여야 갈급한 심령으로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밥을 잘 먹지 않는 경우는 간식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간식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오락이 간식입니다. 테레비 보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세상의 오락을 좋아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반응이 없고 졸리고 하품만 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담대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받지 못하면 절대로 신앙이 자라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간교한 마귀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씀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하는 것입니다. 토요일날 너무 피곤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토요일날 지치게 만들고 파김치가 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일날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들의 약점을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어떠한 이유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겨서는 안되겠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그 심령은 공허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그 심령은 완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들을 기름진 곳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서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에 말씀을 읽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은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생명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길만이 생명과 평안과 축복의 길이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서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제거되고 시온의 대로가 열리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글쓴이 : lemalogo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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