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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을 변화시키는 설교

맑은샘77 2011. 3. 18. 23:57

청중을 변화시키는 설교  

이글은 해돈 로빈슨의 Making a Difference in Preaching(Baker Books Books, 1999)에 실린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번역, 게재한 것입니다. Copyrightⓒ2001 by Haddon W. Robinson. Used by permission.

청중을 변화시키는 설교  

해돈 로빈슨/고든 콘웰 신학교 설교학 교수

그건 정말이지 죽을 쑨 설교였습니다. 달라스에 있는 한 교회에서 요한복음 14장을 설교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본문은 쉬운 본문이 아닙니다. 죽음과 재림에 대한 주석적인 문제로 가득 찬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러분이라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처소를 어떻게 준비하시겠다는 말씀인가?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씀인가? 영혼이 잠자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고자 본문을 연구하고 주석서를 읽느라 한 주간을 꼬박 보내었습니다.

설교할 때가 되자 저는 숙제를 끝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본문이었으나 철저하게 연구했기에 주어진 본문의 확실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시작한지 5분이 지나자 저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10분이 지나자 사람들은 잠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줄에 앉아있던 한 성도는 코를 골기까지 했습니다. 더 비참했던 것은 그의 코고는 소리에 아무도 방해받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듣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아직도 그 날 아침을 떠올리기만 하면 마음 깊숙이 처참한 감정이 듭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문제는 제가 설교 시간 내내 저를 사로잡았던 신학적인 난제들과 씨름하는 데 보냈다는 것입니다. 제가 했던 모든 말은 정당했습니다. 신학교 수업이었다면 매우 강한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서, 그 강단에서는 끔찍한 설교였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건 제가 성도들의 삶의 문제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답했던 것은 저의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이었을 뿐 성도들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 날 저의 설교를 들었던 성도들 가운데는 이제 본향으로 돌아가 주님과 함께 거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싶었던 것은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무덤의 구덩이에 던질 것인가 아니면 나를 안전하게 본향으로 인도할 것인가? 천국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그들이 듣고 싶어했던 설교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우주의 창조주는 우리를 위하여 집을 준비하는 데 2,000년이나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는 데 6일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는 집이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이생의 삶이 끝날 때 이 아름다운 집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준비해 놓으신 곳입니다.”

저는 이러한 설교를 했었어야만 했습니다. 적어도 시작은 그들의 관심사를 가지고 시작 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정반대의 실수도 가능합니다. 설교 내내 적용하느라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에 근거하지 않을 때입니다. 저는 성경을 약화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연결시킬 수 있는 다리가 아무 것도 없는 고층건물식의 설교도 가능합니다. 그런 설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영원한 말씀의 능력을 줄 수는 없습니다. ‘언덕 위의 집’은 서구의 가요에서 나온 것이지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비성경적인 사변으로 가득찬 설교는 결국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제가 서재에서 연구한 것도 사람들의 질문에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성경 본문과 삶을 연결시키는가 하는 적용의 문제입니다.



본문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
설교에서 성경의 본문과 삶의 적용을 어떻게 조화롭게 맞출 수 있겠습니까? 기본 원칙은 사람들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성경의 내용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안됩니다. 그리고 나면 적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주석과 해석의 차이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석은 때때로 동사의 시제나 원문에서 강조된 단어를 눈여겨 봄으로써 본문으로부터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우리가 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는 주일 아침의 설교로서는 결코 적당하지 않습니다. 사실 희랍어나 히브리어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현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직업상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난 당신이 모르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요”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와 청중간의 거리감을 생기게 하는 데는 다름 아닌 거만함이 배어 있습니다.

저는 10년 동안 ‘기독 의료 치과회’란 단체에서 사무총장으로 섬겼습니다. 때때로 저와 대화할 때 의사들은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한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자네가 부모님과 말씀을 나눌 때는 나에게 하듯이 하지 말게나. 나도 배운 사람이지만 전문 용어는 몰라. 단지 의학분야에서 당신만큼 알지 못할 뿐이네.”

그가 무엇이라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늘 그런걸.”

저도 처음 신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 이렇게 많이 했었습니다. 서재에서 뿐 아니라 강단에서도 희랍어와 히브리어의 지식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여 성도가 찬사로 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목사님 설교 듣는 것이 너무 좋아요. 사실 원문에서 목사님이 얻은 그 통찰력을 볼 때 내 영어 성경은 읽을 게 못되는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어요.”

집으로 가면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 여인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만들다니.

평범한 사람들이 학구적인 말을 배울 수 없기에 학문하는 사람들이 대중의 언어를 배워야한다는 스펄전의 말이 옳았습니다. 알아듣게 하는 것이 목사의 임무입니다.

단지 주석만 한 것으로는 주일 아침 설교가 될 수 없습니다. 해석이 있어야 합니다. 해석이란 주석에서 얻은 것으로 본문 이해에 필요한 것을 성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자가 주해한 것을 모두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의 구성이나 흐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설교한 후 몇 주 지나 그 본문을 대할 때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교회에 주석이 필요 없다는 뜻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연구하실 때 여러분은 자세한 성경공부를 즐기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모든 종류의 자료들을 다 파헤쳐도 좋습니다. 그러나 설교에 이토록 미세한 것을 포함시키는 것은 정신을 혼란시키는 각주를 읽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이러한 기술적인 가르침은 교실에서나 적당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들은 주일에 설교한 본문을 가지고 수요일 밤에 더욱 관심있는 사람들의 소그룹 모임에서 자세한 주석 공부를 합니다.

도널드 그래이 반하우스(Donald Gray Barnhouse)는 이것을 흥미로운 방법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설명을 합니다. 동사의 시제를 밝혀주고 어떤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하게 말하고자 할 때 잠시 멈춥니다. 본문을 읽는 데만 10분이 걸립니다. 그는 주석에 근거하여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때도 반하우스는 자랑하는 어조가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에게 고대 언어 강의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이 성경 저자의 생각의 흐름이나 느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의 연구에 기초하여 본문을 강조할 수 있도록 시간을 안배한 것입니다. 제 10장로교회에 처음으로 참석한 사람들은 성경 읽는 것을 듣고 설교를 들은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설교에 들어갈 때 반하우스는 설교를 설교되게 하는 것, 즉 본문의 메시지, 의미, 적용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모든 설교는 ‘그래서?’란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이집트 고고학에 관한 강의는 아무리 흥미로울지라도 설교는 아닙니다. 설교는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적인 적용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적용을 늘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제 차를 빌렸는데 빵구가 났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전화로 말합니다. “한번도 이런 차 타이어를 갈아 끼우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돼?”

저는 말합니다. 스패어 타이어는 어떻게 찾는지, 공구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푸는 열쇠는 어디에 있는지. 다 알려주고 난 다음 제가 “자, 이제 부탁이야. 타이어 갈아주겠니?”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제 차가 잘 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단지 명쾌한 설명만 필요로 할 뿐입니다.

어떤 설교는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의 성도들은 성경의 어떤 본문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자 합니다. 본문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그것을 적용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본문을 통한 권고가 아니라 본문 자체의 해설입니다. 본문에 대한 그들의 궁금증이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보며 우리 자신과 서로를 볼 것인가와 같은 신학의 기본적인 이슈들을 다룰 때는 구체적인 적용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을 설교하면서 본문은 과학적인 이슈를 다루기 보다 신학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여러분은 세 그룹으로 날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날은 빛이요 넷째날은 빛들에 관한 것이며, 둘째날이 바다와 하늘이라면 다섯째 날은 물고기와 새들에 관한 것입니다. 매일 창조는 하나님의 평가로 이어집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리고 나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며 창조에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생물은 “그 종류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 함께 일하는 사람들, 혹은 거리에서 잠자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 말씀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이런 설교는 직접적인 적용은 거의 없이 해설만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적용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설교가 끝나면서 누군가 깨닫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든 남녀는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만 하면 사람이 자신과 타인을 보는 시각에 실제적으로 놀라운 차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을 보세요.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을까?” 여러분은 이신칭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울의 약간 난해한 토론으로 성도들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잘 준비하여 마치고 나면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면서도 하나님도 여전히 의로우실 수 있구나.”

명백한 것은 이 본문이 놀라운 적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복잡하여 여러분은 아마도 바울의 논증을 제대로 다룰 수도 없고 구체적인 많은 적용을 동일한 설교에서 세밀하게 다루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성도들이 진실로 잃어버림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기만 하면 구원 문제를 설명하는 것으로도 강한 적용이 될 것입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스스로 구체적인 적용을 할 수 있도록 믿어주어야 합니다. 저의 경험 가운데 저를 가장 성숙하게 만든 것은 끊임없이 제 속에 이러한 생각이 사로잡을 때였습니다. 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물론 여러분은 성도들이 지니지 않은 지식과, 그들이 함께 나누기를 기대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도 여러분은 회중을 무시하지 않는 자세, 즉 “만일 여러분이 저와 같은 처지라면 동일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태도로 그 지식을 나누어야 합니다. 만일 성도들을 위하여 모든 실천적인 적용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이 생각해야 할 것까지도 생각한다면, 이는 성도들의 지성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아무리 효과적으로 성도들에게 본문을 해석했다 할지라도 성도들을 향해, “여러분이라면 이 본문이 이렇게 적용되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성도들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더욱 위험한 것은 이와 반대되는 점, 즉 설명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적용을 충분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면 강단을 떠나면서 자주 느낍니다.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보였어야 했는데.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하기까지 성도들이 믿는 바에 따라 살기란 어렵습니다.


실제적인 삶의 예:필요성과 위험성
원칙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 즉 어떻게 적용할 지 보이기 위하여 우리는 실제적인 삶의 보기나 예화 즉, “이것이 바로 누군가가 이 문제를 해결한 방법이며 이것이 저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라고 말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삶의 예는 필요한 만큼이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정함에 대하여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단정하게 옷을 입어야 합니까? 당연히 대답은 예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입니까? 이렇게 설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릎 위까지 오는 스커트는 다 단정하지 못합니다.” 그는 무릎을 덮는 스커트를 입은 사람들로만 가득찬 교회로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원칙에 대한 한 가지의 적용이 원칙 자체를 압도해버렸습니다. 원칙에 한가지의 구체적인 적용만 하는 것, 이것은 율법주의의 본질입니다

제 친구 중에는 신앙생활을 일기로 기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일은 그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앙일기에 대하여 설교할 때, 그것을 쓰지 않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 특정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 원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율법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 진리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할 때마다 율법주의를 조장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면 어떻게 구체적인 적용을 설교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의 보기를 가지고 답하겠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80대에 우리 가정에 오셔서 함께 살았습니다. 잠시 후에 그는 쇠약해 지셨고 무리한 행동이 심해져 집에 모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상한 행동은 그 자신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까지도 위험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간호소에 데려가야 했습니다. 아버지를 그 곳에 계시게 하는 데 저의 월급의 반을 지불해야만 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8년간 거의 매일 아버지를 뵈러 갔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아버지가 거기 남아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8년간 하루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 곳을 떠나온 날이 없었습니다. 그분을 집에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그를 적절하게 보호해 줄 수 없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저의 장모께서 암으로 위독하게 되자 덴버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결혼 생활에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저는 덴버 신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잡으려 애쓸 때였습니다. 제 아내 보니는 밤낮으로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축축한 침대를 하루에도 여섯 번 내지 일곱 번 갈아야 했습니다. 18개월 동안 보니는 장모님을 우리 집에서 간호했습니다. 저의 장모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후회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해 보니가 최선을 다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연세 드신 부모님을 어떻게 모실 것인가? 집에서 모실 것인가 아니면 간호소에 모셔야 하는가? 기독교적으로 획일적인 대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상황, 자녀들, 재정, 그리고 부모님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의 큰 원칙은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며 그분들에게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기독교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이기적인 전제로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는가는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달라집니다.

율법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경의 원칙과 구체적인 적용간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설교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어떤 원칙을 단지 한 예가 아니라 두 개나 세 개의 예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칙을 그것을 적용하는 특정한 한가지의 방법과 동일시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이들과 매일 경건의 시간, 즉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뭔가 하나님께 실패하는 삶이다란 생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정 예배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좋았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정을 위해서는 잘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아이들의 속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가정 제단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중심이라 생각했기에 그대로 밀어부쳤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가정 예배가 원칙이 아니라 원칙의 적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원칙은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원칙에 해당되는 동일한 요구를 우리 가정 예배에 잘못 주입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차원으로 접근하게 되었고 한 가지가 우리에게 적합했습니다. 우리 두 아이는 각기 다른 시간에 학교에 갔습니다. 비키가 등교하기 전 아침마다 하루를 맡기며, 그 날 일어날 일을 위해 딸아이와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잠시 후 토리와 그의 한 친구가 저의 서재로 들어올 때 하루의 일들을 위하여 5분간 앉아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침마다 식탁에 앉아 가정 예배를 드린 것만큼이나 만족스럽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원칙을 존중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원칙과 그 적용간에 분명한 구분을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적인 원칙이 추상적이거나 막연하게 들리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때때로 설교자는 그 원칙을 회중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단순하게 번역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미국 개척의 시기였습니다. 서부에 목재 사업을 하는 시민들의 정착지가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교회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예배당을 세운 후 목사를 초청하였습니다. 설교가는 그 정착지로 들어왔고 처음에 매우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교구 사람들이 강 위쪽에 있는 다른 마을에서 강물을 따라 떠내려온 통나무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각각의 통나무는 그 끝에 소유주의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실망스럽게도 목사는 교인들이 나무를 끌어다 이름이 쓰여 있는 끝부분을 잘라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 주 주일 그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을 강하게 설교했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성도들이 줄을 이어 열광적인 찬사를 보내었습니다.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강하고 세밀한 음성의 설교였습니다.” 삶의 변화 없는 그들의 반응은 그를 너무나 괴롭혔습니다. 다음 주 설교를 위해 그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주에도 동일한 설교를 하고 끝을 다르게 맺었습니다. “그대는 이웃의 통나무 끝을 자르지 말지니라.” 설교를 마치자 교인들은 그를 내쫓아 버렸습니다.성도들이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원칙을 말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설교에서의 ‘우리’와 ‘여러분’
해석과 적용의 관계를 보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설교자가 사용하는 인칭 대명사에 있습니다. 훌륭한 설교자는 설교할 때 성도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사람의 일을 돌보기 위하여 사람 가운데 대제사장을 뽑았다고 말씀합니다. 대제사장은 죄를 짓는 것이 무엇이며 용서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그는 깨끗함을 입어야 할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사람들처럼 됨으로써 그는 하나님 앞에 사람들의 대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제사장이 희생을 드림으로써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정결을 베풀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대표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설교도 이와 같습니다.

훌륭한 설교를 듣고 있으면 주위에 누가 있는지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설교자가 말할 때 하나님께서 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때는 본문을 해석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적용의 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설교자는 ‘우리’보다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설교자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합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원칙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이 본문을 적용했는지 두 세가지의 예를 보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이 본문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이제 당신은 당신의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제 당신은 결혼서약을 신중하게 지킬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 때 당신은 복수가 아니라 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 시점에서 설교자가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청중과 분리되어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인 적용을 할 수 있도록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효과적인 적용은 기교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방법이라기 보다 하나의 자세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자는 성경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성경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문제, 상처, 두려움, 그리고 고민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철학으로 설교에 접근할 때 부싯돌과 철이 충돌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문제라는 부싯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철을 때려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불타오르게 합니다.

생각해 볼 문제
1. 설교자는 어떻게 성경 본문과 삶의 적용을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습니까?
2. 주석과 해석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3. 설교에서 ‘그래서’란 무엇을 말합니까?
4. 설교에서 실제 삶의 보기가 감당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5. 이번 주 당신의 설교에서 성경 본문과 삶의 적용을 어떻게 조화롭게 유지하겠습니까?

해돈 로빈슨/ 달라스 신학교(Th. M.)에서 공부하고 일리노이대학에서 스피치 커뮤니케이션(Speech Communication)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달라스 신학교의 교수, 덴버신학교의 설교학 교수 겸 학장을 지냈고 지금은 고든 콘웰 신학교 설교학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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