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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한국사회문화의 성격2

맑은샘77 2007. 10. 3. 00:05

2.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고찰   

전통의 계승과 혁신, 하나는 다른 하나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으며, 이 둘은 영향사적 연관의 객관성으로 녹아드는 것들이다.  전통의 맥락은 문화뿐만 아니라 야만을 통해서만 그 연속성이 확립된다는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그때 그때마다 현재 세대는 미래 세대의 운명뿐만 아니라 과거 세대가 죄 없이 당한 운명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는 이념이다. 윤리적 보편주의는, 이미 발생하여 돌이킬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불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나중에 태어난 자들과 앞선간 자들, 곧, 인간의 손에 의해 자신의 신체와 인격의 위엄이 훼손된 모든 사람들 사이에는 연대성이 있다.

2.1.  유교와 근대성의 문제

2.1.1.  유교는 우리의 전통사상인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김경일의 문제제기는 한국사회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되었고, 유교자본주의 및 아시아적 가치-유교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개항이후 근대화된 이래 우리가 갖는 가장 고루하면서 현실에 제기되는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제기는 항상 담론을 유발한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의 전통으로 생각하고, 탈근대-유교는 과연 서구의 종언에 대한 대안인가?라는 논의에 새롭게 재인되고 있는 유교에 대해 알아보자.

존재론과 인식론은 단어의 배후에 숨어 있으면서 단어에게 구체적인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삶에 대한 무언의 가정과 명제를 담고 있는 말들이다. 브르디유는 그러한 가정과 명제를 '독사'(doxa)라고 부른 적이 있다.   서구라파의 정치적 담론체계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모든 문화에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독사가 있다.

한국인의 관점을 틀 지우는 ‘독사’는 인본주의와 가족주의의 존재론을 가지고 있는 유교이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론은 일상적인 말들 속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고, 인간관계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권리와 책임 및 역할을 규정하도록 학교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끊임없이 교육받고 훈련받는 것이 한국인이고, 그 결과 우리는 서구라파 사회계약론의 기저에 깔려 있는 절대적 개인의 상(像)과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타인과의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 간주관적(intersubjective) 인간의 상을 상정하게 된다.

 유교는 우리 생활인 일상 안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유교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근대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1960년대 초에 발표된 김경동 교수는 가치를 “인간으로 하여금 일정한 대상을 선호하여 선택하도록 해주는 인간의 한 상징적 요소”라고 정의하면서 한국인의 보편적 가치는 역시 “유교적 가치” 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홍승직 교수는 전통적 가치란 조선시대를 지배한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적 가치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 유교가 사라지고 있는가라고 생각도 해 볼 수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유교의 규범을 지키고 있다. 조상숭배, 어른을 모시는 태도, 부계제도, 가족제도의 존중, 교육의 중요성 강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학교에서 충효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의 도덕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고 로빈슨 교수는 말한다.

 라이샤워는 모든 일본 사람은 유교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과연 일본인 가운데 얼마나 스스로 유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 근대성안의 유교 전통》에 실린 「현대한국의 유교」라는 논문에서 고병익 교수는 인용부호를 붙여서 “모든 사람은 유교인이다”(All Man are Confucians)라고 말하였다. 그는 한국의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옷을 입은 유교인이고, 불교인은 불교의 옷을 입은 유교인이다. 뚜웨이밍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마음의 유교적 습성들이 아직도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행동을 크게 지배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남철은 현실과 원칙, 프라그마티즘과 도덕주의의 관계를 유교에서 찾고있다. 이러한 논의에 유교는 항상 대안으로 기사회생한다. 하와이 대학의 로져 에임스 교수는 <동양사상과 사회발전>이란 학술대회에서 '근대화'를 '서구화'로 혼동하지 말 것을 훈계했다. 그는 '자유'라는 보호막 안에서 마약과 향락으로 시들어 가는 미국 청소년들의 예를 들며 유교적 수신과 덕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권리'라는 방패막이 안에서 도덕적 진공상태에 빠져드는 서구의 개인주의를 예로 들며 유교의 '공동체주의'와, '계약론적 합리성'의 비인간성을 지탄하며 동양전통에서 중시해 온 인격미와 유대감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동양도 이제는 '자율' '주체' '합리' '보편'으로 대변되는 근대 서양의 획일적 진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전통 고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토착적 근대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와는 달리 김경일은 한일합방을 부른 무기력한 정부와 위선적 지식인들, 6․25를 부른 우리 문화 속의 분열 본질, 그리고 IMF를 부르고 만 자기 기만과 허세. 그것들은 도덕의 가면을 쓴 유교 문화 속의 원질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비판한다.

한국의 전통적 가치를 “유교적 가치”라고 할 수는 있어도 유교적 가치를 “한국적” 가치라고 할 수 있겠냐는 문제는 다분히 논쟁의 소지가 있다. 유교적 가치는 중국의 가치이고 중화체제에 포함된 조선의 지배엘리트가 그 중국의 가치를 도입하여 유용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조선이전에 한반도에 거주했던 선조들의 지배적 가치는 분명히 유교적 가치가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고려시대의 불교가 지배적 신앙이었는데 조선 500여년을 거치면서 완전히 유교에 의해서 해소되었는가? 그렇다면 만약 일제가 100년 정도 지속되었고 일제가 지독하게 일본의 가치를 조선에 이식했다면 똑 같은 논리로 일본적 가치를 한국의 지배적 가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행태는 사실 일제하에서의 우리 지식인들이 벌인 친일 행각에서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의 서구적 가치 또는 미국의 가치를 심기에 열심인 친미적인 지식인과 이미 보편화된 기독교의 가치와 서구적 가치를 우리의 가치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유교를 비판하는 김영일을 비롯한 진웬쉐와 주강현이 있다.


2.1.2.  유교의 전근대성

인문학의 위기는 바로 유교의 위기와 깊은 관계를 가진다. 이는 바로 16세기의 인문학의 위기에서 그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세 가지 사실이 그들(인문학자)의 죄를 설명해 줄 것이고 어쩌면 그들의 잘못을 줄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행운이 자기들 편일 때에 그들은 너무도 절제를 못 했다. 둘째로는 외적인 생활 조건의 불확실성을 들 수 있다. 후원자의 기분에 따라서, 그리고 적대자의 악의에 따라서 수시로 영욕이 엇갈렸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고대의 영향이었다. 고대는 그들에게 도덕성을 심어주지 못한 채 그들의 현재의 도덕성을 교란하였다. 고대를 도그마로, 즉 모든 사고와 행동의 모범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 점에서 불리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유교에서 말하는 사대부는 서구에서의 인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인문주의자의 삶은 가장 강력한 도덕적 천성을 가진 사람들만이 해를 입지 않고 견디어 낼 수 있는 종류의 삶이다.

레오 10세의 치하에서 씌어진 문학사가인 지랄두스의 논문은 학자 문인들의 도덕적인 문란함과 망가진 생활양식에서 상당히 심각한 일반적인 비난들이 요약되었다. 성급함, 허영심, 고집, 자기 신격화, 산만한 사생활, 온갖 종류의 방종, 이단, 무신론, 그리고 확신도 없이 말하는 버릇, 정부에 대한 파괴적 영향, 언어의 현학성, 처음에는 문사들을 유혹하고 나서 나중에는 굶주리게 만드는 영주들에 대한 지나친 아첨 등을 주로 지적했다. 이 비난들 중에서 한가지는 가장 위험한 것이 되었으니 곧 ‘이단’이라는 말이었고 이러한 행태는 조선에서의 유교에서도 완벽히 나타난다.

2.1.2.1.  관계의 도덕성

  유교가 합리적이지 못한다 해도 여전히 그 도덕성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한국 사회의 근대성의 문제는 합리성 문제와 맥락을 같이 한다. 합리성은 모든 것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는 관습적인 것에 대한 회의이며, 진지하게 삶을 다시 물어 보는 것이다. 과연 유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과연 그 속에 감추어진 구조는 무엇인가? 이는 르네상스 시기의 중세 기독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문제와 같다. 이성을 통해 진정 한국의 일상 속에 있는 유교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1500년경에 볼로냐에서 화형을 당한 조로지오는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라 평범한 수태 과정을 거쳐 태어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다. 그는 자신의 악의로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갔다. 그는 스스로 범한 범죄로 인해 십자가형을 당할 만했다. 그의 종교도 가까운 장래에 종말을 고할 것이다”라는 그의 발언은 신앙은 사라졌는데 마법은 남은 것이라는 이 시대의 특징을 담고 있다. 이를 유교에 비유하면 공자는 야합을 통해 태어난 애비도 모르는 인물로 동양사회의 스승은 커녕 동양사회 전체를 거짓과 왜곡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며, 그의 이상사회는 픽션이며,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다. 이제 공자는 사라졌으나 마법은 남아있다.

쿠퍼먼은 도덕체계의 이상형을 두 가지로 나눈다. 그것은 정의중심형 도덕 전통(justice~centered moral tradition)과 관계중심형 도덕 전통(connectedness~centered moral tradition)이다. 근대 내지 현대의 대부분의 서양 철학자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쿠퍼먼도 공적세계와 사적세계를 구분하면서 정의중심형이 일반적이며 비개인적이고 친지나 모르는 남들을 대개 추상적인 일반원칙에 입각해 분별없이 취급하는데 반해, 사랑이나 우정 같은데 근거를 둔 행위나 행동에는 무관심하다. 그리고 남에게 갚아야 하는 빚에 관심을 둔다. 이에 비해 관계중심형은 ‘충분한 인간 관계의 망을 형성, 유지하고 발전시키며 풍부하게 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한다. 이런 도덕 체계는 권리나 권리 수여 같은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체계는 우리가 자연적으로 동정하며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중요시한다. 쿠퍼먼은 사적 생활에서의 구체적인 인간관계에 관해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발전시킨 인․의․예․지 같은 개념에서 유교가 관계중심형의 좋은 본보기라고 말한다.

현대 한국정치의 향방에 은밀하게 영향을 미치는 독사는 바로 이렇게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자아를 규정하도록, 또 현실과 원칙을 동시에 중시하고 이들을 서로 조화시켜 보다 높은 지적 상태인 중의 차원으로 올라가도록 부단히 유도하는 유교문화이다.

그러나 이로 인한 유교적 관계성은 한국사회에서 마침내 업적보다는 지위중심으로 정경유착의 관계성으로 나타난다. 정경유착은 한국사회의 오래된 전통이다. 일찍이 매국노 치고 자신의 매국행위를 애국으로 호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완용 역시 이토를 대신에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면서도 가장 황실을 아끼고 걱정하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을 위장했다. 또한 보호 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이토에게 “새 협약의 성립은 두 나라를 위해 축하할 일이다. 짐은 신병으로 피로하지만 이등 후작은 밤 늦도록 수고했으니 얼마나 피곤하겠는가?”라는 위로의 말까지 내렸다. 그에게는 국가를 잃어버린 것보다 관계 안에서의 자기 안일이 중요하였다. 이러한 관계의 도덕성은 업적 중심의 근대적인 사고를 저해한다. 관계의 도덕성은 비합리적인 발상으로 유교적이다. 삼강오륜은 바로 관계의 도덕성의 전형이며 이는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 일상에서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은 더불어 문화이며, 이는 업적성취를 방해하는 요소이며, 정경유착과 부패의 고리를 만든다. 이는 가족주의의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족 공동체는 관계 안에서의 문화이고, 상호 이해의 문화이다. 이는 이완용과 고종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나타난다. 일본에 국가를 헌납하는데 앞장섰던 이완용에 대해 고종은 “집도 없이 형에게 얹혀 사는 총리대신 이완용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저동에 있는 남녕위궁을 하사함으로써, 고종은 자신에게 양위를 강요한 이완용을 괘씸하게 생각했을 법도 한데 오히려 그에게 황실 소유의 저택까지 하사한 것이다. 이는 이완용이 얼마나 황실과 관계를 잘 맺고 있는 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관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관계를 잘 맺는 인간이 가장 도덕적인 인간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업적이 아닌 지위상승의 논리로 우리 사회의 효율성을 초래하는 요소가 된다.

즉 관계성은 지위가 상승되는 키를 갖고 있다. 우리 나라 에서는 개인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던 길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학문과 덕행을 쌓아 과거에 급제하고 기회가 주어지면 관계에 들어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재야에서 학문과 덕행을 바탕으로 비슷한 지위를 인정받는 다른 한학자들과 교유하며 향촌 사회에서 백성을 교육하는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 속에 일의 개념은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전문적인 문제해결 능력보다는 다른 사람과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업무수행에 있어 더 중요시하도록 만든다.


2.1.2.2.  한국에서의 귀족주의: 특권의식과 사대주의

양계초는 조선의 정치․사회의 부패성이 조선을 자멸시켰다고 지적했다.

“조선의 군사․정치․재정․화폐 개혁은 모두 힘이 없었으며, 외교에서도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귀족과 한문(寒門), 즉 양반과 상민의 계급이 존재하며 양반이 일체 권리를 독점한다. 민중에 대해서는 짐승과 같이 대하고 착취와 약탈을 일삼음으로써 국고에 넣는 것은 3분 1정도밖에 안되었다. 당파를 두어 자기 배만 채우려고 서로 싸웠다. 그리고 정치란 무엇인지 모르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사대주의로 친일․친로․친중 하는 식으로 돌변하기 일쑤다. 귀국한 유학생이 1천명 가까이 되지만, 대부분 관직에 오르려 애쓰기만 하고 사회는 전혀 돌보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양반의 특권지배논리는 오늘날 곳곳에서 나타난다.

한국에는 재미난 두 가지 명물이 있다. 하나는 나이를 따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양반과 상놈을 가르는 것이다. 저마다 양반 행세를 하려 드는 한국인의 가치를 잘 드러내고 있다. 출신의 귀천을 따지는 버릇이다. 이러한 경향은 지식인에게서도 곧바로 나타난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또 대학교수로 재직중인 교수도 역시 아무리 미국의 평등주의를 배우고 또 서구의 학문을 해도 그 역시 가문이 왕족이나 양반임을 강조한다. 또한 미국에 유학을 하고 미국에서 살았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조차도 그가 이씨 조선의 후예임을 강조하고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뼈대있는 집안으로서의 양반 후손을 외치고 양반을 지향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길 가는 사람 누구를 잡고 물어보아도 자신의 조상은 양반이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족보(族譜)일 것이다. 족보는 어느 한 개인 또는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계보가 아니라 그 개인 속하는 씨족(氏族)집단 전체 또는 그 씨족 내 파의 합동계보이다. 또한 족보라는 특권층의 보장제도에 의해 조선인의 문벌숭상 풍조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독립된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느 씨족의 어느 파에 속하는 누구의 자손이며 또 누구의 외손인가로 이해하려는 사회관습의 소산이었다. 족보를 편찬하는 제일의 목적은 일족의 현재 상황을 말하는 것, 즉 족보 편찬한 사람의 위신,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자신들의 출신이 얼마나 유서 깊은지, 일족의 사람이 얼마나 유서 깊은지, 일족의 사람이 현재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지를 나타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족보란 일족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현재의 상태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족보를 통해 현시욕을 추구하는 양반이란 무엇인가? 조선 초기에 양반은 문․무반 양자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지배신분을 뜻했다. 이들 집단이 지니는 특징의 하나는 배타성이었다. 이들 유림의 배타성은 단순히 다른 계급의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유학자 특유의 결벽성까지 작용하여, 씨족간 또는 씨족 내의 각파간에 존재하였던 배타성보다도 더욱 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신분 출신이 양반신분을 조작하여 유림집단에 속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러한 양반은 유교를 교시로 하여 현시적인 생활논리를 갖고 있다. 사후의 보장보다 현실은 우리에게 중요하며 이는 지위중심의 문화를 만들었다. 조상숭배도 사실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이완용 자신이 조상 신주가 불타버린 것이 일생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윤덕한, 260쪽)을 주었음은 그의 행태 안에 현시적인 안위와 관계 속에서의 영욕을 누리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계혈연을 중시하는 조상 제사 방식은 지극히 유교적이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조상제사와 조상의 현창이 단순히 돌아가신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역시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현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반은 조선시대의 특권이었던 양반의 개념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것은 양반의 기준에 대한 성문화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양인(良人)과 천인의 신분만 존재한다는 양천제(良賤制)는 《경국대전》등 어떤 법전에도 양반에 대한 명문규정이 없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양반과 상놈(사실은 상인)을 가르는 기준은 정신 노동을 하는가 육체 노동을 하는 가에 있다.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은 모두 천한 상놈이다.(사농공상, 士農工商) 그리고 글이나 읽고 음풍농월하는 지식인과 귀족, 즉 벽지 산골에서 살지라도 농사일을 하지 않고 독서를 안 해도 놀기만 하는 사람은 모두 양반이라고 떵떵거린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양반의 특색은 보잘것없는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고, 육체 노동을 극도로 천시하며, 입만 놀리고 손은 까딱 안 하는 게으름벵이인 것이다. 그렇기에 양반의 눈에는 모든 육체 노동자는 천하디 천한 상놈, 상것일뿐이다.

노동을 천시하는 경향이 강하니 무슨 일을 해도 쉽게 대강하려고 하여 한국식 ‘빨리 빨리’를 낳았다. 빨리 빨리 서두르기만 하니 솜씨가 거칠고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저 무엇이든 “대강해요”, “괜찮아요”이다. 오래 전부터 나라를 대표하는 영웅들은 모든 양반, 귀족, 인텔리였지 상놈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지탱해 주고 있는 기초가 바로 이 체면 없고 천한 상놈들이 아닌가. 한국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재벌로 성공한 사람은 대부분 막노동으로부터 시작한 사람들이다.

2.1.2.3.  감정의 문화(시스템은 있는가?)

한국의 잘못된 관행과 부패의 고리는 바로 시스템의 부족에 기인한다. 시스템이란 “두 개 이상의 객체가 연합하여 객체 상호간의 논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특정 목적을 수행하는 유기적 집합체(entity)”이다. 이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발상이다. 이러한 발상은 다분히 서구의 경영방식에서 나온다. 서구가 “수많은 타인의 능력을 이용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기술”인 ‘경영’이라면, 동양은 ‘통치’이고 ‘정치’이다. 정치는 권력자의 자의적인 힘이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경영방식은 제도와 의식의 중용형으로 ‘견제와 균형’이라는 논리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국가사회의 위기를 의식개혁에서 찾는다. 그리고 아주 과학적이어야 할 의학자도 신바람으로 인기를 얻고, 정치가는 한국인의 신바람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의식구조만 탓하고 신바람을 일으키려는 낮은 경영의 활력으로는 현재의 위기도 그리고 정보사회에 대처할 수 없다. 이제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식 기반의 자본주의는 지적재산권의 소유자와 관리자를 결정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없이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명확하고 손쉽게 집행할 수 있는 소유권의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신바람을 사랑한다. 그리고 곳곳에서 준비없는 기술로 신바람의 ‘투혼’을 강요한다.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질적 사회일수록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는 사회의 전체적 위기로 이어진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강박적 애국심이 만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이 상처를 입을 때 애국심은 더욱더 기승을 부린다는 점이고, 이렇게 발동한 애국심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종족의 공동체적 감정이 다른 집단과 스스로를 구별하고자 하는 정체성 추구의 결과라고 한다면, 역사적 상황에 따라 변하는 <우리>의 감정은 항상 우리와는 다른 문화에 대한 배타적 구분을 전제한다.

한국에 한국인이 없다는 것은 한민족에 속한다는 감정적 연대감만이 존재하지 우리의 정체성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이성적 내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은 확실히 잘될 땐 신명이 나고 안 될 땐 신물이 난다. 신명이라는 말을 만든 민족도 한국인뿐이다. 한국인 스스로도 신명나는 신바람의 민족이라는 얘기를 곧잘 한다. 한국 토착 샤머니즘의 무당이 추는 춤에서도 신바람을 볼 수 있다. 주문과 열광적인 엑스터시에 의해 ‘신’을 불러일으켜 ‘신명’이 유발되고 미친 듯한 신바람이 넘치게 된다. 한국인의 신바람은 흥이나 희열과 직결되어 있으며 절대로 냉철함과 논리적이지 않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어령 교수는 중국 사람들은 믿음으로 뭉친 신의의 민족이고, 일본인은 기리(의리)와 닌조(인정)의 민족이지만 실제로는 차가운 이해관계고 뭉쳐 정이 없다. 중국인도 일본인도 정이 없지만 한국인은 정으로 맺어져 있다고 했다.

정(情)은 혈연관계, 가족관계를 핵으로 하는 사회, 특히 농경 문화의 정착 생활 속에서 커다란 에너지를 발산하며 한국인을 뭉쳐 놓았다. 그러나 정은 ‘메이드 인 코리아’에 걸맞게 한국이라는 우리 울타리 안에서나 어울린다. 정에는 원리․원칙이 결여되어 있어 신뢰와 계약을 우선시하는 현대사회, 국제사회에는 통하지 않는다. 情․情 하다가 정에 파묻혀 스스로 자기를 속박하는 게 바로 한국인이다.

情, 그것은 한국인의 성격과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에 반에 서양 합리주의는 감성과 감정이 이성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변덕스럽고 부정확하며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치부하는 이성 중심주의의 경향을 보여왔다. 감성보다는 오성, 물질보다는 정신, 육체보다는 영혼에 우월성을 부여한다. 동양적 사유는 근본적으로 몸과 마음을 분리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몸 없는 정신, 감정이 거세된 이성, 신체와 분리된 의식은 ―매킨타이어가 현대 서양인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듯이―<유령적 자아>를 구성하는 추상적 개념들에 불과할 뿐이다.

情은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서양의 합리주의의 정의(正義)와 구별되는가?

첫째, 情은 타인을 나와 분리된 개체로 파악하는 서양 합리주의와는 달리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른 사람들의 처지와 고통에 대한 동정과 이해심을 함양한다. 둘째, 情은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감정적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사회적 안정과 평화를 가져온다. 셋째, 情은 도덕적 이상과 목표에 대한 헌신을 통해 현실적 이익에 대한 관심과 추구를 제한할 수 있도록 만든다. 넷째, 情은 구체적 사회 관계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개인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발전시킨다.

H. B. 핼 바드는 <조선열망>에서 “조선인은 화가 나면 정신을 잃을 정도다. 자기의 목숨 같은 건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상태로 되어 이가 없는 동물로 변한다.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조선 여성 …조선인은 어릴 때부터 자기의 기분을 제어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 모양이다. 아이들도 어른들을 본받아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광기를 부리는데…라고 한국인의 감정적임을 문화 속에서 찾고 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결여되어 있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냉정이다. 냉정하게, 냉철하게 사물의 원리․원칙을 지키려는 보편 타당한 정(이성)이 없다.

2.2.  한국 전통문화에 있어서의 근대성: 한국 문화의 현주소에 대한 분석

1970년대 중반에 이미 가치관과 관련하여 한국사회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규명하고 있다. 첫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만 하면 된다는 배금사상, 둘째, 감투만 쓰면 매사가 성취되는 듯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권력주변에 가까이 하려는 권력만능주의, 셋째, 실천이 따르지 않은 채 필요 이상으로 반복되고 주장되는 구호주의, 넷째. 남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이지 않고 필요이상으로 확대해서 보이려는 과시주의는 바로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이다.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에서 홉스테드는 문화의 공통적인 문제를 통해 우리 문화의 현주소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문화간 협력과 세계 속에서의 생존이라는 우리 문화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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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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