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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Re:Re:한국사회문화의 성격4

맑은샘77 2007. 10. 3. 00:08

2.3.3.  전통과 현대의 변증법

2.3.3.1.  개인과 공동체

전통 문화를 창의적으로 계승하려면 <공연히 주관적 정열에만 도취>하기보다는 오히려 <문화 유산 자체가 그의 전승에 있어서 어떠한 법칙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해석학적 문제 의식은 한국 현대 철학의 시작과 더불어 형성된 것이다.

변증법적 지양이라는 헤겔의 용어를 적용하고 있지만, 전통 사상과 외래 사상을 생산적으로 결합하고자 하는 그의 철학적 관점과 방법은 철저하게 해석학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는 바로 전통과 현대의 초점이 된다. 개인주의는 20세기의 문명들 속에서 서구의 가장 두드러진 면으로 남아 있다. 근대성의 문제가 등장하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개인’의 개념이다. 개인주의는 로크가 이른바 <앙상 레짐>이라는 구체제를 비판할 때 사용한 강력한 도구였다. 그는 정치 권력을 이성에 의해 지휘되는 자연 상태 혹은 자연법 안에서 발견하였지만, 그 이성은 다시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여기서 로크의 개인주의는 신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흔적을 드러내지만, 이미 교회의 권위가 무너진 상황을 감안하면 로크 개인주의의 불철저함은 크게 문제될 바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시민정부론」에서 제시환 개인, 즉 자율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개념이 교회의 귀족층의 문화적 권위를 전복시켰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이후 계몽주의의 사회적 지평을 확장시키는 단초를 이루게 된다.  고전적 자유민주주의, 특히 로크 식의 자유 민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는 ‘자율적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이 문제가 된다. 이것은 개인주의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개인주의는 인간이 모든 전통과 문화나 그 외에 어떤 것에도 거추장스러운 구애를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율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개인주의도 하나의 문화전통이다. 샌들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개념은 일종의 신화다. 모든 문화 전통이나 사회적 실천에서 독립해 잇는 추상화된 개인이란 실천하지 않는다.

쿠퍼먼은 공적세계와 사적세계로 인간 생활을 양분하고, 이에 상응하는 “두  개의 초점을 가진 윤리”는 테일러가 늘 이야기해 온 ‘근대 민주주의의 딜레마’와도 직결된다. 이는 사회정의와 연결되는 추상적 도덕체계와 구체적인 인간관계와 연결되는 구체적인 인간관계와 연결되는 구체적인 도덕체계의 변증법적 대립의 문제이다. 이 딜레마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근대 민주주의의 딜레마’는 근대화를 이루어냈거나 아니면 아직 근대화의 과정에 있는 유교 문화권에서도 이미 야기되고 있거나 앞으로 야기될 것이다.

근․현대 사회 안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은 어떤 의미에서 자유 민주주의인 후쿠야마조차 인정할 뿐 아니라, 서양의 공동체 주의자들이 개인주의적 시민 사회의 각종 사회문제 해결 가능성과 연결 시켜 주목하는 것이다. 계약보다는 신용과 신의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에 역점을 두는 공동체에 주목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인간 관계는 구체성을 띤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집단-국가지향적인 “공동체주의적(communitarian)” 사회의 전형적인 반면, 미국은 개인주의적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미국은 종래에 이야기되어 오던 것처럼 개인주의적이지 않으며, 일본 역시 그렇게 국가 중심적이지 않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에 대해 형태 없는 모래더미와 같은 개인이 아니라 엄격하게 배타적이면서도 자발적 연대로 가득 찬 복합체, 이것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명백히 미국 민주주의에 속하는 특징이었다.

미국은 오늘날 이전에 축적된 사회적 자본의 덕으로 풍요롭고 역동적인 연대적 삶을 누리면서, 한편으로는 구성원을 고립시키고 원자화하는 극단적인 불신과 반사회적인 개인주의를 드러내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막스 베버는 《중국의 종교(the Religion of China)》라는 저서에서 강력한 중국의 가족 중심주의가 현대적인 기업조직에 필수적인 보편적 가치와 비인격적인 사회적 유대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소위 말하는 ‘혈연의 족쇄’(지나치게 한정적인 가족유대)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가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가산의 상속이다. 즉, 중국에서 조상 제사를 지냄에 있어,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으면 조상으로서 기억되지 않는다. 이는 가족이 아닌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 문화와 더불어 평등한 상속 때문에 중국인은 대기업을 이룩하기도 힘들고, 설령 대기업이 육성되었다고 하더라도 대기업이 후 세대까지 지속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일본의 가족은 규모가 적고 결집력이 그렇게 없었다. 혈연관계보다도 가족의 존속을 중시하며 아무 스스럼없이 양자를 받아들여 가업이나 재산을 상속시키는 등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랐다.

일본의 ‘이에(家)’라는 것은 생물적인 가족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이에’는 중국의 ‘챠(家)’와는 다르다. 혈연 또는 혼인과 무관한 사람들도 일본의 ‘이에’의 성원이 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중국의 ‘챠’에서는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전통 중국․한국사회의 종족과 같은 순수혈연집단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일본의 ‘이에’는 가산(家産)을 기초로 가업(家業)을 경영하는 경영체, 대외적으로는 가명(家名)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사회단체였다. 그런데 가족의 장(長)이라는 지위는 보통 장자에게 상속되지만 장자의 역할은 가족이 아닌 사람도 맡을 수 있었다. 즉, 이에의 경영을 책이지는 호주를 잇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라서 일본에서는 대를  이어가는 데 있어서 혈연이 아닌 사람도 호주의 지위를 물려받을 수 있다. 게다가 사회에는 혈족에 기초를 두지 않는 자발적인 조직이 많이 얽혀 있다.

‘이에모토’를 하나의 조직으로 결합시키는 원칙은 친족계약적이며 이는 2차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일본인의 욕구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명치시대에 반유교주의자인 니시 아마네는 정치와 도덕을 연결시키는 유교적인 사상에 반대하였다. 유교사상에서 악의 근본은 자신을 수양하고 타인을 다스리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교의 입장에서 보면 양자를 분리시키는 것은 사회의 도덕적 성실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그 자체가 지극히 부도덕한 것이다. 이는 마치 상업사회의 윤리를 수용하면 시민이 덕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서구의 식자들이 우려한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처럼 서구의 가치를 도입하는 시점에서 공리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과학적인 효율이라는 서양의 교의는 물질적인 가치와 서로가 적대적일 정도로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결하는 것이 많을 것이다.

수기(修己)가 사회적 안녕과 조화에 근본이며 개인은 사회를 통하여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사회에 대한 권리나 특권을 주장하기보다 의무를 중시하게 외었다. 사회가 개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묻지 않았지만 개인은 사회가 없이는 선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에 헌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예(禮)이고 인(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仁)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초보적인 단위는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은 중국현실에서 1차 집단일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조직의 원형이 되었다. 아는 유교가 개체성이나 개인의 개성이 다르게 발전하는 것보다 예의 바른 교양을 보다 중시하여 효와 가족에 대한 충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이러한 점이 서구의 개신교가 가지는 내적인 동력과 논리와는 다른 것이다.

가족의 명령에 항거하여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는 유태 기독교적인 권위의 신적인 근거는 중국에는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충(忠)보다는 효(孝)가 한국에서 강조되었다. 이는 정치적 권위보다도 가족에게 충성이 우선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에서는 다섯 가지 덕목 중에서 인(仁)과 효(孝)가 가장 중요하였다. 그러나 유교가 일본에 수입되고 일본의 상황에 적응하게 되자, 덕목의 상대적인 중요성이 상당히 바뀌었다. 유교를 일본적으로 해석한 전형적인 문서인 1882년 군대에 공포된 황제의 훈령, 즉 <군인조칙>에서 충(忠)이 최상위의 덕목으로 거양되고 인은 덕목에서 삭제되었다. 게다가 원래 중국에서 가지고 있던 충(忠)의 의미인 ‘자신에게 의무를 가진다는 윤리적인 의미, 즉 개인에 따라야만 하는 행위의 개인적 기준이었다.  이에 비하여 일본에서는 군주에 대한 의무는 무조건적인 성격이 보다 강하였다. 충(忠)이 일본에서 기본 덕목으로 승격이 되고 효가 격하된 것은 사회적인 의무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에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권위조차도 절대적이 아니었다. 이에 반해 일본은 신유교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그 교의가 천황과 지배계층의 권위를 손상하지 않고 일본의 무사도에 적합하게끔 변모시켰다. 야마자기 안사이는 중국이 공자를 대장으로 하고 맹자를 부장으로 하여 일본을 공격하면, 공맹을 생포하여 국은(國恩)에 보답하는 것이 공맹의 도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효와 충의 갈등 속에서 국가에 대한 충의 우위를 강조하고 ‘이에모토’적인 조직을 가진 일본인의 문화 의식에서는 군국주의의 길을 열 수 있는 일본인의 의식 혹은 정치문화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특이한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생각나는 것은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언했던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말이다. 그는 최근작 '트러스트'에서 앞으로의 세계를 점치는 또 하나의 '예언'을 하고 있다. 그는 개방 시장원리나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토대로 한 민주주의로 세계의 역사는 결판이 났지만 그 나라가 지니고 있는 문화에 의해서 그 양상은 각기 달라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인간을 신뢰하는 문화'와 가족이 아니면 사람을 '믿지 못하는 문화'의 두 유형으로 나누어 놓고 그것이 바로 그 나라의 'Social Capital'(사회자본)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인간을 신뢰하는 문화'유형에 속하는 나라로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를 들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나라로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라틴계에 속하는 유럽국가들을 꼽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지구 규모의 대기업은 모두 '인간을 신뢰하는 문화' 속에서 나오고 있으며, 결국 21세기의 세계시장은 '트러스트'의 사회자본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시점에서 보면 '왜 같은 유럽이라고 해도 이탈리아에는 세계규모의 대기업이 없는가. 어째서 마피아의 집단이 아니라도 그들 기업은 가족 중심의 패밀리 비지니스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를 설명할 수도 있다. 반대로 같은 아시아인데도 어째서 일본인들은 세계적인 대기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를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블라우의 주장처럼 사회는 집단간의 상호 얽힘이 결속력의 기본이 되는데 연망줄 안에 얽힌 사람에 대한 높은 신뢰와 연줄망 밖의 사람에 대한 낮은 신뢰는 폐쇄적 집단 사이의 갈등을 통해 아노미 상태로 이어질 위험성을 증가한다. 

‘정태적 신뢰’ 상태로서의 ‘경제적 신뢰’가 비계산적이고 당연시 된 신뢰라면, ‘동태적 신뢰’는 불신에 기반한 신뢰라는 것이다. 정신적 신뢰가 맹신이 되어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 있다는 점에 비하며, 동태적 신뢰에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문제가 적은 편이다. 루만은 신뢰 정도를 감시에 의해 결정하지 않는 경우를 확신이라고 지칭한다.

 루만은 행위자가 위험을 의식하는가의 여부에 의해 확신과 신뢰의 구별한다.

 반대로, 대안적 상황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 행위자가 위험을 인지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내는 믿음을 루만은 신뢰하고 부른다.  콜만은 행위와 결과의 시(공)간의 차이로 인해 신뢰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합리적인 행위자라면 손해를 입을 가능성, 이익을 볼 가능성, 예상되는 이익과 손해의 크기 등을 고려하여 신뢰를 할 것인지의 여부와 신뢰의 수준을 결정하게 된다.

  우리는 루만이 확신이라고 부른 것도 신뢰의 한 유형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확신이란 신뢰의 정도가 매우 높으며 신뢰의 수준을 늘 감시하여 결정하지 않는 경우라고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가를 감시하는 경우를 사건으로서의 신뢰를 부르려고 하는데, 사건으로서의 신뢰는 동태적이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정보와 경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신뢰를 할 것인가 하는 결정은 이익을 볼 가능성, 잠정적인 손실액과 기대되는 이익의 크기에 대한 계산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뢰를 사건으로 개념화함으로써 반복적 만남, 지난 만남의 기억, 그리고 집단 내의 신뢰자의 분포 등이 개인간의 신뢰를 형성하는 데 필수요건이 되는 점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관계가 오래 되지 않은 사람들과의 접촉, 또는 위험 부담이 큰 상황 등일 때, 사건으로서의 신뢰가 나타나게 된다.

후쿠야마는 중국이 세계 경제대국이 된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대만 홍콩 그리고 우리 한국의 유교문화를 포함해서. 후쿠야마의 예언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한보의 이번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도, 그리고 그것이 정치인의 가십으로 번지고 있는 것도 모두가 프란시스 후쿠야마 문화유형의 모델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두렵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정말 인간신뢰의 문화가 없는가. 가족집단에 치우친 우리의 그 빈약한 사회자본으로는 결코 21세기의 아침을 맞이할 수 없다. 이것은 정치나 기업의 부패보다도 더 무서운 문제다.

중개집단이 취약한 중국이나 라틴계 가톨릭 문화와 비교해 보면 일본과 미국간의 유사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미국, 일본, 독일이 규모가 크고 현대적이며 합리적으로 잘 조직되고 전문적으로 경영되는 기업을 최초로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 나라는 각각 기업조직으로 하여금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고, 친족에 기초하지 않은 새롭고 자발적이며 다양한 사회집단을 창조할 수 있도록 하는 모종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친족관계가 없는 개인간에 높은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고, 따라서 사회적 자본을 위한 견고한 기초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일본인들이 ‘이에모토’ 그룹이라 부르는 것들로서 가부키 극장, 꽃꽂이, 전통다도 따위의 전통적 예술이나 공예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 그룹들은 가족처럼 위계질서를 이루면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강한 수직적 유대를 맺고 있지만, 친족관계에 기초하고 있지는 않으며 누구나 마음대로 가입할 수 있다. 일본인은 국가지향적이라기 보다는 집단지향적인 문화를 가지로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스펙트럼의 중간지대에서, 강력한 서양에서 중시하는 개인의 선택과 창의성이 들어설 자리가 동양에는 없다.

관계의 도덕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유태, 기독교적인 서양의 문명에서는 개인이 양식(Conscience)에 충실하려고 하였으나 반면에 유교문화권에는 개인의 성실 혹은 충심을 찾으려고 항상 노력한 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의무, 충성, 관계에 얽혀지는 것이 개인의 양식과 자율성이 자아완성보다도 더욱 강조되어진다.

개인이 인간관계와 집단에서 그 정체성을 갖는다는 점을 유교가 강조하는 데에 비하여 서양은 자신의 힘으로 우뚝 서 있는 개인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서구에서 종교개혁은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실천하여서 결국에는 기존의 사회적인 관계를 전복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개인적인 열망에서 신과 영적인 교류를 하고, 양식의 순수성을 찾고, 이윤을 추구하고, 창의성을 가지고, 자아완성을 하려고 하는 존재가 개인이다.

일본과 중국은 유교사회로서 여러 가지 문화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중국 유교의 정수는 가족주의이다. 유교는 도덕교육을 통해 그리고 어떤 사회적 유대보다도  가족의 중요성을 높이 받듦으로써 가족적 연대를 지나칠 정도로 고취시킨다. 이런점에서 중국의 가족은 일본의 가족보다 훨씬 견고하고 응집력이 있다. 그러나 사회집단의 분포와 관련하여 볼 때 일본문화와 중국문화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산업구조는 한나라 문화에 대해 많은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가족적 연대는 매우 튼튼하지만 친족관계가 없는 사람들 간의 신뢰에 바탕을 둔 연대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사회에서는 가족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중소기업이 우위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반대로 학교, 병원, 교회, 자선단체 같은 비영리 민간단체가 활성화되어 있는 나라에서도 역시 가족 단위를 넘어서서 강력한 민간 경제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다.

가족이라는 모형이 생활의 전반에 걸쳐서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국가는 대가족이라고 전통적으로 여겨졌다. 가족이 그 구성원에게 생의 의미와 구원을 가져다준다. 즉, 개인이 자아에 대하여 가지는 의미는 대단할 정도로 가족에 의하여 정의된다.

우리는 고무줄 같이 즐었다 줄었다 하는 신축성이 좋아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가장 추상적인 말이다. 일상에서 나를 중심으로 너와 제3자인 그 그리고 그녀를 몽땅 포괄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지나친 차별의식도 결국 이 우리와 우리가 아닌 남을 가르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라는 낱말은 원래 울타리를 의미하는 울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가 우리(한국인)을 가둔 돼지우리가 되어 버렸다고 지적하고 싶다.

지금도 유교사상이, 공자가 한국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유교 비판, 공자 사상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어 왔고 특히 근대에 와서 중국의 근대화를 막는 병적 근원으로 지적되어 1970년대 말만해도 유교의 맥이 끊겨 사라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유교 비판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유교의 사상, 이념 그리고  주자학이 핵심인 윤리에 입각한 상하관계, 남존여비적 경향이 그대로 한국에 살아 숨쉬며 강력한 생명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별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자질구레한 생활 습관에 이르기까지 유교의 흔적이 없는 것이라고는 찾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이 같은 유교의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과연 한국이 얼마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사회일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서구에서 개인은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능력을 가진 것으로 상정된다. 이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에서의 유교적 전통은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개인의 관계를 생각할 수 없다. 즉, 전통적으로 유교가 가장 중요시하는 공동체는 가족인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그것은 현대 사회의 종교이며, 우리가 곁눈질하여 서양 사회를 볼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이다. 푸코는 이와 같은 개인주의가 바로 병의 징후라고 질타하고 있다.

이러한 서양의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동양의 공동체주의를 내세우고 싶을 것입니다.

현대인이 철저하게 개인화 될수록 사회는 더욱더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해 전체주의적으로 지배받는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역설이다. 병적인 관계를 말해 주는 역설이다. 만약 어떤 사회가 마치 개인의 (외면적)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개인의 (진정한)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관계를 발전시킨다면, 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병적인 관계입니다. 관계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관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개인의 운명, 그것은 아마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병일 것이다.

2.3.3.2.  보편과 특수의 문제

보편적인 것이란 역사의 모든 개별적인 것들에서 그때마다 인식될 수 있는 가장 높은 개별성을 뜻하는 것이다.

 홍익인간의 이념이 조선조를 통해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조선조는 고사하고 심지어는 한말에 민족주의 사학을 연 신채호나 박은식 같은 학자들에게조차도 홍익인간이라는 고유적 이념은 주목되지 못하였다. 조선조를 통해서 홍익인간이 거론되지 않았던 것은 민족적 고유성을 비하시켰던 사대모화사상이 지식계를 지배한데다 단군의 건국과정에 대한 인식이 유교적 관점에 입각해서 조정되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단재 신채호나 박은식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국학 운동가들은 민족단위로 경쟁하는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자기를 충분히 지키고 생존해 갈 수 있는 강력한 민족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같은 과제와 관련하여 그들은 민족성원들을 사대모화사상 같은 왜소한 자아상으로부터 탈피시켜야 했고, 아울러 왕조의 신민으로서의 소극적~피동적 정치의식으로부터도 벗어나게 해야 했다. 그러한 요청에 부응하여 정립된 것이 바로 단군의 자손 배달 겨레로의 민족 정체의식이다. 그 같은 근대적 민족의식이 대중화하면서 한민족은 ‘전근대 민족’으로부터 ‘근대민족’으로 진화 발전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는 후에 기독교에 의해 미신으로 취급되어 단군상이 수난을 당하는 현상과 밀접하다.

이제 우리의 보편은 특수가 되었고, 우리의 보편은 이미 서구의 보편이다. 근대화는 서구화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문제를 제기한다. 아니 이미 서구화는 너무도 완벽히 보편이 되어서 이러한 질문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는 우리의 국시가 되었으며, 서구의 산업화는 이제 정보화․세계화라는 화두로 보편을 강요하며 국제 체제는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라는 무서운 이데올로기로 우리의 목을 옭죄이고 있다. 19세기의 문제는 이미 20세기에 연속되며, 21세기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시간과 상황은 변했지만 서구에 의해 주도되는 그리고 그에 놀아나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우리는 지난 우리 선조가 갖는 문제를 여전히 갖게 된다. 이제 새로운 신제국주의는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근대성의 문제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역사에서 그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제 모든 지상의 국가들은 하나의 체제로 급속하게 통합되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사는 매우 가까운 이웃으로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세계화 현상’이 아무리 급박하게 진전된다고 할지라도 각기 다른 언어와 생활 습관을 가진 각 지역의 사람들의 일상적인 ‘자기인식’은 여전히 각기 다른 그들 나름대로의 전통적인 문화의식, 가치관념, 언어, 습관 등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세계화’의 원동력이 결국 ‘근대화’의 급진적인 발전 과정에서 나온 것이요, 바로 근대화나 세계화의 문화적 배경이 서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와 문화적 전통을 달리하는 우리의 세계화는 결국 지금보다도 더 많은 개방을 요구 당하는 강조 높은 위험과 도전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세계화의 거센 물결 앞에서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을 더욱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특수한 문화는 서양인에게도 의미 있는 보편을 발전시키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특수는 서양의 자본주의와 기술 문명에 대처하려는 보수주의의 구실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복고 주의자들의 전현대주의, 토착 특권주의자들의 반현대주의 그리고 반동주의자들의 탈현대주의를 구별하고자 한다.

한국인 자신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국제적으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국제 식품이 되리라는 법은 없다. 김치가 국제식품이라고 자찬하는 것은 일종의 과잉 내셔널리즘의 발로이다. 한국인들은 김치의 우수성에 대해서만 떠들어대며 거기에서 발생하는 악취에 대해서는 체감을 못하고 있다. 김칫독 문화에 대한 국수주의에 빠져 그 맛과 악취에 너무 익숙해지고 푹 절어 버린 꼴이다.

로티의 ‘자민족 중심주의’라는 표현이 잘 시사하듯, 누구나 어떤 특수한 문화를 배경으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문화를 이해하고 자기 문화와 비교해서 다른 문화의 상대적 가치를 평가하기도 힘들다. 그러면 다양성 안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 참된 세계인도 못된다. 참된 세계화는 무비판적인 동질화나 범용의 희생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동양인 특히 한국인들은 이제 아편전쟁의 후휴증인 노예근성을 개끗하게 청산하고, 자기들의 전통적 문화의 가치를 총괄적으로 현대 세계의 상황 안에서 재조명하고 재활력화하여야 한다. 그래서 지금 유교를 생각한다.

2.3.3.3.  전통과 근대성의 변증법

문화적 근대화는 합리주의의 실현이다. 고대나 중세에는 전통, 인습, 미신, 주술 등을 통해 사람을 비합리적으로 구속했다. 문화적 근대화는 고대나 중세의 비합리적인 구속을 벗어 던지며 사상과 종교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문화변동을 말한다. 유교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또한 현실 세계를 지향한다. 그럼에도 서구의 근대적인 합리주의에 계몽되는 입장에 처하고 말았다. 또한 우리의 전통 종교는 유교에 의해 힘을 잃고 마침내 서구의 기독교에 생명의 힘을 다하고 있다. 전통과 근대는 여전히 우리의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에 대안적인 가치는 없는가? 또한 그리고 그 가치란 무엇인가? 그 가치는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리고 진정 우리의 종교와 그 가치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무속은 우리 문화의 본질’이라고 하지만, 수다한 교과서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어느덧 우리는 엄숙한 권위주의적 유교 문화, 혹은 지극히 정교한 종교이론 체제로서의 불교 문화와 기독교 문화에 접수 당한 탓이다.

 샤머니즘은 무엇보다도 서구 모더니즘의 최대의 희생자이다. 서구 철학사 및 문화사에 용인되는 유일한 만능의 황금자로 가늠되지 않는 것은 일탈자(逸脫者)요, 이단 내지 이상이며 변태요 심지어 야만이라고 간주하려 든 그 시선이 샤머니즘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이러한 우리 것에 대한 담론은 이제 우리의 전통인 조화를 추구하는 문화의  힘으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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