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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교와 페미니즘의 만남

맑은샘77 2007. 10. 3. 00:11

유교와 페미니즘의 만남

 

 

일시 : 1999. 11. 27.

장소 : 성균관대

 

1999/ 11/ 25 경향신문 23면

 

"유교와 페미니즘 양립할 수 있나" (박성휴 기자)

 

물과 기름같은 사이로 비쳐지는 유학자와 여성학자가 한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토론을 벌인다. 한국유교학회는 27일 오후1시 서울 성균관대 종합강의동에서 「유교와 페미니즘의 만남」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이 대회는 올해초 「공자논쟁」 이후 여성학계로부터의 비판이 더욱 거세지자 변화를 모색하는 유학계가 진보적 페미니스트를 초청함으로써 이뤄졌다. 토론은 페미니즘의 일부를 점진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주최측과 보다 근본적인 유교의 각성을 촉구하는 여성학계의 대립양상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유학계측의안병주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미리 제출한 기조발제문에서 "유교의 역사는 이론보완의 역사"라며 "유교 속에 남녀평등의 가치를 가미하면 유교의 진리는 영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가부장제는 페미니즘의 수용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변용돼야 한다"면서도 "남녀평등을 위해 가부장제에서 중시되던 효의 윤리까지 비판하는 급진적인 방법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은선 세종대 교수도 "초기 페미니즘처럼 유교와 완전히 단절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우리는 서구인이 아닌 아시아인으로서 성의 정체성뿐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부장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유교에서 신체 차이에 따른 성역할의 고정화를 떼낸다면 질서·위계의식 등 페미니즘이 수용할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이숙인 국민대 강사는 "유교에서 일반 여성이 처한 상황과는 달리 어머니의 권위가 인정되었던 것은 많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결과"라고 밝혔다.
    반면 토론자로 나선 여성학자들은 이같은 「친유교적 견해」를 매몰차게 비판하고 있다.
    고갑희 한신대· 허라금 이화여대· 이주향 수원대 교수는 "전통적인 유학자와 동양철학을 전공한 여성전문가들이 일부 전향적인 자세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교계는 여성차별적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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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1999.12.25

 

강남순/철학박사.감리교신학대학 겸임교수

 

"유교와 페미니즘 그 불가능한 만남에 대하여" 
 
   한국유교학회 주최로 열린 ‘유교와 페미니즘의 첫 만남’이라는 학술대회 기사를 여성신문에서 보고서, 나는 이 글에서 유교와 페미니즘을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지닌 위험성과 허구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평등과 해방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의 이념은 ‘서구적’인 것도 ‘한국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여성의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평등을 추구하는 페미니즘 사상은 결코 어느 지역이나 문화에 제한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조선시대 이후 우리 한국의 역사에서 성차별과 적서차별, 신분차별 등 다양한 종류의 인간 차별주의의 사회/정치적 구조를 확고히 한 유교가, 또한 신분을 초월하여 남성과 여성이 평등공동체를 구가한 역사적 자취가 전혀 없는 유교의 역사에서 어떻게 유교가 페미니즘과 접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어느 특정한 종교나 사상으로부터 페미니즘의 원리를 찾으려 한다면, 은밀한 차별구조를 은폐시키는 메타담론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역사적 실체로서 그 사상이 여성과 남성의 평등과 자유를 구가하는 데에 역사에서 어떠한 기여를 해 왔으며, 또한 앞으로 어떠한 구체적 기여를 할 수 있는 가를 보아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구체적 삶의 정황을 조명해보는 ‘프락시스에의 성찰’(reflection on praxis)이 결여된 사상적 접목은 ‘반 진리’(half truth)를 내포함으로서 노골적 성차별주의 사상보다 더욱 위험하다. 구체적인 역사/사회/문화/정치적 정황에 대한 조명없이 이루어지는 사상적 접목은 얼마나 우리에게 왜곡된 환상과 혼돈을 주는가.

   개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는 현대 페미니즘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이해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서구에서 먼저 인식되었다는 점은 부인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단지 서구에서 나왔다고 하여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외면해야 한다면, 그것은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여성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가치조차 부정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는 그 다음 단계로, 타자를 자신과 동일한 권리와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고 같이 연대하는 새로운 평등적 관계성으로 나아가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개체성만의 지나친 강조는, 부정적 의미의 개인주의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의 인간관계성에 대한 강조는 표면적으로는 서구문화로 표방되는 현대사회의 고도의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사고로 보일 수 있고, 실제로 많은 학자들이-특히 한국 남성학자들이나, 유교의 구체적 실천의 삶을 경험해 보지 않은 서양학자들이- 그러한 서구사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사상으로 유교를 조명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여성의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적 가치의 실천에 관심있는 페미니스트라면, 유교적 관계주의는 그 근원적 이해에서 남성/여성, 적자/서자, 남편/아내, 딸/아들, 양반/상민, 장유등의 위계적이며 남성중심적 관계성을 기초로 하는 것이며, 인간을 개체적 존재로 보는 인식이 근원적으로 결여되어 있어서 사실상 모든 인간 간의 ‘평등적 관계주의’라는 대안적 원리를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갈파하게 된다. 페미니즘은 추상적 논의만을 하는 메타담론이 아니라, 여성의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구체적 변혁을 추구하는 이론이며 운동이라고 이해할 때, 유교의 페미니즘적 수용이란 오히려 지금 한국 사회에 야기되고 있는 다양하고 철저한 성차별의 의식/가치/제도들의 이념적 기제가 유교라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페미니즘 사상의 확산과 발전에 오히려 역행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왜 우리가 유교로부터 페미니즘적 원리를 찾아야 하는가? 이렇게 찾아진 유교적 페미니즘의 원리는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또한 어떻게 남녀평등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가? 더구나 그 근원을 따지자면, 유교가 한국 고유의 ‘한국적’인 사상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사상/종교에서 어떠한 원리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성차별 극복의 역사적 자취를 지니고 있으며, 남녀평등사상의 변혁적 원리가 발휘되었던 역사적 사실이 실제로 있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유교가 한국 역사에서 여성을 위한 해방적/변혁적 원리가 된 적도 없고, 현재도 되지 않고 있다면, 오히려 다양하고 철저한 성차별의 윤리와 가치 그리고 제도를 고착화하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면, 한국의 페미니즘이 유교와의 접목을 위하여 에너지를 써야 할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오히려 소위 ‘한국적’ 페미니즘의 발전은 한국 역사에서 여성해방의 가장 노골적인 장애기제가 된 유교의 성차별성, 가부장제성을 철저히 해체하고, ‘지금-여기’의 한국에서 여성들이 성차별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실천하고 추구해야 할 과제를 이론화하는 것-이것이 진정한 ‘한국적’ 페미니즘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가장 ‘한국적’인 페미니즘은, 한국고유의 양태든지 인류 보편적 양태든지 간에, 다양하게 경험되는 성차별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화 작업과 그에 상응하는 실천적 운동과의 연관을 통하여 제대로 꽃피울수 있을 것이다.

   ‘한국/서구’라는 지리적/문화적 구분에 의한 사상/종교의 수용이 페미니즘의 이론적 타당성과 정당성을 저절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불필요한 혼돈과 학문적 아집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이 이론의 상품화나 또는 이론을 위한 이론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사는 여성들의 진정한
   해방과 평등을 위한 변혁의 원리를 제공하기 위한 담론화라면 더더욱 이러한 포괄적 인식이 요청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에너지를 올바른 것에, 적절한 것에 투여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바람직한 정치화를 위한 중요한 전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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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2000.1.14

 

이은선/세종대 교수(교육철학.여성신학)


"다시 만나야 하는 유교와 페미니즘"

 

   유교와 페미니즘의 만남을 시도했다는 데서 주목을 끈 한국유교학회 추계 학술대회 기사와 관련해 학자들 간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556호에 실린 강남순 감리교 신학대 겸임교수의 회의적 반응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이은선 세종대 교수의 글을 이번 호에 싣는다. 학술대회에서 이 교수는 ‘유교와 페미니즘, 그 관계맺음의 해석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두 독자의 진지한 관심에 지면을 빌어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 주'

 

   강남순 교수는 유교와 페미니즘의 만남의 시도가 허구적이고 오늘의 한국 남성과 여성의 현실을 무시한 이론만을 위한 시도라고 주장하였다. 본인이 기반하는 논지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그 첫 논지는 강 교수의 논지 역시 자신 이론의 기초적인 근거로 삼고 있는 ‘개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본인이 여기서 문제삼고자 했던 것은 그 개체성의 원리라는 것도 결코 메타 담론이 될 수 없고, 삶이 점점 더 관계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개체성의 원리도 수정,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도 이제 간과할 수 없고, 또한 해서도 안되는 페미니즘 논의에 있어서의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요소에 대한 변화된 인식이다. 오늘의 세계는 점점 더 좁아져서 각국의 여성들은 좀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세계 페미니스트들의 만남의 자리에 가면 본인은 물론 한 여성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 이전에 먼저 ‘한국인, 또는 아시아인’으로 인식되는 경험을 많이 하였으며, 특히 서구 여성들과의 만남에서는 그 경험은 거의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 인식이 본인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의 문화 전통들, 특히 유교전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도록 하였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주지하다시피 페미니즘이 그 핵심가치로 삼고 있는 것은 주체성의 원리이다. 그러나 사실 그 주체성의 확립이란 구별의식에서 생기는 것이다. 나와 타자를 구별할 줄 알고, 정신과 몸을 구별하며, 개인과 사회,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등을 나누어서 생각할 때 그 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禮)의 강조를 통해 구별의식을 확고히 한 유교전통은 그 구별의식이 비록 신분이나 성의 차별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아의식을 형성하는데 어느 다른 전통보다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유교 전통은 강 교수가 주장하듯이 그렇게 우리의 근대적 개체의식 형성에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교나 도교 등의 다른 전통들보다도 뚜렷한 역할을 했으며, 더군다나 거기서 길러진 개체의식이란 끊임없이 자신과 타자를 관계 맺으려는 사회적인 노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보면, 오늘날 페미니즘을 포함하여 서구 계몽주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주체성 원리의 개체주의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씨앗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씨앗을 오늘의 성평등적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보완하고 재해석하는 것이 관건인데, 이것은 더 이상 신체적 조건으로서의 실체화된 성이 아니라 ‘체험’으로서의 성을 말하는 일에 근거하며,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도 유교와 페미니즘은 더욱 만나야 한다.

   또한 유교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이자 위 글 역시 핵심적으로 지적하는 유교 관계주의의 위계적이고 가부장주의적인 실행에 대해서도 본인은 그렇게 오늘의 잣대로만 평가해 버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실행으로 말하면 서구의 기독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기독교의 가부장주의는 너무도 분명하게 최고의 존재를 남성적 하느님(하느님 아버지)으로 규정하여 왔고, 그의 그리스도론, 더 근원적으로는 성서의 수많은 기록들, 고대나 중세에서의 여성억압, 수백만을 헤아리는 마녀사냥, 노예제도, 식민지 제국주의 등 모든 것들이 실행될 때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으며 실행되어 왔던 것이다.

   서구의 여성들은 이러한 역사상의 가부장주의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전통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다시 해석해내고 있다. 거기에 감추어진 성평등적인 요소들을 찾아내고, 그래서 새롭게 이해된 전통 이해를 가지고 사회를 변혁시키며 삶을 개선시키고자 활발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일까? 우리도 오늘날 우리 모습을 형성하는데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유교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내고, 거기서 지금까지 남성들이 보지 못했고 왜곡했던 삶의 모형적 진실들을 찾아내어서 우리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다.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한없이 제한되었고 억압되어 있었지만 유교 전통의 시기는 그 이전 시기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의식있는 도덕적 주체로서 살았으며, 그래서 거기로부터 나름대로의 문화를 이루어왔다면 우리가 그것을 송두리째 폐기할 것이 아니라 그 역사성을 찾아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일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도움이 오직 서구로부터만 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삶의 문제들이 모두 지금 여기서의 현재의 시각으로만 파악되고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교조적 과학주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페미니즘과 유교간의 대화의 문제는 단순히 페미니즘 차원의 논의만이 아니라 더 심층적으로 종교와 세계관의 문제가 된다. 또한 과학과는 달리 종교적인 시각이란 보다 장기간의 시간과정에 대한 의미 파악을 주된 특징으로 삼고 있는 것이기에 이러한 종교적 시각을 가지고 페미니즘 논의를 행하는 것도 우리 시대에 다시 새롭게 요청되는 일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그 주관적 인식의 모습을 넘어서 결국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이 더불어 사는 삶에는 딸과 아들이 동시에 있고, 여성적인 덕목과 남성적인 덕목이 동시에 필요하며, 서구와 더불어 아시아와 한국도 있기 때문이다. 관계의 도를 핵심으로 가르치는 유교경전들을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면서 오늘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대안적 공동체의 모습을 일구어 내는 일, 남을 배려하고 삼갈 줄 아는 도덕적인 전통을 중시하지만 그러나 그 혈연중심과 남성중심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여 모든 타자와 자연에게까지 배려가 미치도록 하는 일, 지적인 앎과 몸으로의 수행을 하나로 만들려는 전통에 주시하여 오늘날 우리의 몸을 통한 대화도 윤리적 행위가 되도록 의식화하는 일 등이 모두 이 유교와 페미니즘의 대화에서 나올 수 있는 열매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적극적으로 만나야 하고, 이 일이야말로 유교전통의 한국 여성들이 오늘날 어느 일보다도 더 중요하게 행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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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유교와 페미니즘의 만남(II) : 페미니즘으로 읽는 유교

일시 : 2000. 12. 9.

장소 : 성균관대

 

여성신문 2000.12.22

최이 부자 기자 bjchoi@womennews.co.kr

 

"유교와 페미니즘이 왜 만나야 하지?" 
 
   ‘유교’와 ‘페미니즘’의 만남, 그 두 번째 시도도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아니 오히려 서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 자리였다.

   지난 9일 성균관대학교에서 한국유교학회가 주최한 심포지엄 ‘유교와 페미니즘의 만남Ⅱ: 페미니즘으로 읽는 유교’는 여전히 ‘왜’ 유교가 페미니즘과 만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혀내지 못했다. 우선 페미니즘이 이해하는 현실적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와 유교학자가 이야기하는 원론적 의미로서의 유교는 차원이 달랐고, 유교학자들이 이해하는 페미니즘 역시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첫 발제자로 나온 이은선 세종대 교수는 “세계의 모든 정황은 페미니즘을 포함하여 서구 계몽주의 자식들이 그렇게 내세우는 ‘개체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도 이제 그 수정과 보완이 필요하게 되었”고 “페미니즘 논의 안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수용되어야” 하며 “(서양여성들도) 성억압적이었던 기독교 전통과 다시 대화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이유를 유교와 페미니즘의 만남의 당위성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수신(修身)’을 기초로 삼고 있는 양명학과 페미니즘의 접목을 시도한다.

   이 교수는 결론으로 대신한 ‘유교적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적 유교’를 위한 실천적 제언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확고히 하는 일 ▲몸과학, 사이보그 등의 가능성을 여성들의 해방과 조화로운 양성평등을 위해 현명하게 이용하려는 노력 ▲혈연으로서의 가족도 넘어서 인간적인 선택과 사랑과 기회에 의해서 구성되는 가족을 더욱 활성화하는 것 ▲구체적인 수행과 반복적인 실천을 통한 공동체성을 지닌 ‘예(禮)’를 형식화할 것 등을 주장했다.

   한편 최영진 성균관대 교수는 “페미니즘 진영에서 비난하는 유교는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재해석되고 왜곡된 유교”라면서 “유교에 있어서 타자는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사랑하고 배려해야 할 목적성을 갖고 있으며 자아와 일체가 되는 존재로 인식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교의 타자관을 남녀관계에 대입시킨다면 “남성에게 있어서의 여성, 그리고 여성에게 있어서의 남성은 모든 계산성을 넘어서서 사랑하고 배려해야 할 대상이며 존재성의 근거가 된다”면서 유교와 페미니즘의 결합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유교는 여전히 위계적 질서와 남성중심적 가치관의 사상적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개체로서의 인간보다는 가족과 공동체, 나아가 국가를 우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얼마 전 유림 세력에 의해 여성예술가의 전시회가 무산되었던 사건을 예로 들지 않아도 유교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그렇다. 이론이 아무리 훌륭해도 현실과 유리되었을 때는 공허하기 마련이다.

   유교가 진정으로 페미니즘과의 접목을 시도한다면 학제간 연구에 그칠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혹은 왜곡된 유교를 체화하고 성차별적 행위를 자행하는 세력에 대한 ‘안티’ 세력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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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12월13일18시21분

한겨레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유교-페미니즘 상생 가능할까?"

 

페미니즘과 화해해야 유교가 산다?

 

   학계에서 동아시아론의 화두로 떠오른 유교는 여성주의(페미니즘) 진영과는 여전히 앙숙이다. 동아시아적 가치의 새 조명을 통해 유교와 자본주의, 심지어 시민사상과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까지 진행되는 마당이지만 페미니즘과의 연계는 여전히 대다수 연구자들에게 금단의 구역처럼 남아있다. 아시아여성들을 억압과 차별의 길로 내몰았던 가부장주의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단체의 종묘공원 퍼포먼스가 유림들과 충돌끝에 무산된 최근의 해프닝은 골깊은 이들의 대립을 방증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현대유교의 생존과 생산적 담론으로서의 페미니즘 정착을 위해 접합의 길을 찾자는 주장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지난해 최초로 유교-페미니즘의 학문적 만남을 주선했던 한국유교학회가 최근 이 문제를 놓고 다시 토론마당을 마련했다. 지난 9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유교와 페미니즘의 만남2:페미니즘으로 읽는 유교'는 1회 때보다 좀더 심화된 탐색을 내보였다. 특히 지난해 유교-페미니즘의 화해 불가피론으로 주류 여성학자들과 격론을 벌였던 이은선 세종대 교수의 논문이 눈길을 끌었다. `유교적 몸의 수행과 페미니즘'이란 발표문에서 그는 페미니즘이 몸이 존재의 근원임을 보여주었다면 한단계 나아가 몸수행을 중시한 유교전통의 다양성을 흡수해 주체적인 몸의 기획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몸담론으로 성과 쾌락을 더욱 자유롭게 즐기게 됐으나 몸의 언어가 비인간화의 위험에 노출된 만큼 미완성의 실체인 몸을 계속 가꾸는 기제로서 유교의 수신론(修身論)을 활용하자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의례를 주목하고 몸이 단순 쾌락의 육체자본화되는 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감정과 하나되는 예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특히 몸을 세계와 관계하는 적극적 주체로 본 양명학의 몸수행론을 바탕으로 그는 △국가주권보다 우선하는 권리로서 몸에 대한 권리보장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유교예식 개혁 △구체적으로 몸의 수행을 실천하는 대안적 수행방법론 등을 예시했다.

   중문학 연구자 김종미(정신문화연구원)씨는 `양강(陽强)과 음유(陰柔)의 변주'란 논문에서 <주역>과 고전문학작품에 나타난 음양이론을 통해 유교적 페미니즘의 논의를 풀어냈다. 그는 “주역에서 남성과 여성은 무수히 많은 양적인 속성과 무수히 많은 음적인 속성이 다양한 층위의 운동원리에 의해 얽혀있는 존재”라며 “양을 존대하고 음을 억제하는 일원론적 왜곡 때문에 역사적 차별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김씨는 이어 `양이 절정에 달하면 음을 위해 물러난다'는 중국 사상가 왕충의 말을 인용해 남성성, 여성성이 감응하며 상생하는 전통 음양가치의 회복을 통해 페미니즘과 손잡을 수 있다고 전망한다.

   한편 최영진 성균관대 교수(한국철학)는 `유교적 페미니즘:그 이론적 가능성의 모색'을 통해 “유교적 페미니즘은 기존 유교가 가부장적 권위주의라는 억압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임을 인정하고 반페미니즘적 요소를 제거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광석 제련작업에 비유하며 인, 왕도의 사상을 견지한 맹자적 관점을 추출해내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유교 음양론의 실제 본질은 타자를 존재를 위한 필수적 존재로서 보는 대대적(對待的) 관계지움에 있는만큼 유교의 평등조화, 상호조응의 원리를 페미니즘 기반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발표문들은 도외시됐던 유가사상의 평등주의적 근본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했지만 형이상학적인 문제제기에 그친 감이 없지 않았다. 현실에 존재하는 가부장적 관행들과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숙제는 여전히 풀지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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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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