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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Re:한국사회문화의 성격3

맑은샘77 2007. 10. 3. 00:07

.2.1.  권력거리(평등문화와 불평등문화)

권력거리란 한 나라의 제도나 조직의 힘없는 구성원들이 권력의 불평등한 분포를 기대하고 수용하는 정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지위와 학력수준이 가장 낮은 직종(비숙련 내지 반숙련 근로자)이 가장 높은 PDI(권력거리지수) 점수를 보였으며, 지위와 학력수준이 가장 높은 직종(엔지니어나 과학자 같은 전문인력의 관리자)이 가장 낮은 PDI 점수를 보였다.

PDI 점수가 높은 나라에서는 직종간 차이가 비교적 적었다. 권력거리 점수가 큰 나라에서는 지위의 고저와 관계없이 모든 직원들이 높은 권력거리 점수를 보인다.

1972년 이래 국가의 권력거리가 낮아지는 쪽으로 여러 국가점수가 수렴되었다든지 혹은 권력거리의 국가간 차이가 작아졌다는 증거를 제시한 연구자는 한 사람도 없다. 오랜 역사적 뿌리를 지닌 국가간 격차는 앞으로도 오랜 세월동안, 적어도 수세기 동안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소위 문화융합이라는 과정 덕택으로 권력과 의존, 독립, 그리고 상호의존에 관한 정신 프로그램의 전세계적 동질화가 혹 일어난다 해도, 그 시기는 아직도 요원하게 보인다.

이러한 홉스테드의 지적은 우리 사회 문화의 현주소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우리사회는 권력거리가 크며 또한 권력을 추구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성향은 우리 생활의 양태가 권위주의, 즉 업적지향이기 보다 지위향상중심의 권력추구형 사회라는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근대사회에서의 제도를 생각하는 방식에서 신분사회를 타파하고 개념 실재론(實在論)을 유명론(唯名論)으로 전환시켜, 모든 조그마(dogma)를 실험이라는체로 쳐 내어, 정치․경제․문화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선천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권위에 대해 현실적인 기능과 효용을 묻는 근대 정신의 다이내믹스는 바로 ‘이다’ 논리․‘이다’ 가치에서 ‘하다’ 논리․‘하다’가치로의 상대적인 중점의 이동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다’는 정태적이며 신분계급적인(혈족관계라든가 인종단체라든가) 상태(state)로 전근대적이고 비근대적인이다. 유교도덕이 전형적인 ‘이다’모럴이며, 유교를 낳은 사회, 그리고 유교적인 도덕이 인간관계의 요체로 생각되고 있는 사회가 전형적인 ‘이다’사회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고 어느 핏줄이냐가 문제되는 신분적인 사회에서는, 노쇠한 피를 새 피로 바꿀 수 있는 신진대사가 이루어기 어렵다. 그러게 때문에 ‘이다’가 많은 정치의 영역에서는 ‘하다’의 논리로 무장된 경제에 비해 ‘하다’논리와 ‘하다’가치의 침투가 늦어지기 쉽다.

근대사회를 특징짓는 기능집단은 본래적으로 ‘하다’에 원리의 기초하고 있다. ‘하다’는 동태적이며 기능적이고 업적(work) 지향이다. 이는 근대적 사회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근대 일본의 다이내믹한 약진의 배경에는 확실히 그런 ‘하다’가치로의 전환이 작용하고 있다. 터부에 의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모든 부족사회-‘이다’사회의 전형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한국사회는 역시 ‘이다’사회가 ‘하다’사회를 억압하고 제어하는 공간이다.

한국인은 직분보다 신분이 중요하다. 자리만 차지하면 된다는 발상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학력․학벌․지연이 중요하며 심지어는 자리를 차지하려는 도서관과 버스 안에서의 자리 차지가 그러하다.

이런 권력추구는 양계초에 예리하게 비판되는데 이것이 100년전의 문제는 아닐것이다.

 “고관들도 오늘 권세만 있으면 내일은 망국이 되어도 조금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합병 후에는 이웃 나라 사람들까지도 통탄할 형편인데 조선의 현관(고관)들은 아첨을 일삼으며 매일 엽관(獵官) 운동에 여념이 없다. 민족 의사 안중근과 같은 사람은 천만인 중에 한둘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다. 조선 사회는 후안무치하고 음험하고 악랄한 자가 많으며 절조있고 자중자애하는 자가 적으므로, 망국은 결국 조선인 사회가 불러온 것이다.” 정경유착은 바로 이러한 정치 권력추구 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이며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이 잘 분리되지 않는 사회에서 생기게 마련이다.

2.2.2.  개인주의 문화와 집합주의 문화

스웨덴인에게 사업은 회사를 상대로 하는 것이다. 반면 사우디인에게 사업은 자기가 잘 아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라는 집단은 사회의 수많은 ‘그들’ 집단에 속해 있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 ‘우리’ 집단(또는 내집단)은 개인의 정체형성의 주된 근원이 되며, 인생의 역경에 대항해서 개인이 지닌 유일한 안전보호막이 되어준다. 

  개인주의(individualism) 란 개인간의 구속력이 느슨한 사회를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직속 가족을 돌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반대로 집합주의(collectivism)는 태어날때부터 줄곧 개인이 강하고 단결이 잘된 내집단에 통합되어 있으며, 평생동안 무조건 내집단에 충성하는 대가로 그 집단이 개인을 계속 보호해주는 그런 사회를 가리킨다.

  부유한 나라는 거의 모두가 높은 IDV(개인지향지수) 접수를 보이고 있는 반면, 가난한 나라는 거의 모두 낮은 IDV 점수를 보이고 있다. 한 국가의 부와 그 문화의 개인주의의 정도 사이에는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 권력거리가 크면 더 집합주의적이 되는 경향이 있고, 권력거리가 작으면 더 개인주의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집합주의 가족과 관련하여 조화 다음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개념은 수치감이다.  개인주의 사회는 죄책감의 문화로 표현이 된다. 사회의 규칙을 어긴 사람들은 종종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남모르는 내부의 보이지 않는 안내자의 기능을 하는 개인의 양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수치감은 본질상 사회적이며 죄책감은 개인적이다. 수치감을 느끼고 안 느끼고는 규칙위반 사실을 남이 알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죄책감에서는 그렇지 않다. 죄책감은 비행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건 모르건 관계없이 느낀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행동이나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해 자기가 점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일을 지키지 못했을 때 체면을 잃게 된다.(Ho, 1976, p.867).

  개인주의적 문화 출신의 교사가 집합주의적 환경으로 이동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교사가 털어놓는 불만은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교사가 학급에 질문을 던졌을 때조차 학생들이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단의 허락 없이 일어나서 말한다는 것은 이치에 안 맞는다고 생각한다. 학생이 입을 열게 하려면 교사는 한 학생을 직접 지목해서 물어야 한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집합주의 문화보다 개인주의 문화에서 훨씬 더 중요시한다. 집합주의 사회에서는 자기와 배경이 같은 내집단 구성원을 다른 사람보다 우대하지 않는 것이 비도덕적인 것이다. 가족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과 국가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간의 연계성에 관한 포괄적인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사회역사학자인 또드 (Emmanuel Todd) 이다.  또드는 한 나라의 정부가 채택한 이념체계를 그 나라에 역사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가족구조를 가지고 설명한다. 한 나라가 특정한 통치방식을 채택하는 진정한 이유는 그것이 국민과 그들 조상이 살아온 가족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는 국민의 사고방식에 부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나라의 정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가족구조를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매슬로우가 자기 이론을 설명해 놓은 주요 저서(Maslow, 1970)는 서양식 토대를 두고 있다. 서양적 의미의 ‘성격(personality)'에 해당하는 단어가 중국어에는 없음을 보여주었다. 서양에서의 성격이란 사회나 문화와는 엄격히 구별되는 별개의 실체이다. 수렵․채집부족은 핵가족이나 작은 무리를 지어 사는 경향이 있고, 정착해서 사는 농경사회는 대부분 복잡한 확대가족이나 마을공동체 내집단을 이루고 있다.

  생존 여부가 자신의 주도권에 더 의존하기 때문에 개인주의 문화를 지지하게 된다. 출산율이 높은 문화의 가정에서 개인주의 가치보다는 집합주의 가치가 자라게 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이덕무는 「사소절」이라는 책에서 경장(敬長), 즉 어른을 섬기는 태도와 관련하여 무려 열아홉 가지 조항 을 제시하고 있다. 서구에서도 중세의 아이들은 단지 작은 모습으로 축소된 어른으로 만 묘사되고 이해되었다.

17세기 이전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아이 혹은 어린이(영어:children, 프랑스어: gerçon)라는 관념은 의존이라는 관념과 결부되어 있었다. 또한 중세 서양에서 가족은 친척과 인척, 즉 결연 혈족으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였으며…, 중세의 가족은 더 큰 공동체에 대해 열려있는 공간이었으며, 동시에 동동체 또한 가족에 대해 개방되었다. 아이들에게 직업적 생활로서의 도제생활과 사적 생활은 구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그 가족은 더 이상 공동체와 연결된 대가족이 아니라 프라이버시(privacy)라는 높은 담벽으로 둘러싸인 채, ‘춥고 냉랭한 외부로부터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피난처“가 된 핵가족으로 바뀌게 되었다. 가족은 교육을 학교에 이전하고, 친교와 경제의 기능을 사회에 이관하고 대신에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사적 공간으로 변모했다.

한편 『근대가족의 형성』에서 쇼터는 “핵가족은 낭만적 사랑보다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동 복지의 개념이 처음으로 싹트기 시작하면서 가족애란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인의 자립은 사실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즉, 사적 개인이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 달리 말하자면 개별화된 개인이 스스로 자기 규제를 실시함으로써 사회 속으로 통합되는 것, 바로 여기에 근대의 공/사 분리 신화는 베일을 벗게 된다. 가족은 이웃과 친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대신에 근대의 규율 권력이 내면화되는 통로가 되었다. 권력은 중세처럼 힘을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을 억누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살피고 어루만져주기 위해서 가족의 은밀한 일상 생활 속으로 침투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권력의 강제를 더 이상 강제로 느끼지 않게 되고, 그것을 내면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개인 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중시한다. 부르디에 의하면, 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소규모 공동체적 사회에서 사람들은 겉으로는 공동체를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공동체 주의의 위선을 지적한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근대국가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일 윤리는 공사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을 공정하게 원칙에 따라 처리한다는 전문가의 직업정신보다는, 남자의 바깥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인 선비정신을 십분 활용해 왔다.

개인의 부의 축적과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문화적 전통과 그로 인한 현실적 이기주의는 우리 사회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문화는 문민정부 이후에도 정부는 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반기업적 국민 정서를 업고 도덕적 명분을 내세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기업을 ‘길들이고자’해 왔다. 당연히 정경유착은 근절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기업인과 노동자․소비자에게 애국심만 요구할 때, 공동체에 헌신할 것만 요구할 때, 그래서 도덕적 명분을 내세워 경제 주체를 이기적이라고 매도할 때, 정경유착은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2.2.3.  남성적 문화와 여성적 문화 또는 불확실성 회피문화와 수용문화

남성상은 사회적 남녀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사회, 즉 남자는 자기 주장적이며 거칠고 물질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반면, 여자는 보다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삶의 질에 관심을 두는 사회에 해당한다. 여성상은 사회적 남녀역할이 중첩되는 사회, 즉 남성과 여성이 모두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삶의 질에 관심을 두는 사회에 해당한다.

여성적 문화에서는 중간쯤의 학생이 규범으로 간주되는 반면 미국과 같은 남성적 문화에서는 가장 우수한 학생이 규범으로 간주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교사와의 면접 결과, 남성적인 나라에서는 진로를 선택할 때 그 직업의 전망이 어떤지에 의해 강하게 영향받는 반면, 여성적이 나라에서는 전공분야에 대한 학생의 내면적인 흥미가 큰 몫을 함을 알 수 있었다.

남성적 문화에서는 교사의 경우는 두뇌의 우수성과 학문적인 명성이, 그리고 학생의 경우는 학업성적이 주된 평가기준이 된다. 여성적 문화에서는 교사들의 친절성과 사교성, 그리고 학생의 사회적 적응이 평가에 더 큰 몫을 한다.

여성적 사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모두 야심적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직업의 필요성에 관한 응답의 범위에서 남녀 차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불확실성에 대해 사회학자인 뒤르껭(Emile Durkheim)이 1897년에 자살현상에 관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뒤르꼥은 여러 나라와 지역의 자살률이 놀라울 정도로 해마다 일정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마저도 나라마다 다른,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어떤 사회적 힘의 영향하에 있는 증거라고 보았다.

불안수준이 높은 문화일수록 더욱 표현적인 문화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말할 때 대개 손동작을 함께 하는 경향이 있으며, 목소리를 높이거나 가정을 보이거나 테이블을 탕탕 치는 행동이 사회적으로 용납된다.

불활실성 회피 경향이 강한 나라에서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바쁘고 안절부절못하며 감정적이고 공격적이며 활동적이다. 반면 불확실성 회피 경향이 약한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조용하고 까다롭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절제되어 있고 게으르다는 인상을 준다.


2.3.  전통 문화와 근대성

2.3.1.  유교 비판

한국의 최대 비극은 유교에 있다. 한국인은 유교라는 불치병에 걸린 지 너무 오래여서 무감각해져 그 병폐를 잊은 듯하다라는 언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일본은 선진국이고 중국은 후진국이니 더러운 뙈놈과 닮았다고 하면 모욕이라도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인은 유독 옛부터 사대주의라는 외래문화 수용 메카니즘이 체질적으로 발달해 왔다. 서양에서는 공자가 유교를 세웠다고 하여 일명 공자교라고도 부르는데 바로 이 유교의 후진성․보수성이 중국의 근대화를 크게 저해했다고 보고 있다. 공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든가 ‘군신유의’의 덕목은 극도의 권력 숭배주의와 상하 서열 의식, 파괴할 수 없는 질서 의식 등 보수사상을 낳고 경쟁력 상실을 초래했으며, 결국에는 문화의 쇠퇴와 문명의 몰락을 가져왔다. 한마디로 말해 인간의 부패와 정치․사회의 부패 추락을 불러온 장본인이다. 중국이라는 문명대국에 예의를 지키고 물리적으로 굴종하면서도 뛰어난 유교를 갖고 있어 정신적으로는 이겼다는 일그러진 심성을 낳았던 것이다. 그만큼 유교가 조선 사회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2.3.2.  근대성으로서의 한국문화

2.3.2.1.  개인의 발견

13세기 말경 이탈리아에서는 개성들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개인주의를 향한 길이 이미 완전히 열렸다. 수많은 개별적인 얼굴들이 끝도 없이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단테의 위대한 문학은 다른 나라에서면, 나머지 유럽 국가들이 아직도 종족이라는 굴레 아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개인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통해서  고귀한 시인들이 자기 시대의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14세기 이탈리아는 아직 겸양과 아첨이라는 것을 거의 몰랐다. 누구나 거리낌없이 자기가 다른 사람과 실제로 다르고,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드러냈다.

맨 처음에 전제군주제가 전제군주와 용병대장의 개성을 발전 시켰다.

공화국 도시에서 사태는 또 다른 방식으로도 개인적 성격의 형성에 유리하였다. 통치하는 당파들이 자주 바뀔수록 개인은 통치술을 연습하고 누리는 데 더욱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피렌쩨 역사에서 정치가들과 국민 지도자들은 분명하게 개인적인 특성을 얻는다.

패배한 당파의 사람들은 자주 전제국가의 신하들과 비슷한 처지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맛본 자유나 통치, 어쩌면 그것을 되찾을 희망이 그들의 개인주의에 더 많은 생기를 주었다. 아뇰로 판돌피니의 <가정생활>이라는 저술은 완전히 완성된 개인 생활에 대한 최초의 프로그램이었다. 개인의 의무와 불확실하고 고마움을 모르는 공식적 생활을 날카롭게 나누는 방식은 진짜 그 시대의 기념비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가장 정신력이 풍부한 추방자 들에게서 발전되어 나온 세계시민주의는 개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였다.

충동이 당시 교양의 온갖 요소를 갖춘, 정말로 강력하고 다방면의 재능을 가진 본성과 어울려 최고의 개성을 만들어내면, 그것이 바로 ‘전인’이다. 단테는 살아있을 때 벌써 어떤 사람은 시인, 어떤 사람은 철학자, 또 다른 사람은 신학자라고 불렀던 인물인데, 그의 모든 저술에서는 사람을 제압하는 개성적 힘의 충일함이 흘러나온다.

모든 권리를 비웃고 건전한 교양은 무엇이든 싹부터 짓누르면서 가장 끔찍한 형태로 통제되지 않은 이기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이 극복되거나 어떻게 해서든 균형을 잡은 곳에서는 새로운 생명체가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개인주의는 ‘전쟁 기술’에서도 발견된다. 개별적인 전사(戰士)의 주관적인 교육은 한쌍 혹은 여러 쌍이 벌이는 화려한 싸움에서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였다. 그와 같은 것은 저 유명한 바를레타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진 관습이었다. 승리자는 북부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시인들과 인문주의자들에 의해서 찬양 받았다. 이런 싸움의 결말은 신의 심판으로 여겨지지 않고 개인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구경꾼들에게는 군대 혹은 국민의 명예를 만족시키는 것 말고도, 내기를 결정해 주는 일이었다.

중세에는 의식의 두 측면-곧 세상을 향한 것과 인간 자신의 내면을 향한 것-이 하나의 공통된 베일 아래 감싸여서 꿈꾸거나 아니면 절반쯤 깨어 있었다. 그 베일은 인간은 자신을 오직 종족, 민족, 당파, 분대, 가족 그 밖의 어떤 형태든지 보편성의 모습으로만 인식하였다. 바로 이탈리아에서 맨 먼저 이 베일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국가와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취급법이 드디어 깨어났다. 바로 그 옆에서 ‘주관성’도 완전한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인간은 정신적인 개인성(Individuum)이 되고 스스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 저기서 자기 자신에 근거한 개성의 발전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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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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