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문화의 성격
우리가 직면한 경제적 위기는 경제만의 위기가 아니라 그것과 관련을 맺고 있는 모든 것의 위기며,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합의와 관례에 의해 조성된 어떤 규범 즉 문법에 의해 연출되는 것으로, 지금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문화’ 라고 부른다. 위기의 문제는 경제 문제에서 출발하되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나는 것은 문화인 것이다. 이러한 문법은 ‘구조’ 라는 개념이 개입한다. 그것은 부분을 고립된 독자적 실체로 보는 대신 전체와의 상관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부분의 문제를 전체의 문제로 읽을 것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당면한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구조적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당연한 귀결이다. 이러한 위기는 우연히 그리고 돌발적으로 불거져 나온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 속에서 상당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진 하나의 지속적인 흐름과 맞물려 있다는 인식이다. 이 흐름이 곧 문화이며, 근대화이다. 모더니티는 문화라는 말과 퍽 유사한 처지에 놓인 개념이다. 문화는 경제발전에 공헌하는 수단적, 위계적 질서만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 그리고 미학적 문제들을 포함한 인생의 근본적인 의미들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혼돈·파국·좌절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야기된 것이고 어쩌면 근대화의 이념 혹은 전략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이런 인식이 정당하다면 오늘의 위기는 이미 그 안에서 예고된, 필연적인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근대화의 역동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한극 경제의 성공과 실패에 관련된다. 두 번째 이유는 한국 정치적 변화와 관련된다. 세 번째의 이유는 동아시아 문화의 독특성과 잠재력에 관련되는 것이다. 이러한 서구적 근대화의 힘에 의한 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사회구조의 변형과 함께 문화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프랑스의 문명 비평가 기 소르망은 다른 나라에 대한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가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설령 알려졌다고 하더라도 싸구려 이미지이기 때문에 현재의 경제위기가 초래되었다고 질타하였다. 이는 적절한 지적이다. 한국에 대한 문화의 이미지는 곧 신뢰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바로 문화의 믿음은 전체 국가와 사회에 대한 믿음에서 연유하며, 이는 총체적인 힘으로 표출된다. 그래서 김구선생은 문화력이 높은 날라를 꿈꾸었던 것이다. 문화력은 곧 국가의 가장 강력한 힘이며, 세계에서의 존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가리키는 ‘home laborans‘와 베버의 ‘Kulturmensch‘는 근본적으로 같은 의미가 된다. 노동은 의식을 가진 인간의 ‘힘’이다. 사람들은 모여서 노동하며 산다. 태초에 삶은 노동이었으며, 노동은 문화의 기반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마다 그 나름대로의 생활양식이 있기 때문에 고유의 문화를 갖는다. 사회에서 한 사람의 정신 프로그램은 그가 자라고 생활경험을 축적한 사회환경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신 프로그램을 습득한 사회적 환경이 다르면 정신 프로그램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한 정신의 소프트웨어를 흔희 문화(culture)라는 말로 부른다. 이 낱말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이런 뜻들은 토양을 경작한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부분의 구미권 언어에서는 ‘문화’란 대개 ‘문명(civilization)’ 또는 ‘정신의 세련화’를 뜻하며 특히 이러한 세련화의 결과로 생기는 교육, 예술, 문학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협의의 문화’이다. 그러나 정신의 소프트웨어로서의 문화는 사회인류학자들이 쓰는 광의의 문화개념과 같다. 사회인류학에서 ‘문화’란 온갖 형태의 생각, 느낌, 행동을 포괄하는 단어이다. 이러한 문화는 역사 속에서 사람에게 가장 폭넓은 자기 동일성의 틀을 제공하였다. 문명은 바로 인간 삶의 기초가 되며 총체적인 것이다. 문명은 문화에 기초하고 문화는 문명이외의 다름이 아니다. 이러한 문명은 첫째, 단일(singular) 문명과 복수(plural) 문명의 구분이다. 둘째, 문명은 독일을 제외하고는 문화적 실체로 파악된다. 우리는 흔히 문화를 정신사적 측면에서, 그리고 문명을 물질적인 외양에서 찾는데 이것은 19세기 독일의 사상가들을 기계, 공학, 물질적 요소와 결부되어 있는 문명(civilization)과 한 사회의 가치관, 이상, 지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예술적, 윤리적 특질과 결부되어 있는 문화(culture)를 엄격하게 구분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독일을 제외한 지역에는 독일처럼 ‘문화’를 그 저변의 ‘문명’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것은 기만적인 시도라고 지적한 브로델의 시작에 동조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문명과 문화는 모두 사람들의 총체적 생활 방식을 가르키고 있다. 문명은 크게 씌여진 문화다. 브로델에 따르면 문명은 하나의 공간, 하나의 문화지역 문화적 특성과 현상의 집약이다. 월러스틴이 정의하는 문명은 모종의 역사적 총체를 형성하면서 이런 현상의 이형(異形)들과 공존하는(반드시 동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세계관, 관습, 구조, 문화(물질 문화와 정신 문화 모두)의 특수한 연쇄다. 도슨이 이해하는 문명은 ‘특수한 민족의 업적인 문화적 창조성의 특수하고 독창적인 과정’의 산물인 반면, 뒤르켐과 모스에게 있어 문명은 ‘그 안에서 개별적 민족 문화는 전체의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다수의 민족들을 포괄하는 일종의 윤리적 환경’이다. 슈펭글러는 문명을 “문화의 피치 못할 ‘운명’이며, 발달한 인류의 종(種)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외현(外現)적이고 인위적인 상태이고, 하나의 결론, 과정물을 승계한 완성물이다.” 라고 파악했다. 문화는 문명의 정의에서 사실상 빠짐없이 등장하는 공통 주제다. 그런 점에서 인간 집단을 가르는 핵심적인 구분선은 가치관, 믿음, 제도, 사회 구조이지 몸집, 두상, 피부색이 아니다. 셋째, 문명은 포괄적이다. 문명은 가장 광범위한 문화적 실체다. 문명은 따라서 가장 상위 수준에 있는 사람들의 문화적 결집체이며 가장 광범위한 수준의 문화적 동질성이다. 또한 문명은 뚜렷한 경계선이 없으며 딱 부러지게 시발점과 종착점과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넷째, 문명은 유한하긴 하지만 아주 오래간다. 문명은 유지되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념적 격변의 와중에서도 살아 남는다. 문명은 유구하지만 한편으로는 진화한다. 문명은 역동적이다. 발흥하며, 쇠멸하고, 융합하고, 분열한다. 퀴글리는 문명이 혼합, 숙성, 팽창, 갈등, 보편 제국, 쇠퇴, 외침(畏鍼)의 일곱 단계를 거친다고 본다. 다섯째, 문명은 정체적 실체가 아니라 문화적 실체이므로 치안을 유지하거나 정의를 세우거나 세금을 거두거나 전쟁을 수행하거나 협상을 벌이거나 그 밖의 정부가 하는 일을 처리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주요 문명과 지금 세계의 주요 문명이 무엇인가에 학자들은 대체로 일치된 견해를 내놓고 있다. 문명권의 형성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힘이다. 힘은 결코 정치력이나 경제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명은 문화의 총체적 힘인 것이다. 이는 문명을 규정하는 핵심적 특성인 종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베버가 말한 5대 세계 종교는-크리스트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거대 문명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불교는 거대 종교이기는 하지만 거대 문명의 바탕이 되지는 못했다. 불교는 ‘조우(encounter)'라는 표현에 잘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토인비나 헌팅턴과 같은 학자나 서구의 일반적 인식에 한번도 고유한 문명권에 들어가지 못했다. 단지 중국의 문명권에 포함될 뿐이다. 문명권은 종교를 바탕으로 구획된다. 토인비는「역사연구」에서 종교의 진보가 역사의 진보를 가늠하게 하는 척도라고 규정한다. 역시 헌팅턴이 바라보는 장래 세계에서 경쟁과 대항의 주체도 ‘문명’ 이다. ‘야만’과 대비되는 보편적 의미의 ‘문명’ 이 아니라 언어, 종교 등 여러 가지 문화적 특질의 집합체로서 세계의 여러 지역에 자리 잡아 온 ‘문명권’ 들을 말하는 것이다. 문명권을 구분하는 1차 기준은 종교다. 문명권은 종교를 근간으로 하며 그는 문명권을 8~9개로 설정해 놓았다. 그러나 헌팅턴은 한국을 독립된 문명권을 형성하지 못한 중국의 문명권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문명권을 형성할 수 있는 종교나 지향하는 가치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전통종교란 무엇이며, 우리의 전통종교는 21세기의 대안적 종교인가? 이러한 역사문화를 통한 현재성과 일상성의 문화연구와 근대성의 문제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긴박하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연대성이 있다. |
'People >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Re:Re:한국사회문화의 성격3 (0) | 2007.10.03 |
---|---|
[스크랩] Re:한국사회문화의 성격2 (0) | 2007.10.03 |
[스크랩] 유가에 있어서 국가의 의미 (0) | 2007.10.03 |
[스크랩] 90년대 한국사회와 유교 - 유교적 가치의 재발견 (0) | 2007.10.03 |
[스크랩] 기독교와 유교의 상충과 대화의 모색 (0) | 2007.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