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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가에 있어서 국가의 의미

맑은샘77 2007. 10. 3. 00:02

유가에 있어서 국가의 의미

백 도 근(영 남 대)


목 차

Ⅰ. 서 론

Ⅱ. 국가와 유가

1. 국가의 유래

2. 유가의 유래

3. 국가와 유가

Ⅲ. 유가의 국가개념

Ⅳ. 결 론



Ⅰ. 서 론

중국유교사에서 국가가 무엇인가 하는 주제를 놓고 정면으로 다룬 학자가 없기 때문에 유가의 국가개념이 무엇인가를 다룬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다만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등에 국가의 기원에 관하여 창업자의 덕(德)과 하늘이 부여하는 천명(天命)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기사가 풍부하게 실려 있고, 다시 유가가 오랫동안 기울인 주된 관심 중의 하나가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통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는 점에 착안해서 살펴보게 되면, 그들의 국가개념이 무엇이었던가를 어느 정도 구명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한다. 가령 <대학(大學)>만 하더라도 경(經) 1장으로 부터 전(傳) 10장에 이르는 전과정이 온통 유가의 통치이념과, 치자(治者)가 되기 위한 덕(德), 그리고 이 덕에 이르는 수양(修養)의 절차 및 방법에 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유가가 생각하는 국가의 개념과 밀접히 관련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구(舊) 중국사회에 있어서 오늘날의 '국가'와 비슷한 것으로서 천자(天子)의 나라 [천하(天下)]와 제후의 나라인 [국(國)], 그리고 경대부의 나라인 [가(家)]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어느 것을 '국가'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당시 [천하]는 '하늘 아래' 혹은 '사해내(四海內)'의 모든 지역을 포함하는 영토개념이지만, 그것은 중국인들 특유의 과장일 뿐, 하(夏)·상(商)·주(周) 시대의 경우 '나라 천리(邦畿千里)' 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왕실의 영향력은 천리를 넘어가지 못했다. 또 전국시대 이후 독립을 이루기 전까지 제후의 [국]은 [천하]의 속방에 불과했고, [가]는 [국]의 속방에 불과하였다. 그런가 하면 춘추시대로 부터 전국시대에 이르면 제후들은 [천자]를 무시하고, 경대부들은 제후들을 무시하여 [천하]와 [국]과 [가]가 구분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부터 국가라는 이름과 현실 국가가 비로소 합치되기 시작한 이후에 있어서도 국가는 다만 기능적으로 설명되었을 뿐 개념적으로 정의된 경우는 없었다. 더욱이 이 문제를 유가의 국가개념과 관련시킬 경우에 서주(西周)의 지식인인 주공의 경우는 현저히 [천하]를 염두에 두고 진술하고 있고, 춘추시대의 공자는 이른바 당시의 오패(五覇) 같은 제후국을 대상으로 말하되 [천하]와 깊은 관련을 늘 염두에 두고 있으며, 맹자의 경우는 [천하]와는 아무 상관 없이 전국(戰國) 시대의 왕(王)들을 대화상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복잡한 문제인듯이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공이 말하는 [천하]로서의 국가는 순전히 [천명(天命)]과 왕실의 [덕(德)]에 의해 기원하고 유지되는 것처럼 이해되고, 공자가 말하는 통치는 예악지치(禮樂之治)가 본령이며, 전국시대 군주들을 상대로 전개한 퉁명스러운 맹자의 사상은 근세 서양에 있어서의 사회계약설(社會契約說)과 같은 입장에 서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들 뿐만 아니라 후세의 유가들 조차도 모두 국가의 목적이 인륜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고 있다는 점과 국가야 말로 인륜을 실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 국가의 형태와 무관하게 유가의 국가개념은 그 정합적 윤곽을 가지고 있음을 말할 수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중국사회에 실재하는 국가와 유가의 유래, 그리고 이 역사적 국가와 유가 지식인들과의 결합관계, 그리고 유가지식인들의 국가인식의 순서로 유가에 있어서 국가의 의미를 살펴 보려 한다.

Ⅱ. 국가와 유가

1. 국가의 유래

장광직(張光直)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중국사회는 B.C. 5000년 이전 구석기·중석기 시대의 유단(遊團; band), B.C. 5000∼B.C. 3200년 사이 앙소(仰韶)문화·청련강(靑蓮崗)문화의 촌락(村落;tribe) 단계, B.C. 3200∼2500년에 이르는 대문구(大汶口)문화와, B.C. 2500∼B.C. 2200년 사이 섬서(陝西)·하남(河南)·산동(山東)의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추방사회(酋邦社會) 단계를 거쳐 B.C. 2200년 이래 하(夏)·상(商)·주(周)의 국가정제(國家政制)의 단계에 이른다.

하·상·주는 수 많은 추방들이 국가정제로 발전하는 가운데, 순서대로 가장 먼저 이른바 [천하(天下)]로 불리는 국가정제를 이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아직 그들과 대적할 국가적 집단들이 없었고, 왕(王)은 특별한 존재로서, [시경]의 대아편(大雅篇)에서도 누누이 강조하듯 덕(德)을 하늘로 부터 인정받아 세상을 다스리는 사명을 부여받은 천자(天子)였고, 이 세상은 이른바 [천하(天下)]로서 모두 그의 영토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약간 허풍스러운 점을 빼고 말하면, 그들에 의해 영도된 왕실과 조정은 겨우 강의 하류로 부터 상·하·주의 순서로 황하강(黃河江) 유역에에서 번갈아 영향력을 행사했던 부족집단들이자 정치집단들로서 소규모 고대국가에 방불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상·주가 이른바 [천하]로서 국가정제를 갖추어 군림하던 시기에 그들 영향력 하의 다른 여러 추방들도 국가정제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이들 세력은 각기 읍(邑)을 건설하여 이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읍은 서주(西周) 시대에 서주의 왕실에 의해 [국(國)]으로 개명(改名)되고 왕실에서 파견한 제후들에 점유되어 상당기간 다스림을 받았으나, 왕실의 쇠퇴와 함께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이르러 대부분 독립하여 열국병립(列國竝立)의 시대를 여는 거점이 된다.

그리고 국가의 의미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으로 [가(家)]가 있는데, 특히 서주시대에 있어서 제후가 다시 [국] 내의 경(卿)·대부(大夫)들에게 채지(采地) 혹은 식읍(食邑)을 주어 분봉한 것으로 나중에 유력한 [가(家)]는 성장하여 [국]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보면 나라(=state)의 호칭에 있어서 [국]은 [천하]의 하위개념이며,[가]는 다시 [국]의 하위개념이다. 이에 <맹자>,이루(離婁)에서는 "모두 천하·국·가라 한다(皆曰,天下國家)"고 하였다. 여기서 "천하·국·가"는 [천하]와 [국]과 [가]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국가라는 말은 본래 이 [국]과 [가]의 연용으로 이루어진 용어이다.

그런데 [국]과 [가]의 연용으로서의 [국가]라는 말이 [천하] 대신에 나라를 뜻하는 일반적인 지칭으로 쓰여지게 된 시기는 아마도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혹은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부터가 아닌가 한다. 이미 춘추시대에 이르면, 중국사회는 사실상 이름뿐인 [천자]의 [천하]가 아니라 제후(=國公)들의 [국]시대가 되고, 다시 춘추시대 말기에 이르면 제후·경·대부들이 각축하는 [국][가]시대를 맞는다.예를 들면 이른바 십이열국(곧 周, 魯, 衛, 鄭, 晋, 曹, 蔡, 燕, 宋, 齊, 陳, 楚, 秦) 시대의 개막과 함께, 다시 진(晋)은 한(韓)·위(魏)·조(趙) 세 [가]에 의해 분할되고, 노(魯)는 계손(季孫)·숙손(叔孫)·맹손(孟孫)의 [가]에 의해 좌우되었던 것이 그 한 두 예들이다.

이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괄목할만한 지식의 대중화 현상이 이루어 지는데, 이 대중화된 지식을 통하여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정치에 관심있는 대부분의 그들 지식인들 가운데 다수는 혹은 [국]의 공실에서 혹은 경·대부의 [가]에서 복무하였고, 더우기 [가]의 경·대부들이 국공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에 자연히 [국가]라는 이름이 보편화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2. 유가의 유래

일반적으로 유가(儒家)는 공자(孔子)로 부터 비롯된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공자로 부터의 유가의 이념이 순전히 공자 자신만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유가라는 집단도 반드시 공자의 추종자들로 부터 나온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렇다고 유가의 이념이 후세에 주장되는 대로 이른바 심법(心法)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최초의 요(堯)로 부터 순(舜)·우(虞)·탕(湯)·문(文)·무(武)·주공(周公)을 거쳐 공자에게 전수되었다거나 유가의 무리 또한 그러한 유래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유가의 창설과 유가이념의 결집은 다음과 같은 유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온건한 견해가 아닌가 한다.

첫째로 유가는 전통의 예(藝)·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익혀 귀족들에게 나아가 그들에게 교서상례(敎書相禮)로 봉사하는 것을 직업으로 살아가던 서주 말의 일군의 직업집단, 곧 [유(儒)]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유] 그 자체의 유래에 관해서, 호적(胡適)은 그의 [說儒一文]에서 "최초의 [유]는 은(殷)의 유민이었으며, 그들은 은례(殷禮)의 보존자 이자 선교사 였다"라고 그 유래와 의의를 말하였고, 풍지생(馮芝生)은 "유가 일어난 것은 고대에 있어서 귀족정치가 붕괴한 이후 이른바 '관이 그 지킴을 잃었다(=官失其守)'고 하는 때이다"라고 하였다. 풍지생은 귀족정치가 붕괴된 시기를 <논어>, 미자편(微子篇)의 "태사지는 제나라에 가고(=太師摯適齊)" 이하 기사에서 나타나듯, 노(魯)나라 악관(樂官)들이 흩어져 가는 시기와 동일하게 보는 듯하다. 이 시기에 민간에 흩어져 간 예악(禮樂)의 전문가들은 생업을 위해서 자유직업인으로서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치거나 그들의 상장전례(喪葬典禮)의 일에 종사하게 된 것이 곧 [유]라는 것이다. [유]의 유래는 두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일찌기 은의 유민들은 서주의 왕실이나, 공·경·대부들의 [국(國)][가(家)]에서 예악의 전문가로 활약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유]의 전신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관의 보호하에 있었고, 그들의 학문도 여전히 관에 있었기 때문이다(=學在官府). 본격적인 [유]는 춘추시대 후기에 이르러 귀족정치가 붕괴되어 가는 시기에 출현하였다. 이렇게 보는 것이 "관이 그 지킴을 잃자(=官失其守), 예악을 잃어 이를 민가에서 구하였다(=禮失而求諸野)" 라는 옛 말에 부합한다. [유가(儒家)]가 바로 이 [유]에서 나왔음은 나중 [유가]에게 높은 이상이 없었다면 [유]와 다름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공자가 현저히 그럴 위험이 있었던 자하(子夏) 같은 제자에게 군자유(君子儒,곧 儒家)가 되고 소인유(小人儒, 곧 儒)가 되지 말기를 훈계했던 것이나, 또 순자(荀子)가 <순자>, 비십이자편(非十二子篇)에서 자장(子張)의 무리를 "구부정하게 높은 관, 심오한듯 꾸며대는 말씨, 우임금을 닮은 걸음걸이에 순임금 같은 몸짓", 자하(子夏)의 무리를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안색을 장중하게 하여 기쁜듯 종일 말없이 있는", 자유(子游)의 무리를 "일하기를 싫어하고 염치없이 먹기만을 즐기며, 군자는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것을 당연스레 말하는" 이라고 하여 그들을 "천유(賤儒)" 라고 비판 했을 때, 이해되고 남음이 있다. 그런데 [유가]가 단지 이전의 [유]들의 전통만을 계승했다면 어떻게 그들 [유]와 다를 수가 있었겠는가? 그것은 [유가]에 합류한 사람들이 단지 '교서쟁이(=敎書匠)'에 불과한 [유]들 뿐만 아니라, 새로이 몰락한 구 귀족의 자제들과 신흥의 지주 및 상인 자제들이 합류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불안정한 사회환경을 능히 기회(機會)로 여길 수 있는 자들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당시 이미 귀족정치의 말기에 나타난 일군의 창조적인 정치사상가들―말하자면, 제(齊)의 관중(管仲)·안영(安瓔), 정(鄭)의 자산(子産)등―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주는 본래 종법제도(宗法制度)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서주의 종법제도는 그들의 건국조를 공통조상으로, 서주의 국왕을 제사와 권력의 정상(頂上)인 대종(大宗)으로 하고, 왕이 임명하는 제후 및 경·대부들을 소종(小宗)으로 하는 거대한 혈연적 통치제도를 말한다. 이 때 이들의 관계를 묶어주는 것은, 그들이 제사의 대상으로 받드는 선조의 위신과 힘이었다. 그들의 선조는 자신들의 덕(德)을 하늘(=天)로 부터 인정받아 건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는 하늘에 올라가 하늘과 함께 능히 그들의 [천하]·[국]·[가]를 보호해 줄 있는 존재로 믿었다. 소종으로서의 제후는 다시 그들의 봉토 내에서는 대종이 되며, 그 아래 경과 대부 등이 소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들어 왕실의 권위가 현저히 약해진 후에 이르러 제후들은 더이상 소종이 아니었으며, 더우기 제(齊)·진(晋)·송(宋)·진(秦)·초(楚)등 이른바 춘추오패(春秋五覇)가 일어나 저마다 종주국을 자처하는 마당에 종래의 종법질서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이 시대 제후국들은 바깥으로는 패자(覇者)가 될 욕심에서 다른 제후국들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히고, 안으로는 권력의 집중을 위하여, 경·대부들의 토지경작권을 몰수하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에 그들은 봉토 대신 단지 봉급만 받는 지식인 곧 지식인 관료들(=士)을 필요로 하였다. 경·대부들의 [가]들도 [공국(公國)]이 되기 위해서 지식인 관료들(=士)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이처럼 춘추시대에는 새로운 사회계층인 지식인 관료의 수요가 대거 창출되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 있어서 인구의 증가, 철제 농기구의 보급, 우경(牛耕)의 도입, 분뇨(糞尿)의 사용 등으로 농촌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농민들은 종래의 예농(隸農)의 지위로 부터 벗어나서 지주·자작농·소작인이라는 새로운 지위로 변해 갔다. 특히 지주들은, 이 시기에 번창하기 시작한 수공업의 생산성에 힘입어 대상인으로 성장한 상인들과 함께 그들의 자제들을 교육시켜 지식인 관료(士)로 출세시킬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처럼 지주 및 상인 계층이야 말로 몰락한 구(舊) 귀족가문들과 함께, 난세의 활력소인 새로운 지식인 집단들 곧 제자백가(諸子百家), 그 중에서도 유가의 주요 공급원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종법적 지배질서관의 변화의 필요성을 맨처음 제시한 사람은 사백(史伯)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여러 맛은 조화시킴으로써 입에 알맞게 되고, 여러 음률도 조화시킴으로써 귀에 아름답듯이, 옛 선왕은 잘 간하는 신하를 뽑아 정·반의 말을 잘 경청함으로써 화(和)·동(同)에 힘썼다"고 하였다. 여기서 [동(同)]이 종법적 지배질서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화(和)]는 새로이 요청되는 질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화]는 주왕실에 이미 왕실의 명령에 순종하지 만은 않는 제후들이 실재하는 현실에서 그들의 요구를 왕실이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이 시대에는 종법적 지배질서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관중(管仲; B.C. 730∼B.C. 645)도 초기 [국] 사상가로서 제(齊)의 환공(桓公)을 도와 제후들 중의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다.

그는 내치에 있어서는 먼저 백성의 의(衣)·식(食)·주(住)를 해결하는 일이 급하고, 의식주가 해결된 뒤에는 사유(四維,곧 禮義廉恥)를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의·식·주를 족하게 할 것은 지주들의 요구이고, 예·의·염·치를 갖출 것은 왕실의 요구인데, 왕실에서 예·의·염·치를 요구하기에 앞서 지주들의 요구를 먼저 들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외교에서는 예(禮)와 덕(德)과 신(信)을 강조하였다. 공자는 환공의 이 조치가 중국을 건지는 참으로 적절한 것이었다고 칭찬하였다.

중국사회가 춘추시대 말기로 갈수록 제후·대부가 각축하고, 더우기 대부들이 국공(國公)을 참칭(僭稱)하는 시대가 되자, 종법적 사회질서와 가적(家的) 사회질서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사상사에 있어서 [동(同)]·[화(和)] 논쟁은 그 중 하나이다. <안자춘추(安子春秋)>, 외편(外篇)에 보면 당시 종법적 질서의 신봉자인 양구거(梁丘据)라는 사람과, 새로운 가적 질서의 신봉자인 안영(安瓔)사이에 심각한 [동]·[화]의 이념적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영은 양구거가 "임금이 옳다고 하면,그도 따라서 옳다고 하고, 임금이 그르다고 하면 그도 따라서 그르다" 고 한다고 하여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국공(國公)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식인 관료라면 "임금이 옳다고 해도 그른 점도 있으므로 그 그른 점을 아뢰어서 그 옳음을 이루게 해주고, 임금이 그릇되다고 해도 옳은 점도 있으므로 그 옳은 점을 아뢰어서 그 그르다 하는 데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화]의 사상이야 말로 종법적 질서에 대항하는 가적 질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안영은 내편(內篇)에서 다시 "임금이 단맛이면 신하는 신맛, 임금이 담백한 맛이면 신하는 짠 맛"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를 대표가 되는 당시 지식인들의 생각은 국가사회에 있어서 지식인들도 왕실과 함께 한 주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사(師)]개념을 창안하였다. 그들은 주공(周公)이 서주(西周) 왕실에 있어서 독특한 지위에 있었던 점에 착안하여, 주공은 건국조인 문왕(文王)·무왕(武王)과 마찬가지로 천명을 받은 자로서 [사]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자신들은 바로 주공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자부하였다. 이로부터 "하늘은 아랫 백성들을 위하여 임금을 만들고,스승을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후일 유가에 있어서 이 [사]는 국왕과 함께 [성인(聖人)]이라는 호칭을 공유하게 된다. 종법질서가 일변(一變)하면 [국]적 혹은 [가]적 질서가 되고, 또 일변해서는 유가적 질서가 된다. 유가적 질서는 순수히 가족내 그리고 향리(鄕里)에 있어서의 인간의 상정(常情)에 기초하여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발굴하며, 그러한 가치를 [가][국]에 까지 확대하고, 그 근거를 하늘에까지 미룸으로써 형성된 질서체계 이다.

[유가]는 바로 상기한 두가지의 전통 위에서 탄생하였다. 먼저 논한 [유]가 그들의 직업적 전통을 [유가]에게 남겼다면, 뒤에 논한 지식인 관료들은 그들의 아이디어를 유가에게 남겼다. 실제로 공자는 이미 이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관념들(=곧 德, 禮, 和 등)이 공자에게서 집대성되는 느낌이 있다. 그도 이미 시인했던 것이지만, 공자는 결코 전혀 독창적인(=生而知之) 사람도 아니었고, 유가사상이 결코 순수히 그의 창작도 아니었다. 그는 이전의 [유]들로 부터 직업전통을 전수받았고, 정치사상가들로 부터 사상전통을 물려받았다. 그는 이 직업전통과 이 사상전통을 결합시켜 유가를 탄생시킨 것이다.

3. 국가와 유가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르러 [국]은 더이상 [천하]의 하위개념으로만 존재할 수 없었다. 이미 국공들 가운데는 [천자]의 명령을 따르는 신하이기 보다 스스로 패자(覇者)가 되어 군소 제후들의 조회(朝會)를 받으면서 종주권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생각을 많은 제후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정세는 불안정하여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 수많은 사상가들이 쏟아져 나와 패제후(覇諸侯)의 계책을 말하게 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관중(管仲)·자산(子産)·안영(安瓔) 등은 공자(孔子)에 의한 유가학술에 상당히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춘추 말기에 이르러 종래의 신분질서가 더욱 붕괴되고, 경·대부 출신 국공이 출현하는 시대가 되었을 때, 구질서하에서 비교적 낮은 신분이었던 신흥 지식인 집단의 활동은 더욱 자유로워졌다. 그들중 한 사람인 공자(孔子)는 당시 가족과 마을 단위의 공동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삶의 원리였던 효제(孝弟)를, 그가 새로 치자(治者)의 마음가짐으로 천명한 인(仁)과 접맥시켜서 가족질서적 국가윤리사상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양자 간의 불연속을 '충서(忠恕)로써 관통시킨다(一以貫之)'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집안과 마을에 있어서 장로(長老)와 현인(賢人)을 섬기는 것이 윤리의 근본임을 상기할 때, "효제가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 라고 한 유자(有子)의 말은, 젊은 국공들은 이제 조정의 조회에서 조차도 장노들과 현인들을, 단지 신하로서만이 아니라, 어른으로, 스승으로 예를 다해 섬겨야 함을 뜻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춘추말기 이래 유가 지식인들은 활동무대를 국내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공자(孔子)의 경우에서만 보더라도 노(魯) 나라 뿐만 아니라 열국을 주유하면서 벼술을 구하러 다닌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인은 천하를 일가로 여기고 중국을 일인으로 여기는 데 능하다"는 말에서도 보듯이, 그들의 학문이 한 사람의 국공을 위해 있지 않고, [천하]의 인민을 위해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대학>의 국가이념은 가족주의 국가윤리사상의 결정판이다. 이미 <대학>이 결집되던 시기에는 종래의 종법질서가 붕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러한 질서를 복구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이르러 전에 [가]중심의 사회에서 활동했던 유가의 후예들은 [가]의 윤리를 다듬어서 새로운 [국]이나 [가]에 알맞는 윤리로 내어 놓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모든 [가]나 [국]은 천하를 지향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윤리는 또한 [천하]·[국]·[가]에 두루 통용되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든 [가]나 [국]에 있어서 [천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개념이었을 뿐이고 그들이 실제 복무하는 곳은 [가]나 [국]이었으므로 이제 [국가(國家)]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연용(連用)되어 보통명사화 되게 되었다. <대학>의 사상은 바로 이 보통명사로서의 국가에 참여하기 위한 치자의 이상과 그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치자의 수양방법에 관해 기술한 책이다. 그리고 그외 모든 유가의 경전들은 이러한 <대학>의 이상에 자양분(滋養分)을 주는 책들이며, 또한 <대학>의 이상이 투사된 책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자가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子曰, 人能弘道, 道不能弘人: <論語>, 衛靈公)"라고 한 말에서 보듯이 국가가 본래 있어서 사람에게 국가의 이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국가] 라는 범위에까지 확대되어 치자로서의 이상이 있게 된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치자의 이상을 통해서 유가의 국가개념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가 형성되어 가던 객관적 역사과정을 통해서 중국에 있어서 국가는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한 방법이라면, 유가사상에 있어서 국가개념은 유가인들의 국가이상을 통해서 국가를 이해하게 되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Ⅲ. 유가의 국가개념

유가의 국가개념을 알기 위해서 할 수만 있다면 '유가는 국가를 어떻게 이해했던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던져서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으면 '유가는 국가를 통하여 무엇을 이룩하려고 했던가?' 라는 물음을 통하여 유가의 국가개념에 접근할 수 밖에 없다.

유가의 주된 관심은 언제나 인륜의 실현에 있었고, 그리고 적어도 이론적으로 국가는 인륜을 실행하는 가장 이상적인 단위로서 긍정된 것으로 보인다. 역으로 말하면 국가는 유가적 이상인 인륜을 가장 적절히 담보해 내는 기구이자 장(場)으로서의 존재목적을 가질 것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가 인륜을 담보해 내기 위해서는 국가 스스로도 인륜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국가가 인륜적이기 위해서는 국가의 탄생이 인륜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 경영이 인륜적 이어야 하며, 그 결과에 있어서 인륜적일 것이 요구된다. 바로 이러한 요구에서 국가의 천명기원설(天命起源說)과 유덕자수명설(有德者受命說), 예악지치설(禮樂之治說), 민본설(民本說)등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유가는 이 세가지 사상을 결합하여 '인륜적 이상을 담보해 내는 최적의 기구 내지는 장'으로서의 국가라는 하나의 개념을 이룩하고 있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유가의 국가개념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유가의 국가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국가는 [덕]을 소유한 자에게 [천명]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사상이다. 본래 유가에서는 백성은 하늘이 낳은 것으로서 본성적으로 아름다운 덕을 사모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하늘이 백성을 낳았다는 것은 백성이 하늘의 소유 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이 백성의 본성을 아름다운 덕을 사모하게끔 하였으므로, 군주가 이 백성들과 관계하기 위해서는 우선 [덕]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하늘로 부터 군주의 명을 받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본성을 이루게 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데서 [천명]과 [덕]에 기초한 국가기원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국가기원사상으로서의 [천명]과 [덕] 사상은 서주(西周) 왕실에 의해서 처음 유포되었는데 공자로부터 이래, 통치자집단과 유가가 이를 공유하게 되었다.

통치에 있어서는 그 방법이 있어야 한다. 유가적 통치에 있어서는 그 본령이 군주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는데, 하늘이 중시하는 것은 [덕]이고, 통치의 대상이 되는 백성 또한 이 [덕]을 사모하므로 올바른 군주는 덕치를 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고의 군주는 무위지치를 행하는 것이고 무위지치의 방법은 예악지치이다.

<효경(孝經)>에 "예악으로 이끌자 백성이 화목해졌다" 라고 하였다. 정사에 있어서 악은 동일화의 수단이고, 예는 차별화의 수단이다. 정치에 있어서 왜 차별화시키고 왜 동일화시켜야 하는가는 예가 없으면 존비(尊卑) 간에 공경이 없게 되고, 악이 없으면 친속(親屬)이 이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본래 악은 안에서 비롯하여 발생한 것이고, 예는 바깥에서 비롯하여 제정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이를 [천명]과 관련짓는다.

음악을 가르쳐 사람을 화순하게 하고 예를 가르쳐 사람들을 절도 있게 한다는 것이 유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 있어서는 예악(禮樂) 뿐만 아니라 형정(刑政)까지도 동원된다. 이에 그들은 "예(禮)로써는 그 뜻을 이끌고, 악(樂)으로써는 그 소리를 화평하게 하며, 정(政)으로써는 그 행동을 한가지로 하며, 형(刑)으로써는 그 간특함을 막는다. 예, 악, 형, 정의 지향점은 하나이다" 라고 하여 이를 정당화 시킨다. 그러나 국가의 목적이 인륜을 실현하는 데 있는 점을 감안하면 형정(刑政)에 의한 통치는 유가에 의해 거부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부터 유가에서는 예악은 근본이고, 형정은 말단이란 생각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예악도 자칫 사치나 방탕에 흐를 수도 있으므로, 그 근본정신에 대한 환기를 거듭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로 덕을 가진다는 것은 이 예악에 정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예악지치는 천명과 덕을 기원으로 삼는 국가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통치개념이다.

통치에는 대상이 있다. 정치발전이라는 것은 이 대상을 넓혀온 것과 관계가 있다. 유가의 정치를 예악지치(禮樂之治)라고 했을 때 예악지치의 기조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 대상이 처음에는 대부(大夫) 이상의 귀족에 한정되고, 차츰 국인(國人)을 포함하며, 공자에 이르러서는 소인(小人, 民과 구별됨)까지 미치고, 맹자에 이르러서야 이른바 야인(野人) 혹은 민중(民衆) 까지를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유가의 예악지치가 전민정치(全民政治)를 표방하게 된 것은 맹자의 민본론(民本論)이 처음이다. 맹자 민본론의 의의는 군자계층이 비로소 자신들이 백성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양에 의해서 존재하는 집단임을 자각하고 백성들의 존재의의를 인정한 데 있다. [맹자]에서 "대인이 할 일이 있고, 소인이 할 일이 있다" 거나 또 "군자가 없으면 야인을 다스릴 수가 없고, 야인이 없으면 군자를 부양할 수 없다"고 한 것은 한 사회 내애서 군주계층과 생산계층인 백성들이 분업을 통한 협조관계에 있음을 인정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들의 할 일은 비록 통치(=治人)의 일과 생산(=食人)의 일로 귀천의 차이는 있지만, 당당히 분업으로 간주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민본론에 있어서 양자의 분업관계는 백성의 과업이 군자계층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라면, 군자계층의 과업은 백성들이 효제(孝弟)할 수 있도록 외적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생활에 있어서 전자는 모든 육체노동을 전담하고, 후자는 정신노동을 책임진다. 그런데 맹자의 인식에는 백성들이 경제생활에 있어서 안정하는 것이야 말로 국가생활에 있어서 근본(根本) 이라 하여 이것이 바탕이 되면 왕도정치(王道政治, 곧 예악지치의 이상인 無爲之治)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왕도정치는 수명(受命)의 천자를 중시하던 과거의 천명사상에서 한 걸음 나아가 정치의 공과(功過)를 백성에 둔 민본사상이다. "백성이 귀하며,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볍다" 는 말은 그의 민본사상의 귀추를 잘 나타낸 말이다.


Ⅳ. 결 론

중국에 있어서 국가는 하(夏)·상(商)·주(周) 등의 나라가 추방사회(酋邦社會)로 부터 국가정제(國家政制)의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출현하였다. 이에 비해 유가는 그 보다 훨씬 후대인 춘추시대에 이르러 공자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그러나 공자가 극구 자신의 사상이 전대(前代) 사상을 기술한 것이지 창작이 아니라고 한 데서 우리는 유가의 국가사상은 유가 이전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유가 경전들은 유가 보다 훨씬 앞서 탄생한 국가가 매우 유가적 기원을 가짐을 말하고 있다.

유가에서 말하는 국가는 천명(天命)을 받은 유덕(有德)한 왕이 백성을 통치함으로써 성립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중국 역사상 수 많은 국가는 기존의 왕이나 왕실이 덕을 잃거나 새로운 유덕자가 수명함으로써 침부(沈浮)를 거듭해 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가적 국가관에 있어서 왕이 백성들을 통치하는 방법은 형정(刑政)에 의한 강압이 아니라 예악(禮樂)에 의한 순리(順理)의 방식을 취한다. 사심(私心)이나 강압을 쓰지 않고 순리에 따라 하는 정치가 극에 이르면 무위지치(無爲之治)가 되는데, 공자 이래 유가는 순임금에 의해 꼭 한번 실현되었던 이 무위지치를 이상적인 통치방식으로 찬양해 왔다.

무위지치를 하는 이유는 백성이란 처음엔 먹고 사는 데 급급한 듯하지만, 궁극에 가서는 효제(孝弟)하기를 바라는 선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가 할 일은 그들에게 처음에는 생계를 도와 주고 나중에는 윤리를 도우는 것이다. 맹자의 민본론(民本論)의 요지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유가가 무위지치를 주장하거나 민본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왕이나 국가의 존재를 필요악 쯤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유가의 최고 지향(志向)은 순천(順天)·지천(知天)·낙천(樂天)에 있는데, 이것은 한 개인의 의식 속에서 배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하인민이 함께 누리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상하인민이 함께 누리기로는 국가만한 장소가 없고, 국가야 말로 인륜이 실현될 최적의 장소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국가나 왕의 존재가 필요악 쯤으로 그 의의가 삭감되기는 커녕, 권부의 핵을 이루는 임금과 신하는 만인이 우러러 보는 존재로서 천리(天理)의 운행을 그 몸에서 보여주는 사표로서 높여졌던 것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천명과 덕, 예악지치와 민본사상 가운데 어느 하나도 결여된 이상적인 유가국가를 생각할 수도 결코 없지만 군권(君權)이 무시된 유가사회나 군신윤리가 유기된 유가윤리도 종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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