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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90년대 한국사회와 유교 - 유교적 가치의 재발견

맑은샘77 2007. 10. 3. 00:00

90년대 한국사회와 유교 - 유교적 가치의 재발견

사회학과 강길연, 김정진, 박혜원, 김성은

1. 머리말

기독교에서 성경을 신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교에서는 성현들의 경전을 학습, 해석하고 신봉하며, 이것이 유교행위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룬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러한 경전의 해석은 저자와 그 시대적, 공간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해석, 학파들을 존재하게 하였다. 유교는 때로는 공자를 섬기는 공자교의 모습으로, 때로는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많은 이에게는 그저 익숙한 생활규범의 하나로서 존재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정치이데올로기로 크게 부각된 유교도 주희라는 학자의 해석에 전적으로 근거한 성리학이라는 유교의 한 학파였으며 심지어 중국 현대사에는 마르크시즘에 입각한 유교의 해석도 존재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그런데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유교의 이미지도 일치된 것이 아니다. 우선 일제로부터의 독립 후 정치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원리로서의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는 어려워졌던 유교는 그러나 여전히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행동양식을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 의해 버려져야할 구습, 전통으로 여겨졌었다. 그리고 많은 독재적인 정치지도자들에 의해서는 유교의 충忠, 효孝의 가치, 혹은 그 수직적인 위계질서의 내용만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유교자본주의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면서 유교는 마치 잊고있었던 경제성장의 숨은 공로자, 내지는 세계적인 보편담론- 아시아적 가치와 유교 자본주의-에 끼여들기 위한 좋은 빌미로까지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유교의 어떤 성격이 이렇게 다양한 해석과 이용을 허용하였을까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유교가 우리사회에서 누구에게 언제 어떤 이미지를 지니는가에 대한 해답도 여기에서 구해질 수 있지 않을까?

2. 유교의 근대사

1) 일제시대 유림의 세 부류와 활동

(1)보수 유림

道學君子然하여 나라는 망해도 도는 망하지 않는다(國家亡而道不可亡)하는 소극적 기대론을 취했다.

(2)친일유림

중추원과 경학원(구 성균관)을 기점으로 활동했다(일본에 세워진 日韓合邦功勞者塔에 한일합방을 조정에 상소한 조선유생들의 명단이 들어있다고 한다).

제1기: 한일합방을 시도하면서 조선내에서의 지지세력 확보책으로 1907년 조직한 대동학회 (1909년 10월 공자교로 개칭)를 주축으로 활동함

제2기: 3·1운동이후 1919년 12월에 조직된 大東斯文會, 1920∼21년에 조직된 儒道振興會 등을 통해 한일합방을 합리화하거나 내선동조론등을 증명하기위한 사업을 추진함

제3기: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 중심으로 황도정신에 기초하여 유도의 진흥을 도모한다는 취지 아래 유교가 곧 皇道라는 이데올로기로써 대동아전쟁과 대동아공영권건설을 합리화시키려함,

(3)항일유림

독립운동에 있어서 이미 망해버린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자는 복벽론(復抗論)을 청산하고 민주공화제를 지향하지 못한 점이 한계였다.

衁) 한일합방 당시 국치의 충격으로 국내에서 저항을 하거나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

을사조약 이후 독립운동에 있어서 이미 망해버린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자는 복벽론(復抗論)을 청산했다. 민주공화 유림의 입장과 행동특징을 유인석이 제시한 처변삼사 유형에 따라 3가지로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①목숨을 끊어 지조를 온전히 하겠다는 致命遂志의 입장과 행동(민영환, 조병세등)

②의병을 일으켜 賊盜들을 쓸어내겠다는 擧義掃淸의 입장과 행동(최익현,유인석등)

③떠나서 옛전통을 지키겠다는 去之守舊의 입장과 행동

㈀중국대륙, 만주, 블라디보스등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하는 경우:유인석, 이승희, 박은식

㈁국내에서 경전을 싸가지고 산으로 들어가 은둔하는 抱經入山의 경우

遁) 유림단사건 및 국내외에서 저항운동을 하던 시기(1919∼30)

①파리장서사건-제 1차 유림단 사건: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영남·호서의 도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림단이 독립을 청원하는 유림의 결집된 의사를 만국평화회의에 전달하였다. 이에 일제는 곧 유림에 대한 일대 검거 선풍을 벌여 유림 5백여명을 체포하였다. 이 장서 사건은 국내외에 널리 보도되어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것은 유림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의미를 떠나 국내의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하여 한 민족의 전체의사를 국제적으로 천명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②김윤식 등의 對日本長書事件: 친일행각으로 지탄을 받다가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용식과 함께 일본정부에 대하여 하루 속히 식민지적 지배를 철폐하고 우리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보낸 사건이다. 김윤식은 여전히 왕정복구를 염원하였는데, 이는 유자의 입장에서 忠君愛國 不事二君의 정신을 견지하려 했음을 뜻한다.

③제2차 유림단 사건: 金昌淑 宋永祐, 金華植, 李鳳魯 등이 만주 동삼성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는데 소요되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려하였는데 그 실적은 매우 부진하였다. 그러자, 폭력을 동원하여 국내의 친일 부호들에게 위협을 가해야 자금모집이 쉬울 것이라고 보고 중국에 들어가 의열단과 상의한 뒤 모험단원을 동반하여 다시 잠입하고자 26년 경성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김창숙 일행이 돌아간 뒤 영남일대에서 자금을 모집한 사실을 탐지한 일경이 일대 검거선풍을 일으켜 약 6백여 명에 달하는 많은 유림을 체포, 구금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2차 유림단 사건이다.

鑁) 유림의 조직적인 활동이 괴멸되고 개인적 활동에 의존하였던 시기(1931∼45)

역사서술에 주력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민족문화를 수호하려는 일부도학자들의 노력이 지속되었다.

2) 유교의 개혁과 종교화 운동

서양식 근대교육제도가 일반화되고 전통적인 교육제도가 합법적으로 승인받지 못함에 따라 유교체제의 붕괴는 가속화되었다. 이와 같이 유교가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 것은 타종교에 비해 태생적으로 종교적 성격이 희박하고, 지식인 본위의 가르침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림의 일부 선각자들은 유교를 재건하는 방법으로 유교의 제도적 개혁과 함께 종교조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일제시기 한국에서 전개되었던 공교운동은 유교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성격을 계발하고 서양식 교회제도를 수용하여 유교를 종교단체로 발전시킴으로써, 서양 기독교 세력에 저항할 수 있는 정신적 주축을 확립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이다. 이는 장차 보편적 종교이념으로서 인류의 이상을 제시하기 위한 '유교의 근대적 자기 발견'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도 할수 있다.

(1)이승희의 공교운동과 유교개혁사상

이승희의 공교(孔敎)사상은 도학을 기초로 하고 공교의 체계와 조직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가 제기하고 있는 종교관에 의하면, 유교는 '윤리를 기초로 하는 종교이며, 동시에 민족자주성의 전통을 요구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특히 유교공동체의 조직화를 위해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전통의 보수적 폐쇄성을 탈피하여 근대세계를 지향하는 열린 교리를 개발하고 있다. 이승희가 도학에 내재된 보편성을 통해 근대세계로의 개방을 추구한 것이다. 이런 이승희의 공교운동은 전통 도학을 온건한 방법으로 재구성하려 했기 때문에 급격한 사회변화를 따라가기 어려웠고 더구나 국내에 활동무대를 전혀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취약점으로 지적된다.

(2)이병헌의 공교운동

이병헌은 《유교복원론,1919》에서 유교의 종교적 신념과 개혁의지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공교사상의 기초로서 강유위를 계승하여 금문경학(今文經學)의 입장에서 경전주석을 완성하였다. 그는 "유교는 어떤 교인가"라는 첫 질문에 대해 "공자의 교"라고 대답하면서 공자는 先聖後賢을 넘어서는 유교의 정점이요, "오직 하나요, 둘도 없는 교주"라고 보았다. 그는 곧 공자를 교주로 확립시키는 데서 유교의 진정한 모습을 찾았던 것이다. 그는 '종교'란 용어가 영어 'religion'을 일본에서 명치유신 초기에 번역된 것임을 지적하고, 유교에서의 '敎'자는 '宗'자를 붙일 필요도 없이 의미가 自足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동안의 유림의 수구적 태도에 대해서 '굳어서 막힌 견해(固滯之見)'라 비판하면서 형식주의를 배격하였다. 또한 공자의 도가 갖는 기본성격을 '무한히 넓고 크게 하며' (博大無外), '세상에 대응하는데 밝으며'(明於應世), '진화에 절실한 것'(切於進化)이라 밝힘으로써 유교의 보편성·현실성·진보성을 제시하였다.

《유교복원론》을 통하여 나타난 이병헌의 사상적 입장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유교의 종교적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척사위정론의 시대가 지난 뒤에. 기독교의 위력앞에 붕괴된 유교재건을 위하여 기독교적 방법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는 유교를 교조가 있는 종교로 설립하기 위하여 공자를 절대유일의 교조로 내세웠고, 신이 있는 종교로 정립하기 위해 상재(上宰)를 주재신(主宰神)으로 부각시켰다. 그리고 주역·춘추·중용·예운의 경전적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교당과 교사(敎士)의 제도를 통한 포교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병헌이 제시한 유교의 원상은 유교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해석이었으며, 이는 전환기에 있어서 전통의 근대적 계승을 위한 시도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3) 해방이후의 유림의 조직과 활동

(1)1970년 이전

1946년 봄에 전국유림대회를 개최하여 김창숙을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 겸 성균관장으로 추대하여 일제 때의 친일분자들이 주축이 된 황도유림을 성균관에서 축출하고 새롭게 유도회를 결성하였다. 이어 유교의 현대화를 이룩하고 유교 이념에 입각한 육영사업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설립 기성회를 결성, 1946년 9월 성균관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1954년 6월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재단법인 성균관에 병합시킴으로써 명실공히 유림이 성균관 대학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재단 및 유도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유림분규가 10여년간 계속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분규는 재단자산의 불법유용건과 유도회임원의 선임문제에서 비롯되었는데 대립의 실질적인 이유는 반이승만 정권의 선봉에 섰던 김창숙을 유도회, 성균관, 성균관대로 부터 축출하기 위한 반대측의 계략때문이었다. 1961년 정당사회단체강제해산포고령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김창숙파를 몰아내고 유림조직을 정치적으로 악용하고자 하는 세력과 반정부세력과의 다툼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유도회와 성균관이 본래 의도한 사업을 해내지 못하고 퇴색해 버렸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2)1970년 이후

유도회의 재건을 원하는 전국유림의 총의를 받들어 69년 3월부터 유도회 각 시·도지부의 결성에 들어가, 그해 10월까지 지방조직을 모두 완료하고, 이듬해 6월21일 유도회총본부가 재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완전 마비상태에 빠져있던 유림조직은 유림분규가 수습된 이후에도 상당기간 유도진흥사업을 착수하지 못하는 부진을 면하지 못했다.

유림조직은 성균관·유도회·재단법인 성균관으로 삼원화되어 있다. 이가운데 재단법인 성균관은 유고조직의 최상위에 있는 중앙기구이고, 산하 재단으로서 각 시도별 향교재단이 있으며, 그 아래 전국(남한)235개소의 각 지방 향교가 있다. 정관에 의하면 재단법인 성균관은 성균관 내에 소재하며, 유도정신에 기하여 ①도의의 천명, ②윤리의 扶植, ③문화의 발전, ④公德의 作興을 목적으로 하고 그 기본사업으로는 ①文廟享祀 ②성균관 및 유도회의 유지 관리, ③지방향교의 통할 관리, ④학술 및 문예의 연구 보급, ⑤교화, 사회사업의 경영 및 보조등을 경영한다고 되어 있다.

성균관은 관장(1인), 부관장(3인), 典儀(35인), 전학(105인), 司儀(20인)등 임원이 있고, 성균관총회를 최고 의결기구로 한다. 이밖에 특별기구로 유교문화연구위원회, 전례연구위원회, 교화연구위원회를 두고 있다. 지방에 소재하는 235개향교에는 성균관장의 임명을 받은 典校, 掌儀등 임원이 있다. 성균관과 지방향교는 엄격한 상하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방향교의 자치적인 활동 영역은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

유도회는 유교의 전국적인 조직으로서 유교인의 叢林이라 할 수 있다. 중앙의 성균관 경내에 유도회총본부가 있고, 각 시도에 시도본부, 구·시·군의 향교 단위에 支部, 동·읍·면단위로 支會, 통·리·동의 단위에 分會를 둔다. 최고 의결기구는 유도회 총회이며 유도회 산하기구로는 여성유도회 ·청년유도회·학생유도회 등이 있다 1975년 5월 23일 여성유도회 가 '여성유림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고, 이듬해 11월13일에 청년유도회가 창립됨으로써 여성과 청년 유교인의 조직활동에 활성화를 기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으며, 1987년 9월 28일에는 전국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학생유도회가 발족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청년유도회는 기관지『한배움』을 발행하는 등 비교적 퇌잘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볼 때, 이들 산하 기구의 조직활동이 활발하다고 하기는 아직 어려운 실정이다.

지금까지의 유림활동은 정부 시책의 지지 성명이나 가족법 개정 반대시위정도에 머물렸다, 통시대적으로 적용되는 유교정신의 본질을 확인하고, 대중의 혼돈된 가치관을 교정해주고, 윤리의식과 도덕질서를 확립하는 등,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유교의 핵심을 지향하는 조직적인 활동이 요청된다 아니할 수 없다.

(3)유교의 종교화 운동

20세기 말 오늘의 시점에서 유교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교화가 급선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유교의 현대화·종교화 작업은 1994년4월 25일 성균관장에 최근덕 교수가 선출된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는 3년의 임기 동안 실천할 목표로 ①유교 이론의 현대화, ②유림 조직의 대중화, ③선비정신의 행동화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제로 삼원화되어 있던 권한과 책임을 일원적으로 규정하여 통합종단으로 묶고자 하였으나 지도부 중요직책의 선임문제(겸임문제 포함)는 분란의 소지를 갖고 있다. 최근 재단 측과 성균관 측의 갈등·대림 현상이 표면화되어 법정다툼으로까지 번지면서, 유교의 개혁과 종단의 운영에 차질을 초래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3. 유교의 재발견

1) 사회로의 확대

[논어論語]의 첫머리에 "그 사람됨이 부모에게 효순하고 형제끼리 우애있는 자는 사회에 나아가서도 윗사람을 거역하는 자가 드물다. 윗사람에게 거역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위정자는 먼저 그 근본을 다스리는데 힘을 써야할 것이다. 근본이 확립되면 인간의 대도는 스스로 훤히 트이게 마련이다. 효孝, 제悌야말로 인간의 이상인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신라의 경덕왕으로부터 '안민가 安民歌'를 지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충담사가 지은 노래에서는 "君은 아비요, 臣은 사랑스런 어미시라, 民을 즐거운 아해로 여기시니, 민이 은애를 알지로다. "라 하고, "군이 군답게, 신이 신답게, 민이 민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이다"라 하였다. 이 사뇌가(詞腦歌) 한 수 속에 당시의 국가에 대한 의식이 승려의 입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라에는 군과 신과 민이 있으며, 각각 아비, 어미, 아이들의 가족적 관계로서 사랑으로 기르는 역할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기 위해서는 '군답게, 신답게, 민답게' 각각의 역할을 할 것이 요구된다. 공자도 정치의 방법으로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와야 한다(君君臣臣, 父父子子)"라 언명하였지만, 국가의 기본 구성으로서 인간관계의 범주는 인금과 신하와 백성으로 파악될 수 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충담사의 '안민가'에서는 백성에 대해 아비와 어미의 관계로 백성을 사랑하고 배양하는 것이 역할로 제시되었다.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며 직간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의무감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조광조는 절명시(絶命詩)에서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근심하기를 내 집 근심하듯 하였네(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라 하여 임금과 나라를 가정적 친애감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흔히 사회속 인간관계에 여러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그 이상적인 목표를 '인간적' 또는 '가족적' 분위기라는 데 두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가정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서로서로 고락을 함께 하는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기 때문이다. 누가 시켜서 어떤 명령이나 규제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동정심과 위타심에서 인간관계를 영위해나가는 가정생활이 그대로 가정 밖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면 그 이상 이상적인 사회는 없을 것이다.

우리 집, 우리 가정, 우리 가족, 이는 바로 공동 운명체라는 화합심을 불러 일으키는 말이다. 모든 것을 서로 믿고 자기보다 다른 가족을 이해하는 사랑으로 교섭되므로 가정 안에서는 대립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가정 안에서는 긴장이니 불안이니 하는 속박이 없으며 경쟁, 쟁탈, 시비, 수원讐怨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 그저 평화롭게 자기를 내맡기고 털어놓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영역이라는 것, 이것이 가정생활의 특징이다.

한 사회도 하나의 생명의 지속체요, 그것은 유한한 생명들이 지속체요, 그것은 유한한 생명들이 한 길 이어져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한다. 가정이 비연속의 연속인 것처럼 사회도 비연속의 연속이다. 가정이 영위되어 나가는 데 있어야 할 질서나 사회가 유지되기위해 요구되는 질서는 그 원리에서 같은 것이다. 개인이 가정을 통해 사회에 모여들어 사는 것이므로 사회에는 질서의 복잡성이라든가 병행 같은 것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여러 가지 원리가 범위의 신축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된다. 말하자면 가정질서가 곧 사회질서의 원형, 또는 추형 雛型이어야 한다는 것이다.가정 질서에서 부부윤리는 바탕이요, 부모 자녀는 종적 시간에 따른 상하관계이며, 형제 자매는 횡적 공간을 통한 피차 관계라고 할때, 사회질서에서도 그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즉 기본 구성원은 모든 남녀, 즉 군중이며 가정에서의 상하관계 같은 것은 옛날 같으면 군신관계를 들 수 있을 것이나 그보다는 세대의 선후라든가 직분의 고하라든가 친척의 항렬 등으로 이루어지는 계층관계를 칠 수 있을 것이다.

2) 가족주의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하나의 커다란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유교의 일반적 태도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선택하진 않았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사실을 자각하면서 자신의 육신을 나아준 부모와 자기 존재의 근원인 하늘과 땅에 대하여 인간은 은혜를 받은 것으로 인식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을 가장 큰 의무로 여기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부여받은 육신도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 부모가 물려주신 것으로서 부모의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는 자신의 생명도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개인으로서 완전히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부모를 통하여 조상과 연결되고 자식을 통하여 후손으로 연결되는 한 매듭으로서 자신이 지켜야할 책임과 역할이 있다.

가정은 생명 지속의 시간성과 생명확충의 공간성이 교차되는 지점이다. 이곳은 한 생명의 중심이며 그 핵을 둘러싼 여러 생명이 회합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요한 가정의 의미는 그 혈연 중심으로 모여든 생명군이 정의 情誼의 교감으로 얽혀서 이해를 모르고 평화적으로 살아가는 생활의 최소이자 최선의 단위라는 사실이다.

한 사회에는 여러 연령층이 있다. 이 연령층을 놓고 보면, 다 같이 현재라는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실재로 현사회를 움직여나가는 계층을 중심으로 보면, 어떤 연령층은 이미 사회의 주역에서 물러나 과거화된 경우도 있고, 어떤 연령층은 다음 세대의 주역을 맡을 준비단계로서 현재이면서 미래에 속하는 경우도 있는 등 구분이 있다. 현재의 미래는 얼마 안가서 현재의 현재가 될 것이고, 그때의 현재의 현재는 현재의 과거로 밀려나간다. 이렇게 인생은 그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미래에서 현재, 현재에서 과거로 옮겨간다. 만일 사회기능이나 직분에서 나타나는 상하 관계를 시간의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자연적 추이로 본다면 서로간의 대응되는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국가 조직에서 여러 기구에 이르기까지 필연적으로 유한과 유한의 연결을 요하게 되고, 따라서 기구마다에도 사회전반에서처럼 현재속의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게 마련이다. 만일 한 사회는 물론 한 기구가 이런 시간의 종적 안배없이 어느 한 연령계층에 편중되어 있다면, 그것은 불건강한 기구요 미래가 기약되지 않는 극히 유한한 생명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실제적인 관계를 깨닫는다면, 사회의 상하관계는 바로 가정의 상하관계처럼 법적 제도니 힘의 강압이니 하는 외적 질서 규제없이 내적 정의만으로도 평화적으로 혹은 인간적 또는 가정적으로 영위되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바로 각 가정의 거울이요,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절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말하자면 결국은 한 개개인의 인격에 따라 사회질서 전반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개개인의 인격이 가정이라는 생활권을 통하지 않고 막바로 사회에 참여해서도 안되며 또 아무리 사회 기본단위가 가정이라 할지라도 개개 인격을 삼켜버린채 사회로 나아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윤리 생활의 기본 단위인 개개 인격을 말살하고 그대로 사회를 구성할 경우 여기서는 생명체가 생존단위를 잃고 자유 의지를 행사할 수 없는 집체주의 集體主義가 나타날 가능성이 많아진다.

3) 개인적 차원에서의 종교적 수행 -인간에서 시작해서 인간으로 귀결됨

유교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채찍질하여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자기완성의 길을 가도록 요구한다. 여기서 인간완성에로의 길은 인간이 자신의 성품을 따름으로써 하늘의 뜻에 일치해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하늘로부터 부여된 존재요 하늘의 명령을 받는 존재이므로 인간이 하늘의 뜻과 일치되는 것은 자신의 의무와 정당성을 충족시키는 자기완성이라 할 수 있다. 하늘과 인간이 일치하는 것은 유교적 삶의 목표요, 이상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유교에서 삶의 목표를 인간이 하늘과 일치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일치의 의미는 인간이 하늘에 흡수된다거나 하늘과 일체가 되어 인간이 곧 하늘이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삶의 최종적 목표에 도달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일 뿐이다. 오직 인간은 하늘과 일치됨으로써 자신의 의지가 하늘의 명령과 일치하는 상태에 이름으로써 가장 완전한 자율성을 누리게 된다. 공자가 70세에 이르게 된 경지인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경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성인聖人' 또는 '대인大人'이라 일컫는 것이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욕구의 충동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불완전성을 본질적 성격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완전한 자신을 성취하고자한다면 욕망의 충동을 억제하고 지켜야할 명령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때에 인간이 지켜야할 최상의 명령은 하늘의 명령이다. 이 하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육신을 갖고 있는 인간은 자신의 생활조건에 적합한 규범을 파악하여야한다. 그것은 인간의 구체적 행동과 사고에 작용할 수 있는 도덕적 규범의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 도덕 규범을 통하여 자신을 완성하는 길을 갈 수 있다.

인간이 육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하늘의 명령으로서 성품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하늘을 따를 수 있는 기준과 방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유교의 인간삶에 대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낙관적이며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현재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미숙하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인간의 삶의 의미에 역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금장태는 '유교사상의 문제들'에서 유교에 있어 '거듭남'의 구체적 양상은 인간이 자아극복과 인격적 새로워짐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공자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 안연顔淵의 인仁에 대한 물음에 답하면서, "자신을 극복하여 예법에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克己復禮, 爲仁)"라 대답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극복해야할 대상으로서의 자신과 돌아가야할 목적으로서의 예법이 대립되고 있다. 즉 여타 종교에서 의식 안에서 경험되는 죽음, 혹은 근본적으로 한 생명과의 단절과 초월을 통한 새로운 생명의 획득이 있어야 거듭날 수 있는 것과 달리 유교적 거듭남은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하여 거듭나는 '길'(道)로서의 하늘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신비한 체험보다 엄격한 윤리적 생활, 끊임없는 학습과 수양을 방법으로 취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유교가 인간의 초월이 아닌 인간의 완성으로서의 종교적 목표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4. 맺음말

먼저 주목할 점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담론으로만 여기던 기존의 편견과는 달리 유교가 매우 현실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유교는 현실과 동떨어진 덕목을 추구하는 이상주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쉬운데, 오히려 유교는 이상주의를 가장한 현실주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만하다. 여타의 종교들이 영적체험이라든지,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한 황홀경에의 도달을 필수불가결한 입문과정으로 생각하는데 반해서 유교는 미신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이성적인 판단에 우위에 둘 것을 강조함으로써 합리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17,18세기 중국과 일본에서의 반기독교적 주장과 기독교를 공격할 때에는 한결같이 기독교의 반이성적 가르침이나 미신적 요소 등을 지적하고 있다고 한다. -줄리아 칭, '유교와 기독교')

또한 현세를 내세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파악하는 데에 반해 유교에서는 미래의 삶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현세의 삶에 충실한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들과 구별되는 현실주의적인 측면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요 덕목들은 거의 예외없는 철저한 개인주의에서 출발한다. 유교에서 가족은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단위이다. 유교의 내세관은 후세를 통해서 구현된다. 그렇기 飁문에 유교에서 여성에게 부과된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녀교육일 수밖에 없고, 훌륭한 어머니의 보증으로써 또, 종족 보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부차적으로 정숙이라든지 정절 등과 같은 덕목도 따라오는 것이다. 또한 유교에서의 사랑은 작은 단위에서 출발해서 큰 단위로 확대되는 것(恕)을 특징으로 한다. 즉 내 자식과 부모를 향한 사랑과 규범이 다른 어린이와 노인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써 사회적으로 사랑과 공경이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이며 나아가 내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을 때 비로소 남도 다스릴 수 있다는 통치이념으로까지 연결이 되는 것이다.(修身齊家 治國平天下) 따라서 끊임없는 개인적인 수양이 유교에서의 이상적 인간상의 핵심적 요소가 되는데 이러한 점이야말로 훌륭한 지도자에 의해 집단적인 이상향이 실현되는 기독교, 내지 아랍의 종교들과 구별되는 유교의 개인주의적인 측면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유교적 개인주의는 '가족'을 그 중심단위로 한다는 점에서 그 핵을 '나' 개인으로 삼는 서구적 개인주의와 구분된다. 서구적 자본주의가 이러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발전된 것에 비해서, 아시아에서의 자본주의는 가족적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소위 연공서열, 정실인사, 종신고용, 인간주의 경영 등의 부정적으로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긍정적으로 조망되는 아시아적 가치의 지적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일본과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가족제도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고, 범죄율의 급속한 증가는 없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주의적인 유교의 긍정적인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논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가족주의적 질서가 유지되는 데에는 수직적 위계질서의 존재와 그에 따른 철저한 역할 구분을 당연시하는 유교적 규범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후쿠야마가 지적했듯이 가족주의 질서의 핵심은 여성이고 아시아국가들은 여성을 사회적 차별을 통해 가정의 울타리 안에 묶어둠으로써 이 같은 사회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의 경제 위기와 관련해서 이러한 유교적 가치 혹은 아시아적 가치가 자본주의 발달에 긍적적인 기여를 했는지 아니면 장기적으로 오늘의 위기를 불러들이는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동양에서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여러가지 견해들이 분분하다. 다만 유교를 전근대적 또는 근대적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하게 치부해버리기에는 (마치 유교가 종교인가의 문제를 논할 때처럼) 너무 다양한 측면들을 -그리고 그에 따르는 다양한 해석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이제 이러한 가치들 중 현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가치들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90년대 한국사회에서 유교의 재해석은 결국 근대화에 대한 반성과 결부될 수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유교의 진정한 가치는 잊혀진 채, 가족주의와 위계질서만이 남은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유교가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 깊이 성찰한 내용은 간과되고 주체를 구속하는 규범의 형태로 개개인에게 내재화된 것은 특정한 사회적 기제들이 끊임없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교의 재발견 또는 재해석은 한국 사회의 근대화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 역사적 조건들에 대하여 철저한 비판과 검토를 거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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