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유교의 상충과 대화의 모색
'천주실의'의 분석을 중심으로
송영배(서울대학교 철학과)
1. 기독교와 유교의 대화와 『천주실의』의 의미
유교적 문화권 안에서의 최초의 본격적인 기독교와 유교와의 대화는 일찍이 1583년 30세의 나이로 '짜오칭'[肇慶, 廣東省]에 온 이래 중국의 문인들에게 최초로 상당히 성공적인 반향을 일으킨 마테오 리치(利瑪竇 Matteo Ricci 1552-1610)의 저술활동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특히 그가 당시에 성리학적인 학문바탕 위에 서 있었던 여러 문인들과의 대화에 기초하여 작성한 {천주실의}(天主實義, 1603년 北京출판)는 과거 17세기 이래의 유교적 문화권 안에서 이런 동서 철학사상, 또는 유교와 기독교사상의 교섭과 교류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주었다. 필자는 그 영향력과 의미를 두 가지 점에서 보고 있다.
1)『천주실의}는 이미 400년전에 중국의 전통 문화 속에 서양의 철학사상,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에 근거하는 토미즘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전문서적이다. 2) 중국선비[中士]의 질문에 대하여 서양선비[西士, 즉 마테오 리치]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천주실의}의 서술체계에서, 기본적으로 중국문인들이 제기하는 질문의 대부분은 전형적으로 송명(宋明) 이학(理學)의 철학적 문제의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는 반면에, 이에 대답하는 마테오 리치의 철학적/신학적 해설은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사상에 바탕을 두고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천주실의}의 텍스트 분석은 동서 형이상학의 세계관적 대립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지양하여 유교와 기독교 사상이 서로 융통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모색의 근거를 찾는데 더없이 중요하다. 『천주실의}를 편찬하면서,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의 중요한 개념, 특히 '기독교의 하느님'을 바로 유교의 고전 속에 등장하는 <천>(天)이나 <상제>(上帝)와 동일한 존재로 본다는 기본 전제를 하고 있다. 따라서 『천주실의』에서는, 인격 신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천>이나 <상제>에 대한 제사와 숭배의 사상이 드러나고 있는 고대 중국의 본래의 유교사상은 기독교의 상제숭배(上帝崇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중국의 유교적 문화전통을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담한 접근성을 시도하고 있다. 다만 후대의 유학사상, 특히 송명(宋明) 이학(理學)사상의 무신론적 특성, 특히 이기론(理氣論)에 기초하는 우주의 생성발전론이란 결국 이교, 특히 불교와 도교라는 우상숭배의 나쁜 영향을 받아서 왜곡된 것이라는 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적인 철학적 개념의 틀과 토미즘의 신학사상에 기초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요컨대, 마테오 리치는 한편 유교와 기독교 사상 사이의 근원적인 동일성(同一性)을 강조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 송명(宋明) 이학(理學)의 형이상학적 구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해버리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마테오 리치의 기독교와 유교에 대한 해석과 송명 이학에 대한 비판은 17 세기 초『천주실의}가 출판된 이래로 동북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성리학에 비판적인 일부 지식인들에게 『천주실의』가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면, 또한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강력하게 묵수하려는 정통적인 성리학자들에게는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천주실의}의 분석을 통하여 첫째 유교와 기독교간의 근본적인 사유의 구조적 차이, 다시 말해, 동서철학 간의 형이상학적인 전제의 차이는 도대체 무언인가를 밝혀보고, 둘째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테오 리치는 어떻게 기독교의 면모를 중국인들에게 제시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그것에로 다가가게 하였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끝으로 필자는 결론에서 다시 한번 이들의 상충(相衝)을 검토해봄으로써 다시금 서로의 대화로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조심스럽게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마테오 리치의 心身이원론의 지나친 강조와 現世의 人生價値에 대한 지나친 輕視
마테오 리치의 해석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形]와 정신[神]이 결합된 생명체이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정신성"[神性]에 있다고 보고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그는 사람들에게 내세에서 영혼(靈魂)이 받을 영원한 행복의 추구를 권장하고 있다. 그 결과 현세에서의 인생의 가치가 어처구니없이 부정되고 있다:
현세라는 것은 우리들이 잠시 머무르는 곳이요 오래 사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들의 본집은 현세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 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곳에서 [우리들의] 본업을 이루어야 합니다! 현세는 짐승 들의 세상입니다. 따라서 짐승들 각각의 부류들의 모습은 땅으로 향하여 엎드려 있습 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백성들이기에 머리를 들어서 하늘을 향하여 순종하고 있는 것 입니다. 현세를 본래의 [삶의] 처소로 여기는 것은 짐승들의 무리들입니다. 천주께서 [현세의] 사람들을 각박하게 대하시는 것은 진실로 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마테오 리치가 강조하는 인생의 가치는 현세에서의 삶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세는 단지 내세의 영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잠시 쉬어 가는 임시 장소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바로 '정신성'[神性]이요, 그것의 추구는 육체에 얽매어 있는 영혼[또는 정신]이 현세에서의 육체의 속박을 떠나서, 다시 말해, 죽고 난 뒤에 내세에 가서야 완성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내세 지향적인 사고, 요컨대, 현세 부정적인 사고는 유교적 문화 전통에서는 제대로 이해되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공자가 "일생동안 고심한 것은 바로 현세의 '인간'과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사람 섬길 줄도 모르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자로가 또] 죽음을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삶도 아직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이와 같이 유교적 전통에서는 현세에서의 삶 속에서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교제, 또는 교류, 요컨대, 그들 간의 원숙한 '실천적 의지'가 제일차적인 관심인 것이다. 따라서 사후의 귀신에 대한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여야, [君子로서] 지식[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현세중심의 인문주의 정신에 강하게 뿌리박고 있는 중국의 문인들에게 지나친 현세부정의 논리는 그렇게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3.실체[substances 自立者]와 속성[accidents 依賴者]의 범주적 구별과 太極[곧 理] 은 사물의 존재근거[物之原]가 아니요 마음[心]이나 사물[物]의 속성이라는 주장
천리(天理)를 기본 바탕으로하여 구성된 송명(宋明) 이학(理學), 즉 성리학적인 도덕형이상학 체계에서는 천지만물의 근원을 대극(太極), 또는 이(理)로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유럽에서와 같은 천지의 창조자로서의 인격신적인 개념은 성리학적 전통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주희(朱熹 1130-1200)는 다음과 같이 인격신의 천지만물의 지배를 명백히 부정하고 있다:
저 푸른 하늘은 운행을 계속하고 멈추지 않는 바로 그것이다. 지금 저 하늘에 인격 적인 존재가 있어서 죄악을 심판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실로 말이 안되는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을 주재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말이 안되는 것이다.
주희는 이와 같이 죄악을 심판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소가 말을 낳을 수 없고 복숭아나무에서 오얏꽃이 필 수 없으며, 오직 소가 소를, 말이 말을 낳고, 복숭아나무에서는 오직 복숭아꽃이 필 수 밖에 없는 이치를 생각해 본다면 천지 만물의 무궁한 변화 발전에는 반드시 그것을 주재하는 객관적인 이치 즉 '이'(理) 또는 '천리'(天理) -- 그것을 도(道) 또는 태극(太極)이라고 부름 -- 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단 사물이 존재하면, 그 사물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치는 각각 그 존재의 당연한 법칙을 갖지 않는 것이 없으니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모두 하늘[天 자연]이 부여한 것이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희가 말하는 <이>개념은 이와 같이 ① 사물의 존재론적 근거(所以然之故)와 ② 그것의 당연한 법칙(所當然之則)과 ③ 개체의 자의적 임의성을 배제하는 객관적 필연성(自不容已)이라는 3 측면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요컨대, 주희는 현실세계의 주체적인 경험적 대상(사물)들로부터 그 사물들의 존재론적 근거와 그것의 당연한 법칙 --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존재법칙 -- 을 일단 추상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그는 모든 사물(인간 및 모든 생물)을 주재하고 있는 존재론적 근본원리를 이(理)로 규정하고 그 <이>의 객관적 필연성에 제일차적인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주희의 <이>는 -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과 유사한 - 관념적 실재성(ideelle Realit t)이라는 철학적 범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만물의 선험적인 존재론적 근거일 뿐이므로 개체의 주체적인 감각적 경험적 내용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란 (선험적으로) 하늘에 있는 것으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실로 모든 변화의 핵심이요 만류의 뿌리이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역사, 사회, 자연현상으로부터 유리되어 오직 그것의 선험적인 존재론적 근거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이>가 영원히 초역사적으로 타당한 천지만물의 주재자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미즘적 세계관에만 익숙한 마테오 리치에게는 이와 같은 송명 이학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전혀 정당하게 이해될 수가 없었다. 오직 유일신의 천지창조를 믿고 있는 그에게는 태극[太極, 곧 理]이 천지만물의 근원[天地萬物之原]이 된다는 성리학적인 형이상학적인 체계는 도저히 수용될 수가 없었다. 그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물에 대한 실체와 속성에 대한 범주적 구별을 원용하여 "태극[즉 理]가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태극이라는 것이 단지 이(理)라고 해석된다면, [그 태극은] 천지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역시 속성[依賴者]의 부류이니 스스로 자립할 수가 없는 데, 어떻게 다른 사물들을 존재케 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의 문인들이나 학자들이 '이'를 따져서 말할 때는 오직 두 경우가 있습니다. [理는] 사람의 마음[人心] 속에 있거나 혹은 [마음 밖의] 사물들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물의 정황이 사람의 마 음 속의 이치와 합치하면 그 사물은 비로소 참으로 실재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 음이 사물 속의 그 이치[理]를 끝가지 캘 수가 있어서 그것을 다 인식하는 것을 '사 물에 나아가 인식함'[格物]이라고 합니다. [理가 오직] 이 두 경우[或在人心, 或在事 物, 필자]에 의거한다면 '이'는 진실로 속성[依賴者]인 것이니 어떻게 사물의 근원이 되겠습니까? 두 경우 [理는] 모두 [이미 현존해있는] 존재물[곧 人心이나 事 物]보다 뒤[後]에 있는 것이니, [시간적으로] 뒤에 [기탁된] 것[後, 속성]이 어떻게 [이미 시간에서] 앞서 있는 것[先者, 실체]의 근원이 됩니까? 또한 저들[宋明 理學 者]은, [우주 발생론적으로]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때보다도] 앞서서 반드시 '이'(理)가 존재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는 어느 곳에 존재하였던 것 입니까? 어느 존재물에 종속되었던 것입니까? 속성[依賴者]이라는 것은 스스로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의탁할 실체[自立者]가 없다면 속성[依賴者]은 존 재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공허[空虛 nothingness]에 의탁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공허'는 의탁할 만 하지 못하니 '이'는 떨어져나감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반고[盤古,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우주의 창조자 보다] 이전에 이미 '이'가 존재했었다면 왜 [그때는] 한가롭게 있기만 했지, 활동하여 만물을 창생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누가 그것[理]을 격동시켰습니까? 더욱이 '이'는 본래 동정(動 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스스로 작동을 했단 말입니까? [理가] 원초에는 만물을 창생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바로 나중에야 만물의 창생을 원하게된 셈입니 다. 그렇다면 '이'가 어찌 의지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찌하여 [나중에는] 만물을 창생할려고 하기도 하고, [원초에는] 만물을 창생하지 않으려고 하였던 것입니까? 여기에서 마테오 리치는 우선 송명 이학에서 말하는 '이'를 자기 나름대로 충실하게 파악하여, 바로 그 점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기원하는 1) 실체와 속성의 범주적 구별과 2) 사물 생성의 시간적 순서에 기반 하는 인과법칙에 입각하여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서 '이'가 천지만물 창조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가 이해하기로는 첫째 '이'는 오직 다음의 두 경우에만 존재한다. "[理는] 사람의 마음[人心] 속에 있거나 혹은 [마음 밖의] 사물들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란, 마테오 리치가 보기에는, 실제로 경험적 세계에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천하만물, 즉 실체[自立者]들이 아니고, 다만 이들 실체들에 내재하여 이들로 하여금 그러한 존재로 이름지어 [규정해] 주는 개개 체들의 '형상인'[形相因 formal cause]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이'란 결국 만물 개개체, 즉 실체[自立者 substances]도 못되는 것이요, 단지 그들에 종속되어 있는 속성[依賴者]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체에 예속될 수 밖에 없는 속성에 불과한 '이'가 도대체 "어느 곳에 존재"하였으며 "어느 존재물에 종속"된 것인가를 마테오 리치는 따져 묻는다. 만약 '이'가 "공허[空虛 nothingness]에 의탁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공허'는 의탁할 만 하지 못하니 '이'는 떨어져나감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가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둘째로 리치는 사물생성의 인과법칙에 따라서 결과가 원인보다도 시간상 앞 설 수 없다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먼저 인간의 마음[人心]이나 (마음 밖의) 사물이라는 실체들이 있고 난 다음에, 그곳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기에, 시간상으로 뒤[後]가 시간상으로 앞서있는 것[先者]의 존재원인이 될 수 없기에, '이'는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셋째로, 리치가 파악한 송명 이학의 '이'는 '동정'(動靜)도 없고 의지[志 will]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도대체 "스스로 작동"하여 태초에 "천지만물의 창생"할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 기독교의 하느님과 같은 --- 천지만물을 창제한 근원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마테오 리치의 '이'에 대한 이러한 반박과 비판들은, 결국 --- 중국의 그것과는 --- 완전히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의 기본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물의 존재근거를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설이나 인과율적인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마주 대하고 있는 우주[世界 Welt]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물체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스스로를 움직일 수 없고 그 운동의 유발은 근원적으로 그 사물의 밖에 있는 운동인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천지만물의 운행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운동을 야기시킨 초월자의 목적에 따라서 합리적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이 또한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형이상학적인 구도에 의하면, 천지만물은 생명이 없는 존재물, "혼(anima)도 지각도 없는", 요컨대, 주체적인 생명활동이 없는 죽은 물체(dead objects)일 뿐인 것이다. 자기들을 초월해 있는 외재적 존재가 이들을 이끌어주지 않는 한, 이들은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움직여서 운동을 하고 자신을 변화 발전시킬 수 있는 능동적인 힘, 즉 운동인[efficient cause 作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끊임없이 자생하고 변화하고 있는 천지만물들의 운동의 원인을 궁극적인 원초로 거슬러 가면 이들을 만들어 내고 운동을 하게끔 한 최초의 운동인이나 그 운동의 목적을 규정한 목적인[final cause 爲者]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운동인과 목적인은 결코 이들 개체들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들 개체들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외재자, 곧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세계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초월적인 절대자 하느님과 그에 의하여 창조된 삼라만상의 천지만물들은 존재론적인 범주에서는 전혀 상이한 것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주장하는 "만물일체"(萬物一體)설이 성립될 수 없음을 마테오 리치는 강하게 변론하고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전통과는 전혀 다른 --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우주만물은 결코 자기 운동도 못하고 죽어있는 무생명체가 아니다. 우주는 생명력으로 충만하여 언제나 "생명이 끊임없이 연속되고 쉬임이 없는"(生生不息) 생명체[活物]인 것이다. 우주를 바로 생명체로 보는 유교적 세계관은 {주역}(周易), {중용}(中庸) 이래로 중국의 고전 문헌의 도처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우주 삼라만상을 모두 "생명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끊임이 없는"[生生不息] 생명적 유기체로 파악한다면, 이들은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결코 이들 밖에 초월해 있는 최초의 운동인, 요컨대 이들을 초월해 있는 '하느님'의 배려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자연계의 산천 초목이나 계절의 변화란 "스스로에 의하여 저절로 움직이는"[自然] 것으로 파악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 삼라만상의 무한한 생명적 전개의 존재론적인 원인을 특히 송명 이학에서는 -- 앞서 언급했듯이 -- 특히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만약 송명 이학에서 말하는 '이'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설(四原因說)에 억지로라도 대비하여 설명한다면, '이'는 확실히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상인(formal cause)과 비슷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개개사물들을 그렇게 이름지어주는 형상인일 뿐만이 아니라 그 사물들 안에 내재하면서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운동인(efficient cause)이요 동시에 그 운동의 합당한 당위성과 목적을 규정하고 있는 목적인(final cause)으로 필자는 보고싶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에 대한 주희(朱熹 1130-1200)의 언급들을 간략하게나마 개괄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 만물은 각기 반드시 그렇게 되어진 이유[所以然之故]와 마땅히 그렇게 [행해야 할] 법칙[所當然之則]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理)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의 본바탕과 정감의 덕,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규범 그리고 [인간 세상 밖의] 천지와 귀신들의 조화[變]며 짐승들과 초목들의 합당한 모습[宜]에 이르기 까지, 그 각각의 개체 안에는 그가 그렇게 행해야할 뿐이요 그만둘 수는 없는 당위[其 當然而不容已]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며 달리 바뀔 수 없는 [존재]이유[其所以然而 不可易者]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주 사이에는 한결같이 '이'만 있을 뿐이다. 하늘은 그것을 얻어서 하늘이 되고 땅 은 그것을 얻어서 땅이 된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겨난 것은 또한 그것을 얻 어서 본성으로 삼는다. 그것을 펼쳐놓으면 삼강(三綱)이 되고 그것을 규범으로 삼으 면 오륜(五倫)이 된다. 모두 이런 '이'가 통용된 것이니 가서 있지 않은 곳이 없 다. [모든 것이] 쇠하고 성하고 차고 비이게 되면서 순환 반복하여 끊임이 없다는 [理에 의한 이런 변화와 운동은] 아직 사물들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인류가 사라지고 만물이 다 없어진 뒤에까지 끝나면 다시 시작하고 시작하면 다시 끝나가는 것이니, 또한 혹시 한 순간이라도 멈춘 적이 없다. 그러나 뜻으로 헤아려보면 아마도 기(氣)는 이 이(理)에 의지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기'가 모이게 되면 '이' 또한 그곳에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주희의 말들을 종합해보면, '이'는 개개 사물들의 존재근거(raison d'^etre)로서 일종의 관념적 실재(idelle Realit t)이다. '이'는 개개의 사물들 속에 내재하면서 그들 각각을 그러한 개체로서 성립시켜주는 존재근거[所以然之故]이며 동시에 이들 존재의 당위성[所當然之則], 말하자면 형상인이요 동시에 목적인이 될 뿐만 아니라, 그 개개체들을 움직이게 하여 변화 발전시키는 생명적 힘, 즉 운동인인 셈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구도를 가진 중국의 지식인들에게는 개개 사물들을 초월하여 있으면서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외재적 운동인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런 형이상학체계를 가진 중국문인들에게는, 마테오 리치가 그에게 익숙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미즘적인 사유체계에 입각하여 '이'란 자립적 존재가 될 수 없으며 단지 속성에 불과하다는 반박은 도무지 이해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4. 유교의 도덕이상주의와 기독교의 상선악벌의 도덕공리론
성리학은 천리(天理)를 기초로 하는 도덕형이상학이다. 그것에 의하면, 천지간에 존재하는 모든 개개 사물들은 모두 각각 자기 내부에 자신의 이상적 완전성, 즉 '천리'[天理, 또는 理 즉 性]를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우주의 삼라만상은 성리학적 도덕존재론의 차원에서 보자면 모두 지극히 선하고 또한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든지 사물이든지 이들 개개체들이 경험적 현실세계에 존재하려면 그들 각각을 구성해주는 물질적 재료, 즉 기(氣)와 융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개개 존재물 자체 안에 존재하는 각각의 이상적 완전성, 즉 '이'는 많건 적건 바로 '기'에 의하여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요점은 바로 이렇게 은폐된 '이'를 어떻게 하면 다시 복원시키느냐하는 인간의 순수 도덕적 의지와 실천공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에 사람들에게 "천리를 온존(溫存)하고 사욕을 없애라!"(存天理, 滅人欲)하고 권면하면서 사람들이 추구해야할 최상의 목표는 바로 사욕을 제거하고 본래 '천리'로서 부여된 본성, 즉 이상적 완전성의 회복[復性]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이 은폐된 자신의 본성, 즉 이상적 완전성을 회복하려고 <결심하느냐 아니하느냐>하는 것은 순전히 도덕실천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순전한 도덕문제에는 결코 선행에 대한 포상이나 악행에 대한 벌을 면하려는 공리 타산적인 이해관계가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문인들은 천주(天主)의 상선벌악(賞善罰惡)에 근거를 두고서 인간에게 선행을 유도하고 악행을 막아보려는, 다분히 공리 타산적인 기독교의 도덕공리론에 결단코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이에 중국선비[中士]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당지옥으로 말씀하신다면 아마도 천주의 가르침은 아닌 것같습니다. 이로운 것을 쫓 아가고 해로운 것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이로움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미워하는 것이니, [그것은] 선을 [선 그 자체 때문에] 좋아하고 악을 [악 그 자체 때문에] 미워하는 [중국 본래의] 바른 뜻이 아닙 니다. 우리[중국의] 옛 성현들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이(利)는 언급하지 않고 오직 인 의(仁義)만 말할 뿐입니다. 군자가 선을 함에는 아무런 의도[無意]도 없습니다. 하물 며 이해[利害得失]를 따지려는 뜻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테오 리치가 보기에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천리에 근거하는 성선설>만으로는 인간의 악행을 막고 선행을 유도하기에는 대단히 미흡한 것이다. 왜냐하면 송명의 이학(理學)에서는 자기의 본질에 대한 자기 각성, 또는 본성의 깨달음[本性自覺]이 특히 강조될 뿐이고, -- 서양적 윤리구도에서처럼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자유의지'에 따른 '선행과 악행'의 현실적 선택[인간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하느님의 상벌]이 아니고 -- 단지 인간의 본성적 선만의 강조만으로는 도대체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선악의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교적 윤리구도에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주장[性善說]은 바로 "천주"(하느님)에 의해 인간의 마음[心]에 부여된[銘之] '양지'(良智) '양능'(良能)을 일컬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potentiality)만을 제시한 것뿐이지, 현실적인 악행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제재, 즉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효과적 방책으로는 부적절하다고 리치는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 이성적인 의지[正志]의 실현을 통하여, 잠재적인 성선(性善)을 계발시킬 수 있는 실천적 결단과 실천 행위, 즉 '본성적 선(善)의 계발'이라는 각도에서의 지속적인 선행의 축적, 즉 구체적인 습선(習善)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습선(習善)의 과정은 결코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마테오 리치에 의하면, 바로 천부적으로 부여된 자유의지에 따라서 어떤 행동을 선택했느냐에 딸려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기독교의 도덕공리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세상의 존재물이 일단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있고, 또한 그 의지를 따를 수도 그만둘 수도[곧 자유의지가] 있어야 그 다음에 [비로소] 덕(德)도 부덕(不德)도, 선 도 악도 있게 됩니다. 의지는 마음에서 발동하는 것입니다. 쇠나 돌이나 초목들은 마 음이 없으니 의지가 없습니다. 때문에 막야[ , 고대의 명검]가 사람을 해쳤어도 복수하려는 사람은 '막야'를 분질러버리지 않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기와가 사람의 머리를 다치게 했다해도 원통한 사람은 날아온 기와에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렇습 니다.'막야'가 자르고 절단을 [잘] 한다고 해서 그에게 공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 다. [지붕 위의] 기와가 비바람을 막아주어도 사람들은 그것에 보답하고 감사하지 않 습니다. 한 일이 마음에서도 의지에서도 [우러나 온] 바가 없기 때문에 덕도 부덕도 없고 선도 악도 없어서 이들을 상줄 수도 벌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짐승이라면 짐승 의 마음과 의지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옳은지 그른지를 변별할 수 있는 이성 [靈心 reason]이 없으니 느낀 바에 따라서 멋대로 즉시 반응하는 것이며 이치를 따져 서 자기가 할 바를 절제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예[禮]가 되는지 비례(非禮)가 되는지 를 분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역시 스스로 알 턱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 선인지 악인지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오직 사람만은 그와 같지 않아서 밖으로 일을 거 행하고 안으로는 마음을 다스려서, [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 합당한지 아니한지 를 [압니다.] 지각할 수도 있고 [그에 따라서 할 일을] 할 수도 그만둘 수도 있습니 다. 비록 수심(獸心)이 있다해도 이치로 마음을 주재하면 '수심'이 어찌 주재하는 우 리들의 마음의 명령을 어길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도리에 따라서 의지를 발동하면 곧 덕을 행하는 군자가 되는 것이니, 천주께서는 그런 사람을 돕습니다. 우 리의 의지가 수심(獸心)에 빠져들어 바로 죄짓는 소인이 되면 천주께서는 또한 이들 을 내쳐버립니다.[...] 이렇다면 의지가 선과 악의 근원임이 명백히 드러난 셈입니 다.[...]세속에서도 대개 명예와 덕망의 득실을 중하게 여기고 개인적인 재물의 손 익은 가볍게 여깁니다. 때문에 [맹자에서는] "{춘추}(春秋)가 이루어지니 반역하는 신하들이나 [부모에게] 못된 자식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반역 하는 신하와 못된 자식들이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악명의 폐해됨이 끝이 없음을 두려 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맹자는 우선 인의(仁義)를 [담론의] 주제로 삼았으나 그 뒤 당시의 군주를 만날 때마다 [그가] 인정(仁政)을 베풀기를 권하고는 오히려 [그렇 게 하고서도] "[천하를 통일하는 최고의] 왕이 되지 않은 일은 아직은 없었다."는 말로 말끝을 맺고 있습니다.'천하에 왕이 되는 일'이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겠습니까? 사람이라면 누가 친구들을 이롭게 하고 어버이와 인척들을 이롭게 하는 것을 기뻐 하 지 않겠습니까? 이득을 마음속에 떠올리지 않았다면 왜 그것을 친구나 어버이에게 주려고 하겠습니까? 인(仁)을 실현하는 방도는, ({논어}에) "자기가 갖고자 하지 않 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이득을 바 라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 해도, 이득을 넓혀서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오히려 꼭 합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득을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바로 그 이득이 거짓되었 고 그것이 의(義)에 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역}에 "이로움(利)은 의(義)와 화합 한다."고 했고, 또한 "이로움의 용도는 몸을 편안히 함으로써 덕(德)을 높임에 있 다."라고 하였습니다. [...] 내세의 이득을 중시하는 이는 반드시 현세의 이득을 경시합니다. 현세의 이득을 경시하면서, 윗사람을 범하고, 뺏으려 다투고, 아비를 죽 이는 일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내세의 이득을 바라게 하는 것이 정치를 함에 무슨 어려운 문제가 되겠습니까?
인간이 다른 만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성은 바로 인간이 가진 이성적 추리능력[靈才 rational inference]에 있으며 인간의 선행과 악행은 이런 시비선악의 판단에 따라서 행동을 결정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마테오 리치의 인간관과 윤리관에서 보자면 유교의 순수 도덕적인 복성설(復性說)은 권선징악을 효과적으로 도모하기에 너무나 미흡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로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 결과에 따른 하느님의 상벌이 무엇보다도 핵심적인 사항이었기 때문에 내세에서의 복락의 취득이라는 그러한 '이득'의 추구는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의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이와 같은 기독교의 도덕공리론은 순수도덕이상론의 영향을 받고 있는 중국문인들에게는 상당히 천박한 것으로 보였다. 마테오 리치는 그의 다른 저작 {기인십편}(畸人十篇)에서 인간의 사후에 하느님이 내리는 상벌의 공리론에 거부감을 보이는 중국의 문인 공대참[ 大參, 인명미상]의 유가적 도덕수양론을 소개하고 있다. 공대참은 현세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양심의 판단을 강조하면서 현세에서의 양심에 따른 선행공부를 더욱 의미 있게 권장하고 있다. 공대참은 마테오 리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기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선생께서는 사람[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보응을 논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선행과 악 행, 고통과 쾌락[의 차이]는 아주 작아서 서로 서로 걸맞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아 주 작은 것 중에는 또한 법률로 따져 물을 수 없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이나 법률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우리 작은 가슴속의 임금인 양심은 옳 고 그른 것을 지각하여 철저하게 보응합니다. 보응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요 지 금[당장]에서 하는 것입니다. 죽은 뒤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덕을 베푸는 사람[仁人] 은 천당, 곧 본심(本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본심이 평안한 땅이요 낙원입니다. 저절로 마음이 흡족해지고 저절로 기뻐서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덕스런 마음을 한번 베풀었으면 바로 복락(福樂) 한 개를 더 추가한 셈입니다. 모든 덕을 가 추게 되면 곧 모든 복락을 다 갖춘 셈입니다. 따라서 '인'을 이룬 사람[仁者]은 정신 의 즐거움을 크게 이루어내었다고 말합니다. 나쁜 생각이 마음속에 생기면 그 마음 이 곧 고해(苦海)입니다. 죄가 마음속에 생겨나면 수백 수천의 재앙의 기회가 수시로 멋대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나쁜 마음은 스스로가 낭패를 당하고 스스로가 벌받은 셈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한번 어기면 스스로 재앙 하나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멋대 로 하고 법도가 없으면 그것이 지옥의 중벌입니다. 왜냐고요? 내가 일단 천명(天命) 을 어겼으면 곧 내 스스로 수치심이 들어서 나를 고발하고 내 죄를 따져서 정죄하니, 내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습니까? 곧 내 스스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나를 죄이고 옥 에 가두어 두는데, 내가 어찌 도망칠 수가 있겠습니까? 본성의 천리(天理)로 부터 심 판하여 내가 한 짓에 따라서 벌주니 내가 뇌물을 주고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자비스런 용서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애통과 참회와 참담함 등등 여러 감 정들이 사방에서 내 속을 공격하고 재앙과 독기는 [정해진] 방향이 없으니 내 어찌 피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남의 [눈을] 가린 사람도 자기는 가릴 수 없으며 남의 [눈 을] 피한 사람도 자기는 피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어려운 환란을 당하면 현자나 못 난 이나 크게 다를 바 없으니, 대개 고생과 즐거움은 다 같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하니 [사람의] 피부만 보지 말고 그 속을 보십시오. 얼굴만 보지 말고 그 마음 속을 보십시오! 군자는 밖의 환난으로 자기의 [수양을 닦는] 즐거움을 바꿔서는 안 되며 소인도 밖의 화려함으로 [군자가 되지 못한] 자기의 근심을 멈추어서는 안됩니 다. 이렇다면 덕행과 부덕에 대한 보상은 내 몸[의 양심] 안에 있는 것이요, 몸 밖 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이를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5. 마테오 리치의 유교 윤리의 개조와 기독교 윤리이상: -- 기독교적 인[仁 즉 천주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통한 자아의 완성 --
토마스 아퀴나스(1225?-74)에 있어서, '이성'[intellect 司明者]의 기능은 바로 추론을 통하여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변별을 해주는 인식능력이라면, '이성적 욕구'(intellectual appetite), 즉 '의지'[will 司愛]의 역할은 인간의 도덕적 선의 구현에 있다. 리치는 이런 아퀴나스의 생각을 중국적으로 변용 하여 이제 중국선비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성의 큰 공능은 [사회적] 의(義)의 [인식에] 있고, 의지의 대본(大本)은 인(仁)을 [실천함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군자(君子)는 '인'과 '의'를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필요한 것이니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습니다. 오 직 이성만이 '인'의 선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의지 [司愛者]가 그것을 욕구 하여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의지는 의(義)의 덕을 욕구합 니다. 그 다음에 이성[司明者]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仁)은 또한 '의'의 최고의 핵심입니다. '인'이 지극하면, 이성[의 활동]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군자(君子)의 배움은 '인'을 위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리치는 인간의 이성이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객관적인 의(義)요, 또한 이성적 의지가 추구하는 것이 도덕적인 인(仁)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의 인간윤리가 바로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윤리이상 -- 즉 인(仁)과 의(義)의 추구 -- 과 결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인간과 인간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서로를 올바르게 융합시킬 수 있는 '인간다운 사랑의 실천', 즉 '인'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함으로써, 더욱 더 기독교의 윤리 이상이 유교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치가 말하는 '인'(仁 )의 핵심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덕의 종류는 많으니,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지금 선생님을 위하여 그 대 강을 말씀드리자면, '인'이 그 핵심입니다. 대강을 얻고 나면 나머지는 부수되어 나 옵니다. 따라서 {주역}(周易)에 "<원>(元)이란 선(善)의 으뜸이다. ... 군자는 <인> (仁)을 체현(體現)하였으니 사람들의 으뜸이 될 만 하다."[{周易}[乾卦][文言]]고 하 였습니다. '인'이란 바로 두 마디로 그 뜻을 다 말할 수 있습니다. "천주를 사랑하라! 천주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천주를 사랑하 는 사람은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라!" 이 두 가지를 실천할 수 있으면 모든 행동이 다 이루어진 것이겠습니다. 그러하니 둘이지만 또한 하나일 뿐입니다. 누가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받들어 사랑할 것입니다! 천주가 인간을 사랑합니다. 우리들이 진실로 천주를 사랑한다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리치가 말하는 '인'이란 궁극적으로 만유의 창조주인 <천주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천주가 사랑하는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인간사랑> 외에 다름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런 <하느님에 대한 사랑> -- 즉 기독교적 '인' -- 이란, 바로 구체적 상황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 사랑의 실천행위에 있음을 리치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주를 사랑하는 공효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진실된 것이 없습니다. [{論 語}에] 이른바 [인(仁 )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 으면서, 어떻게 진실 되게 하느님(上帝)을 섬긴다고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사 랑하는 것은 공허한 사랑이 아닙니다. 누가 배고파하면 먹여주고, 갈증을 느끼면 물을 먹여주고, 옷이 없으면 입혀주고, 집이 없으면 재워주고, 우환이 있으면 동정하고 위 로해주고, 어리석으면 가르쳐주고, 죄를 지으려면 올바른 말로 말리고, 우리를 모욕해 도 용서해주고, 죽으면 장사지내주고 그를 위해 대신 하느님께 기도해주며, 또한 살아 서나 죽어서나 하느님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천주의 사랑과 인간사랑의 도리>를 다 듣고 난, 중국의 선비들은, 자기네들의 '가족윤리'와 그에 기초하는 대인관과 국가관 속에서 자기의 도덕계발을 말하는 유교적 윤리 이상 보다 더 포괄적인, 새로운 윤리이상을 접하고서 상당한 호기심과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6. 결론: 기독교와 유교의 대화의 새로운 지평
{천주실의}에서 개진된 많은 철학적인 문제들 중에서 필자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특히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하나는 형이상학적인 "관념적 실재"로서의 천리(天理)에 기초하고 있는 송명 이학(理學)이라는 일종의 도덕형이상학에 맞서서, ---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인 천주의 만물창조와 주재(主宰), 인간 영혼의 내세에서의 상벌의 도리 등을 밝히기 위하여 -- 마테오 리치가 설명하고 있는 1) 극단적인 심신(心身) 이원론, 2) 특히 송명 이학의 핵심개념인 '이'[또는 太極]의 만물근원설에 대한 부정, 그리고 3) 기독교의 도덕공리론에 대한 논의의 개략적인 소개이다. 이들에 대하여 필자는 각각의 주제에 대하여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출발하는 비판적인 대비적 고찰을 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마테오 리치가 -- 성리학 메시지의 핵심인 '인간의 자아회복'[復性說] 또는 '도덕적 자기계발'을 의식하면서 -- 이것에 대한 보다 낳은 대안으로서 제시한 -- 기독교의 신앙에 바탕을 둔 -- 인간 수양론, 즉 기독교 윤리 이상론에 관한 논의의 흥미로운 전개이었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전혀 생소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신학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자기의 논지를 이끌어 가면서도, 때때로 고전유교경전과 연관하여 기독교 이론을 설득하고 있는 리치의 진지한 노력은 경이롭게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논의들이 과연 그 당시 중국의 문인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의 전통적 사고와 정말 얼마나 잘 융합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비판적인 반성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필자가 본문(2,3과 4장)에서 이미 동서형이상학의 구조적 차이점을 대비해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설"(四原因說)과 지나친 "목적론적 세계관"에 의존하고 있는 마테오 리치의 성리학적 이론 틀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은 성리학적 소양을 가진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두 번째의 유교를 넘어서는 기독교의 윤리이상론의 개진은 그러나 독창적인 면이 많다고 하겠다. 물론 정신과 물질, 또는 영혼과 육신의 과도한 대립과 이분법을 전제하고서 전개되고 있으나, 그런 서양적 형이상학으로부터 이끌어낸 기독교의 윤리의 진지성과 참뜻이 -- 마테오 리치에 의해 한편으로 유교적 윤리적 개념과 융합하면서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적인 새로운 내용을 부가함으로써 -- 유교적 지성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마테오 리치의 이런 '동서사상의 융합'의 독창성은 유교문화와 융합하는 기독교의 토착화(the Enculuration of Christianity in Confucian Culture)라는 측면과 관련하여 정말 중요한 의미와 시사점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공대참( 大參)의 의견 개진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리학적인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내면적 양심의 판단과 그 양심에 의해 파악되는 천리(天理)의 발양이 무엇보다도 문제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교적 도덕형이상학에서는 인간의 양심에 근거하는 인본주의적인 도덕론이 뚜렷이 각인 되어 있음을 보게된다. 이런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天主) 또한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는 양심 이상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천주실의}에서 중국선비[中士]는 하느님[上帝]의 덕이나 능력에 대비될 수 있는 인간 내심 속에 있는 양심의 중요한 역할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본연의 양심이 다름 아닌 하느님, 즉 "천주상제"(天主上帝)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하느님이 외재적 초월자가 아니라 바로 "내심의 하느님"(內心之上帝)인 것이다.
하느님의 덕은 진실로 크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 역시 지극한 덕을 갖추고 있습 니다. 하느님은 진실로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도 모든 일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한번 옛 성인들을 시험삼아 보자면 [그들은] 근원과 조화하여 사물[의 이치]를 열었고 가르침을 세웠으며 인륜[의 도리를] 밝혔습니다. 쟁기와 끌과 옷짜는 틀로 백성들을 양육하였으며 배와 수레와 재물로 백성들을 이롭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기틀을 만들었고 만세불변의 큰 법도를 내려서 온 세상이 그것에 의해 영원토록 안정되었습니다. 옛날 성인이 없었는데, 하느님 스스로 작업을 하고 스스로 일을 수립하여 지극한 정치에 이르렀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으로 따져보면 사람의 덕과 재능은 비록 하느님이라 해도 뛰어넘어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천지의 창조가 오로지 하느님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사람들]은 이런 자기 마음[良知良能]의 묘용(妙用)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 이 마음[良知良能]은 멀어서 가지 못할 곳이 없고 높아서 못 오를 곳이 없으며 넓어서 담지 못할 것이 없으며 작아서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으며 딱딱하여 [속을] 재어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네모난 한 치의 [심장] 속에 [마음이] 엄연한 천주(天主)처럼 계심을 잘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天主]이 아니고서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천리(天理)를 도덕형이상학의 기초로 삼고 있는 송명 이학(eine auf den innerweltlichen tianli[天理] aufgebaute Moralmetaphysik des Neu-Konfuzianismus)에서는 하느님이란 결국 현세 인간의 양심의 반성과 통찰을 떠나서는 달리 생각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하느님이란 외재적 초월자인 것이 아니라 개개의 사물들 속에 잠재해 있는 천리(天理) 그 자체인 것이다. 특히 인간의 경우 양심이 곧 천주인 셈이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에서는 현상계를 초월하여 밖에서 이를 주재하고 보살피는 초월적 하느님이 문제가 되고 그 하느님의 의도와 목적에 의하여 천지만물은 생성되고 발전하여 그 목적을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본질은 바로 초현세적인 하느님에 의한 목적론(die ausserweltliche Teleologie des Christentums)의 추구에 있다고 정의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 이래의 기독교적 전통에서도 바로 천주의 존재증명을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에서 찾아왔다는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마테오 리치 역시 천주의 존재증명을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양심에서 찾고 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누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서 하늘을 바라볼 때 '이 가운데 반드시 주재하는 분이 계시는 구나!'하고 가만히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 우리들이 배우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양능(良能)입니다. 지금 천하의 모든 나라 [만민들]에게는 각기 스스로 주어진 참마음이 있어서 -- 서로 말해주지 않았어도 -- 모두 천상의 유일한 지존자를 공경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은 슬픔을 애소하고 인자한 부모에게 그러하듯이 [그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필자는 기독교와 유교 사상 사이의 보다 더 깊은 대화의 새로운 지평은 바로 이와 같이 기독교에서나 유교에서도 함께 논의될 수 있는 인간의 양심의 소리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다시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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