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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교역자의 자아발견과 자기개발

맑은샘77 2013. 7. 18. 23:23
부교역자의 자아발견과 자기개발 -역량 갖춘 목회자로 준비하는 기간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이권희 목사 / 신일교회

▶ 들어가는말

미래의 장군을 만드는 요람,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사관생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장군으로서 양성하기 위해 필요한 지성, 감성 그리고 야성을 개발시킨다고 한다. 심지어 장군의 품위유지에 필요한 에티켓과 승마와 골프까지 가르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는 장차 장군으로서 필요한 역량과 조건을 완비시키려는 목적 때문이다. 기업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모 재벌 그룹이 한 사람의 인재를 모시기 위해 자가 비행기까지 띄운다고 한다. 이는 사람을 중요시 여기는 현대 사회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반면 교회는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교회 내에서 부교역자는 여전히 담임목사의 빛에 가린 ‘영원한 2인자’로 자리매김 해오고 있다. 한국 교회는 준비된 교역자들을 데려다가 교회의 구미에 맞게 써먹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부교역자를 키우거나 개발시키는 데 관심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부교역자의 위치는 불안정하다.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모르는 임시직이다. 담임목사나 성도들의 부교역자에 대한 인식 또한 그리 따뜻하지 못하다. 잠깐 머물다가 떠날 사람 정도로 생각한다. 어떤 교회는 부교역자를 부속품 정도로 생각한다. 부교역자에게 자신의 비서 역할에서부터 운전, 세차, 원고 대필, 심지어 가사 일까지 맡기는 담임목사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부교역자 자신도 사명감이나 당당함보다는 의무감이나 마지 못하는 자세로 사역을 한다는 사실이다. 담임목사가 되기 위한 실습시간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부교역자들은 ‘생존형 부교역자’로 전락한다. 생존형 부교역자는 부교역자로 일하는 것이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연히 자신의 위치와 사역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다. 사역에 기쁨이 없으며 행복하지 못하다. 좌절에 빠지기 쉬우며 다른 사역지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이름하여 ‘철새 목회자’가 되는 것이다.

반면 부교역자로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부교역자들은 ‘웰빙(번영)형 부교역자’다. 이들은 스스로의 위치와 사역에 만족한다. 하나님이 언젠가 담임목사의 기회를 주시는 때를 위해 철저히 준비한다. 자연히 사역에 기쁨이 있다. 한 교회에서 인정을 받으며 오래 사역한다. 다른 사역지로 옮기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필자는 부교역자 시기야말로 미래를 준비하고 역량을 갖춘 목회자로서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기간은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를 개발할 수 있는 기간이다. 원래 뛰어난 사람은 예외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부교역자들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스스로를 개발하지 않으면 미래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교역자는 자아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해야 한다. 담임목사를 도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사역에 충성하면서 어떻게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를 개발함으로 성공적인 부역자가 될 수 있을까?

▶ 부교역자의 자아 발견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라
부교역자로서 스스로의 위치와 사역 문제는 누구의 시각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부교역자는 담임목사의 ‘협력자’이자 ‘동역자’이다. 또한 담임목사와 ‘같은 입장’에 선 사람이요, 담임목사와 ‘같은 편’이다. 물론 부교역자가 담임목사보다 목회의 경력에서는 뒤질 수 있다. 연륜은 짧으며 미숙해 보이며 여유도 없다. 하지만 부교역자가 담임목사를 기죽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타는 사명감이다. ‘하트’(heart)라고 하는 것이 불타 올라야 한다. 젊었을 때부터 소명의식에서 승부를 걸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어떤 목회자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 담임목사가 부교역자에게 도전 받는 것이 부교역자의 영적 패기, 즉 소명의식이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도전을 받는 것이 바로 강한 사명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부교역자 시기는 아마추어일 수 있다. 아마추어를 꼭 ‘비전문갗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아마추어’는 본래 ‘애호갗라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사랑한다’ 혹은 ‘애호한다’는 의미이다. 프로는 자신의 생명이 달린 차원이다. 그러기에 전문가적인 식견과 노련함이 배어 있다. 하지만 프로에게 그것이 짐이요 멍에일 수 있다. 아마추어는 다르다. 정말 사랑하는 것이다. 골프경기를 보라. 얼마나 많은 갤러리들이 운집해서 숨을 죽이면서 경기를 보는가?

흔히 담임목사들이 부교역자들에게 “당신들이 담임목사라면 이렇게 하겠느냐?”라는 말을 듣는다. 맞는 말이다. 모든 부교역자들이 자신이 담임목사라는 의식을 가지고 사역한다면 목회현장은 훨씬 풍성해지고 윤택해질 것이다. 교회마다 부흥의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그렇지 못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부교역자는 담임목사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담임목사만큼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담임목사가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 내 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삯군이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영혼을 맡기시겠는가? 부교역자의 시기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애틋함이 날마다 살아 있어야 할 것 아닐까? 전문가가 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너무 빨리 프로가 되려 하지 말라. 섣불리 프로가 되면 본인도 힘들고 성도들도 힘들다. 전문가가 되기 전에 목사로 부르심에 감사하라. 목사직을 사랑하라. 그런 의미에서 모든 교역자는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강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위치를 알라
부교역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 진정으로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간파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위치를 알 때 가장 아름답다. 운동경기를 해 보면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위치선정이다. 축구도 그렇고 농구는 더욱 그러하다. 테니스 또한 위치 선정이 필수인 것으로 알고 있다. 프로일수록 위치선정이 빠르며 정확하다. 교회에서 부교역자의 정체성은 자신의 위치선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28:20).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라. 한결같이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위치를 지켰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끝까지 지킨다. 심지어 그를 추종하던 자들이 모두 예수님에게로 갔을 때에도, 자신의 제자들이 불평을 해도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신약의 바나바를 보라. 그는 사실 안디옥교회의 담임교역자였다.

그가 바울을 안디옥교회에 모시고 온 후 사도행전 13장 이후에는 바나바는 사실상 퇴장한다. 대신 자신은 ‘아름다운 2인자’로서 머물게 된다. 반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해 실패한 경우도 많다. 최초의 사람 아담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했을 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천사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보다 높아지려 했을 때 타락한다. 목회는 자신의 위치를 알 때 아름답게 열매를 맺는다.

자신의 위치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자신의 역할과 위치선정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좌충우돌한다. 부교역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자기 위치를 알고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부교역자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늘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부교역자는 목회자이기 전에 피조물이요 일꾼이요 청지기다. 청지기는 맡은 자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사신 거룩한 공동체다. 교회를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영혼들도 역시 교역자에게 맡기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도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했다(고후 1: 24). 목회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바로 알았던 것이다. 베드로는 영적 지도자들에게 교회에서 부교역자는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영적 모델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마더 테레사의 말을 기억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몽땅 연필이다.”

어떤 부교역자는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교회 내에서 물의를 일으킨다. 심지어 담임목사의 권위에 도전한다. 자신의 위치에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이루려 하는 무모함을 드러낸다. 물론 실력이 있는 것을 어떻게 감추겠는가? 하지만 진정으로 그가 지혜롭다면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능력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지혜다. 어떤 사람은 부교역자로서 약방의 감초처럼, 이 곳 저 곳에서 낄 때 끼지 않을 때를 분별하지 못한다. 그것처럼 추한 모습이 없다. 반대로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역할을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열중쉬어만 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위치를 알라.

이 원고는 교회갱신을위한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옥한흠 목사)가 8월 23일 ‘교회여 일어나라, 그리고 빛을 발하라’란 주제로 개최한 영성수련회에서 이권희 목사(신일교회 담임)가 선택특강을 통해 강연한 글이다. <편집자 주>

출처 : 말씀의 공간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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