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설교학

불신자와 청년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설교하십니까?

맑은샘77 2013. 7. 6. 16:12

불신자와 청년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설교하십니까?

 



제게는 강해 설교가 중심을 이루는 설교 형식이고 또 가장 편하게 설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 사역한 것이 ‘찾는이’들(나들목교회에서는 불신자들에게 긍정적인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 이 단어를 쓴다)에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였어요. 그들에게 성경을 이야기해 주면서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콘텍스트의 문제를 갖고 그것을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했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보고 그에 대해 성경이 뭐라고 가르치는지를 거꾸로 찾아가서 얘기해 주는 방식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주제별 설교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일에 불신자와 신자 모두에게 필요한 주제와 이슈를 삶의 콘텍스트에서 찾고, 그 이슈를 텍스트인 성경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불신자와 신자가 공감하는 이슈들을 매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요?

처음에 이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어요. 차라리 불신자들만 놓고 설교하든지, 아니면 신자들만 놓고 설교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발견한 점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대부분의 회중은 공감하는 이슈들을 갖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찾는이’들이 많이 오지만 여전히 60~70%는 신자들입니다. 한동안 어디에 초점을 맞춰 설교해야 할지 방향 정하기가 쉽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실제적이고 적절한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자와 신자 모두에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신자들은 기독교가 자신의 삶에 실제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성 교제, 사랑, 성공의 문제 등에서 말입니다.

한 번은 친구 한 명이 저희 교회에 왔다가 믿기로 결심했는데, 그 이유가 그날의 설교 주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설교 시리즈 주제가 “건강한 여름나기”였는데, 그날은 여성들의 노출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것이었어요. 그 친구가 “야, 나는 교회에서 그런 문제를 설교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런 개인적인 것부터 시작해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를 찾아서 다양하게 설명합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니까 불신자들이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 사람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며 정죄하고 쫓아다니면서 심판하시는 줄로 알다가, 우리에게 정말 풍성한 삶을 주길 원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사랑하라는 원론적인 말을 수백 번 들었지만, ‘어떻게’ 사랑하라고 구체적으로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설교자들이 텍스트에 대한 고민보다 그 텍스트가 콘텍스트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씨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목회자들이 상황화에 따른 내용들을 세부적으로 분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죠. 설교자가 텍스트 자체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는가가 설교의 기초라면, 설교의 완성은 그 설교가 전달되는 콘텍스트 대한 이해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말씀이 회중의 마음에 분명히 꽂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적 측면, 문화적 맥락, 사회적 현실, 역사적 흐름 등을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정도까지만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구약의 설교자 중에서 아모스를 굉장히 존경합니다. 아모스는 뽕나무를 치는 농부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이스라엘 주변국들의 국제 정세에 대해 통달하고 있었음에 놀라울 뿐이에요.

텍스트가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 듣기 연습이 중요하다면, 또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콘텍스트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때 회중이 당하고 있는 필요와 당시는 느끼지 못하지만 꼭 필요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메시지가 날카롭게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성도들의 고민도 많은 경우에 현실적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현실적 문제를 복음의 관점에서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필요라는 측면에서 느껴지는 필요(felt need)와 진정한 필요(real need)를 구분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두 가지를 모두 다뤄야 합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는 현실적인 문제이지만,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진정한 필요에 닿게 됩니다. 자신이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을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진정한 필요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느껴지는 필요가 채워질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가 느껴지는 필요의 진정한 답변입니다.

이 답변을 사람들에게 주는 데 있어서 어떻게 실제적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위해 목회자 자신은 완벽하지 않지만 스스로 자신에게 적용하는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설교가 책상 위에서만 이뤄지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회중이 살고 있는 시장 바닥으로 가야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 아예 필요도 느끼지 못할 때도 있어요. 예를 들면, 통일 문제 같은 것입니다. 통일 문제에 대해, 남쪽 사람들은 느껴지는 필요가 없어지고 있어요. 그것을 위해 목회자는 남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할 필요가 있어요. 사실 현대 마케팅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필요’를 창출한다고 그러잖아요. 사람들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필요를 느끼게 해서 물건을 팔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보다 더 치열하게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영적 필요를 느끼게 해 주고, 그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우리가 십자가 복음만을 전해야 하며,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모두 들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과거에 한국은 단순히 사고하고 결정해야만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굉장히 복잡해졌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은 과정이 중시되는 문화로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문화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생존의 문제였기에 ‘살거나 죽거나’였습니다. 신앙도 ‘믿을래, 안 믿을래?’ ‘천당갈래, 지옥갈래?’와 같이 단순히 결정해야 하는 내용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접근하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 하고 있는 사역은 과정 중심적입니다. 한 번 듣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나중에 또 들어야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연결되는 내용으로 설교합니다. 한 번은 용서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용서 시리즈를 들은 ‘찾는이’들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용서는 인간의 성숙과 함께 가야 할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겁니다. 이런 얘기를 불신자들이 하는 거죠. 그러고 나서 그 용서의 중심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복음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거죠. 저는 오늘날 불신자들에게 그런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물론 때로 전도 집회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 집회는 이미 수확에 준비된 사람들을 얻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수확에 준비가 안 된 사람은 전도 집회에 와도 수확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차원을 통해 건드리면, 열매가 툭 하고 떨어질 정도로 준비가 된 사람들이 전도 집회에서 복음을 듣고 영접하는 거죠. 물론 아주 능력 있는 전도자가 설교해서 수확에 준비도 안 된 사람이 메시지를 듣고 바로 회심하는 일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전도 집회는 이미 준비된 사람을 수확하는 행사라고 봅니다. 따라서 전도 집회를 잘못하면 덜 준비된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하고 나서 더 이상 복음을 듣고 싶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들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초대 받고 전도 집회에 와서, 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갈 수도 있다는 거죠. 따라서 ‘복음 전도’(evangelism)보다 ‘복음 전도 전단계’(pre-evangelism)가 필요합니다.
또 전도 집회에서 전해지는 복음이 어떤 때는 복음이 아닐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복음의 주변만 맴돌면서 결단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회심을 요구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복음을 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회심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해 한 번 추구해 보겠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라는 의미에서 손을 들거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회심과 관계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분명히 전하고, 회심을 요구할 때는 분명히 요구하는, 분명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믿어요.

목사님께서 구체적으로 복음 전도를 할 때, 주된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제가 전도 설교할 때 반드시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이 중요하고, 두 번째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으로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세 번째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 중요하고, 네 번째로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인이신 인생, 화목한 관계를 누리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략 이런 내용으로 설교하는데, 실제 설교에서 이 말씀을 그냥 하면 회중에게 전달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중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복음과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다양한 방법이 있겠죠. 그것은 매우 창의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의대생들에게 설교할 때가 있었어요. 의대생들은 매우 짜여지고,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 지쳐 있는 친구들이거든요. 의대생들에게 여러 가지 필요가 있겠지만, 그때 제가 ‘자유’에 대해 설교했어요. 그 전도 집회에 저희 교회의 재즈 밴드와 함께 갔습니다. 재즈라는 음악 자체가 갖고 있는 속성이 자유, 다양함의 조화 등이잖아요? 결국 개개인의 독특성이 있으면서 전체가 어우러지는 하모니가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재즈 음악 연주를 듣고 난 다음에 재즈가 갖는 그런 자유로움과 전체 하모니 속에서 개인의 독특성이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을 얘기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인간에게 가능한가를 질문했어요.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죄를 설명하면서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온전한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똑같은 복음을 전하는데, 접촉점을 달리 한 것이죠. 청중의 필요를 보면 거기에 맞출 수 있는 예들은 많이 있다고 봅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이런 일을 위해 목회자들에게 창조성이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조성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창조성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사랑하면 길이 보이는 것 같이, 창조성은 거기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을 자꾸 품으려고 하면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보이는 것 같아요.

놀라운 복음을 가진 자로서 이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고민하면 처음에는 길이 잘 안 보이지만 나중에 길이 조금씩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되더군요.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을 품는다면, 주님께서 받아들일 준비도 안 돼 있어 경계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지 않을까요?
청년들과 불신자들을 위한 복음 증거 방법에 대해 동료 목회자들에게 권면할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저도 늘 부족함을 느끼지만, 복음 전도의 대상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고 그 대상을 마음에 품으려는 태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가진 메시지가 그들을 향해 어떻게 흘러갈 수 있는지에 대해 그 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하고 싶은 말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오늘날 시대에 적실하게 가르치려고 애를 썼으면 좋겠습니다. 텍스트의 이상적인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가르치려고 애써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러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민감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한다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이상적이고 실제적인 두 가지가 함께 하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들목사랑의교회 김형목-불신자와 청년위한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