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설교학

한신세미나) 영적 사건으로서의 설교-전가화목사

맑은샘77 2013. 7. 6. 16:06

한신세미나) 영적 사건으로서의 설교


이번 설교개발 세미나에서 우리는 설교에 관한 많은 이야기, 강의, 논리, 이론 등을 듣고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야기는 다 들었는데 불이 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인간의 잔치에 불과할 것입니다.
지적 해석으로서의 설교, 영적사건으로서의 설교, 이런 말들이 근래에 다시 나온 말들입니다. 우리는 지적 해석으로서의 설교에 너무 많은 시간과 너무 많은 정열과 너무 많은 것들을 소모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 있어서 사건이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건으로서의 설교가 이 근래에 설교학에 다시 대두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말씀을 외쳤을 때 저들 속에 '사건'이 일어났는데 오늘 왜 우리가 지적이고 해석적인 설교를 하면서 사건을 일으키는 설교는 못할까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본 론
오늘 우리는 이 공동적인 관심을 가지고 초대 사도들을 통해서 역사했던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설교, 지식을 포용할 수 있는, 영적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설교에 대하여 같이 연구하면서 성령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역사와 사건들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외치는 자의 신앙에 따라 말씀은 전해진다
생스터라는 사람은 설교학의 유명한 대가입니다.「Power in Preaching」이라는 설교책을 안 읽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분의 유명한 이야기는 목회자가 자신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내가 지금 외치는 말씀이 이 시대에 하나님이 내게 맡긴 말씀이라고 깊게 믿으면 깊은 역사가 일어나고 높게 믿으면 높은 능력이 나타나고 넓게 믿으면 넓은 능력이 나타납니다. 문제는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의 신앙에 달려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보다 제일 먼저 간구할 것은 '내 믿음이 커지게 하시옵소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가 이 성산에서 수많은 강의를 들을 때에 정말 하나님이 내 입술에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겼다는 믿음이 오게 하소서. 이 믿음이 없다면 다 말장난(language game)입니다. 언어의 유희입니다. 그래서 설교학에서 늘 조심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혹시 말장난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하면 말장난을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이 당면한 설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모든 역사 속에 위대한 하나님의 부흥운동은 위대한 설교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하기를 위대한 봉사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위에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어떤 위대한 정치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 땅위에 하나님의 제일 큰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제일 위대한 하나님의 부흥운동은 위대한 종들의 입술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가서 선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남을 돕는 것도 중요하고 사회사업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정치적인 운동도 중요하지만 목회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입술에 권세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이 입술에서 생명이 죽고 사는 하늘의 사명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 입술에 권세있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담을 수 있을까?
이것은 한 시대를 사는 모든 목회자들의 한결같은 고민입니다. 구름 떼같이 주일마다 찾아오는 귀한 생명들을 향하여 무언가 쏟아야 하는 데 그것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목회자의 사명
목사는 누구냐?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할 이야기가 없으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주에 할 이야기가 없으면 참 딱한 것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주일 아침 8시까지 설교준비가 안된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옛날 노트를 뒤적뒤적하면서 무엇을 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실제 아닙니까? 어떤 때는 재탕도 고민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설교라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이고 예언과 많이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예언이라는 말이 내일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누구도 받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까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인데 매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지 못했다고 할 때 그때 고민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설교는 혼적 설교, 영적 설교, 수평적 설교, 수직적 설교, 문자적 설교, 지적 설교, 사건으로서의 설교 등으로 많이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설교를 통해서 교회에서 성령의 죽고 사는 사건이 나타날까 하는 소위 은사개발로서의 설교까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 영성에 대한 이해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사람의 삼위는 육과 혼과 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언제나 환경관계(environment)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환경은 언제나 편하기를 좋아합니다. 좀더 눕자, 좀더 쉬자, 좀더 놀자입니다. 결국 이것은 쾌락을 원합니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 가는 쾌락은 섹스(sex)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든 다 성적욕망에서 어떻게 해야 기쁘고 어떻게 하면 삶 속에 평화를 얻을 수 있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이드(id)라고 하는 데 본능적인 자아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섹스(sex)가 인간 속에 기쁨과 감격과 평화를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의 혁명이 세상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그래도 조금 나은 사람들이 에고(ego), 즉 푸쉬케라는 혼적인 삶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인데 인간이 어떻게 환경을 따라 짐승처럼 살수 있겠느냐, 사람과 짐승은 다르다면서 사람답게 살자는 사람들입니다. 사람과 짐승의 구별은 쾌락이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산다'는 사상 즉 이데올로기(ideology)의 유무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상이 인간 속에 기쁨과 감격과 평화를 준다해서 실존주의 사상이니, 무슨 무슨 사상이 생기고 이와함께 기독교도 사상화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사상은 과학사상까지 갑니다. 이들은 어떤 '사상'이 인간 속에 기쁨과 감격과 평화를 주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이 인간 속에 기쁨과 감격과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상은 또 다른 사상의 노예를 만들 뿐입니다. 기독교까지도 기독교사상으로 끝난다면 또 다른 어떤 속박적인 제도와 조직과 논리를 만들고 맙니다.
이것보다 한 걸음 더 나가는 단계가 수퍼 에고(super ego)의 단계입니다. 초자아의 문제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하늘의 주만 보이는 적나라한 영적인 문제에 대한 진리의 세계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관계
사람은 환경관계를 가지고 살고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지만 영적인 단계에 올라가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일까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은혜 중에 은혜, 계시 중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특수 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속에 참 기쁨과 감격과 평화를 준다고 믿을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와 접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일 대 일로 예배 속에 만나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설교' 즉 사건으로서의 설교라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고 할 때 그를 문자적으로는 도저히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논리로는 도저히 만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영으로, 진리의 영으로, 성령으로 우리 속에 운행하기 때문에 영적사건이 일어나지 않고는 아무리 지적동의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은 어렵습니다.
이것이 영적사건으로의 설교에 실패한 이유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인 이야기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이야기에는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기쁨과 감격과 평화에 접근하는 데는 미숙했습니다.


영적 사건으로서의 설교의 개발
영적 사건으로서의 설교를 한다 할 때의 문제를 깊게 파헤쳐봅시다. 어떤 면에서 교리, 신조, 신학적 사상, 주석적 내용들도 영적인 것 자체는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하나님의 성령의 사건을 일으키고 비춰주는 거울일 뿐입니다. 사실은 허상입니다. 이런 것 자체를 영적인 사건으로 오해하면 영적인 설교는 실패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실제를 비춰주는 거울일 뿐이고 실제는 이것 이면에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지적인 훈련'을 잘 하는 것 이외에 이 지적인 훈련과 영적인 사건이 어떻게 같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참 하나님의 말씀일진대 그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사건이 틀림없이 일어나야 됩니다. 성령의 사건이 따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공허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일어나는 성령의 사건은 맹목입니다. 이 두가지는 언제나 같이 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 모든 사도들이 말씀을 외칠 때 듣는 자마다 '오호라 우리가 어찌하면 좋을꼬'하며 즉석에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림자만 보아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들이 듣고 모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조, 교리, 사상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고 기독교의 종교적인 지식을 만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속에 내 영을 살리는 생기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사건을 만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영적 사건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사건을 만남에 있어서 제일 먼저 '성령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문제를 먼저 이해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성령이 무엇이냐, 진리의 영입니다. 변화의 영입니다. 거룩한 영입니다. 증거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약속의 영입니다. 성령에 대한 것이 성경에 이렇게 38가지 정도 나옵니다.
성령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의 영을 모르고는 진리를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그 진리가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 나와 피차 속에 다리를 놓아주지 않으면 내게 있는 진리의 영감이 아무리 좋아도 진리의 영이 같이 조명하지 않으면 저쪽에서 해석이 되어야 반응이 다시 옵니다. 설교는 절대로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쌍방통행이 되어야만 설교가 됩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가 성도는 들어주는 기계이고 나는 말만 던지면 되는 줄 알기 때문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는 꼭 의사의 왕래가 있어야 됩니다. 이쪽에서 설교자가 던지면 저쪽에서 반응이 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잊어버리고 일방적으로 설교하기 때문에 근본적 설교의 전달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설교를 함에 있어서 내가 어떤 진리를 가졌다고 할 때 이 진리는 절대로 말만 가지고 전달되지 않습니다. 혀 끝으로 말하는 진리는 전달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전달되는 원칙적인 것은 진실을 품은 표정입니다. 눈빛, 얼굴, 인격, 행동, 영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진리의 영으로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진리의 전달방법을 알지 못하고는 절대로 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술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설교는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라 할 때 변화라는 것은 지적동의를 통해서만은 절대로 완성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적동의를 통해서 슈퍼 에고, 초자아까지 올라간다면 대학 나온 사람들이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변화라는 것이 설교의 주제라 할 때 변화의 영인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설교는 절대로 변화의 사건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거룩하기를 원합니다. 1차원의 삶은 짐승 같은 삶입니다. 오늘날 놀랍게도 거리를 보면 짐승이 많습니다. 저희가 사는 강남에 저녁때에 보면 짐승이 많이 보입니다. 짐승이 안되려면 거기에 예수의 영이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밤까지 짐승 노릇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가면 그 짐승의 탈을 벗습니다.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은 말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거룩한 영이 그 언어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내 속에 거룩한 영은 저쪽의 영이 암호를 보낼 때 그것을 받아서 풀어 보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어디에서 언제 역사할까?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나타나는 말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분은 떠났지만 그분을 증거하고 보여주는 기록된 말씀이 있고, 둘째는 시대는 가고 역사는 가도 하나님이 붙드셔서 성별하여 그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하는 목회자의 선포되는 말씀 즉 설교가 있습니다.
셋째 이 살을 먹는 자마다, 이 피를 마시는 자마다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으리라 이러한 성찬이나, 세례와 같이 행동화된 말씀, 희생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에서는 성례전을 설교만큼이나 은혜로 생각합니다. 개신교는 그것이 부족합니다만 교인들이 와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속에 주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받지 못하던 또 다른 깊은 은혜를 받습니다.
성령은 말씀이 선포되는 곳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행해지는 모든 곳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믿고 구하는 곳에 나타납니다. 대개 성령의 사건 혹은 사건으로서의 설교가 나타나지 않는 것들을 보면 설교를 하는 자나 설교를 듣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동의라든가 지적견해라든가, 명상이든가 감상같은 세계에서는 동의하지만 저 말씀이 참 내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하는 믿음과 구함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 이것이 단순한 종교적, 지적인 동의가 아니고, 인간의 종교적 교양의 문제가 아니고,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영혼이 살고 죽는 하나님의 생명의 사건이라는 것을 믿고 구하는 설교자(speaker)와 회중(congregation)에 따라서 같은 설교지만 큰 차이가 납니다.
간증을 하면 저는 이 방향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사람입니다. 내가 미국을 가기 전에 두달 동안의 설교제목이 무언가하면 사랑의 이야기(Love story) 였습니다. 그리고 에릭 시갈의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그 이야기를 두달 했더니 권사님이 "목사님 설교 좀 바꾸세요"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전혀 이 방향에 대하여 몰랐다는 것입니다. 소설책, 영화 등을 말하면서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멋있지 않습니까 하면서 성경 조금 읽는 것이 설교인줄 알았습니다.
심령을 살리는 사건으로의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또 배울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임스 버거시라는 교수님으로부터 이에 대해 배우고 눈뜨면서 이것을 공부하다가 저의 신학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제가 부천에 있는 어느 교회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거기 가서 집회를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수천 명이 모였는데 끝나고 차가 갈 수 없어 걸어 내려가는데, 사람들이 "말씀이 좋더라","설교 잘하더라"하는 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님, 목사님들과 내려가서 조그만 여관에 들어가 땀을 씻으려고 저고리를 벗고 침대에 앉았는데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너 이놈 네가 내 영광 다 받았다. 설교 잘하고 말씀이 좋아? 예수는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거꾸러졌습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이 유혹에 걸립니다. 말씀이 나빠도 상관없습니다. 설교가 나빠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오늘 목사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 영혼에 소망을 얻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권능의 체험을 얻었다,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말씀 좋다', '설교 좋다'는 것에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았던 세가지 유혹에 걸려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떡으로 만 사는 것이 아닌데 자꾸 떡으로 살려고 합니다. 천하를 다 가지려는 권력지향, 남을 지배하려는 것들 때문에 종교인들끼리도 그런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참 진리라고 한다면 안모이면 어떻습니까? 진리는 비싼 것입니다. 안모이면 할 수 없습니다. 죽고 사는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갑니까?
설교를 하면서 우리는 자유스런 형식(free style) 그릇 형식(package style)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항아리에 무엇을 가득 채워넣고 매 주일마다 한 바케스씩 뽑아서 채워 교인들이 오면 줍니다. 즉 주석이나 다른 곳에서 뽑아내어 설교합니다. 이것도 설교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인물'입니다. 이 고인물을 먹는 물고기는 생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똑똑 떨어지는 생수의 줄기를 잡아가지고 조그마한 접시에 받아서 하는 것은 모여 냇물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닷물을 이룹니다. 생기가 있습니다.
저는 주석 설교에 대한 것은 철저하게 반대합니다. 목회자들이 주석 설교 때문에 영감이 다 죽습니다. 목요일, 금요일까지 걱정이 없습니다. 토요일에 주석을 베끼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개 두고 모자이크를 합니다. 이번 주일은 공부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겠다 하며 1대지 2대지… 딱 만들어 놓고 여기 있다 먹어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 설교를 일평생 했는데 한 사람도 목사님이 외친 설교 듣고 내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설교를 듣고 멸망하는 자에게 부끄러운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내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없다면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주석을 자꾸 보면 왜 잘못되는가 하면 내 영감은 절대로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석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일단 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까지는 하고 마지막 과정에서 내가 신학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는가? 역사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는가? 아니면 설교 원어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는가? 그 단계에 가서 주석을 사용해야지 처음부터 주석을 놓고 하면 베껴쓴 것이지 그게 무슨 설교입니까? 그것이 표절이지 무슨 설교입니까?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세웁니까? 아무나 세워서 베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시대의 영을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통해서 진리를 푸는 것입니다. 내 설교의 형식은 무엇인가? 한번 집고 넘어 가야 할 것입니다.


설교의 전달 양식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으로의 설교들이 번역이 많이 되어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입에서 나오는 언어 설교만 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혀로만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마다 하나님 내가 오늘도 혀로만 설교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라고 꼭 기도하고 올라가야 합니다. 이제부터 양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설교는 그분의 인격에 감명을 받은 한 인격이 그분의 영감을 받아 다른 인격들 속에 증거하는 진리의 행위입니다.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은 설교의 전달 양식입니다. 너무 경직되어 있습니다.


성대묘사의 중요성
성경 몇장 몇절에 예수님이 어찌했다. 이렇게 써서 25분을 설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신학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교회가 만들어 놓은 교회의 유물입니다. 그 설교 내용의 언어가 무엇으로 구사되었는가 하는 것은 7~8%밖에 차이가 안납니다. 내 원고가 여기 있는데 이 원고를 가지고 어느 목사님이 지금 가져다 읽어도 내용은 같습니다. 그 내용의 차이에서 오는 설교가 좋다 안좋다는 내용은 7% 내지 8%도 차이가 안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38%가 성대묘사(vocal expression‍‍)입니다. 같은 말씀이지만 그분이 그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은혜로운 성대에 담아서 보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근래에 성대 개발에 대한 이야기들이 설교학에서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같은 '동백아가씨'지만 그 노래를 누가 부르냐에 따라서 전혀 다릅니다. 같은 하나님이고 같은 그리스도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라고 글자 그대로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도 급하고 빠르게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성대모사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어떤 분의 성대묘사는 강단에 서면 은혜롭습니다. 영의 눈을 뜨게 합니다. 어떤 분은 거부감이 일어납니다. 교인들은 너무 잘압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끼리 보아도 압니다.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성령에 잡힌 성대가 되어야 합니다. 소리가 날 때 목의 네 가지의 기구, 사운드 시스템(sound system)에서 나옵니다. 소리는 그냥 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 있는 소리로 훈련해야 합니다. 은혜를 충만히 받는 것도 중요하고 훈련도 중요합니다. 소리가 날 때 성대관리를 어떻게 하면 우렁찬 소리가 나올까, 어떻게 하면 불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올까, 어떤 사람은 아무리 하여도 안됩니다. 기본적인 발성 패턴을 모르면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서는데 노력해야 됩니다. 최고의 노력을 다한 사람 속에 최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와 학교에서 설교자에게 성대관리를 하나도 시키지 않습니다. 목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은 성악가와 목사입니다. 성악가보다 우리는 찬양을 하기 때문에 목을 더 많이 씁니다. 우리는 평생 찬양하고 설교할 사람들인데 성대 개발에 대한 이야기는 한가지도 못들어 왔습니다.
목이 왜 쉬느냐 ? 첫째 우리처럼 목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목에 성대코드가 있고 거기에 성대관이 있습니다. 그 두 성대관 사이의 떨판에서 파열이 되어 소리가 납니다. 이 떨판에 상처가 나면 목이 쉽니다. 우선 목이 안쉬려면 말을 할 때 편안해야 됩니다. 힘을 주면 안됩니다. 아주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두 번째 산기도를 하다가 목이 쉽니다. 새벽기도 가서 목이 쉽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아버지~주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렁찬 소리는 복식호흡으로 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히 역사합니다"라고 소리칠 수 있습니다. 이 복식호흡법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제 새벽기도 가서 기도가 안되거든 복식호흡만 하십시오.


눈으로 하는 설교
그다음 중요한 것은 55%가 또 다른 요소입니다. 이것이 모두 언어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꼭 설교 원고지만 붙들고 설교를 성공하려 해서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주의 집으로 온 백성이여 다 돌아오라. 하나님의 말씀을 재발견하십시다. 말씀의 선포와 일치하는 생활을 하십시오."하는 이런 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데 많은 실패를 주었습니다. 어떤 분의 설교를 들으면 졸지 않는데 어떤 분의 설교를 들으면 1주일 내내 준비한 것인데 다 졸고 있습니다. 설교하는 분도 졸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서세원 씨가 나옵니다. 제가 그 집에 가서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믿음 생활을 잘합니다. TV에 나오는 단막극 25분을 쓰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외웁니다. 책상 위에 붙여놓고 거울에도 붙여놓고 웃는 것도 연습하고 합니다. 이렇게 25분 단막극에 나오는 개그맨도 그것을 외우는데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사는 25분 그것을 못 외웁니까? 외울 수 있습니다. 왜 못 외웁니까?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것을 베낀 사람은 절대로 안 외워집니다. 내게서 나타난 것은 다 외워집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55%, 하나님의 설교는 눈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줄 터이니 나를 바라보라' 이렇게 모든 진리는 눈에서 나옵니다. 모든 확신도 눈에서 나옵니다. 영적 사건은 눈이 마주칠 때 나타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눈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여기서 눈을 잡아야 합니다. 심령을 잡지 말고, 지적동의나 지적 견해를 잡지 말고 눈을 먼저 잡아야 합니다. 만일 고리타분하게 그냥 줄줄 읽으면, 처음엔 따라가다가 듣기도 힘들어집니다.
목회 임상학은 내가 잘했는가 못했는가 보는 것입니다. 목회자들끼리 모여 앉아 자기의 목회에 대한 임상을 해야 합니다. 남의 것을 들어보면서 실패의 원인을 깨닫습니다. 1주일 동안 심방을 안 해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습니다. 25분 설교만 외우면 그것이 제일 위대한 심방입니다. 우리는 그 설교를 그룹치료(그룹 데라피)라 합니다. 성도들은 목사님과 문제를 해결하려고 심방을 원합니다. 강단에서 영적인 사건은 최고의 심방입니다. 들을 때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표정으로 하는 설교
모든 진실은 얼굴 표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부부생활을 하는 데 남편이 죄를 지으면 집사람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자꾸 얼굴이 붉어집니다. 똑같습니다. 모든 진리는 얼굴 표정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이 땅을 떠나도 후회 없이 그분 앞에 가서 신앙의 보고서를 낼 수 있다면 얼굴 표정이 다릅니다. 표정을 붙들어야 합니다. 남의 것을 금요일날 베낀 사람은 절대로 자기 표정을 쓸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에벨링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하나님의 역사는 시간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래 믿고 오래 목회하고, 설교하다 보면 뭐가 되겠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건을 따라 일어납니다.
눈, 표정은 말로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55%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원고를 보지 말고 설교를 해야 합니다. 원고를 쓰기는 하지만 읽지는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고를 안 읽으면 정치연설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권위를 살리기 위해 원고를 써 가지고 가서 읽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몸 전체로 말하는 것(body language)입니다. 혀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도 말하고 입도 말하고 얼굴도 말하고 손도 말하고 몸도 말합니다. 제가 동역자 목사님과 같이 경험을 나누면서 자꾸 성장하자는 것인데 제가 확신있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제 학문으로 익어서 완전히 소화되었기 때문에 자신있게 이야기합니다.
손동작도 쓰고 발동작도 쓰고 눈, 얼굴, 몸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혀로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입으로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비 언어로서의 설교에 대한 연구들이 1960년대부터 시작해서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영적 은사 '카리스마'
은사는 은혜(카리스마타)입니다. 은사는 선물(도마타)이라는 말입니다. 은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이 죄와 악의 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준 영적인 무기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성령을 따라 나누어진다 할 때 이 영적 은사가 우리 속에 나타나면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영은 지혜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혼의 세계입니다. 너무 많이 안다고 교만한 사람은, 지식은 결국 교만으로 갑니다. 그런데 지혜는 결국 '나는 하나님 앞에 너무 모른다'고 하는 겸손으로 갑니다. 성경에는 영적인 세계에 들어갔을 때 나타나는 열매를 이야기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왜 교회 안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지 하나님을 참 영적인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이 적은 지 알 수 있습니다.
육의 세계는 육신의 부모를 가정을 통해서 압니다. 혼의 세계는 지식의 부모를 학교 스승을 통해서 압니다. 영의 세계는 하나님의 영적 센터인 교회와 하나님이 지명하여 그리스도의 자리에 세운, 예언자의 기능으로 제사장의 기능으로 영적 왕권으로 세운 목회자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분야는 이것입니다. 세상의 의사들은 의사가 될 때 죽은 시체를 놓고 모든 신경, 조직, 세포까지 외우고 졸업하면 어떤 병자가 와도 척척 치료합니다. 우리는 영적 지도자입니다. 막상 나왔을 때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영적 은사의 세계를 알아야 목회가 유익합니다. 맥가브란은 교회 성장은 세 가지 패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성경 공부를 열심히 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관계를 열심히 하면 교회가 성장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한계가 있고 깨어집니다. 제일 기적적으로 모이는 교회는 셋째 영적 은사가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방언이 터지고 예언이 터지고 온통 성령체험을 하고 사람이 변하고 역사가 일어나고 성령의 권능이 일어나는 교회가 가장 기적적으로 부흥합니다.
이 세 가지가 늘 종합되어 있어야 하지만 성경공부 잘 시키고, 인간관계를 잘해도 인간의 방법입니다. 사람이 줄 수 없는 신령한 은사가 역사하는 교회는 기적적으로 부흥합니다.


설교와 인간관계
우리가 설교를 함에 있어 저들이 성경공부를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부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함에 있어서 제일 위대한 기적은 인간관계이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예수 믿고 제일 위대한 기적은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설교는 저들이 말씀을 들을때에 저들이 다 하나님 안에서 온갖 은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영적 은사의 세계를 무시하니까 오늘 죄와 악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권능이 없어서 이중인격들을 갖습니다. 회칠한 무덤들이 됐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인을 붙들고는 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들을 붙들고 일합니다.
영적인 사람과 종교적인 사람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왜 우리의 목회가 어렵습니까? 기독교 종교인을 붙들고는 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의 영, 변화의 영, 거룩한 영, 증거의 영, 약속의 영, 능력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를 초월해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적인 사건으로서의 설교가 내 강단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한 시대에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모든 목회자들의 처음의 관심사이고 마지막 관심사입니다.


좋은 설교자의 요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알아도 그 설교 듣고 은혜 받았다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고 감격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목사님은 성경을 안보고 설교하는 분도 있습니다. 성경만 많이 본다고 설교가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위대한 설교는 성경만 많이 본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좋은 설교자의 몇 가지 요소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첫째는 인격(personality)입니다.
모든 위대한 설교는 위대한 인격 속에서 나옵니다. 인격이 없이 위대한 설교는 없습니다. D.L. 무디는 초등학교밖에 못나온 사람인데, 시카고 강변에서 엄청난 집회를 하고 내려오니까 한 사람이 "무디야 나 모르니? 동창이쟎아. 야 나도 목사다. 너 설교 잘한다. 몇 시간 준비했냐? 10시간 준비했냐?"고 하더랍니다. 그러자 무디는 "아니 이 설교 48년 준비했다"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인격에서 위대한 설교가 나옵니다. 설교를 방법론, 구성론에만 치우치면 안되고 내 인격의 영적 원리가 서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상상력(imagination)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99%의 노력을 중시하고 1%의 영감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1%의 영감도 없이 노력하는 것보다는 1%의 영감을 가지고 10%의 노력을 하면 그 사람이 훨씬 영감 있는 설교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상상력에 잡혀있어야 합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의 상상력에 잡혀있어야 합니다. 보혈의 능력의 십자가에 잡혀있어야 합니다. 나를 온통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붙들어 매어야 합니다. 밥을 먹고 잠자고 꿈을 꾸어도 길을 가도, 앉아도, 서도, 예수이어야 합니다. 거룩한 상상력에 붙들어 매어야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를 키우는데 그 어린 아이가 상한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고 맥을 못쓰고 오랫동안 고생을 합니다. 영적인 사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 영감을 놓치면, 영적인 것이 상한 것을 고치려면 세달 네달이 걸립니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하여 미친 듯이 달려가야 합니다. '너희가 보기에는 십자가가 부끄러운 것이지만 내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는 말씀을 붙들고 계속 나가야 합니다.


셋째는 열정(pathos)입니다.
모든 기적은 열정이라는 열쇠로 풀립니다. 초대교회는 모두 미쳤었습니다. 모두 새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취했느냐에 따라서 저들도 취합니다. 내가 얼마나 성령과 진리에 취하느냐에 따라서 저들도 취합니다. 열정입니다. 이것의 희랍어는 '엔토스'라는 것인데 이것은 'in God'즉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뜨겁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있으면 뜨겁습니다. 성령이 있으면 뜨겁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설교의 역사는 열정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현대인은 '냉담'이라는 질병에 걸려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사악해졌습니다. 사람 한 두명 죽은 것은 마음 두지 않습니다. 모두 무관심이라는 질병에 걸려있습니다. 이것을 흔들려면 열정이라는 진리의 태풍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뿌리가 뽑힙니다.
확신없는 설교는 겉돌게 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나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가 저들의 영혼을 뒤엎은 것은, 영혼의 뿌리를 뽑은 것은, 저들의 삶의 근거를 흔든 것은 '열정'이었습니다. 내가 오늘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오를지라도 내가 사람을 부끄러워하랴, 하나님을 부끄러워하랴, 내가 심판을 두려워하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랴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는 다만 성경이야기의 연속이 아닙니다. 하나의 지식이 아닙니다. 사건입니다. 초대교회의 설교가 그러했듯이 사건이 일어나야 설교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영적 은사를 통해서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설교자의 영적 능력에 따라 설교를 듣는 청중의 변화는 달라집니다. 이 영적 능력을 개발하십시오. 영적 은사를 활용하십시오. 그러할 때 설교는 "사건"으로, "기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