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설교자료

[스크랩] 마11:18-30 진실한 겸손

맑은샘77 2011. 10. 26. 16:51

마11:18-30 진실한 겸손 11.7.24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잠언은 겸손에 대해서 많이 말합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다." "하나님은 겸손한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스펄전 목사는 말하기를 "겸손의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은 매우 험하고 힘들다. 그러나 내려가기만 하면 말 할 수 없이 풍성하다."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자보다 강한사람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떠나서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도덕경>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바다가 온갖 시냇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낮추기 때문이다.” 여러분, 바다는 모든 물을 다 수용할 만큼 넓고 위대합니다. 그런데 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까? 바다는 가장 낮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강보다 높으면 강물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낮은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배운다고 말할 때에 무엇을 배우느냐? 어떻게 배워 나갈 것이냐? 그 교육 모델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교육모델이 좋으면 학습효과는 최고가 됩니다.

따라하는 것이 쉽습니까?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쉽습니까?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을 모방하거나 따라하는 것은 쉽습니다. 보통 아이들을 둘 이상 키워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첫째 아이는 말을 가르치고 숫자공부를 시키는데 정성을 다합니다. 가르쳐도 빨리 못하는 같고 답답합니다. 그런데 작은 아이는 같은 나이에 가르치지 않은 것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빠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모방하는 것처럼 쉬운 게 없습니다. 그냥 따라하면 됩니다. 그래서 빨리 배울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행동촉진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즉 표본을 잘 만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사람은 겸손해야 된다는 것도 알고 겸손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겸손이 쉽지 않은 이유는 겸손의 본을 잘 보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겸손은 우리가 배워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 겸손을 겸손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웁니다. 예수님의 진실한 겸손은 어떤 삶의 모습입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그 겸손의 본을 배우고 진실한 겸손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만 높이는 온유한 마음입니다.

빌2장은 예수님의 겸손을 잘 나타내는 성경의 중요한 장입니다. 빌2장에서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되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죽기까지 자기 자신의 자리를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의 마음에 겸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마음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온유한 마음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낮은 곳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키셨습니다. 겸손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시는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왜 내가해야합니까 하지 않았습니다.

겸손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겸손이고 교만은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부를 보십시오. 부부는 동등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자기의 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부가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이고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마음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왜 내가 이것을 해야 하느냐? 둘이 똑 같이 나누어 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싹틀 때 그것이 바로 교만한 마음이 싹트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사울이 겸손할 때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었을 때 전쟁에 나가면서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신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결룩 그는 버림을 받아 하나님께 버려진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웃시야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할 때에 그의 나라는 강성해졌습니다. 나라가 강하고 부강해 지자 마음에 교만의 싹이 낫습니다. 그는 자신이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제사장이 나서서 그것은 다신의 일이 아닙니다 하고 만류하자 그는 자신이 왕임을 내세우며 교만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때 그의 몸에 문둥병이 발해서 죽을 때 까지 별궁에 갇혀 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쏠버대학을 졸업한 ‘포항가리’는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으로 지낼 당시 쏠버대학에서 라비스 박사 교육 5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답사를 하기 위하여 단상에 오른 라비스 박사는 깜짝 놀랐다. 내빈석도 아닌 재학생석 맨 뒷자리에 포항가리 대통령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황급히 단상에서 내려가 대통령을 단상으로 모시려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끝내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제자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오직 선생님뿐입니다.” 장내는 뜨거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고, 포항가리 대통령은 더욱 명성 높은 대통령이 되었다.

교통 경찰관이 신호 위반한 차를 세웠습니다. “신호 위반 하셨습니다. 면허증을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급히 서두르다가 깜빡 잊고 면허증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름과 주소, 직업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름은 막사이사이, 직업은 대통령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유명한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교통 경찰관에게 겸손히 잘못을 시인했으며, 벌금도 물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겸손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죄인임을 깨달을깨 우리는 마음이 가난해 집니다. 가난한 영혼이 됩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헬라 말의 뜻은 '가난하다'외에 '무엇 무엇 때문에 고통스럽다' '무엇에 대하여 겸손하다' '비천하다' '파산되었다'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자신의 죄를 알고 자신이 죄로 말미암아 파산되어진 사람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에딘버러대학의 제임스 심프슨 교수에게 한 학생이 “선생님의 생애에서 가장 뜻깊은 발견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심프슨 교수는 환자들에게 고통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마취제 클로로프롬을 발견,세계 의학계에 위대한 혁명을 일으킨 사람으로 칭송받는 의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심프슨 교수가 당연히 그 마취제의 발견을 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심프슨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나는 죄인이며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시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을 자신의 능력이나 지식을 드러내지 않고 낮추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자각한 사람들이 그 낮아진 마음으로 다른 영혼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 위에서 꽃피는 덕목인 것입니다.

허세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높아진 자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죠니 에릭슨 타다는 이것을 잘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겸손의 기회를 잘 붙잡습니다. 그리고 겸손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려 합니다. 바로 이때에 겸손은 우리 손가락 사이로 연기처럼 빠져나가고 맙니다." 한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로서 또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다한 자는 큰 자로서 또 높아진 자로서 세세토록 존귀와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배우는 마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배우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끊임없이 배웁니다. 배운다는 것은 그냥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한 겸손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도 밤 깊은 시간에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셨습니다.

이태리의 토스까니니(Arturo Toscanini)라고 하면 20세기의 제일 가는 교향곡 지휘자이다. 베토벤 심포니를 제일 많이 지휘한 사람이다. 그리고 베토벤의 음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조회가 깊은 지휘자였다. 그런데 그는 연주를 앞두고 여러 달 전부터 그 음악의 진수를 익히면서 오묘한 신비를 체험한 뒤에야 지휘봉을 잡는다고 한다.

한번은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물었다. "선생님, 이번 심포니 곡은 전에 여러 번 지휘하신 곡인데 왜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까? 우리가 거의 다 외우다시피한 곡이 아닙니까?" 그러자 선생이신 토스까니니 지휘자가 대답을 했다. "아니야, 아직까지도 이 곡조의 신비를 파악하려면 전도 요원한걸..."

세계에서 제일 간다고 하는 명 지휘자의 태도이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운전하는데 자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고율이 더 많다고 한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전도 요원하다고 하는 겸손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태도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주님 자신이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다.

슈바이쩌 박사가 선교를 위해 아프리카에 갔을 때의 일이다. 처음 아프리카에 가서 병원을 지을 때, 그는 나무를 베고 운반하고, 못질하는 등의 일을 몸소 했다. 그 때, 슈바이쩌가 하는 일을 곁에는 한 흑인 청년이 있었다. 혼자 하기에 힘이든 슈바이쩌는 "자네, 날 좀 도와주지 않겠나 ?" 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전 지식인이어서 그런 일은 할 수 없어요. 막일은 못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이에 슈바이쩌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자네만 할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네. 그러나 웬만큼 배웠다. 싶으니까 이젠 아무 일이나 다 하겠더군." 세계의 성자로 추앙 받고 있는 알버트 슈바이쩌 박사가 그 당시 지식인들이 꺼려했던 막일을 했다는 것은 그의 겸손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함께 짐을 지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집을 져주시면 우리의 짐은 가볍습니다. 낙타는 자기 등에 짐을 지게하려면 무릎을 꿇습니다.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을 져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든다.

내가 누군가의 짐을 져 줌으로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쉼을 얻게 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내가 해야 되는 줄 알고 다른 사람과 함께 멍에를 메면 왜 당신은 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줄 알고 짐을 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생활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성 부러더 로렌즈 수도사는 어느 날 제일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수도원장으로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그가 문제 많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수도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노수도사가 왔구려!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 닦으시오." 처음 부임한 수도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전통이 된 모양입니다.

노수도사는 이 수도원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노수도사는 "네! 그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노수도사는 한 달, 두 달, 석 달, 접시를 닦았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구박이 대단했습니다.

석 달이 지나서 감독이 순시 차 왔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이 쩔쩔매었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물었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수도사들이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깜짝 놀랬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즈 수도사를 3개월 전에 임명했는데!" 감독의 말에 젊은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했습니다. 그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노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노수도사의 죽기까지 낮아진 겸손의 도여! 그후부터 그 수도원이 모범적이 수도원이 됐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몸소 겸손하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겸손한 마음이 생길 때 남을 섬기는 행동으로 이어져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마음은 있어도 몸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쉬게하는 일에 자신을 드릴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 차량 봉사자 주방 봉사자 화장실 청소자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자리 가정에서 가정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남편과 아내를 위하여 묵묵히 말없이 자신의 일을 축복으로 알고 섬기는 사람들이 진정한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내가 왜 교회에서 그런 일을 해야 돼. 내가 이런 집구석에서 왜 시부모를 섬겨야 하고 시댁의 식구를 아내를 남편을 섬겨야 돼? 이 직장 아니면 내가 갈 곳이 없는 줄 알아 사람 이렇게 무시해도 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겸손해지려면 먼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그의 멍에를 메고 그를 따라 가십시오. 지금의 자리가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죄인의 자리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됨의 자리. 예수님을 배우고 또 배우는 자리 , 그리고 예수님처럼 섬기려는 자리 그곳이 바로 진실한 겸손의 자리입니다. 잠언16:19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출처 : 아름다운
글쓴이 : 광야소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