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리 밝혀 둘 것은, 글을 쓰는 저도 감히 주님의 광대한 뜻을 따라가지 못하며 그저 그 뜻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치는 한낱 성도에 불가함을 고백합니다. -
우연히 다음의 아고라 토론방을 보다가 문화 방 요주의 화제가 기독교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종교가 문화와 혼동되어 부적합한 곳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분명히 밝혀 둘 것은 종교는 문화가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종교를 통해 파생된 특정 문화는 존재 할 수 있으나, 종교가 문화의 범주에서 다루어진다는 것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는 오류임을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문화란 것은 특정 사회로 부터 '만들어진' 것이나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를 문화적 맥락에서 분석하고 비판하려고 하는 자세는 종교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단적 무신론'의 발로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글들이 지켜야할 선을 넘은 즉, 이에 대한 제 소견을 짤막하게나마 밝히려고 합니다. 부디 제 글에 대한 비판과 수렴으로 일련의 논란이 종식되길 원합니다. 아래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쟁점화 되는 문제들이 있었는데요, 이는 1. 십일조란 무엇인가? 2. 교회의 재정(현세적 타락) 3. 기독교의 본질 이렇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십일조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십일조는 말 그대로 생산하여 얻은 소산 중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래 몇 분이 지적 하셨듯이 십일조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제도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려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 니라' (신명기 14:22~23) 십일조는 성경의 가장 기초적인 규례 중 하나인 율법의 일부입니다. 결코 어느 누군가가 자기의 잇속을 채우려 만든 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손에 그 율법이 타락하게 되면서 중세 유럽에서 십일조가 세속영주에게 사유되는 등 많은 문제점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를 고치려 종교개혁을 통한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이러한 부정이 고쳐지지 않자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교회에서 십일조에 대한 의무를 지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켰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당시 십일조를 법으로 금한 국가들은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와 같은 지정된 율법이 제도란 이름으로 타락하기에 아주 쉬운 환경이었다는 말입니다. 악법도 법이라는 유명한 철학가의 말처럼, 기독교인들에게는 율법이 당연히 지켜야 할 규범입니다. 단지 사회의 법의 강제성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죠. 만약 특정 교회에서 십일조를 강요한다면 이는 물론 잘못된 행태이며 구시대의 악습을 세습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군대에 징병된다고 해서 모두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킬 수 없는 것처럼,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신앙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분들, 즉 하나님이 나의 주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없는 분들은 십일조에서 자유로우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디 십일조가 모두에게 아무 이유 없이 지워지는 의무가 아님을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라면, 마치 우리가 국방의 의무나 여타 다른 사회적 의무를 이행하듯이, 십일조는 당연히 지켜야 할 신성한 의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만원 중에 10만원이든, 10만원 중에 만원이든 간에 여호와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또 이에 복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십일조인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의 재정문제를 비롯한 현세적 문제점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적어보려 합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즉, 인간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게 허락하신 것이죠. 다만 자유의지를 다스릴 수 있도록 몇 가지 법규를 정하셨는데, 결국 아담과 하와는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어리석은 본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성직자들과 재직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수행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들을 택하여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들 자체는 여전히 인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의 수행원들도 결국은 인간이며, 인간이기에 넘어야 할 유혹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유혹 중 하나는 바로 교회의 재정으로부터 오는 문제일 것입니다. 교회의 재정은 교회에 들어온 헌금으로 구성되며, 이 헌금은 위에 말한 수행원들에 의해서 집계되고 집행되어 집니다. 이는 마치 국민의 세금을 정부가 계획하여 예산으로 운행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다만 국가의 세금의 주인이 국민인데 반하여, 교회 헌금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차이가 있겠습니다. 이를 집행하는데 있어 주님 보시기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수행해야 함이 당연하지만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인해 국가의 세금을 횡령하는 정치인의 소행처럼 특정 교회에서 특정 수행원들에 의해서 재정적인 부정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가끔 목격하게 됩니다. 물론 이들이 이러한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당연시 하여 그 모든 행동을 합리화 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자면 실제로 이 같은 인간 본성으로 인하여 주님의 영광을 가리 우는 일이 제법 많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로 인하여 실제로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생기고 이들이 교회에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에 대해 먼저 교회와 성도들이 깨어 땅을 치며 회개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이러한 일들을 심판 날에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통해 세우심을 얻었다가 교만해지고 타락하게 되고, 그 때문에 패망하는 예를 수 없이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한 분명한 것은, 이 같은 죄인들로 인해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선한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 비난의 화살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알카에다는 중동인 들이 만든 테러조직이므로 모든 중동인 들은 테러리스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죄를 범한 교회와 수행원들은 사람들의 정정당당한 비판과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땅을 치며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이성을 갖고 그 비판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의 위치에서 온전하고 합당한 일들을 행할 때 서로 인상을 찌푸리는 일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부분은 믿지 않는 분들로 하여금 많은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종교를 종교로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고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참선의 종교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유익과 이로움을 위한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또한 선행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이라 고백함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종교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며 부정적인 시각을 보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기독교는 소위 말하는 전통수복신앙과는 거리가 먼 종교입니다.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진창에 빠진 나 자신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그 진창에 내어 던져서라도 주님의 뜻에 맞추어 감을 의미합니다. 즉, 나를 위한 믿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신앙이 바로 기독교의 교리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님이 내 구주라고 고백함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당연히 지켜야 할 계명으로 생각함을 의미합니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다 보면 가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전도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 일부는 기독교의 원래 교리와는 다른 일명 ‘사이비’ 종교로부터 나온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전도행태가 기독교의 사명과 어긋나는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 이 말씀이 바로 현재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상과제인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선택이 아니라 아까 십일조의 의무처럼 기필코 행하여 할 의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할 수 있느냐, 그것도 절대 아닙니다. 인간을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만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려 드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좀 전에 언급한 길거리 전도의 경우,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혐오감을 준다면 분명 그 방법은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전도는 무언가 가시적인 결과물을 빨리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같은 백성 된 입장에서 주님의 뜻을 목청껏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무조건 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분들이 더 좋은 전도방법을 강구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앞으로 길이나 다른 장소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무조건 혐오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들이 왜 힘들게 나와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려 하는지 생각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구원받음은 그들을 위함이 아니요, 바로 여러분 자신과 하나님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긴 글을 쓰게 되면서 참으로 고민도 많이 되고 걱정도 많이 됩니다. 주님의 불완전한 종으로써 괜한 일에 나선 것은 아닌지 자꾸 마음이 쓰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조금이나마 여러분이 그 분의 뜻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한복음 10:11~16] |
출처 : 문화방
글쓴이 : 조성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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