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객관적 사료들에서는 현재의 성경이 끼워맞추기 식으로 난도질 당한 거라는 게 정설입니다. 교회에서 지엄하게 설교하는 분들이나 이를 감명 깊게 들으시는 분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수세기 동안 갑자기 없다가 튀어나온 주옥같은 구절들은 이전의 예수 행적과 말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앞에 어느 분이 성경 일부를 문제 삼아 쓴 글을 보았는데, 상당히 자세히 객관적으로 본 감도 있지만 기독교에 대한, 특히 개신교에 대한 반감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문제 제게에 대한 가치는 상당히 있습니다. 의도야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겠지만 비판의 형식과 절차는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구절마다 현재 상황을 꿰어맞추기 식으로 논의하는 걸 보면 전체 글의 구조나 주인공들의 의도와는 달리 현지화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설교하는 방식을 보면, 몇 구절씩 중요하게 인용하여 해석하고 현재의 사회 상황이나 주위 경험들을 잘 섞어서 해야 좋은 설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성경 전체를 몇 번이고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예수라는 사람이 일관된 말과 행실을 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믿는 분들이야 "설마?" 내지는 "이런 쳐죽일 놈이 있나!"라고 하시겠지만 우리 일상에서 한 사람이 앞뒤가 다른 말을 하는 경우 흔히 영악한 놈이라거나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아실 겁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의심은 하지 못합니다. 역시 교회에 대한 비판도 하지 못합니다. 이는 그야말로 파문조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인의 잣대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겸손함 같지만 사실 냉정하게 하나의 작품을 읽는 심정으로 여러 번 읽다가 보면 예수라는 분의 말이 분노와 사랑이라는 이중 구조로 사물을 보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믿음의 족속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편애가 있음도 알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이스라엘이 성경을 가장 잘 아는 족속일터인데 20세기 중후반부터 하는 행동들을 보면 예수의 말을 우리 나라 대중이 알고 있는 방식과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에게 행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말씀을 더 공고히 믿고 있는 그들이, 믿음의 권세로 똘똘뭉친 그들이 하는 걸 보면 말이죠. 하나 일례로 보면 성경에서 잠언을 보면 "여자와 어린이는 미욱하나니 채찍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현재 시대 변화에 어떻게 해석할까요? 아마도 성령의 감화 정도로 해석하리라 봅니다만 과거에도 그랬을까요? 이러한 양상은 기독교 내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카톨릭의 경우는 사제는 남자의 고유권한입니다. 최근 일부 교파에서는 여자로서 신부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 조류는 약합니다. 그나마 그러한 조류에 따르기보다 여자로 구성된 수녀회나 신자들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지원하여 종교적으로 시대적 변화에 체면치례만 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교회 안에서도 장로는 믿음이 아니라 남자로서의 재력가나 명망가가 되고 여자는 실질적 권한이 미약한 권사 정도로 중요한 교파의 당회에서 한복을 입고 좌우로 도열하여 장로들이나 당회장에게 인사하는 꽃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지금은 많이 바뀌어 이런 일이 없다고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나 자기 교회를 돌아보시면 금방 알아차립니다. 또 하나의 사례는 과학자들과의 반목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동설을 진실로 알고 있는 경우 지동성을 탄압했던 교회는 아직도 천동설을 믿고 있을까요? 물론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없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철학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 이론을 성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에 접합하여 자기들의 권위와 명예를 내세웠습니다. 그 당시 갈릴레오의 지동설의 의견 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권위의 그리고 명성에 있어서 상당한 도전이 되었던 것이지요. 결국 은 그들 종교 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 여긴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위 명성을 중요시 여겼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아무튼 성서 필자들이 과학자들이 아니었던 이상 자신들이 보이는 관점에서 성서를 기록했음이 분명합니다. 최근에는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시 19:6)라는 구절을 지동설의 증거로 애둘러 맞추고 있습니다. 시대마다 성경은 참으로 위대한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든 다 진리가 되는 능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의 관점은 다릅니다. 종교는 인간의 정신과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가도록 하는 가치지향적인 분야이고, 과학은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사실에 대해 원리를 밝히는 가치중립적인 분야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종교가 과거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말씀과 상관없는 그 시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거나 종교지도자들의 실수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선종하신 바오로 2세도 과거 교회가 저지른 문제에 대해 과학자들과 허심탄회한 사죄를 못하고 오히려 스티븐 호킹 박사 등의 과학자들에게 우주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고 가셨다는 것이나 우리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와 미국 등에 사대적인 기회주의로 연명해왔던 사실들에 대해서도 현재 한국 교회는 어떠한 멍애도 없는 듯 자유롭습니다. 아마도 이후 교회가 횡포를 저질러도 자유로울 것입니다. 일반 도덕률이 아니라 말씀의 도덕률로 무장하여 횡포란 무신론자나 타종교자들의 음모로, 회개는 일반 신도에게나 전가의 보도가 되는 역사적 법칙을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앞에 논의한 남녀평등을 인정하고 과학과 종교의 영역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상당히 더딘 교회의 회개나 개혁은 과거 종교의 일부 편파적인 운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이 영원한 진리라고 보는 습관적 시각에서 강화된 결과입니다. 교단 내부 조직이 개혁에 더딘다고 하기보다 교단이 해석하는 성경의 일관된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뭐~ 다수의 믿는 분들이야 그것보다는 자신이 영접한 사랑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따르고 옳바른 삶을 살고 계신다고 위안을 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가 점점 포화상태가 되다보니 이제는 해외선교까지 계획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김선일씨의 죽음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고, 최근 아프카니스탄에 가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하는 개신교파의 움직임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흡사 시장경제의 논리를 종교에 그대로 적용하여 실천하는 것이 나닌지 우려됩니다. 이와 고나련하여 초기 한국 개신교에서 '야훼'를 작명하는 과정에 대해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현재 조선이 믿는 '하느님'으로 할까? 너무 뻔하니 '하나님으로 할까?" 어찌보면 기업에서 제품의 작명을 짓는 듯한 태도로 임하니 종교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던 모양입니다. 친구도 교회 목사인데 중동 선교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더군요. 아마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질서에 종교시장주의가 들어서서 시장지배 선점을 위한 각축에 한국교회들이 발벗고 나선 것으로 이해합니다. 힘내라고 하면서 이런 측면의 의견도 있다고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더니 묵묵부답하다가 연락이 뜸해진 것이 마음 아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친구는 한마디로 자유와 사랑을 위한 일보를 준비 중이겠거니 생각하고 오늘도 전화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기독교계가 밝힌 대로 국가와 사회에 영향을 주는 국민(영유아를 뺀) 중 기독교인(카톨릭과 개신교)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반수를 넘는 상황입니다. 그럼 우리 사회가 선교를 그만두고 다른 곳에서 선교를 해야 하는가? 사회가 온전한가"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교회들은 점점 신자가 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독교인들이 내면화된 하나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가의 문제는 각자 개인에게 맡겨둘 것이 아닌데도 믿음의 질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이제는 시장논리처럼 인원만 선점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듯 합니다. 물론 고민이야 하겠지만 시장 선점이 먼저일테고 아마도 믿음의 내면화에 대해서는 고민은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다고 해야 정확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분들이 많아서라든가 빨갱이가 많아서, 즉 불순분자가 많아서 우리 사회가 혼란한 것이지 내가 몸담고 있는 종교가 문제라서 지금 목회자들이 문제라서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야훼입니다. 이슬람과 같은 하나님이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세계 종교로서의 기독교라는 위치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태라 기독교인들은 인지부조화 측면에서 인간의 도덕과 일관성보다 자기들이 믿는 행위의 정당성을 더욱 강조하느라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많은 유럽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복지가 잘 된 나라일수록 기독교는 그 힘을 잃는다. 지금 유럽 기독교의 위치가 그렇다. 마국과 남미 그리고 아시아의 한국은 어떤가? 종교를 믿게 하는 데에 애너지를 쏟을 것이 아니라 경제적 성장을 위해 정부를 다그치기보다 사회복지를 늘리는 데에 노력을 하는 것이 불쌍한 영혼들을 줄이는 것이다. 베버가 말한 대로 이런 식이라면 기독교는 이분법으로 무장하여 갈등을 먹고 사는 존재가 될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권합니다. 한번 인지부조화나 인지불일치를 검색하시고 종교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진정한 믿음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이 말씀을 실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말하는 제게 당신 교회다니는 사람인지, 성경을 몇번 읽었냐고 하지 마십시오. 김일성과 같은 세습으로 수십, 수백만 신도를 우롱하는 종교가 있는 한, 정부와 투쟁도 불사하며 미국을 비호하며 기득권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 종교라면 거부하십시오. 자기들에 대한 비판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팔아가며 정당화하는 논리에만 빠져있는 자들을 거부하십시오. 조각난 글을 맞춘 성경의 일부분으로 비판을 정당화하는 태도를 버리십시오. 이는 모순으로 가득찬 성경의 일반적 해석 문제가 아니라, 또 종교 지도자들의 욕심과 권위주의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믿고 사랑하는 말씀을 자신이 읽고 해석하지 않고 시대가 변할 때마다 다른 해석을 해놓는 것을 의존적으로 추종한 데에 따른 것입니다. 자신이 말씀을 읽고 직접 내면화하여 인간적인 도덕률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와 인간에 대해 인내하고 말씀 대로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세상은 살기 좋아집니다. |
출처 : 포토 KIN
글쓴이 : 권선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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