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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점만 쓰겠습니다. - 기독교 인들에게 고합니다.

맑은샘77 2006. 5. 19. 18:07
이 글의 '기독교'는 전체가 아닌 일부를 지칭하는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거두절미하고 요점만 쓰겠습니다.
다빈치코드가 왜 기독교를 부수고 있는지.


# 다빈치코드가 뭡니까?

원작은 소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건 영화지요. 여기까지는 간단합니다.
중요한건 물론 내용이겠죠. 기독교계의 주장에 따르면 반 기독교 적인 정서와
신성모독이 주를 이루는 '악마의 소설'입니다.

이 악마의 소설은 누가 썼을까요. 댄브라운이라는 작가입니다.
이 작가의 주요한 작품으로는 '천사와 악마'가 있습니다.
다빈치코드를 논함에 있어 '작가'를 걸고 넘어지려면 천사와 악마도 읽어야만
하죠.

'기독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댄브라운의 책들을 '표면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이는 분명 종교에 대한 지독한 공격이며, 신성모독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마인드를 버리거나, 책을 심층적으로 읽는다면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죠. (둘다 바뀐다면 금상첨화구요)

간단히 내용을 정리해볼까요?

먼저 천사와 악마입니다.

천사와악마는 바티칸이 배경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사회는 과학과 종교를
축으로 하여 발전해 왔죠. (이건 픽션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사회발전의 직접적 축이되는 과학에 있어서 부족한 부분을 종교가 메꾸어 주고
형이상학 적이고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따라서 '기술'이나 '사회'의 발전에
는 별 도움이 안되는 종교의 부족한 부분을 과학이 메꾸어 준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이원적 구조는 그 본질이 '대립'이란 것이죠.
따라서
과학과 종교는 서로를 견제하고, 강한쪽이 약한쪽을 탄압하게 됩니다.

천사와 악마에서 짚어내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과학과 종교의 이원적 구조. 이러한 이원적 구조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미 인식되어 있는 사실이고, 댄 브라운은 이 주제를 적절히 요리해서
책을 쓴 것이죠.

서로 배척하는 종교와 과학에 밝은 미래는 없다 - 가 주제쯤 되겠습니다.

다만 이야기를 서술함에 있어 재미를 추구하기 위한 장치로 카톨릭 신앙을 공격한 것입니다. (댄브라운의 소설에선 기본적으로 '구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신교를 무시한다거나 하는 이유라기 보다는, 그가 주로 사용하는 소재들이
구교를 가지고 놀기에 더 적절하기 때문이죠. '카톨릭'은 구교와 신교를 아울러 지칭하기도 하지만 구교만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댄 브라운이 지적하는 문제들은 카톨릭계에서도 스스로 인정하는 말
그대로의 '문제점'들입니다.

'과학'의 입장에서 소설을 서술하며 '카톨릭'의 문제점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이 '악마의 소설'이 될 이유는 없죠,.

게다가 그것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게 '종교와 과학의 상생을 통한
보다 나은 미래'라면요.

물론 소설 전개에 있어서의 선정성(종교에 대한)이 다소 지나치다는 의견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표현론적 관점에서 '지나친'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악마의 책'이네 '작가는 악마네'하는 것은 '오버'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많은 '기독교 인'들은 이러한 '선정성'에 빠져서 책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이제 다빈치 코드를 볼까요.


다빈치코드의 '핵심'이 되는 내용은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입니다.
'예수결혼설'이라고 멋대로 이름을 붙여 봅시다.
아무튼, 이 '설' 에 대해 얘기 하기 위해선 기초지식이 필요합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기독교 인이던 아니던) 다빈치 코드를 읽고 이렇게 말하죠.

'이거 정말이야?'
문제는 이겁니다. '이게 정말일까?'

신앙을 떠나서 결론부터 대답하자면 '알 수 없다'입니다.

예수가 결혼했다는 설은 정말 고리짝부터 있어왔습니다.
가깝게는 1970년대에 '성혈과 성배'가 있었죠.
(다빈치코드에도 등장하는 책이며, 이 책이 작가들이 저작권 위반 혐의로
댄브라운을 고소했다가 패소했습니다)

그리고 '다빈치 코드'는 이러한 주장의 '흔적'을 옛날 고리짝적 작품들에서
찾아나갑니다. 천사와 악마 에서와 같이 이 바탕엔 미묘한 '이성'과 '종교'의
대립이 깔려있습니다. 이성은 물론 '과학'을 상징하죠.
하지만 다빈치코드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다빈치코드의 '핵심'은 '카톨릭이 파괴한 신의 여성적 면모'입니다.
예수가 결혼을 했느냐 안했으냐, 아니 그럼 신이 '여자'란 거냐-
와 같은 유치한 질문이 아닙니다.

사실 카돌릭 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가 그 발전 과정에 있어서 '여성성'을
박대하고 파괴해왔습니다.

다빈치코드는 이러한 '사실'을 '공격'함에 있어서 '픽션'을 사용한 것입죠.

물론 정작 문제가 되고 있는것이 '예수결혼설'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을 수 밖에요. (작가도 당황했을것입니다)

역시 신앙을 떠나서 솔직하게 말해보라 하면,이것이 댄브라운의 재능이
아닌가 싶습니다.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만드는 능력. (물론 재료의 선택도 탁월 하지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같은 작품도 물론 일대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이었지만, 다빈치 코드에 비할바는 아니라고 생각되는군요.

개인적으로 종교와 관련하여 이정도의 센세이션을 불러온 작품은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정도 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죠.

종교는 더이상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닙니다.
'신성불가침'의 폐해와 불합리성은 이미 밝혀진지 오래죠.

저도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신앙에 대한 '비판'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악의일변도의 '비난'만 아니라면 말이죠.

그리고 제가 보기에 '다빈치코드'는 '비판'이지 '비난'이 아닙니다.


#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엇이 문제인 걸까?

'다빈치코드 사태'라고 할 만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한국 기독교의 '색'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물론 해외에서도 '다빈치코드'를 가지고 난리부르스를 추었지만, 한국 기독교
처럼 '배경지식 없이' '그러나 끈질지게' 물고 늘어진 곳은 없었죠.

이는 한국인의 정서와 기독교가 묘하게 융합되면서 생긴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흔히 말하는 성당, 그러니까 천주교(신교)와 비교하여 보다 가족적인 분위기의
기독교가 갖게 된 맹점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한국 교회의 가부장적인 면에대한 논란이야 예전부터 있어왔었지만, 근래에
볼수 있는 모습들은 이런 문제점들이 쌓여서 터진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구교의 대응은 품위있고 수준있었습니다. (물론 항상 예외는 있습니다만)
고위직 성직자들이 '아 그거? 픽션이랍니다' 라고 대응해 주는 정도.
조금더 이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분들께선, 다빈치코드에서 근거로 사용된 내용들을 반박하는 '자료'를 제시하였고, 이를 책으로 엮어내기도 하셨죠.

자연스럽게 일반 신자들도 '응,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가게 되었죠.
물론 다빈치코드를 읽고 신앙이 흔들린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에 대한 카톨릭계의 반박 자료를 접하고 나면 안정(?)을 취하게 되기 마련이죠.

하지만 기독교는 어땠습니까.
책 출판부터 말 그대로 '난장판'을 벌였죠.

각종 도서포탈 사이트엔 책에 대한 일방적 맹비난과 욕설, 게다가 출판
관계자들을 향한 협박과 인신공격이 끊이질 않았죠.

교회내에서도 '다빈치코드'를 '이해'하고 '반박'하거나 '설명'하려하기 보단
일방적으로 '악마의 책'내지는 '금서'로 정해버렸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독교계의 과잉반응이 다빈치코드의 판매량 증가에
도움을 줬다는 말이 나올 정도지요.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오버'할까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길 테니까요.)


# 이제 어떻게?

카톨릭은 사랑과 평과, 용서와 상생의 종교입니다.
신교든 구교든 어느 파든지 간에 이는 기본이 되는 공통된 교리이죠.
(대부분의 종교가 마찬가지 이지만요)

다빈치코드를 '적'으로 규정했다면, 예수께서 '적'에게 어떻게 대하라고 하셨는지 한번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처음부터 '적'이 맞긴 한지 잘 생각해 보시면 더 좋구요.


머리가 커버린 하느님의 아들딸들을 설득하기엔, '기독교적 마인드'는 많이
부족합니다.

'기독교적인 세계에서 기독교적인 논리로'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수단이 목적에 부합하는 것을 합목적성.

현재의 기독교에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출처 : 문화방
글쓴이 : 만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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