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죽음-장례

[스크랩] 주옥같은장례식설교

맑은샘77 2016. 5. 7. 12:43
주옥 같은 장례식 설교 모음 (추가 중)
  • 글쓴이: agaser
  • 조회수 : 138
  • 08.02.0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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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 예수님의 말씀 (눅 8:49-56)

이 시간 “죽음 앞에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제목입니다. 고 000 집사님의 입관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신 사건을 통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50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거나 아주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용감한 사람은 없습니다. 두렵지 않다면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장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려워말라고 말씀합니다. 왜 두려워말라고 하실까요?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두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두려움을 다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히2:14-15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으면 어떤 두려움도 다 물러가게 됩니다.

2. 주님은 죽음을 잔다고 하셨습니다.

52-53절에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사람들은 이 아이는 이제 끝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호흡이 멈추고 심장도 멈추고 체온은 싸늘해졌으니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 앞에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잔다고 하셨습니다. 잔다는 말은 깰 것이라는 의미도 있고, 평안함 가운데 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처럼 죽으면 평안합니다. 육체의 죽음도 그렇지만 자아의 죽음도 그래요. 내가 죽어 보세요. 평안해요. 내가 살았으니까 염려 걱정 욕심 다툼 시기 분쟁 불안 초조한 것이지 죽으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잘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육체도 내 자아도 잘 죽어야 합니다. 평안하게 되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52절에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살려 주실 텐데 왜 우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 갔는데 왜 웁니까? 부모를 보내고 울면 효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는 사람들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울지 않습니다. 부모를 보내고도 자녀를 보내고도 울지 않아야 합니다.

살전4:13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돌아가신 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우리보다 더 좋은 곳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실 때 많은 여인들이 따라가며 울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의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울려면 아직 지상을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해서 “하나님,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주세요. 모두 예수 믿고 천국 가게 해주세요. 하나님 일에 충성하게 해 주세요. 죄짓지 않고 살게 해주세요. 내가 죽게 해주세요.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이렇게 날마다 울어야 합니다.

훈련소에서 흘리는 땀 한 방울은 전쟁터에서 흘리는 피 한 방울보다 더 귀하다고 합니다. 날마다 우세요. 그러나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는 울 필요가 없습니다. 고인 집사님이 살아계실 제 제가 많이 울어드렸습니다. “하나님, 평안히 가게 해주세요. 주님 잊지 않고 꼭 천국 가게 해주세요. 좋은 날 하나님의 부름 받게 해주세요.” 그런데 꼭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있으면 설 대목이 아닙니까? 살아 있을 때 많이 울며 기도하세요. 그러나 고인은 더 좋은 곳에 계시니 위해서는 울 필요 없습니다.

4. 주님은 죽은 자의 손을 꼭 붙들어주셨습니다.

54절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죽은 아이의 손을 꼭 붙잡으시고 일으키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천국 갈 때 우리 손을 꼭 붙잡아주십니다.

요14:1-3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상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주님은 더 나타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시고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사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고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세상 수고 다 마쳤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잘 섬기고 하나님 일 많이 하다가 천국에서 함께 만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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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요 10:27-29)

이 시간에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람도 자기 자녀를 버리지 않는데 어찌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버리시겠습니까? 설혹 부모는 우리를 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신다고 하는 것이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시27:10).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왜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할까요?

1.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10:28에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우리 성도에게 주신 생명은 보통 생명이 아니에요.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원히 살았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만약 내가 받았다는 영생이 어떤 이유에서건 중간에 끝을 맞는다면 그것은 말로만 영생이지 애초부터 참 영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생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요5:24에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을 다시 잃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6:39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한 마리의 양이라도 잃지 않도록 찾고 찾으십니다.

2.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도장 찍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엡1:13-14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님에 의해서 영원한 인침을 받은 존재입니다. 엡4:30에 보니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했어요. 여기 "구속의 날"이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부활의 날입니다.

아주 너는 내 것이라 하고 도장 찍어 놓으셨어요. 그래서 사43:1-3에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도 불 가운데로 행할 때도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노년이 되어 망각증세가 와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습니다. 몇 달 전에 우리 최 집사님에게도 “하나님 잊지 마세요.”하고 기도해 드렸는데 하나님 잊지 않으셨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혹 나는 주님을 잊었어도 주님은 나를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요14:17에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 성도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이 약속입니다.

시37:28에 “여호와께서 -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람도 일단 자녀로 태어나면 그 자녀가 건강하든 병이 들었든 그 자녀를 위해 부모가 일생을 헌신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자녀도 한 번 나면 버릴 수 없는데 어찌 하나님 자녀가 버림이 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존재보다 자기 자녀들을 더 귀히 여기십니다. 사9:6에 “그의 어깨(shoulder-단수)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랬는데 여기 정사를 멘 어께는 단수입니다. 그러나 눅 15장의 잃은 양을 찾아 어께(shoulders-복수)에 멘 그 어께는 복수로 나와 있어요. 즉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우주보다 더 견고하게 메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보다 우리를 천 배 만 배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후4:18에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늙어 아무 쓸모 없게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시지 않아요. 그래서 사46:3-4에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마지막까지 책임져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야 해요. 아직 주님 앞에 나오지 못했다면 꼭 이 시간에 영접하시고 천국의 소망 가지고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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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에게 주시는 복 (행 16:31)

이 시간에 “믿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심히 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큰 이익을 얻기 위함입니다. 커도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아주 큰 복입니다.

그럼 믿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무엇일까요?

1. 믿는 자에게 구원 받는 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구원은 죄에서 구원, 저주에서 구원, 사단에서 구원, 절망에서 구원, 지옥감에서 구원, 율법에서 구원 등 다양한 구원입니다. 예수 잘 믿어 보세요. 이 건져주시는 구원의 감격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2.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복을 받습니다.

요1:12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랬습니다. 세상의 왕의 아들 왕자만 되어도 놀라운 것인데 하나님의 자녀라니 상상이라도 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특권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한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좋으신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왜 좋으신 것으로 주시지 않겠어요? 가장 좋으신 것으로 주십니다.

3. 믿는 자에게는 능력과 권세를 주십니다.

막9:23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침범치 못합니다. 사람들이 미신을 믿고 두려워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아무 염려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4. 믿는 자에게는 천국의 복을 주십니다.

요12:26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셨습니다.

어떤 마을에 한 사나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나이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둘도 없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첫 번째 친구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소중히 여기고 가까이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친구는 만나기만 하면 이래라 저래라 요구만 하고 귀찮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친구지만 될 수 있으면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왕궁에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왕이 법정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제일 친하게 생각하는 첫 번째 친구에게 동행해 줄 있느냐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첫 번째 친구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 찾아갔습니다. 하소연을 하면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친구가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같이 가주기는 하겠는데 왕궁의 문까지만 같이 가겠다. 그 다음은 너 혼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크게 실망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에게 갔습니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세 번째 친구가 두말없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물론이지. 내가 함께 가주지. 내가 왕에게 가서 자네가 틀림없이 결백한 사람이라고 말하겠네."라고 하면서 따라나섰습니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왕의 법정은 하나님의 심판대입니다. 누구나 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친구는 물질입니다. 아무리 물질을 좋아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물질은 절대로 같이 따라가 주지 못합니다.

두 번째 친구는 우리의 부모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무덤까지는 따라와 묻어주고 애도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습니다.

그럼 세 번째 친구는 누구일까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너무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면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하나님의 딸은 하나님 나라에 가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 잘 믿어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능력과 권세 받고 천국의 영원한 복을 받아 누리는 가족과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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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죽음의 의미 (계14:13)

이 시간에 [성도의 죽음의 의미]라는 제목입니다. 요즘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들어보셨죠? 웰빙이란 사전적인 의미는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지향하는 삶의 유형을 가리키는데 간단히 말하면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습니다. 잘 먹고 잘 살뿐 아니라 잘 죽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내세의 소망 없이 산다면 어찌 웰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잘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 외에는 이 세상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 죽음의 두려움도 공포도 없는 이생 뿐 아니라 내세가지 진정한 인생의 행복과 영생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성도의 죽음의 의미를 잘 알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럼 성도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성도의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복된 것입니다.

계14:13에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죽음이 저주라면 독생자까지 주시면서 사랑하신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는 죽음을 면제해 주셔야지 허락하셨을까요? 성경은 이것을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추한 육신 이대로 영원히 사는 것이 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귀한 것을 이루시고 주시기 위한 한 과정일 뿐입니다.

2. 성도의 죽음은 고통스런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눅8:52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셨습니다. 잔다는 것은 그만큼 편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시 깰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음은 자는 것과 같답니다. 천국에 입신한 썬다씽에게 천국성도가 한 말이 죽음은 잠과 같고 이 죽음을 넘어가는 데는 아무런 고통이 없다고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자기 죽은 줄을 알지 못하지만 다른 것은 성도에게는 천사와 성도들이 나타나 천국으로 인도해 주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마귀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3. 성도의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니라 기쁜 것입니다.

이 날은 천국의 빵빠레가 울리고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수많은 천사들과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영접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5:8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했고, 또 빌1:23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했습니다. 왜 죽음이 불행하게 보이고 슬프게 보입니까? 그것은 신령한 눈으로 보지 않고 육신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는 내가 가도 울지 말라. 찬양하라고 유언하는 것을 봅니다.

4.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생의 영원한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어요. 저는 임종하시는 성도들을 지켜보면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잠시 죽어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살아나 가족들을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을 보았고, 어떤 분은 천사가 황금 수레를 대기해 놓고 모셔가려고 한다고 글로 써 준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다니엘 수양관의 박영문 장로는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와서 하나님의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박용규 목사님도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습니다. 여러분도 한 분도 빠짐없이 천국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고인들의 최고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세요?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나오듯 자손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천국 오는 것이랍니다. 또 한 사람이라도 지옥에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고통스런 지옥에서도 죽은 자의 한결같은 소원은 지옥 오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모두 천국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나의 행복이 되고 부모에게도 효도하는 것입니다.

5. 성도의 죽음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요14:2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외롭게 혼자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환영단을 이끌고 데리러 오십니다. 이것이 불신자와 크게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의 죽음은 결코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비극이 아닙니다.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고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딸임을 먼저 감사드립니다. 우리들도 고인을 본받아 신앙생활 잘하고 좋은 일 많이 하다가 장래에 천국에서 함께 만나는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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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어떤 곳일까? (계 21:1-4)

이 시간에 “천국에 없는 것과 있는 것”이라는 제목입니다. 성도에게도 죽음이 있지만 슬프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하늘 집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곳인지 필설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여기에 대해서 천국에 없는 것과 있는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1. 계 22:5에 천국에는 밤이 없다 했습니다.
밤이 없습니다. 밤이 없다는 것은 어둠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밝은 빛만이 있어요. 마음에 어둠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은 항상 밝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하셨어요. 이렇게 천국은 좋은 곳입니다.

2.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다.
거기서는 아픈 사람을 볼 수 없어요. 모두 다 건강하고 모두 다 젊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질고나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어떤 상처도 다 치료 되어 기억할래야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3. 죽음과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계 21:3-4절에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했습니다.

4.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근심과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사업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입학 때문에 온갖 염려와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만사를 주님이 책임지시니 우리가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5. 유혹과 죄가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죄가 많습니까? 그러나 천국은 좋은 사람만 사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에서는 죄를 질래야 질 수 없습니다. 죄가 지어지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6. 바다가 없습니다.
본문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는 얼마나 고달프고 무섭고 시달리고 때로는 침몰되어 죽기도 합니까? 천국에는 환난이 없다는 말입니다.

7. 천국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 것은 다 변합니다. 바벨론도, 로마도, 애굽도 다 멸망했습니다. 세상 나라는 다 변하고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히, 영원히 변함이 존재할 것입니다.

8. 그런가 하면 천국은 아름다운 성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살 황금길과 보석으로 빛난 집이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새예루살렘 성을 문자 그대로 계산한다 해도 그 규모가 얼마나 크든지 한 사람 당 천 평 만 평짜리 아파트보다 더 크고 아름답습니다.

9. 천국은 기쁨과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슬픔과 근심 대신에 기쁨과 행복만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오고 생명수 강이 흐르는 곳입니다. 그 강가에는 온갖 생명 과일이 다달이 열매를 맺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뻤던 것의 천 배를 더해도 천국의 기쁨과 행복만 못합니다.

10. 천국에는 아름다운 내 개인의 집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충성했는지 거기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11. 천국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천국에 온갖 아름다운 것이 가득해도 사랑하는 예수님이 안 계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에는 가장 귀한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모든 성도와 구원 받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유족 및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천국만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출세해도 천국 가지 못하면 가장 불행합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했어도 천국 간다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 천국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죄를 대속하여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만 들어갑니다. 유식하다고 고상하다고 착한 일 많이 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떤 죄인든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부디 모든 유족들과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구원자 예수 믿고 천국이 영광스런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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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직한 고백 (눅 23:39-43)

이 세상에는 수십억의 인류가 살고 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달렸던 두 강도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두 종류의 모습을 축소한 모습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구원 받은 모습이고 하나는 스스로 버림받은 모습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두 사람이 모두 죄인이었지만 어떻게 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1.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41절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렇게 한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듯 우리가 구원 받으려면 최소한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인죄론의 기초가 잘 놓여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였습니다. 요즘에 신앙을 핍박하는 사람 별로 못 봅니다만 옛날에는 많았습니다. 그 때 생각에 ‘참 어리석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또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안다면 그런 일이 없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강도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책망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2. 예수님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41절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그 강도가 예수님을 정확히 알았다고 보기 어렵지만 전후 문맥을 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그는 최후의 순간에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주요 왕이시며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다 몰라도 나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알아야 합니다. 강도는 십자가에 함께 달리는 그 짧은 시간에 예수님이 누군지 발견했는데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어찌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구주이십니다.

3. 강도는 자신을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42절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강도가 구원 받는 영광스런 순간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어떤 죄인도 자기 공로 없어도 예수 공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공로 말고 다른 것이 거기 덧붙일 수 없습니다. 예수 믿어도 이래야 구원을 받는다는 다른 덧붙임이 있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인생의 목적은 있지만 오직 구원은 예수 공로로 받습니다.

사랑하는 유가족 그리고 성도 여러분!

여기 복된 강도와 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십시다. 예수님이 누군지 아십시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강도와 같이 예수님의 손을 잡고 저 천국에 가실 수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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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3대 질문 (벧전2:11)

오늘 본문에 우리 인생을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며 어디로 가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3대 질문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사며, 어디로 가는가? 이 3대 질문만 제대로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 인생은 어디서 왔습니까?

창1:26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과정상 보자면 어떻게 왔습니까? 부모에게서 왔습니다. 그럼 부모는 어디서 왔습니까? 조부모에게서 왔습니다. 그럼 할아버지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증조, 그럼 증조는 어디서 고조, 고조는 어디서 그 위에 그 분은 또 그 위에,,, 그렇다면 맨 위에는 누구시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이라고 합니다. 그럼 단군은? 곰의 자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개국 신화이고 그 위에 사실은 할아버지가 계실 것이고 결국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신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다윈의 진화론처럼 원숭이에게서 났다면 이 시간 재론할 가치조차도 없지만 그럼 그 원숭이는 어디서 났겠습니까? 거슬려 올라가면 보이지 않는 작은 아메바라면 그 아메바는 어디서 왔습니까? 그리고 이 지구와 우주는 어디서 왔습니까?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머리 좋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이 고도의 그러므로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깊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인생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중국 어느 마을에서 부친의 비문을 세우는데 쓸 말이 없어서 "먹다. 죽다"라고 써서 비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래서는 불효이지요. 그러나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자들은 다 이런 인생입니다. 잘해야 먹다. 낳다. 일하다. 죽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야 썩어져 없어질 것만을 위해서 산다면 어리석은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삶의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고전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리고 전12:13에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니라"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 경외하며 사는 것이 목적일까요? 우리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래야 우리 인생이 가장 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좋으시겠지만 우리가 복이 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그래야 형통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야 자손이 잘 됩니다.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은 안 될 것이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잘 될 것입니다.

3.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세월이란 고속열차를 타고 무덤이란 종착역을 향하여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잘 알아야 합니다. 잘못 알면 큰 낭패를 당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후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요즘은 과학자들도 영혼의 실체를 밝혀내고 있습니다. 영혼 떠난 몸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등 여러 실험이 진행되었습니다. 과학자들도 이 지구의 북쪽으로 우주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이미 성경이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습니다. 영원한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만 지으며 자신의 소욕대로만 산 사람들은 천국에 못가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잘 아시죠. 부자는 세상에서는 성공했지만 유황불이 펄펄 끓는 음부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거지였지만 마음에 예수님을 모셨기에 천국의 백성이 되어 영광중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크게 후회할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저는 찜질방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천국체질이지 지옥체질은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이보다 더 뜨거운 지옥에서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어떻게 이 뜨거운 곳에서 1시간도 아니고 하루도 아니고 천년만년 영원토록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 잘 믿어 나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천국체질로 살아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유족들과 성도 여러분!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갑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면 하나님의 품으로 갈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둠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 모두 이 엄숙한 순간에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삶을 결심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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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주는 자유 (빌1:20-24)
474. 231장

먼저 사랑하는 유족들과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위로의 말씀과 영으로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 “죽음의 자유”라는 제목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싫어하고 두려워 하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죽음이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본문의 바울은 지상의 영화로운 삶보다 육신을 떠나 천상의 삶을 더 사모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먼저는 죽음은 우리에게 한없는 자유를 선사해 주기 때문입니다.

1. 죽음은 현세의 모든 악을 제거해 줍니다.

죄 얼마나 사람을 범죄케 하고 갈등과 시련을 줍니까? 그러나 죽음은 죄와 상관없게 만들어 줍니다. 세상 살면서 늘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케 했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어졌습니다. 이 방법은 지상에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범죄하지 않으려면 주님의 공로를 믿고 성령으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죽음이 가져다 주는 유익입니다.

2. 죽음은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계21:4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다시는 고통과 슬픔이 없어요. 영원한 기쁨과 찬송만이 있습니다.

3. 죽음은 최고 행복의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낙원이란 즐거운 곳입니다. 거기에는 행복의 모든 조건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만족이 없었지요. 그러나 그곳에는 기화요초 만발하고 아름다운 생명 과실과 생명강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과 성도들과 천사들이 있는 곳입니다.

4. 죽음은 영원한 안전의 자유를 줍니다.

지상에 있을 때는 주님을 믿다가 부인하거나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느 누구도 죽음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 신원의 영원한 안전장치입니다.

사랑하는 유족들과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을 믿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유와 행복의 천국에 들어가신 성공적인 삶을 사신 집사님을 생각하면서 슬퍼하지 마시고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믿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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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받는 사람 (롬8:28)

고 000 집사님의 장례식예배에 제가 유족들과 성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께 사랑 받고 살자는 말씀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셨기 때문에 아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사랑 받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늘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1. 마음에 안식을 주십니다. 시127:2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했습니다. 잠을 주신다는 것은 평안함과 안식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살이에서 고달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면 형통함을 주십니다. 본문 롬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잘 되도 잘된 것이고 못 되도 더 잘되게 결과를 주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3.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약1:12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즉 생명으로 왕노릇하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겠다는 축복입니다.

4.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나라를 주십니다. 약2:5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셨습니다. 성도는 지상에서 살면서 천국을 누려야 정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누립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5. 하나님을 사랑하면 보호하여 주십니다. 시145:20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했습니다. 사43:2에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 -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진정 사랑하면 이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자굴에서도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6.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잠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요일4:12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했습니다.

7. 하나님을 사랑하면 재물의 복을 주십니다. 잠8:21에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성경에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모두 하나님 경외하는 자들에게 물질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욥도 다윗도 야곱도 다 부자였습니다.

8.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 사랑 받고 또 하나님이 함께 사시는 사람이 됩니다. 요14:23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하셨습니다.

9.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됩니다. 고전8:3에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10. 하나님을 사랑하면 천대에 이르러 복을 주십니다. 신5:10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이렇게 놀라운 복을 약속하십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늘 예배하고 기도하고 충성하며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드린 안식과 형통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와 보호와 사랑과 재물과 함께 하심과 아심과 체험과 천대까지 이르러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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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어떤 곳일까? (계 21:1-4)

이 시간에 “천국에 없는 것과 있는 것”이라는 제목입니다. 성도에게도 죽음이 있지만 슬프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하늘 집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곳인지 필설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여기에 대해서 천국에 없는 것과 있는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1. 계 22:5에 천국에는 밤이 없다 했습니다.
밤이 없습니다. 밤이 없다는 것은 어둠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밝은 빛만이 있어요. 마음에 어둠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은 항상 밝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천국은 좋은 곳입니다.

2.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다.
거기서는 아픈 사람을 볼 수 없어요. 모두 다 건강하고 모두 다 젊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질고나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어떤 상처도 다 치료 되어 기억할 래야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3. 죽음과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계 21:3-4절에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했습니다.

4.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근심과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사업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입학 때문에 온갖 염려와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5. 유혹과 죄가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죄가 많습니까? 그러나 천국은 좋은 사람만 사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에서는 죄를 질래야 질 수 없습니다. 죄가 지어지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6. 바다가 없습니다.
본문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는 얼마나 고달프고 무섭고 시달리고 때로는 침몰되어 죽기도 합니까? 천국에는 환난이 없다는 말입니다.

7. 천국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 것은 다 변합니다. 바벨론도, 로마도, 애굽도 다 멸망했습니다. 세상 나라는 다 변하고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히, 영원히 변함이 존재할 것입니다.

8. 그런가 하면 천국은 아름다운 성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살 황금길과 보석으로 빛난 집이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새예루살렘 성을 문자 그대로 계산한다 해도 그 규모가 얼마나 크든지 한 사람 당 천 평 만 평짜리 아파트보다 더 크고 아름답습니다.

9. 천국은 기쁨과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슬픔과 근심 대신에 기쁨과 행복만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오고 생명수 강이 흐르는 곳입니다. 그 강가에는 온갖 생명 과일이 다달이 열매를 맺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뻤던 것의 천 배를 더해도 천국의 기쁨과 행복만 못합니다.

10. 천국에는 아름다운 내 개인의 집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충성했는지 거기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11. 천국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천국에 온갖 아름다운 것이 가득해도 사랑하는 예수님이 안 계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에는 가장 귀한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모든 성도와 구원 받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유족 및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천국만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출세해도 천국 가지 못하면 가장 불행합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했어도 천국 간다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 천국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죄를 대속하여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만 들어갑니다. 유식하다고 고상하다고 착한 일 많이 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떤 죄인든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부디 모든 유족들과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구원자 예수 믿고 천국이 영광스런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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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만나자(눅17:20-21)

우리 성도들에게 영원하고 가장 큰 소망은 바로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많은 임종하시는 성도들을 지켜보면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잠시 죽어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가족들을 모아놓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을 보았고, 어떤 분은 천사가 황금 수레를 대기해 놓고 모셔가려는 것을 글로 써 준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 진봉교회에서도 어느 집사님께서는 임종한다고 가족들이 모였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며칠 날 오너라 해서 꼭 그 날자 12시 땡 하고 지나니까 몇 분 안되 운명하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다니엘 수양관의 박영문 장로는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와서 하나님의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다는 성경의 증언은 모두 진실입니다. 무한한 우주 속에 놀라운 생명체인 지구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믿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아름다운 천국을 갑니다. 그런데 성도의 천국 경험은 약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1. 영적으로 누리는 현세천국입니다.

눅17:20-21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천국이 바로 마음에서 누리니 심령천국이요,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이므로 현세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그 마음에 이 천국이 성령으로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이 적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 잘 경외하면 마음속에서 풍성한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흐르고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고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삶의 형통과 능력과 승리와 축복이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지상에서 예수 잘 믿어 이 천국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2.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내세천국이 있습니다.

고후12:2-4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입신이라고도 합니다. 육체이탈은 아니지만 영혼만 갔는지 몸까지 갔는지 구분하지 못할 만큼 생생한 체험이 됩니다. 어떤 경우는 질고나 사고 등으로 육체이탈을 해서 잠시 죽었다가 천국을 보고 온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볼 때 이런 것이 결코 비성경적이 아니고 가능함을 확신하게 됩니다.

어릴 때 황두연 목사 집회 시 간증하던 옥화라는 자매의 입신경험을 녹음으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천국에서 천사를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하는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도의 유명한 목사 썬다씽도 이런 입신을 자주 경험하여 그 때 주님과 대화한 기록을 책으로 냈습니다.

우리 교단 박용규 목사님도 임종예배 드릴 만큼 사경 속에 있을 때 천국을 보고 돌아왔니다. 그는 천사와 함께 이 지구를 떠나 몇 분 안에 북극 위로 올라가서 황금길을 통해 천국 가서 온갖 아름다운 것을 보고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주시는 것은 모든 백성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참된 믿음을 갖도록 하심입니다. 이 경험들이 바로 내세 천국을 지상에서 경험하는 은사적 경험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 경험이 가능합니다.

3. 내세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갈 천국입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성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계21:1-4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것이 내세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반드시 들어가야 할 천국입니다. 여기 못 들어가면 지옥밖에는 없습니다. 중간 지점은 없어요. 우리는 모두 거기서 만나야 합니다. 거기서 만나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울까요? 사랑하는 유족들은 앞서간 고인이 거기서 기다리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서 가족들이 하나님 잘 섬기는 것을 학수 기대하실 것입니다. 그곳은 참으로 아름답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 영생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최상의 복락원입니다.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이 말씀 들으시고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섭섭하지만 소망을 가지시고 위로를 받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고인은 천국에 가셨습니다. 예수님 잘 믿고 마음의 천국 내세적 천국 누리고 더욱 충성하여 하나님께 큰 칭찬과 상 받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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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직한 고백 (눅 23:39-43)

이 세상에는 수십억의 인류가 살고 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달렸던 두 강도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두 종류의 모습을 축소한 모습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구원 받은 모습이고 하나는 스스로 버림받은 모습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두 사람이 모두 죄인이었지만 어떻게 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1.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41절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렇게 한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듯 우리가 구원 받으려면 최소한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인죄론의 기초가 잘 놓여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였습니다. 요즘에 신앙을 핍박하는 사람 별로 못 봅니다만 옛날에는 많았습니다. 그 때 생각에 ‘참 어리석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또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안다면 그런 일이 없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강도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책망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2. 예수님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41절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그 강도가 예수님을 정확히 알았다고 보기 어렵지만 전후 문맥을 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그는 최후의 순간에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주요 왕이시며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다 몰라도 나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알아야 합니다. 강도는 십자가에 함께 달리는 그 짧은 시간에 예수님이 누군지 발견했는데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어찌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구주이십니다.

3. 강도는 자신을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42절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강도가 구원 받는 영광스런 순간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어떤 죄인도 자기 공로 없어도 예수 공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공로 말고 다른 것이 거기 덧붙일 수 없습니다. 예수 믿어도 이래야 구원을 받는다는 다른 덧붙임이 있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인생의 목적은 있지만 오직 구원은 예수 공로로 받습니다.

사랑하는 유가족 그리고 성도 여러분!

여기 복된 강도와 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십시다. 예수님이 누군지 아십시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강도와 같이 예수님의 손을 잡고 저 천국에 가실 수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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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관의 신령한 의미 (창50:1-3)

창50:1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 맞추고 2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입관이란 시신을 관에 넣는 예식입니다. 이 모든 예식들은 지상에 남아 있는 후손에게 남겨진 의무로서 이 일은 조상에 대한 자손의 예의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처리에 대해서는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본문과 같이 일부 성경의 기록에서 입관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으로도 그런 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었습니다. 죄에 대해 죽고 저주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장례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죽었다고 하면서도 생활이 깨끗하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한 자가 있는데 그것은 장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사가 무엇이냐? 세례가 장사입니다. 골2:12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장사를 위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세례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야곱의 입관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장사지내지기 위하여 영적 입관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2절 말씀대로 향재료를 넣어야 합니다.

향재료가 무엇일까요? 계8:3을 보면 기도를 향이라 했어요. 더 자세히 말한다면 기도와 찬송과 말씀 등의 예배가 향입니다. 이 향이 없이는 우리의 추한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변화 받기 위해서 예수 믿고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2. 향재료 넣는데 40일이 걸렸습니다.

40은 훈련의 수요 연단의 수입니다. 즉 예배생활이 잘 훈련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루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향이 시신에 충분히 배려면 40일이 걸렸듯 신앙생활이 아주 우리 몸에 배여야 합니다.

3. 70일간 애곡했습니다.

이것은 고인을 온전히 떠나보내는 마음인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생각과 마음까지도 온전히 변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인의 시신을 입관함에 대한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하여 온전히 입관하여 성령으로 장사지내지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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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죽음 (창50:1-3)

사람의 죽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과 그렇지 못한 죽음입니다. 아프리카 최대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80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우간다에 전해지자 온 백성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였습니다. 축제를 벌였습니다. 우간다 정부도 대략 이런 내용으로 공식 성명을 냈습니다. <아민의 죽음은 좋은 일이다. 그의 죽음과 장례는 나쁜 과거의 종말을 의미한다. 잘 죽었다> 왜 그랬을까요? 살아생전에 쿠테타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폭정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반대되는 죽음이 있습니다. 야곱의 죽음입니다. 야곱이 죽자 애굽의 바로왕의 호의로 아들 요셉은 몸을 미이라로 만들었습니다. 미이라로 만들었다는 것은 최고 대우입니다. 또 향 재료를 야곱 몸에 넣었는데 40일이나 걸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70일 동안 애곡하였습니다. 3일장을 지내고도 지치는 데 감히 10주 동안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만큼 고인을 예우하고 사랑했음을 말합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모두에게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야곱의 입관 절차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1. 미이라를 만든 데서 영생의 소망을 보여줍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미이라를 잘 만들어 피라밋에 가보면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실물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미이라 자체는 시체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죽지만 천국의 소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몸에 향 재료를 넣는 데서 부활의 소망을 봅니다.

몸에 향을 넣는데 이 향들은 썩지 않게 하는 향들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3. 70일간 애곡함에서 성도는 죽음을 통해서 모두의 사랑을 받음을 보여줍니다.

무슨 뜻인가? 육신의 죽음도 그렇지만 내 자아가 죽어지는 것입니다. 내 죄가 죽고 내 교만이 죽고 내 고집이 죽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 따라 이웃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 천국도 가지만 살아서 예수 안에서 천국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의 죽음 앞에서 자신을 반성해 보십시다. 나는 언제 부름을 받아도 순종할 준비되어 있는가? 그리고 육체의 죽음 이전에 죄에 대해서 죽는 진정한 회개가 있는가? 이 죽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정 사랑 받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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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게 하는 은사 (고후12:9-10)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고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었으므로 영원한 천국에 가셨습니다. 인생의 승리를 한 것입니다. 이 귀한 축복을 되돌려 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고인이 아니라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앞에 남은 이 세상을 어떻게 승리하며 사명 잘 감당하고 살아가느냐가 남은 과제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상 살아 나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능력 있게 하는 은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우리를 능력 있게 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1. 믿음입니다.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요일5:4에도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믿음이란 놀라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믿음은 불가능이 없습니다. 믿음의 힘은 해도 멈추고 달도 멈추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어 100세지만 믿음으로 아들을 낳고, 모세는 홍해가 앞에 가로놓여 있었어도 믿음으로 홍해를 가르고 건넜고,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칠 일간 돌다가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 믿고 할 수 없다 하지 말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우리를 능력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선천적 후천적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능력을 받으면 훌륭해 질 수가 있습니다. 이 능력이 얼마나 크든지 고전1:27-28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성령의 능력을 받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우리를 능력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성경 66군 모든 말씀은 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내 말씀으로 붙드시기 바랍니다. 기록된 말씀은 소리도 없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도 없이 조용하지만 그 말씀을 믿는 자에게 반드시 성취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믿는 성도들을 돕습니다. 시103:20에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늘 하나님의 말씀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4. 기도가 우리를 능력 있게 합니다.
마18:19에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했습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세요. 엘리야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기도만 들어 주시는 것 아닙니다. 약5:17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능하게 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고후12:9-10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부족하고 나약하고 어려움도 하나님의 은사라는 점입니다. 혹시 기도해도 물리쳐 주시지 않는다면 이것을 통해서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믿으시고 불평하지 마시고 더 겸손히 더 주님을 의지하고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더 크고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귀한 은사입니다.

사랑하시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이 험한 세상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온전히 승리하며 살아갑시다. 우리를 능력 있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은사입니다. 말씀입니다. 기도입니다. 연단입니다. 우리 모두 능력 받아 저 나라에 이르도록 승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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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만나자(눅17:20-21)

우리 성도들에게 영원하고 가장 큰 소망은 바로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많은 임종하시는 성도들을 지켜보면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잠시 죽어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가족들을 모아놓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을 보았고, 어떤 분은 천사가 황금 수레를 대기해 놓고 모셔가려는 것을 글로 써 준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 진봉교회에서도 어느 집사님께서는 임종한다고 가족들이 모였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며칠 날 오너라 해서 꼭 그 날자 12시 땡 하고 지나니까 몇 분 안되 운명하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다니엘 수양관의 박영문 장로는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와서 하나님의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다는 성경의 증언은 모두 진실입니다. 무한한 우주 속에 놀라운 생명체인 지구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믿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아름다운 천국을 갑니다. 그런데 성도의 천국 경험은 약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1. 영적으로 누리는 현세천국입니다.

눅17:20-21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천국이 바로 마음에서 누리니 심령천국이요,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이므로 현세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그 마음에 이 천국이 성령으로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이 적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 잘 경외하면 마음속에서 풍성한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흐르고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고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삶의 형통과 능력과 승리와 축복이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지상에서 예수 잘 믿어 이 천국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2.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내세천국이 있습니다.

고후12:2-4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입신이라고도 합니다. 육체이탈은 아니지만 영혼만 갔는지 몸까지 갔는지 구분하지 못할 만큼 생생한 체험이 됩니다. 어떤 경우는 질고나 사고 등으로 육체이탈을 해서 잠시 죽었다가 천국을 보고 온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볼 때 이런 것이 결코 비성경적이 아니고 가능함을 확신하게 됩니다.

어릴 때 황두연 목사 집회 시 간증하던 옥화라는 자매의 입신경험을 녹음으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천국에서 천사를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하는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도의 유명한 목사 썬다씽도 이런 입신을 자주 경험하여 그 때 주님과 대화한 기록을 책으로 냈습니다.

박용규 목사님도 임종예배 드릴 만큼 사경 속에 있을 때 천국을 보고 돌아왔니다. 그는 천사와 함께 이 지구를 떠나 몇 분 안에 북극 위로 올라가서 황금길을 통해 천국 가서 온갖 아름다운 것을 보고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주시는 것은 모든 백성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참된 믿음을 갖도록 하심입니다. 이 경험들이 바로 내세 천국을 지상에서 경험하는 은사적 경험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 경험이 가능합니다.

3. 영원한 내세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갈 천국입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성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계21:1-4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것이 내세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반드시 들어가야 할 천국입니다. 여기 못 들어가면 지옥밖에는 없습니다. 중간 지점은 없어요. 우리는 모두 거기서 만나야 합니다. 거기서 만나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울까요? 사랑하는 유족들은 앞서간 고인이 거기서 기다리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서 가족들이 하나님 잘 섬기는 것을 학수 기대하실 것입니다. 그곳은 참으로 아름답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 영생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최상의 복락원입니다.

사랑하는 유족과 성도 여러분!!

이 말씀 들으시고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섭섭하지만 소망을 가지시고 위로를 받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고인은 천국에 가셨습니다. 예수님 잘 믿고 마음의 천국 내세적 천국 누리고 더욱 충성하여 하나님께 큰 칭찬과 상 받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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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사랑을 깊이 깨닫자 (계 16:1-21)

이 시간 “고난의 사랑을 깊이 깨닫자”라는 제목입니다. 제 특별히 이 제목으로 말씀하는 이유는 고인의 생전에 소원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문 집사님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항상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교회 가까이에 집 있는가 보세요.” 교회 가까이 집을 사서 항상 하나님을 가깝게 섬기고 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평생소원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실로는 이루지 못했지만 이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셨고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마음만은 기쁘시게 받으시고 상을 주실 줄 믿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십니다. 특별히 우리를 위해 고난의 잔을 대신 받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 깨닫는다면 그것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우리 믿음을 크게 하며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12: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하였습니다.

본문에 대접이 나오는데 대접이 무엇일까요? 대접은 고난입니다. 인은 인침이고, 나팔은 복음이고, 대접은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부어지는 일곱 대접 재앙은 문자적으로는 말세의 재앙이자만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주님의 대접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즉 고난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다가오는 마음의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을 때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1.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 견딜 수 없게 됩니다.

2절에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했습니다. 종말에 짐승의 표 받은 사람이 따로 있겠지만 신령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그런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 짐승이 따로 없고 우상숭배자가 다로 없습니다. 제가 욕망대로 본능대로만 산 짐승이요, 세상을 사랑한 우상숭배자입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죄송해서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됩니다. 아버지 뜻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마음입니다.

2. 고난의 사랑을 더 깨달으면 그 사랑에 감동되어 녹아집니다.

3절에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했습니다. 이젠 죄악을 깨닫고 마음 아파할 정도가 아니에요. 십자가 사랑에 감동될 때 온통 마음이 보혈의 바다가 됩니다. 그리고 내가 죽고 예수만 살아요.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3. 고난의 사랑을 더 깨달으면 생각과 계획과 목적까지도 바꿉니다.

4-7절을 보면 대접이 부어져 강과 물 근원까지 피가 되고 그 피를 마십니다. 피의 역사가 더 세부적인 데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이젠 감동 정도가 아니에요. 좀 더 깊이 생각과 계획까지도 바뀝니다. 그래서 생각과 계획과 생애의 목적까지도 주님을 위한 것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이 이렇게 바뀝니다. 그래서 여기 하나님의 원수들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4. 고난의 사랑을 더 깨달으면 나를 잊고 하나님만 생각합니다.

8-9절에 보면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아 그 불로 사람들을 태웁니다. 그런데 아직 덜 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훼방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여기에 힌트가 있어요. 이 재앙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재앙이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깨달으면 나를 불태우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5. 주님의 사랑을 더 깨닫게 되면 주를 위해 몸부림칩니다.

10-11절에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이 말씀은 적그리스도 권세의 쇠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역시 재앙의 주제가 회개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짐승의 정권에 고통과 거역이라는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을 때 아직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악의 본성을 생각하며 애통하며 몸부림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데 훼방꾼이 내 안팎에 있으니 이 얼마나 아픔이요 고통입니까? 이것이 주의 사랑을 깨달은 자만이 갖는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6. 더욱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두려운 사선을 마다않고 수없이 넘나들며 주님을 사모합니다.

12-16절 내용입니다. 미혹의 영들이 왕들을 꾀여 유브라데강을 건넙니다. 누가 그 죽음의 전쟁터로 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미혹 당했기 때문이 갑니다. 이처럼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은 자는 어서 속히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을 동원하여 죽음의 사선을 넘어 주님을 사모합니다. “주님 언제 오시렵니까? 아직 오지 않으신다면 주님 제가 언제 주님께 갑니까?” 주님 곁으로 더 가까이 가고 싶어 갈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세상을 붙잡고 떠나기 싫어 안달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면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으로 천국을 침노하며 바울과 같이 지상과 천상의 사이에서 어느 편을 택할지 모르는 마음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주와 함께 따로 거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인 것입니다.

7. 고난의 사랑을 더 깨달으면 그 무엇도 초월하며 예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17-21절 내용입니다. 지진으로 무너지고 만국의 성도 사라지고 거대한 우박이 사람에게 떨어집니다. 아래에서 흔들리고 위에서 떨어지고 그러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재앙의 해석의 키가 21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재앙으로 조금 남은 사람들이요 계속하여 죽을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진정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으면 어떤 고난이 와도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압니다. 욕을 먹어도 좋아요. 그 일로 내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니 말입니다. 매를 맞아도 좋아요. 역시 그 일로 내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니 말입니다. 다 잃어도 좋아요. 아파도 좋아요. 억울해도 좋아요. 죽어도 좋아요. 내가 예수와 죽고 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감사요 영광입니다.

이 수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빌1:21-22의 바울의 고백과 같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했던 그 말씀과 같습니다. 이렇다고 믿고 저렇다고 안 믿고 그런 어린이가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은 자는 장성한 성도가 됩니다(엡4:15-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음이 대접같이 부어지고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유족들과 성도들 고인을 따라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며 천국에서 다시 만나십시다. 우리 모두 예수의 사랑 안에서 더욱 장성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랑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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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는 지혜 (마 24:15-20)

오늘 사랑하는 성도님을 입관하고 예배하면서 육신의 정으로는 섭섭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싶은 것은 고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셨기 때문에 천국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가실 때 편히 가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 분은 복이 많으신 분이세요. 자녀들이 기도하고 전도하고 또 목사님들을 비롯하여 기도해주신 많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길에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사실은 성경의 영원한 약속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죄악 많고 환난 많은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환난의 세상을 사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1. 16절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적을 피해 숨을 수 있는 산이 많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전에 속히 산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전쟁이 났을 때 피할 수 있는 산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처럼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피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온전히 피해집니다.

며칠 전 성도님이 고난 가운데 계실 때 많은 분들이 애타게 기도했습니다. 저도 고인의 손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을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평안함을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잠이 오면 편히 주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안 주실 줄 믿고 한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돌아와서도 “하나님 한 번만 이 성도님이 웃을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런데 그날부터 점점 좋아져서 다음 날에는 숨소리도 평안하고 연방 주무시기만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피해집니다. 우리가 세상 살 때 늘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 17절에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가지 말라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만큼 사태가 촉박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포위된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곧장 피해야지 머뭇거리면 잡힙니다. 이처럼 세상을 살 때 육신의 일에 메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살까? 너무 거기에 매여 살면 불행합니다.

사람들이 일생 화장실만 구하다가 마친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화장실이 밖에 있는 사람은 화장실이 안에 있는 집이 하나 있었으면, 그래서 집을 샀는데 이제는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그 다음에는 세 개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하다가 일생 마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비참한 마음 품고 살도록 하시지 않아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세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책임져주실 것을 믿고 자유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입니다.

3. 18절에 밭에 있는 자들은 겉옷을 가지러 돌이키지 말라 하셨습니다.

너무 급하니 겉옷을 챙겨 입으러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격식에 매이지 말고 활발하게 신앙 생활하라는 교훈입니다. 속으로만 아니라 늘 활발하게 신앙생활하세요. 그러면 시험도 물러갑니다. 죄악도 물러갑니다. 사단도 물러갑니다. 고난이 와도 견딜 수 있어요. 세상을 다 이길 수 있어요.

4. 19절에 아이 밴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멸망 시 가장 어려웠던 사람들은 임신과 수유기간에 있는 여성들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살이에 우리 믿음이 어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어리면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두려움 시험이 떠나갈 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이 크면 세상을 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다고 했습니다. 나도 돕고 남도 도우면서 살 수 있습니다.

5. 또 젖먹이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달콤한 축복만 추구하지 마세요.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고 용서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닮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납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의 일에 동참할 뿐 아니라 이웃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고난 받는 이웃과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가장 행복한 자가 됩니다.

6. 20절에 도망하는 날이 겨울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겨울은 비가 많아 도피하기 어려운 계절입니다. 그래서 겨울 닥치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차가운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차가울 때 시험이 오면 어떻게 이겨내겠습니까? 항상 뜨겁게 신앙생활하면 어떤 역경도 불행도 슬픔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7. 그리고 안식일이 되지 않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에 2,000규빗(약 1키로) 이상은 움직이지 못하게 발목 잡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무슨 의미냐면 신앙을 제한 억제하는 이런저런 잘못된 전통과 법에 얽매이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좋은 전통은 살려나가지만 믿음의 발목 잡는 전통에는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이런 것 저런 것에 매이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셨습니다. 이 환난 많고 죄악 많은 이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저 나라에 이르기까지 승리하고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 부르짖는 기도
글쓴이 : 이국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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