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손대던 외톨이 백인 청년, 인종갈등에 기름(종합3보)
인종 갈등 내재한 찰스턴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경고음'
(워싱턴·서울=연합뉴스) 신지홍 특파원 장재은 한미희 기자 = 미국 흑인교회에서 9명을 사살한 딜런 로프(21)가 심각한 백인 우월주의자로 확인되고 있다.
미 법무부 민권국, 연방수사국(FBI),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검찰은 이번 총격 사건을 '증오범죄'로 규정하고 수사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경찰이 사건을 발생 직후에 곧바로 증오범죄로 규정할 수 있었을 정도로 로프의 성향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단서가 잇따르고 있다.
찰스턴 경찰의 한 관계자는 "희생자들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됐다"며 사건의 성격을 요약했다.
사건 목격자인 실비아 존슨이 18일(현지시간) 미국 NBC 방송과 인터뷰를 통해 전한 로프의 범행 직전 발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나는 이 일을 해야 한다. 당신들은 우리 여성들을 강간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차지했다. 당신들은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
하이디 베이리치 미국 남부빈곤 법 센터 정보조사 국장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발언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꺼내는 전형적 주제라고 소개했다.
베이리치 국장은 "흑인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지만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백인들이 이런 말을 한다"고 설명했다.
흑인 남성들이 백인 여성들을 강간한다는 발언도 흑인에 대한 백인의 두려움 섞인 증오를 담은 미국의 옛날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로프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서는 그의 백인 우월주의 성향이 단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에서 검은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오른쪽 가슴에 과거 극단적 인종차별 제도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운용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의 국기를 누벼놓았다.
자신의 자동차에는 남부연합기가 새겨진 번호판을 달고 다니기도 했다.
로프가 소수 백인이 다수 흑인을 지배하는 사회를 동경했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사우스캐롤라이나 렉싱턴 출신인 그의 현주소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이스트오버라는 매우 작은 마을로 주민 거의 전부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다.
로프는 그 지역에서 학창 생활을 했으나 고교를 마치지 못했고 현재 직업도 없으며 학창 시절 친구들과도 연락이 뜸했던 '외톨이'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백인 우월주의 또는 흑인 증오에 사로잡힌 로프가 마약에도 손을 댔다는 증언도 나왔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린지 그레이엄(공화·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은 로프의 급우이던 조카딸의 말을 빌려 로프가 마약에 취해 지냈다고 전했다.
그레이엄 의원은 "로프가 조용하고, 이상하며, 매우 비사교적인 인물로 모든 사람이 그가 마약을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가 확인한 법원 기록을 보면 로프는 아편 의존증 치료제인 '서복손'(Suboxone)이라는 약을 처방전 없이 소지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었다.
고교 동창인 존 멀린스는 미국 뉴스 웹사이트 '더 데일리 비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로프에 대해 "'알약 투입기'로 여겨질 정도로 (향정신성 의약품의 하나인) '자낙스'(Xanax) 같은 약을 아주 많이 먹어댔다"고 말했다.
그는 "로프가 위험해 보이진 않았지만, 가끔 '남부의 자존심' 등을 들먹이며 거북한 말을 하기도 했고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많이 했다"며 "그래도 그런 성향이 이런 심각한 사태로까지 이어질지는 몰랐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건이 발생하기 몇주 전 로프와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다는 친구 조이 미크는 FBI에 "로프가 최근 생일 때 받은 돈으로 권총을 샀다"면서 "몇 주 전 함께 술을 마셨을 땐 로프가 '계획이 있다'는 말도 했다"고 털어놨다.
로프의 범행이 찰스턴시 및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내재한 인종 갈등에 기름을 부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남북 전쟁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및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요배경인 찰스턴은 흑인 노예와 백인 농장주가 갈등하던 흑백갈등의 뿌리가 남아있는 곳이다
USA투데이에 따르면 찰스턴은 2010년 기준 인구 12만 명 중 68%가 백인, 25%가 흑인이다.
정의를 위한 흑인 변호사회 회장인 말릭 샤바스는 이곳이 부유하긴 하지만 분열이 남아있는 곳이라며 인종주의가 '광범위하고 끈질기다'는 찰스턴의 흑인 주민들의 말을 전했다.
그는 찰스턴이 "백인은 꼭대기에, 흑인은 바닥에 있는 도시"이자 "현대의 짐 크로(19세기 흑인 비하 노래에 나오는 흑인 이름으로, 미국 남부의 흑인 차별 정책을 가리키는 말)"라고 꼬집었다.
찰스턴뿐만 아니라 인근 노스찰스턴에서는 지난 4월 백인 경관이 달아나는 흑인 용의자의 등 뒤에 총격을 가해 숨지게 했다.
이에 따라 이들 도시가 속한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심각한 인종갈등을 겪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사우스캐롤라나주 주 청사에 찰스턴 총격 이튿날도 남부연합기가 내걸린 것을 놓고 소셜미디어에서는 비난이 쏟아졌다고 ABC 방송은 보도했다.
남북전쟁 때 사용하던 남부연합기는 백인들에겐 남부 전통의 상징이지만 흑인들에겐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당국은 미국 50개주 중 유일하게 아직도 청사에 이 깃발을 게양하는 관행을 고수하고 있어 종종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남부연합기가 자랑스레 내 걸린 곳에서 이번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마치 미국인의 DNA 속에 심어진 사악한 유전자 코드처럼 백인 우월에 대한 상징이 미국인의 의식 속에 대대로 남아있다고 꼬집었다.
또 1994년생으로 겨우 21세밖에 안된, 소위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이후 출생자)가 이번 사건의 용의자란 사실도 적잖은 충격을 준다고 WP는 지적했다.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극단적 인종차별 제도, 인종 증오 등은 20세기와 그 이전을 살던 세대에서나 거론되던 해묵은 갈등의 주제로 여겨왔으나, 21세기에도 여전해 인종증오가 덜어졌다는 것이 환상에 불과했음을 여지없이 보여줬다는 것이다.
WP는 "밀레니얼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관용적이어서 이들이 앞으로 인종에 구애되지 않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줄 것이라 믿었지만 로프가 이러한 믿음을 산산이 부숴버렸다"고 전했다.
shin@yna.co.kr, jangje@yna.co.kr, mihe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5/06/19 12:04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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