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설교자료

청년주일설교 -전도서 12: 청년의 때 너는

맑은샘77 2015. 5. 24. 16:16

청년주일설교 (20150308/주민교회/이훈삼목사)

 

본문 : 전도서 12:1~2

제목 : 청년의 때, 너는!

 

 

 

1. 야속한 세월 - 할머니와 통장

 

은행 문을 열자마자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할머니가 직원에게 숨 가쁘게 말씀하셨다.

 

 

색시 이 통장에서 돈 좀 찾아줘!’. 공손히 일을 처리하던 사무원은 할머니 통장 도장을 가져오셔야지 이 도장은 아니에요라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잠깐만 기다리라 하고 가서는 퇴근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돌아오시지 않은 할머니를 걱정하던 때에 내려가는 은행 셔터 문을 받치면서 할머니가 나타나 하시는 말씀, ‘색시. 반장 도장이면 안 될까? 우리 통장이 도대체 어딜 갔는지 원 찾을 수가 없네.’

나이가 들면 보고 듣고 이해하는 능력이 점점 떨어진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청춘일까?

 

 

2. 전도서의 교훈

 

1) 기독교 허무주의(Nihilism)

구약에서 특별한 문학인 전도서는 기독교 허무주의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전도서 전체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들리는 주조음(Keynote)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다.

 

 

   

인생의 공허함을 말하고 있다. (), 쾌락, 지혜, 명예, 권력, 사업, 이성, 지식 등 세상만사 그 어느 것도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아무리 멋있게 보여도 바람에 날아가 없어져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기독교 허무주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원한 의미나 가치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이 사회적 현상이나 세속적 가치에 무책임해서는 안 되지만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의미는 현재의 삶을 넘어서는 영원하신 하나님께 두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따라서 신앙은 모두 일정 정도 허무주의적 입장을 지니고 있다.

 

2) 코헬렛의 탄식 아쉽다!’

 

 

 

코헬렛이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혜를 이야기하는 설교자다. 그래서 전도서는 전도하는 책이라기보다는 옛날 지혜로운 어떤 사람이 후대들에게 보내는 삶의 교훈서 같은 것이다. 전도서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로서 왕이라고 되어 있어서 역사상 가장 지혜롭다고 하는 솔로몬왕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솔로몬 왕을 빗댄 어느 지혜자 또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지혜의 말씀을 모아서 편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부귀영화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 이제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면서 사랑하는 청춘들에게 인생은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들려주는 이야기다. 인생에는 연습이 없기에, 나보다 먼저 길을 간 분들의 경험, 성공과 실패 등을 주의 깊게 듣고 참고하여 자신이 가야 할 길에 교훈으로 삼는 청년이 실패할 확률이 적으며, 인생을 좀 더 의미 있고 알차게 살아갈 수가 있다. 청년의 시기일수록 이전 세대의 교훈을 지겨운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성실한 청년이다.

오늘 코헬렛이 들려주는 헛되다는 탄식이 내게는 아쉽다로 들린다.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흘러 간 것이 아쉽고, 건강이 벌써 쇠약해져서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에 버거운 현실이 아쉽고, 재산, 건강, 시간, 젊음, 능력이 있을 때는 정작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제대로 살아보고자 했는데 벌써 그럴 힘도 능력도 없고, 무엇보다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더라는 회환으로 들린다. 그래서 전도서의 말씀을 쉽게 바꾸어 본다면, 만일 내가 30, 4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젊을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이며 그에 대한 안타까운 대답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3. 내게 다시 청춘이 주어진다면? - 하나님을 기억하라!

 

1) 가장 소중한 것, 가장 근원적인 것에 관심하라.

 

 

 

청년 실업이 10%를 넘고 청년 실업자가 100만 명인 시대에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기억력, 실행력, 패기, 용기, 자신감 등 삶의 활력소 등 모든 것이 가장 절정일 때인 청년기야말로 무엇보다도 가장 근원에 깊이 관심할 때이다. 옛날에는 졸업만 하면 취업이 되었다. 누가 더 좋은 직장에 다니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요즘은 취업하냐 못하냐가 실제로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학문을 통해 인생과 역사의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 캠퍼스가 요즘은 거대한 취업 학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참 어려운 이야기지만, 청년의 때야말로 나를 이루고 있는 근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그쳐버리면 거기에 진정한 삶이 피어날 수는 없다.

 

 

 영화  본 시리즈 1편 : 본 아이덴티티 (맷 데이먼)

 

맷 데이먼을 일약 세계적 스타로 만든 영화 본 시리즈는 미국 정보부 특수 요원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부상을 입고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아주 스릴 있게 그려서 세계적인 영화가 되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본은 끊임없이 묻는다 ;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무조건 취업해서 돈 벌고 결혼하고 애 낳고 먹고 사는 것도 당장 닥친 심각한 과제이지만, 오늘 코헬렛은 그렇게 살아서 나름대로 누구보다도 성공하여 떵떵거리며 살아보았는데, 인생의 마지막 자리에서 보니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을 보낸 것이 너무 아쉽다, 그러니 너희는 제발 그렇게 살지 말아라는 당부다. 물론 누릴 것 다 누렸으니 이제 와서 그런 말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진정 인생의 과정을 다 마치고 진정을 다해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이 음성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최대한 본질을 추구하라.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그 뿌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내 존재, 사회의 문제, 세상의 구조, 그리고 신의 존재에까지!

 

2)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삶 티치아노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형태를 중요시 하던 미켈란젤로 중심의 피렌체-로마 화파가 있었다면 그와는 달리 색채와 빛을 회화의 중요한 요소로 여긴 티치아노(1490~1576) 중심의 베네치아 화파가 존재했다. 티치아노는 이후 색채와 빛을 중시하던 화가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는 40대 초반에 참회하는 마리아를 그렸다. 티치아노의 작품들을 보면 인간의 살()을 어떻게 저렇게 표현할 수 있는지 놀랍다. 긴 금발머리로 온 몸을 휘감은 젊은 여인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그의 풍만한 가슴과 크고 맑은 눈은 그 시대 남심을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부속물(Attribute/애트리뷰트)인 향유 병이 옆에 놓여있지 않다면 마리아인줄 잘 몰랐을 것 같다. 게다가 제목이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라니! 제목과 달리 마리아는 너무 관능적이다. 화가는 성경을 빌려 그만의 에로티시즘을 표현하고 있다.

 

 

 티치아노,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18*97cm, 1565,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레미타주미술관

 

30년 후 70대 중반의 티치아노는 같은 제목의 그림을 다시 그렸다. 구도, 색상, 모델 등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화려한 아름다움의 첫 번째 작품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긴 머리카락은 갈색으로 바뀌었고, 향유 병은 어둠 속에 잠겨 있으며, 그 녀 앞에는 성경이 놓여 있고 그 아래에는 해골이 받치고 있다.

 

 

그리고 어둔 하늘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충혈 된 두 눈에는 눈물이 한 움큼씩 들어 있다. 그토록 아름다운 육체, 젊음, 사랑, 명성도 언젠가는 모두 한 줌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버릴 것이다. 그림은 어두워졌지만 그만큼의 깊이가 생겨났다.

생전 티치아노처럼 부귀와 영화를 누린 화가가 흔하지 않다. 모델을 서던 황제 카를 5세가 티치아노가 떨어트린 붓을 줍기 위하여 몸을 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당당했던 화가가 노년에 이르러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진정으로 변한 것은 마리아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를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노구(老軀)의 화가 자신일 것이라!

 

3) 피조물의 한계 - 죽음을 기억하라.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유한한 존재라는 선언이다. 이 점을 깊이 헤아려야만 기독교 신앙에 이를 수 있다. 특히 미래, 긍정, 자신감 등이 충만한 청년의 시절일수록 내 생명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 인간의 생명은 유리잔처럼 쉽게 바스러질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80세가 넘으니 마치 누구나 80세까지 인생을 확보해놓은 것처럼 여기는 사람은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다. 오늘 피었다가 저녁에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 같은 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아침에는 짙은 안개가 세상을 가리지만 어느 순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또한 인간의 생명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한스 발둥, 죽음과 소녀, 1517년 

종교개혁 시기 독일의 화가 한스 발둥은 1517년에 죽음과 소녀라는 그림을 그렸다.

착하고 순박하게 생긴 소녀, 온 몸이 백옥처럼 하얗고 탄력 있는 소녀가 해골로 표현된 죽음으로부터 머리채를 낚여 채여 있다. 소녀는 지금 죽음을 맞이할 때가 아니다. 본인도 전혀 원하지 않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보아도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나 누가 죽음에 순서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죽음에게 사정을 한다. 나 더 살고 싶다고!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다고! 그러나 소녀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죽음의 표정과 손아귀는 단호하다. 결코 양보할 기세가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냉혹한 현실이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마다 죽음을 마주하며 죽음과 투쟁하는 삶이다. 죽음 앞에서 나는 죽음을 이길 수 있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공부 잘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날마다 운동을 해서 몸을 튼튼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보험을 많이 든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든 생명의 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다. 생명의 창조자, 내 생명의 주관자 앞에 내 삶을 맡긴다. 이것이 구원의 복음이다.

 

4) 믿음으로 도전 다윗

청년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며 겸손하게 살고 늘 죽음을 기억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러면 기독교 청년들은 너무 맥없이 사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와 한계를 인식하면서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맡기며 사는 청년을 주님이 책임져주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지키시며 어떤 시련과 환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신다.

 

 

    미켈란젤로, 다윗상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골리앗의 목을 베고 승승장구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사울왕의 사위도 되었고 사울왕의 측근에서 그를 보좌하고 치유하는 중책도 맡았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으로부터 목숨을 빼앗길 수 있는 위험을 여러 번 감수해야 했다. 어떤 때는 창을 던지고, 왕궁으로부터 도망하여 들에서 떠돌며 사는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 군사를 몰고 출동하는 사울을 피해 다녀야 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다윗이라면 이를 가는 원수 블레셋까지 도망쳐야 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을 무참히 무찌른 원수 다윗이 블레셋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잡아죽이려하자 다윗은 자존심 모두 버리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다윗은 밤마다 자살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윗이 그 모든 역경과 절망을 이겨내고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자기 삶을 맡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책임져 주신다. 그의 앞길을 열어주시고 새로운 은총을 베풀어주신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응답해주신다.

그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능력을 신뢰하라.

 

4. 기성세대에게 당부 우리의 자식들이다.

 

1) 노인과 청년

 

 

 

어느 교회나 청년들의 불만은 어른들이 청년을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냥 애들 취급한다는 점이다. 대부분 이 청년들을 교회 어른들이 주일학교에서부터 가르치고 청소년부를 거쳐 청년이 되기까지 보았기 때문에 늘 어른들 눈에는 아이처럼 보이는 것이 불만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제대로 독립적 존재로 인정해주지 않다가 귀찮은 심부름 시킬 때나 하기 싫어하는 노동을 할 때는 어김없이 불러서 일을 부려먹는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청년들이 느끼는 이 불만을 기성세대가 주의 깊게 헤아려야 한다.

 

2) 청년들에 대해 기대를 높여야 한다.

아이는 결코 부모의 기대를 넘어가지 못한다. 부모가 재는 이거밖에 안될 거야 라고 생각하면 그 이상을 넘어가기 어렵다. 어른의 역할은 청년들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키워내도록 돕는 역할이다. 그래서 말이라도 우리 청년들 멋지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기대를 가질 때 정말 그 꿈과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청년에게 갖는 기대는 하나님께서 우리 청년들을 사랑하시고 이들을 통해 엄청난 구원 사역을 펼치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다. 어른들이 청년들에 대하여 이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곳에 놀라운 기적이 펼쳐질 수 있다.

 

3) 청년들 집체극

 

  주민 청년 집체극 '주민교회의 어제, 오늘, 내일, 공연 후 기념사진  

 

지난주일 청년들이 만든 주민교회의 어제오늘내일이라는 집체 극을 보면서 우리는 뜨거운 희망을 보았다. 물론 연습도 부족하고 세밀한 부분도 더 다듬어야 하겠지만, 그 속에 담긴 청년들의 시각과 열정, 그리고 능력은 앞으로 주민교회의 앞날을 책임지기에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늘 청년주일을 맞아 이러한 주민청년들이 더욱 하나님 앞에서 교회와 이 시대를 짊어지고 나가는 행복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는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