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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헌금에 대하여

맑은샘77 2015. 2. 27. 15:55

십일조 헌금에 대하여 십일조

2006/10/1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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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 (明印堂) | 등대지기
원문 http://blog.naver.com/yongin7/60028180645

기독교 질문과 답변

 

십일조 헌금에 대하여

흔히 이런 질문을 한다.

“우리 교회는 아주 부자 교회입니다. 언제나 돈이 남아돕니다. 우리 집은 아주 가난하고요. 남편은 실직했고, 큰딸애가 벌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합니다. 그런데도 꼭 십일조를 교회에 드려야 하나요? 전도사님께 물었더니 그럴수록 더 열심히 십일조를 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또는,

“십일조를 교회에 드리지 않고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도와주면 안 되나요?”

“십일조를 교회에 드려야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며 십일조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십일조가 무엇인지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다.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의 것이고, 이것을 교회에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 한편에서는 물질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십일조는 반드시 드려야 하는 것이며, 예수를 믿으면서도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아주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고 나서부터 축복을 받아 큰 부자가 되었다는 간증은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다. 그런가 하면, 어느 부자 장로님은 돈이 아까워 십일조 헌금 드리기를 게을리 했더니 그만 쫄딱 망하고 말았다는 간증도 꽤나 많이 들었다.

과연, 십일조란 그런 것일까?

자, 십일조에 대해 알아보자. 사람들이 입으로 하는 간증이 아니라, 성경은 십일조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구약 시대의 십일조에 대해 알아보자.

   

구약 시대의 십일조


말라기 3장 8-10절의 말씀

많은 목사님들이 십일조 내기를 강조할 때, 즐겨 인용하는 말씀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되어 저주를 받게 된다. 반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내려 주신다.

말씀 그대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성도로서 당연히 드려야 하는 것이요, 또 안 드리면 저주를 받고 드리면 복을 받는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 것이다.

그러나 말라기의 이 말씀은 우리 신약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구약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인 것이다.

자, 창세기 14장 18-20절의 말씀을 보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성경 말씀 중에서 최초로 나오는 십일조 이야기이다.

자, 이 말씀을 좀 풀어보자. 성경은 풀어야 그 참 뜻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성경의 참 뜻을 깨달아 알아야 하나님을 믿어도 바르게 믿을 수 있고, 현금을 드려도 제대로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살렘왕 멜기세덱에 대해 알아보자.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원래는 여부스 족의 성읍으로 이름은 살렘이라 하였다. 주전 1000년경에 다윗에 의해서 점령당한 후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즉 살렘은 예루살렘의 옛 이름인 것이다.

그럼, 멜기세덱은 누구나?

히브리서 7장 2-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이 누군가? 그는 구약 시대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며,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이다. 그는 살렘의 왕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이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하늘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그림자인 것이다. 

이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떡과 포도주를 준다.

떡과 포도주 = 예수님의 살과 피

아브람이 누군가?  믿는 자의 조상, 구원받은 자의 조상, 영적 이스라엘이다. 아브람의 후손인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그의 피로 죄를 씻어 주시고, 그의 살을 먹여 영생을 주신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축복하였을 때, 아브람은 그 얻은 것 중에서 십분 일을 그에게 준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람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축복을 받아 그 얻은 것 중에서 드린 것이다. 또 멜기세덱의 축복 기도를 받기 위해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니라, 그의 축복 기도를 받고 난 후에 드린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브람이 드린 십일조는 축복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축복을 받은 대가로 드린 것이다.

다시, 창세기 28장 20-22절의 말씀을 보자.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위 말씀은,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 에서의 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을 찾아 하란으로 가는 도중에, 해가 저물어 길가에서 돌을 베개하고 자다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다음, 그가 하나님께 드린 서원의 말이다.

야곱은 말한다. 하나님이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주시고 편안히 아비 집에 돌아오게 해 주신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여기서도 십일조란, 축복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은 대가로 드리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 즉 족장 시대, 이스라엘이 애굽 땅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십일조는 축복 받기 위해 드린 것이 아니라, 받은 대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축복 받은 대가로 드리던 십일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보답으로 드리던 십일조가 율법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차츰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즉 십일조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보자.

신명기 14장 28-29절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26장 12-15절의 말씀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

이 말씀으로, 십일조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방법 내지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째서 족장 시대에는 복을 받은 대가로 드리던 십일조가 율법 시대에 와서는 복을 받는 수단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족장 시대에는 율법이 없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다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받았다.

그러나 율법 시대에는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 그리고 십일조도 율법의 하나가 된 것이다. 율법 시대에는 율법을 지켜 행하면 복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십일조도 율법의 하나이다. 따라서 율법에 따라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고 드리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율법은 하나도 지키지 않고 오직 십일조만 드린다고 해서 복을 받지는 않는다. 그는 다른 율법을 지키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로 인하여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십일조 뿐 아니라, 모든 율법은 그것을 지키면 축복이요, 지키지 않으면 저주인 것이다. 각별히 십일조만 지키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포함해서 모든 율법은 이것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형벌 내지는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신명기 28장 1-68절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요는, 십일조도 율법의 하나요 따라서 다른 모든 율법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지켜 행하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것이다. 다른 모든 율법도 십일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지키면 복이요 지키지 않으면 저주인 것이다. 각별히 십일조만이 그것을 지켰다고 복을 주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

지금도 많은 목사님들이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고 말라기 3장 8-12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소리 높이 외친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복을 받으십시오.”

그러나 이 말라기 말씀은 구약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인 것이다. 만일, 이 말씀대로 지금 우리가 십일조를 드려야 복을 받는 것이라면, 또한 우리는 다른 모든 율법도 함께 지켜야 한다. 말라기의 말씀을 따라 십일조를 드려야 복을 받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율법도 다 지켜야 하고, 아무리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도 다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저주를 받고 말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은 완성되었고,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십일조를 포함한 모든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모든 구약의 율법은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내면 축복을 받고, 내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외치는 목사님들은 우리를 데리고 구약 율법 시대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십일조라고 하는 구약 시대의 율법으로부터도 물론 해방되었다. 십일조를 드린다고 각별히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각별한 저주를 받는 것도 아니다.


잠깐 여기서, 구약 시대의 십일조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그래야 십일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확실하게 알아야 그것을 근거로 해서 확신을 가지고 내든지 말든지 할 수 있다.  

구약 율법 시대에,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 것일까?    

민수기 18장 21절의 말씀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의 생활비로 주어진다.

다른 말씀을 보자.

신명기 14장 22-27절의 말씀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십일조는 절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서 가족들이 함께 먹는데 사용된다. 그리도 성전에서 일을 하지 않는 레위인들에게도 주어 함께 먹고 즐긴다.

또 말씀을 보자.

신명기 14장 28-29절의 말씀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십일조는 분깃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 과부들을 구제하는데 사용된다.

결국, 구약 시대의 십일조는, 그 삼분의 일은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에게 주어지고, 삼분의 일은 매 절기마다 성전에 올라가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는데 사용되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곡간에 모아 두었다가 객, 고아, 과부, 분깃 없는 레위인을 구제하는데 사용된다.

만일, 지금 우리가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 헌금이 말라기에 기록된 십일조와 같은 것으로, 그것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드리면 축복을 받고 안 드리면 저주를 받는 그런 것이라면, 드린 십일조도 또한 구약의 십일조처럼 그렇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곧 일년 동안의 수입을 다 합계해서 그 십일조를 떼어 그 중 삼분의 일은 교회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의 생활비로 드리고, 삼분의 일은 교회에 나와서 함께 즐기며 친교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고, 남지 삼분의 일은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사용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교회는 어디에도 없다.

앞에서 인용한 신명기 14장 22-29절의 말씀에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하라 그리하면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주시리라”

말하자면, 십일조는 드리기만 하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사용하여야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대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느헤미야 13장 10-12절의 말씀을 보자.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더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이 수축되고, 성전이 정비되어 다시 율법이 선포되고 그때까지 끊겼던 십일조가 다시 드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느헤미야의 부흥 운동도 잠시요, 백성들과 제사장들은 또다시 안일에 빠지고 십일조 드리는 일에도 게을리 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몇 해씩 가뭄이 계속되었고, 밭의 소출은 줄어들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저버리셨기 때문에 비를 내려주시지 않는 것이라고 불평을 말하며 더욱 십일조 드리는 일을 게을리 했다. 갈수록 성전은 퇴락하고, 레위인들은 다시 성전을 떠났다. 이때, 말라기 선지가 나와 외치게 되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지 않는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하나님을 믿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비를 내려 주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실 것이란 말씀이다.

여기서 말라기 선지가 말씀하신 십일조는, 전체 십일조 중 그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레위인을 위해 성전 곡간에 드리는 십일조였다. 아마도, 당시 백성들의 삶이 너무나 어려워서 십일조의 다른 두 가지, 성전에 올라갈 때에 사용하는 비용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는 아마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어째했거나, 백성들은 말라기 선지의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이나 유대 땅에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때, 유대교가 나타난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율법주의 바리새인들이 나온다.

누가 복음 18장 11-12절의 말씀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을 철저하게 지키며 그 중에서도 각별히 온전한 십일조 드리기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 조문에만 얽매인 나머지 율법의 정신을 잊고 말았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의 말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지키게 하신 것은 율법을 통해 우리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해서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의 조문 하나하나는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외형적인 조문에만 얽매이고, 십일조를 드리는 그 행위에만 붙들려서 그 안에 숨어 있는 더 귀한 것 곧 의와 인과 신은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고, 엄격한 십일조를 드리고 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들의 의를 밖으로 나타내며 자랑하려고 하였다.  

  

구약 율법 시대에, 왜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

십일조를 드리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주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 시대 구약 교회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은 그 드린 물질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 알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 물질을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십일조 드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했기 때문인 것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복을 받으시기 빕니다.”

이렇게 외치는 요즘의 그 십일조는 도대체 무슨 뜻을 가진 십일조일까?

바리새인들의 십일조가 원래의 뜻인 의와 인과 신을 저버린 외형적이요, 자기들의 의를 자랑하기 위한 십일조였다면, 지금의 십일조, 드리면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 주신다고 하는, 지금의 우리나라 목사님들이 외치는 그 십일조도 역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와 인과 신의 실천을 위한 십일조는 분명 아니다. 의와 인과 신을 위해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오직 물질 축복을 받기 위한 십일조이기 때문이다. 돈을 드려 더 많은 돈을 얻어내겠다는 지극히 타산적인 십일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보다 나을 것이 없다. 한층 더 저속한 뜻의 십일조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십일조를 기뻐하실 리가 없다.

욥기 41장 11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시고 더 많은 물질로 갚아 주시니 하나님께 물질을 드려 더 많은 물질 축복을 받아라, 라고 말하는 자가 누구냐? 이 천하가 다 나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이 내게 무엇을 바친단 말이냐, 라는 뜻이다.

또, 욥기 38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이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약 교회에서는 십일조는 없어져야 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율법적 십일조는 없어져야 하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십일조의 참 뜻은 그대로 살아서 신약 교회로 이어져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신약 교회의 십일조

  

십일조의 원 뜻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의 실천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믿음의 실천이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 곧 십일조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십일조의 기본적인 뜻은 잊고 단지 소득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드리는 것이 십일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의 원 뜻은 잊고 오직 십일조 드리는 것 자체를 자랑하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 거르지 않고 드리는 것으로 자랑으로 여기기도 한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는, 소득 중 십일조만 드리면 나머지 십의 구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된다. 소득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이것을 드리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란 생각은, 뒤집어 보면, 나머지 십 분의 구는 모두가 나의 것이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소유라는 뜻이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 나와 묻는다.

“선생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

“어느 계명이오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하신 계명이니라”

청년이 대답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 

이 부자 청년은 위 계명들 뿐 아니라, 십일조도 아마 충실히 드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청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재산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나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물질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나의 소유를 나누어줌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하늘에서 상급이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약 교회의 십일조인 것이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려서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는 것이 율법 시대의 십일조라고 한다면, 소득의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나의 모든 소유를 팔아 의와 인과 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신약 시대의 십일조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했을 때, 하늘의 상급이 있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6장 9-12절의 말씀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이 말씀을 풀어 보자.

먼저, 불의한 재물이란 무엇일까? 무엇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남의 것을 몰래 도적질 해 온 재물이 불의한 재물인가? 아니면 불의한 짓을 해서 부당하게 이익을 본 재물이 불의한 재물인가? 

아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물,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재물,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재물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내 뜻대로 사용하고자 혼자 움켜쥐고 있는 재물이 바로 불의한 재물이다.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물 중, 먹고 입고 그리고도 남은 재물을 나의 육신의 쾌락이나 연락을 위해 물 쓰듯 쓰고 있는 재물이 불의한 재물이다.

구약 시대에는 모든 소득 중 십일조만 드리고 나면 나머지 십의 구는 다 나의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나의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재물을 다 하나님 뜻에 따라 사용해야할 의무를 지닌다.

나의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단지 그의 청지기일 뿐이다. 그런데, 그 재물을 “나의 것이요” 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려고 잔뜩 움켜쥐고 있는 재물이 바로 불의한 재물인 것이다.

내가 정당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은 사람의 눈으로는 다 정당한 나의 소유이다.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나 개인의 소유이다. 그러나 하나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이 나에게 임시 맡기신 것으로 보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재물을 “나의 것이요” 하고 움켜쥐고 있는 재물이 바로 불의한 재물인 것이다.

율법 시대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하나님 뜻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제 뜻대로 사용하려고 제 것으로 갖고 있는 재물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그래서 불의한 재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불의한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그들을 너희의 친한 친구로 만들어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곧 재물도 없어지고, 이 땅도 소멸되어 없어질 때에, 그들이, 그 가난했던 자들을 네 친구로 만들었던 그 사실이, 너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인 것이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내가 불의한 재물, 곧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맡기신 재물을 하나님 뜻에 맞게 충실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하늘나라에 갔을 때, 하늘나라의 귀한 직분도 나에게 맡겨주시지 않을 것이란 말씀이다.

마태복음 19장 27-29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또, 마태복음 25장 달란트의 비유 중 19-21절의 말씀.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달란트의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였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뜻에 반하여 그것을 땅에 묻어 둔다.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기고 만다.

28-30절에서 예수님은 그 무익한 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한 종은 작은 일에 충성된 자로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귀하고 큰 직분을 받게 된다. 반면, 한 달란트를 받아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둔 종 곧 작은 일에 충성치 아니한 종은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기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작은 일로 우리를 시험하시고 그 작은 일에 우리가 충성을 다 했을 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큰 직분을 주신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작은 일에서조차 충성하지 않았을 때에는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기고 마는 것이다.

땅 = 육신

달란트를 땅에 묻다 =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자신의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다. 오직 땅이 용도로만 사용하다,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다”

있는 것 =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권리.

작은 일에 충성치 않는 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권리마저 빼앗기고 어두운 데로 떨어지고, 그 곳에서 후회하며 이를 갈고 슬퍼하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을 믿어 얻은 구원받을 권세를 빼앗기고 어두운 곳으로 떨어지고 만다.

다시 누가복음 16장 12절의 말씀.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해석하기 어려워 보이는 이 말씀의 뜻은 이렇다.

우리들이 남의 것 곧 하나님의 것에 충성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재물을 하나님 뜻에 따라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것,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려야 할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리란 말씀이다. 

본문 중에서,

“남의 것”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 이것은 “내 것 아닌 남의 것”이다.

“너희 것”  

하늘나라에 가서 내가 받아야 할 것. 하늘나라에 들어갈 권세와 그곳에서 받을 상급과 귀한 직분.

땅에 있는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늘에 있는 신령한 것들은 다 내 것이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 땅에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신령한 것이 다 내 것인 것이다.

이제 결론을 내리자.

십일조란 무엇인가?

구약 율법 시대에는, 소득 중에서 십의 일만 드리면, 나머지는 다 나의 것이요,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의 소득 중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요, 십 분의 구는 나의 것이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면, 그 드린 자에게 복을 주셨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십일조 뿐 아니라 모든 율법이, 행하면 복을 받고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율법은 하나도 지키지 않고 십일조만 드린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다른 율법도 다 지키고 십일조도 드려야 복을 받는 것이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단 십일조뿐 아니라, 모든 율법은 그것을 지키면 다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엄격하게 드렸다. 그러나 그들의 십일조는 의와 인과 신을 저버린 형식적, 외형적인 것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이 십일조를 드린다는 그 자체에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간적 의를 밖으로 들어내 보이기 위해 드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율법적 십일조는 없어졌다. 다른 모든 율법이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어 소멸된 것처럼, 율법적 십일조도 없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소득의 십 분의 십이 다 나의 것인가? 아니다. 나의 모든 소득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나의 소득 중 내 육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 마시고 입고 잠을 자고 그 밖의 활동에 필요한 지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께서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라고 나에게 임시 맡기신 하나님의 것인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는 것이 신약 시대의 십일조인 것이다.

십일조를 교회에 드리고 혹은 목사님께 갖다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물질 복을 받겠다고 하는 그런 십일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먼 나라의 알 수 없는 이방 신의 십일조인 것이다. 성경에는 그런 십일조가 없기 때문이다.

율법 시대의 십일조라도 그것을 백성들이 제사장이나 장로들에게 갖다 준 것이 아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직접 과부나 고아, 분깃 없는 레위인에게 주었고,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을 위해 성전 곡간에 직접 가지고 가서 쌓아 놓았고, 또 절기마다 성전에 올라가는 비용과 성전에 드리는 제물과 그리고 함께 나누어 먹으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물질로 사용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구약 율법 시대의 십일조란, 모든 소득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십일조를 교회에 드리고, 혹은 목사님에게 갖다 드리고, 그 드린 십일조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소비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 물질 축복을 주시는 그런 십일조는 적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속에는 없다. 그런 십일조는 교회에 드리고 목사님에게 드리는 “돈”이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아닌 것이다.

교회가 받은 십일조 헌금을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용한다고 한다면 교회에 드린 십일조 헌금은 곧 하나님께 드린 것이 된다. 그러나 교회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 그 드린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교회에 드린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린 것과 교회에 드린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슬기로운 성도들은 알아야 한다.


또 다른 십일조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 헌금이 다 옳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지금 우리 교회에서 걷고 있는 십일조 헌금은 나름대로 합당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그 모임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필요한 비용 내지 경비가 발생하는데, 이런 비용은 그 모인 사람들에 의해 갹출되는 것은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교회도, 이 지상 교회에서는, 다른 모든 세상의 집단이나 조직체처럼, 그 조직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소요되는 경비를 필요로 한다. 이런 비용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나누어 부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또 그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비용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소득에 비례해서 분담하는 것은 참으로 합리적이다.

우리가 지금 교회에 드리고 있는 십일조 헌금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이며 또한 교회로서는 신도들을 향해 내라고 당당하게 강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 것이다. 이런 십일조는 말라기의 십일조와는 다른 십일조이며, 드리기만 하면 물질 축복을 부어 주신다는 그런 십일조와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교회는, 재물을 드리면 축복을 받는다는 이방의 우상 숭배적 헌금 개념에 말라기의 말씀으로 옷을 입혀 이것을 십일조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교회는 보다 많은 헌금을 걷어 들이고 싶은 욕심에서, 신도들은 신령한 하늘의 축복보다는 눈앞의 물질적 축복, 땅의 축복을 받고 싶은 욕심에서 이상야릇한 십일조가 생긴 것이다.  

자, 이제는 눈을 뜨자. 영의 눈을 크게 뜨고 바로 보자. 이제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바라보자.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고, 다시 말해, 교회에 물질을 드리고  하나님께 드렸다고 믿을 때, 하나님이 때때로 물질로 갚아주시는 것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물질 뿐 아니라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고 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눈에 보이게 갚아 주신다. 누군가의 손을 통해 필요한 물질도 주신다. 어려운 가운데서 십일조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금액의 갑절로 갚아주셨다는 간증을 여러 번 들었고, 또 비슷한 체험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물질을 드렸기 때문에 물질로 갑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아직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 계시며 우리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물질은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 일을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은 결코 잘 먹고 잘 살라고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 일을 하는데 필요한 도구로서 주실 뿐인 것이다.

 

정봉화씀 <부르는 소리> 4부 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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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십일조 십일조

2006/10/18 08:30

복사 http://blog.naver.com/jmark777/29846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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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축복의 통로 | 로즈
원문 http://blog.naver.com/pinkhous/80020693240
 십일조의 유래

십일조에 대해서 제일 처음 마음에 떠오르는 말씀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14 장에서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롯과 재물 을 구출하여 오는 중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맞이하며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노획한 재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이 사건에 근거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란 이유로 신약의 성도들이 마땅히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과연 신약적 경륜과 일치하는가에 대하여는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신약의 사도들은 단 한번도 십일조를 교회의 실행으로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교회에 보낸 서신 어느곳에서도 십일조에 관한 암시조차 없습니다.
  
○ 구약의 십일조

1.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의 생계를 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의 일을 레위지파에게 드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십분의 일에 대한 첫 언급은 레위지파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을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지파로 삼으시고 그들에게는 이스라엘 땅에서 아무 유업도 없겠고, 또 아무 몫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주께서 저들의 유업이시며, 저들의 분깃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18:20).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로 하여금 하나님의 직무를 잘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의 어떠한 일들도 하지 않고 오직 성막에서 여러 가지 직무만을 감당하게 하셨으며 그들의 생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소산의 십의 일에 속한 것들을 레위지파에게 드리게 하여 레위지파로 하여금 성막 일에만 전념하게 하셨습니다.(민18:21)

2.  십의 일에 드리는 것들로는 땅의 곡식과, 나무의 과실, 포도주와 기름, 소, 양, 염소 떼의 처음 낳은 짐승들이었습니다.(레27:30 ; 신12:17)

구약에서는 화폐가 아니라 농산물과 가축들을 십의 일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십의 일은 주로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서 드렸기에 주로 농산물을 드렸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은 우리가 어떠한 일이든지 정성을 다하여 땀 흘려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소산으로 주시는 것들을 드렸습니다.

○ 사복음서의 십일조

"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박하와 아나스와 커민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과 공의와 자비와 믿음의 더 중요한 것을 빠뜨렸기 때문이라. 너희는 이것들도 마땅히 행하고 또 저것들도 저버리지 말아야 하리라"(마23:23).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언급하고 계신 부분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구절이 신약 성도들이 십일조를 드려야 되는 직접적인 성경의 증거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신약의 성도들도 마땅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시대가 어느 시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부활할 때에 율법이 폐하게 되고 은혜 시대가 열린다고 보면,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말씀하시는 때는 율법 시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은 아주 당연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주님께서 이 구절을 말씀하신 이유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며 남에게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보이고자 하는 의도로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참 의도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의 참 중요성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율법의 목적은 그 말씀을 순종할 때에 "공의와 자비와 믿음"에 대해서 깨달을 수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저들에게 율법의 참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결론을 내리시기를 율법의 십일조도 행하고 또한 율법의 목적인 "공의와 자비와 믿음"도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위 구절이 선포된 때는 은혜 시대가 아닌 율법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도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이지 결코 신약의 성도들을 위해서 말씀하신 구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은혜 시대에서의 십일조

1. 신약 시대에서는 레위 직분이 폐지되고 십일조를 드릴 의무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교회가 탄생한 것은 베드로가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이스라엘이 주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침례를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의 복음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수천 명이 모여서 주님을 위해서 날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리와 빵을 나누며 교제와 전도에 전념하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초대 교회가 세워진 행적들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어느 곳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이 십일조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단 한 구절도 십일조를 교회의 실행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십일조가 성경적이라면 신약 성경에도 반드시 기록되어 교회가 지켜야 할 양식으로 주셨을 것인데, 우리는 이에 관한 어떠한 자취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레위지파에게 드렸던 십일조는 이제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하지 않으며, 레위지파가 성전에서 드렸던 희생제사는 완전히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구약에서 드렸던 제사는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단 한번에 자신을 드림으로서 이제 모든 사람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처럼 제사장에게 나와서 짐승을 잡아 레위 제사장에게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지금의 목사계급을 레위지파를 대치하는 것으로 합리화한다면 그것은 구약적 사고일 뿐입니다.
  
2. 초대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와 재산을 다 팔아서 공동으로 소유하며 생활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모금에 대해서 언급하는 곳이 사도행전 2장 후반 절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구절에서 보면 모든 성도들이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소유와 재산을 다 팔아서 서로가 필요한대로 함께 쓰며 생활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물과 소유를 아끼지 않고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눔으로 아무도 부족함이나 더함이 없는 삶을 살았으며, 복음 증거와 말씀 교제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우며, 날마다 모여 빵과 잔을 나누며 성령으로 충만한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믿는 이들을 날마다 더해주시는 축복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본이야말로 하나님의 교회들이 따라야 할 양식입니다. 이러한 단순한 초대교회의 양식은 거듭난 믿는이와 신약교회가 당연히 따라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교회들이 이러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십일조의 수준에서 만족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 신약 교회 안에서 연보의 실행

신약에서는 십일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단어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연보(모금)이라는 단어입니다. 초기 신약 교회에서 실행된 모금이야말로 믿는이들이 따라야 할 양식이라고 믿습니다. 초기 신약교회들은 과연 어떻게 모금을 하였는지를 성경을 통하여 고찰함으로써 요즈음 실행되고 있는 십일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신약 교회에서 모금을 최초로 하게 된 동기

아가보란 한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와서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온 세상에 흉년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가이사 클라디우스 시대에 엄청난 기근이 유대에 임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행11:27).  
그러한 소식을 들은 안디옥 교회은 즉시 각자가 능력 만큼 모금을 거두어 유대에 거하는 형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으며,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거둔 모금을 예루살렘 교회로 보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행11:29-30). 고린도 교회도 미리 모금을 준비하였다가 바울이 보낸 신실한 형제를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로 위로금을 보냈습니다(고전16:1-3).

우리는 성경에서 최초의 헌금에 관한 구절이 모금에서 비롯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들은 극심한 환난과 핍박과 기근으로 인해서 지역 교회들이 어려운 생활에 처해 있을 때 서로의 어려움을 도와주기 위해서 모금을 하였습니다. 이 모금은 성도들이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자세로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마음이 감동이 되는 대로 모금을 하여 지역 교회들이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각 지역의 교회들을 다니면서 교회에서 성도들이 모금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을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2. 신약교회에서 드린 연보의 방법

가. 번성케 하신 대로

"매주의 첫날에 너희 각 자가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신 대로 따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는 모금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16:2)  

바울 사도는 반드시 모금은 자신의 처지에 맞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곧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신대로 감사함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주의 첫날에 주님께 나와서 자신에게 베푸신 주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매일의 삶 가운데 영과 혼과 몸을 지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참 모금의 자세로 가르칩니다.

나. 자원하여

" 먼저 할 마음만 있다면 사람이 가진대로 받으실 것이며,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이 말씀은 구약에서 드렸던 십일조와 상반되는 구절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성경은 분명하게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려야 한다고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신약에서는 성도의 개인 양심에 따라 물질을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와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므로 자신의 형편과 소득에 따라 마음의 감동으로 믿음의 분량 만큼 주님께 드릴 때에, 주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약에서는 자원하는 마음이 아닌 율법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십분의 일을 레위족속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 율법에 순종하여 십일조를 무조건 드려야 했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기쁨 가운데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께  드리는 것이 성경적인 모금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신약은 은혜 시대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구약의 율법 시대와 같이 십일조를 드려야만 된다면, 그것은 자원하는 마음보다는 명령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모금을 강요하지 않으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지 않은 모금은 결코 주님께서 받으시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마지 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고후9:7)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모금을 드리는 자가 자신을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이 생겨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자신이 가진 소득에서 얼마를 믿음에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주님께서는 기뻐 받으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 마음에 정한 대로 기쁨으로 드림  

" 각 사람은 미리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는 하지 말아야 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드리는 자를 사랑하심이라"(고후8:7)

이제 결론적인 구절에 도달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모금에 대한 기준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금의 기준에 대하여 "마음에 정한 대로"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날마다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모든 일들을 형통하게 해 주시고, 내게 주시는 소득에 대하여 하나님께 자원하여 자신이 마음속으로 얼마를 낼 것인가를 정하여 즐거이 내는 성도들을 주님께서는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십일조를 잘 내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교회에서 인정받게 되며, 또한 말라키에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창고에 가득 채워 넣으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어 엄청난 복을 채워 주 실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십일조를 즐거이 내는 사람은 엄청난 축복을 받을 것으로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하여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결국 그 십일조로 인해서 시험을 받게 되며 연약한 자들을 정죄의 올무에 묶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헌금의 참된 의미를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고 하는 기복 신앙을 심어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은혜 아래의 연보가 아니라 법 아래의 헌금으로 끌어 내릴 수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이 먼저 선행되어 주님께 드릴 때에 그 헌금은 주님께서 받으시고 분명히 우리의 부족함을 풍성히 채워 주실 것입니다.

라. 연보를 드린 성도의 축복

성경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필요에 따라 모금을 할 경우에 즐거이 기쁨으로 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뿌린 그대로 다시 주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인색하게 뿌린 사람은 반대로 인색하게 거둘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인색하게 심는 자는 인색하게 거둘 것이요, 넉넉하게 심는 자는 넉넉하게 거둔다는 것이라" (고후9:6).

주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우리의 필요를 넉넉하게 채워주시며, 우리가 주님의 선하신 그 일들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자 더 후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고후9:8).

○ 성경적인 연보의 사용

1. 교회와 교회간의 균등한 생활을 위해서 어려운 교회를 지원함

신약에서 최초로 모금을 하게 된 동기는 어려운 교회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형편을 자신들의 형편과 균등하게 하기 위해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들을 섬김의 직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거듭난 성도들이 다 마땅히 해야 할 직무란 것입니다.  

“이는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충족시켜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인하여 넘쳐나기 때문이라."(고후9:12).
  
다시 말하면 모금은 성도를 섬기는 방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교회에서 모금을 하여 제일 먼저 써야 될 곳은 어려운 교회들을 지원하여 그들이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도록 서로가 도와주어야 될 것입니다

" 균등하게 하려는 것이니 지금은 너희의 풍족함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보충함으로써 후에 그들의 풍족함으로 너희의 부족함을 보충하여 균등함이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후8:14)

2. 복음의 전도자들(선교사)을 지원함

우리가 직접 복음 전도자가 되어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것이 복음에 빚진 자들의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교회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사역은 복음 전도자들을 도와줌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지역들을 다니면서 복음 전도 여행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활을 지원하던 교회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교회들의 헌신적인 섬김의 직무를 통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다른 교회들에게 삯을 받은 것은 그들에게서 탈취한 셈이니라"(고후11:8)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충분하게 채워 주었음이니라 ....."(고후11:9)

왜 우리는 모금을 하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교회가 가장 우선 순위로 하여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복음전도자(선교사)들을 지원하며 어려운 지역 교회들을 도와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어려움 없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때, 주님께서는 그러한 교회의 모금을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3. 어려운 가정과 참 과부을 구제하는 일과 선한 일들을 함

성경에 보면 교회 안에서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혼자 사는 참과부가 있다면 반드시 교회가 그 과부를 구제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교회에는 과부가 아니라도 여러 가지 환경으로 인해서 어려운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도와줌으로써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경제적인 부분으로 인해서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먼저 믿는 가정을 먼저 돌보고 나서 어려운 주위의 사람들을 구제하여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일조와 신약의 모금에 대해서 개관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 보완이 필요없다고 단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 시대에서는 오직 성도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께 자원하여 자신에게 주신 형편에 맞게 주님께 헌금을 내는 것이지, 강요나 억지로 드린다면 결코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 형편에 맞게 기쁘게 드리는 사람에 대하여 주님께서 반드시 뿌린 대로 그의 모든 삶을 넉넉하게 해 주시며 주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게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먼저 자신들을 주께 드리는 부분을 말했습니다.

“...먼저 자신들을 주께 드리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었느니라”(고후8:5)

누가 어떻게 쓸것인지의 구체적인 것은 지역교회의 직분자인 장로들과 집사들이 주님의 뜻을 구하면서 결정하여야 하고 또 집행된 내역은 직분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것이 재정의 투명성을 위해 필요할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님꼐서 우리 교회에 부흥회에 오셨을때 하신말씀이 생각난다.

십일조를 드리기보다.. 십의십이조를 드리는 삶이 되라..

그 말씀이 귀에 잊혀지지 않는다.

 

회사다닐때 어느분이 나에게 물어보셨다.

십일조를 왜 내냐고.. 먹고 살기 빠듯한데

교회바칠 돈이 어딨냐고..

나는 그말을 들은 후 그분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를 허락하신 분은

주님이시기에 수입의 십분의 일을 헌금을 내는 것이다.그러나 내가 주님에게 받은 은혜를 갚으려면

십일조로도 부족하다라고~

그러니깐 그분꼐서 아무말씀 없으셨던걸로 기억된다.

또한 어느분은 교회에 낼 돈으로 자기한테 달라고 하셨던 분도 계셨다.

난 조용히 그분을 위해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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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십일조 십일조

2006/10/18 07:47

복사 http://blog.naver.com/jmark777/2984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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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바.라.기 | 아스팔트
원문 http://blog.naver.com/dlarpxo/140028239747
 
-그것으로 실험하여 사실을 입증하라-
성경/말라기 3 : 7 - 12

세상에는 두 가지 어려운 일이 있다. 첫째는 돈을 바르게 버는 일이요, 둘째는 돈을 바르게 사용하는 일이다. 어느 것이 더 어려운 일인가? 대개 경험상으로 보면 후자가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돈을 번 사람들이 수 없이 많지만, 그 돈을 값있고 보람있게 사용하는 사람은 별로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향락과 자기의 자랑 그리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돈을 버는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스의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부자가 그 재산을 자만하여도 어떻게 쓰느냐가 판명되기 전까지는 그를 칭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돈 버는데는 총명하고 용감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헌금생활을 하지 못하고 인색한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많은 것 같다. IS(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 금이 증시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신8:13,14)고 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없었으면 어찌 재물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시8:18, 시 127:1,2) 바울은 고전4:7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게 있는 것 중에서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딤전6:6-10 에서도 돈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렸도다" 이렇게 돈을 모아 부자가 되면 그만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버리고 모으되 바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철저하게 경건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일찍이 예수님도 우리에게 물질에 대하여 권면하신 적이 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리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19-21) 보물을 땅에 쌓는다는 것은 자기만을 위해 현세의 일에만 물질을 사용함이요,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는 헌금이나 빈민과 병자를 위한 구제등을 의미한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면 마음도 하늘에 있고 보물을 땅에 쌓으면 마음도 땅에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물질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과의 물질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물론 자기가 열심히 일하면 물질의 복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화가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헌금에 대한 바른 정신 곧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IS 백성의 율법이 레위기에 법제화 되기 훨씬 이전 시대부터 십일조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또는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세속 역사 및 성경 역사에 있어서 10이라는 숫자가 사용된 수많은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두 개의 두드러진 사례를 찾아보자.

1. 모세시대 이전의 십일조 역사
1) 시리아 및 아랍어 역본의 히브리서 7장에 의하면 아브람은 그의 모든 소유의 10
   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드린다. 그러나 문맥에서 볼 수 있는 원래의 의미는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노획한 노략물의 10분의 1이다. (창14;20, 히7:2, 6)
2) 야곱은 벧엘에서 환상을 본 후에 자기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의
   모든 소유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겠노라고 서약한다. (창29:22)
   이러한 사례들은 모세의 십일조 제도가 수립되기 이전에 고대에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십일조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그러나 이교 민족들, 즉 로마
   인들, 카르타고인들, 아라비아인들 가운데서도 전체 소유 또는 노획물, 징발한 재
   산, 상업적 이익으로부터의 10분의 1을 거룩한 일과 그와 유사한 일을 위하여, 또
   한 국가를 위하여 드린 무수한 사례들이 발견된다. 이렇게 이방 민족들도 십일조
   를 바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는데, 그러면 이와 같은 이방인의 십일조 규범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이것은 이미 아담 때부터 하나님께서 가르쳤을 것으
   로 사료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바치도록 그 한계선을 그어 주셨으나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타락한 바 믿음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잡신을 섬기므
   로 온전한 십일조의 본질을 왜곡하며 무너뜨린 것이다.
3)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헌물 제사하는 성경상 최초의 기록이다.
   "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 하
   신지라"(창4:4-5) 고 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가인의 제물이 배척된 이유를
   십일조와 결부시키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제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us,
   160-220, 칼타고 사람으로 엄격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한 초대교부, 변증론을 비
   롯한 많은 신학적 저서가 있으며 라틴신학의 원조)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물리치신 이유는 가인이 그 헌물을 공정하게 분할하지 않고 바친 것이라고 말했
   다. 신약성경 히11:4 에 보면 "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
   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
   라"는 기록이 있는데 헬라어 원문성경을 보면 예물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다. (예물: 단수-δωρον;복수-δωροι) 이것을 보면 가인이 정죄된 것은 예물의 정
   량을 채우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아벨이 믿음으로 바쳤다는 것은 순
   종과 상관성을 가지며 순종이라는 것은 이미 하달된 명령이 건재해 있어야만 의의
   가 있는 것이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는 것이라 성경이 말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이 두 사람에게 그들이 바쳐야 할 헌물의 정량이 지시되지 않
   았다면 또는 다소간에 각자의 소원대로 바칠 자유가 허용되었다면 가인에게서 허
   물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성경에는 가인이 범죄하였다고 규정해 놓았으며
   그러므로 하나님께 분명히 그들에게 헌물의 종류와 일정량을 엄밀히 명령하셨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레5:15, 27:30) 성경은 분명히 아벨의 제사는 가인과
   비교할 때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히11:4) 테이어(Thayer)의
   헬라어 사전에 의하면 "더 나은,,은 질적으로 우수할 뿐 아니라 또한 양적으로도
   우수함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한다.
모세 때부터는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명을 받아 율법으로 제정하심으로 시작된다. 십일조에 관한 최초의 율법 제정은 모든 수확물과 가축의 10분의 1이 여호와께 속하며 그에게 드려져야만 한다는 선언이다. 율법에 제정된 십일조에 관한 법률을 자세히 이해하려면 다음의 성경을 참고하여 상고해야 할 것이다 (레27:30-33, 민19:21-28, 신12:5-14, 14:22, 26:12-15,말3:7-12)
 
 
 
십일조(Maaser;마아세르, 十一條, Tithes)의 뜻은 말 그대로 '십분의 일(1/10),이다. IS 사회에서 농산물이나 가축이나 전리품 등의 수입에서 1/10을 하나님께 바치는 종교적 의무이다. 우리는 앞서 모세 이전시대와 모세 이후시대로부터 법제화 된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왜 소득 또는 소산물의 1/10이라는 비율이 책정되었는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추정컨대 '모든 것, 혹은 '완전, 을 뜻하는 열(10)에서 '일부분, 혹은'대표'를 뜻하는 하나(1)을 바침으로써, 헌신과 복종의 의미를 포함하기 위함인 듯하다. 모세 율법에 나타난 여러 규례들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은 십일조의 규례를 3단계로 분류하였다.
“내가 IS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IS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IS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IS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을 대하여 말하기를 IS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제1의 십일조는 매년 토지 소산이나 가축이나 기타 수입의 1/10을 하나님께 바치는 규례이다. 이것은 토지의 분깃없이 오직 성막을 돌보는 일에만 헌신된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해 사용되었다. 한편, 레위인들은 이때 받은 소득의 1/10을 다시금 제사장들에게 바쳤다. 이처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하여”바치는 십일조를 ‘제1의 십일조’라고 불렀다.
제2의 십일조는 제1의 십일조를 바치고 남은 것 9/10중에서 다시금 1/10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규례이다. 이것은 민족 절기 때에 감사의 축제용으로 주로 사용되었고, 그 성격상‘축제 십일조’(Festival Tithe)라고도 부른다.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경상비에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 분명한 언급은 없으나 성전의 화로나 부젓가락, 제단등이 낡고 더러워 쓸 수 없는 경우에는 제2의 십일조로 그런 기구들을 구입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매 7년 주기의 안식년을 기준으로 하여, 제3년과 6년에는 둘째 십일조의 비용을 축제용으로 사용치 않고, 성(城) 중의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데 사용토록 규정한 십일조 규례이다. 따라서 제3의 십일조는 따로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둘째 십일조와 내용상으로 같은 것으로서, 다만 그 쓰이는 용도만 다르게 규정한 십일조일 뿐이다. 곧 ‘이웃 구제용’십일조이다. 그러나 역사가 요셉푸스(Josephus)는 다르게 해석했다. 첫째 십일조는 - 레위인을 위해, 둘째 십일조는 - 절기를 위해, 셋째 십일조는 - 레위인 중 궁핍한 자나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Antiquities 4권)
 
히브리인은 십일조 이외에는 다양한 형태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즉, 그들은 곡식과 과일은 물론 양털과 같은 다양한 소득의 처음 것을 당연히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바쳤으며 이를 ‘큰 예물’이라 불렀다. 율법 해설서인 ‘미쉬나’(Mishna)에 따르면 그것은 소득의 1/40∼1/60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율법은 전체 소득에서 먼저 큰 예물 (1/40∼1/60)을 제하고 그 가운데서 다시 제1의 십일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제한 가운데서 다시 제2의 십일조를 드릴 것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때에 따라 히브리인들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등 여러 가지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별도의 예물을 바쳤으며 성막 건축 등 특별한 사업을 위해서도 헌금을 드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율법을 통해서 본 십일조의 본질은 모든 소산물의 1/10이 아니라, 2/10라는 사실을 바르게 일깨워 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법은 용도의 차이를 구별한 것뿐인데, 본래는 2/10을 드려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 규정은 다른 헌물을 제외한 것이다. 안식일 준수의 명령이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1/7의 요구라고 한다면, 십일조 준수의 명령은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1/10의 요구이다. 하지만 이같은 요구는 나머지의 시간과 재물은 인간의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요 소유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중의 일부분만을 대표로 요구하심으로써, 단순히 시간과 재물만이 아니라 인간의 헌신과 감사와 순종을 받으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를 바치는 자들은 단지 규정된 재물만을 형식적으로 혹은 마지못해 바쳐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채, 밭작물의 조그마한 소득까지도 십일조를 바친다고 자랑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것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보여준다.(마23:23, 눅11:42) 그런즉 십일조는 무엇보다 만물의 소유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신앙고백 위에서 드려져야 한다. 즉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자신은 단지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인식하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그리할 때 십일조는 단지 표면적인 1/10의 헌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신앙 고백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일조의 정신인 것이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땅위에 재물 쌓는 것을 경고하시기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0) 땅위에 보물을 쌓아두면 도적이 구멍을 뚫고 들어온다. “구멍을 뚫는다”는 뜻은 팔레스틴에 있는 집들의 담은 대개 돌담이거나 아니면 구운 진흙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도적이 얄팍한 흙을 파고 들어오는 경우를 설명한 것이다. 성도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내세에 들어가 썩지 않는 보물을 받으니 복되고 보물보다 귀한 마음이 세상의 종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 가 있으니 더욱 복된 것이기에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3:22 절의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는 설명이다. 여기서“재리의 유혹”은 흠정역(KJV) 영어성경에서는 “재리의 속임수”-the deceitfulness of riches;부를 얻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여 상대방을 속이는 것-로 번역되어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재물의 속임수에 넘어가 장탄식을 한 사람들의 수는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그래서 다윗 왕도 권고하기를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 (置心:Do not set your heart on them)치 말지어다”(시62:10)라고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IS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7-29) 영어성경(KJV)에는 ‘여러 배’가 ‘백배’(a hundredfold)로 번역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 하니라 하시고 어리석은 부자 비유로 교훈하셨다.(눅12장) 십일조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마23:23절에 잘 나타나 있다.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바치는데 집뜰의 채소의 극히 적은 수입의 십일조까지 드리면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리는 종교적 형식주의를 책망하시면서 이것도 저것도 행하여 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혹 어떤 목회자나 성도들은 신약시대의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이므로 반드시 구약 율법인 십일조 규례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요 십일조나 그밖에 어떤 율법 조문을 지키므로 구원얻는 것이 아님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행위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에 구속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은 우리가 율법 행위보다 더 온전한 경우에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제사 제도는 예수님이 오시므로 이미 개혁되었지만, 그외 우리가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율례는 아직까지 아니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유효한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정신은 나와 내 재산이 모두 내 것인데 그 중에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선사한다는 식의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나의 소유는 본래 하나님의 것으로 내 맘대로 할 것이 못되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셨으니 내 것같이 쓰고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나는 욕심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줄도 모르고 바칠줄도 모르는 인간이 되기 쉽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담스러운 짐을 지우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 최저선을 그어주심으로 물질적 탐심에서 우리를 해방하셔서 우리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교육방침에서 나온 하나님의 생각이요, 계산법이다.
 
수입의 십분의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더러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IS백성은 제1의 십일조, 제2,3의 십일조 외에도 절기 때에 성전에 올라 갈 때마다 예물(gifts)이나 제물(offering)을 가지고 갔다.(신12:5-28) IS 백성들의 경우 절기는 종교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노는 것을 뜻했다. 각가지 절기를 통해 단합과 동시에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강화시켜 나갔는데 속죄일 같은 때는 (레23:2, 24) 금식과 참회도 하였다. 축제일은 대개 그 지방 성소를 중심으로 하여 즐겼으나 거국적인 3대 절기에는 건강한 남자들은 모두 성전에 참여하여야만 했다.(출23:14, 34:23) “너희 중 모든 남자들은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서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찌니라”(신16:16,17)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소, 양 가난한 자들의 경우 비둘기나 곡분(밀가루 종류)을 바칠 수 있었다. IS 백성들은 십일조 외에 제물(오늘의 주일에 해당)이나 예물(오늘의 특별헌금에 해당)을 드렸다. IS의 3대 큰 절기는 유월절(Passover, 출23:5-8, 민28:17-25), 오순절(Pentecost, 출23:16, 34:22, 민28:26-31, 맥추절, 칠칠절, 초실절이라고도 함), 그리고 장막절(Feast of Tabernacles, 레23:24-36, 신16:13-17, 초막절, 수장절이라고도 함) 그외에 소절기로 부림절(에9:21-28), 수전절(요14:22), 나무 드리는 절기(느10:34, 13:31), 그외에 일식과 관련된 절기로는 안식일(출20:11, 31:17), 월삭(New Moon, 민28:11-15), 나팔절(레23:24, 25, 민29:1-6), 안식년(레25:4-6), 희년(레25:8-13)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절기에 성소나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고 각기 힘대로 제물을 드렸다. 십일조와 제물과 예물 외에도 서원제물(신12:26), 세금(마17:25, 22:17), 그리고 특별건축 헌금(출35:20-29, 출36:3-17)을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굶거나 가난한 백성이 되지 아니 하였다. 오히려 그 자손이 복을 받아 세계의 부국이 되었다. 지금도 도리어 미국 은행가의 유대계인들이 은행 잔고를 잠그면 세계 역사가 정지될 만큼 세계 재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IS 민족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왕조들이 망하게 된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흉년이나 이기심에서 십일조를 내는데 인색하여 성전봉사의 전권을 맡은 레위인에게 생활의 위협이 오게 되자 레위인이 그 본직인 성전 봉사의 직을 버리고 딴 길로 가므로 성전이 황폐하고 백성들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는 제사가 제대로 실천되지 아니하였을 경우와 악한 왕이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인 레위인을 무시하거나 저버리지 말라는(신12:19)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하고 성전 제사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한 왕이 위에 올라 허물어진 성전을 정돈하고 쫓겨났거나 타직에 봉사하고 있는 레위인을 다시 불러 그 본직에 세우고 백성들에게 명하여 십분의 일을 바쳐 그들의 생활보장을 튼튼히 해주고 그들을 존경하고 성전 제사를 존귀하게 하였을 때 그 나라는 튼튼하였고 그 백성들은 형통한 복을 받았던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성경은 다음과 같다. (대하30:20-26, 31:2-21) (느10:32-39, 12:44-47, 13:4-22)
IS인의 경우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그들의 직분을 존귀히 여겨 성전봉사에 충성하게 될 때에 나라가 흥하였으니 성전과 레위인의 안전보장 곧 그 나라의 튼튼한 국방과 직결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십일조는 결코 많은 액수가 아니다. 죽었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와 비교할 때 그 기준이 너무 높다고 불평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미조리주 마운트 워싱턴 교회에서 목사님이 어느 주일에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설교 도중 교회의 직분자 한 분이 벌떡 일어나서 항의하기를 “십일조는 신약교회에서 명하지도 않았고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님의 설교는 성경 교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십일조는 각자의 소견대로 할 것이지 목사님의 설교에 귀를 기우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하였다. 목사님은 조용히 예배를 마친 뒤 긴급 당회를 소집하여 그 분을 제명하였다. 그 분을 제명하였더니 그의 동조자 90여명이 빠져나가 교회를 하나 세웠다. 그러나 5년이 경과되지 못해 교회 건물은 자동차 창고로 변했고 교인들은 각처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본 교회는 그 말썽많던 이가 나간 뒤 성령의 크신 축복으로 전례없이 물질적인 복을 받아 대지를 새로 구입하여 건물을 아름답게 건축하였다. 각 교회마다 물질적인 축복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 소심한 분들이 회개하여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지키면 교회가 함께 복을 받을 수 있다.
 
 
 
마태복음 22:15절 이하에 보면 가이사에게 세(稅)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시험하던 헤롯 당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께서 대답하시기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십일조는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물(私物)이 아니라 성물(聖物)임을 명심해야 한다.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다.(레27:30) 또 누구든지 성물을 범하였을 경우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려야하고 범한 성물의 오분의 일(1/5)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贖)한즉 사함을 얻으리라고 하였다.(레5:5,16)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던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오늘날 여성들의 의상들이 너무 많이 변해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인데 복식(服飾)전문가들은 그것을 No Three S라고 한다. 첫째는- 계절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No Season. 계절이 변화함에 따라 겨울에는 겨울 옷을 입어야 하고 여름에는 여름 옷을 입어야 하는데 현대인들은 점차 계절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부유층에서는 에어컨이 잘 되어있기 때문에 구태여 여름철에 여름 옷을 입을 필요가 없게 되고, 보온시설이 잘되어 있는 문화혜택을 입고 살기 때문에 엄동설한에도 구태여 두꺼운 옷을 입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둘째는- 옷의 일정한 스타일(Style)이 없다는 것이다. 옷은 꼭 이래야 한다는 전통적인 개념이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옷의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No Style, 이것이 미래의 옷의 형태라고 한다. 셋째는- 옷을 보고 성(性)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옷은 반드시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여성들은 남자들이나 입었던 바지를 입어도 흉이 아니고 남자들도 장발을 하고 다니니 성별을 구별할 수 없어 No Sex 시대가 왔다고 한다. 사람의 복장은 그 사람의 인품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옷입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마음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데 복장이 계절감각이나 스타일, 성(性)의 구별도 없이 입혀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복잡다난한 세상사에 시달리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복잡하고 뒤엉킨 마음이 교회에도 침투하여 종교 혼합주의를 지향하여 각 종교의 개성과 특성을 무시하는 위험스러운 종교통합 운동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이런 것에 오염된 성도들도 하나님의 것인 성물(聖物)과 나의 것인 사물(私物)을 구별하지 못하고 내 것도 내 것, 하나님의 것도 내 것인 양 착각하는 이들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 가정도 가장의 것과 아내의 것이 있고, 형제지간도 각자의 소유물이 구별되어 있는데 하나님에게 속한 재물과 나에게 속한 재물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불경(不敬)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엔젤(C.Roy Angel)박사의 『황금사과의 은배』라는 저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존은 훌륭한 청년으로 어느 교회 주일학교 책임자였다. 한번도 주일날 교회에 결석한 적이 없었고, 교회 봉사도 뛰어나게 열심이었고, 십일조도 잘 바쳐 교회 중의 몇 안되는 기둥 중의 한사람이었다. 사업이 번창하자 사업규모도 확장되었다. 그동안 십일조도 많이 불어나서 교인들중 최고액 십일조 성도가 되었다. 4년째 접어들면서 여섯 개의 지점망을 구축하고 십일조도 한 주일에 100불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십일조 액수가 더 올라가지 아니했고, 또 존은 주일학교 부장도 사업이 분주해서 할 수가 없다고 사양했다. 수요일 예배도 더러 빠졌고 주일 아침 예배도 결석이 잦았다. 어느 날 목사님께서 존의 직장에 심방을 갔다. 존은 주말이면 타지방의 지점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결석했다고 변명하였다. 그의 수입은 계속 늘어갔으나 십일조는 100불선에 머물러 있었다. 그후 다시 목사님께서 존의 사무실로 심방을 갔다. 그리고 그에게 “존군 퍽 걱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출석도, 봉사도 흥미를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그렇게 잘하던 십일조도 제대로 내지 않으니 걱정입니다.”하고 말했더니 존 군이 대답하기를 “목사님, 저의 십일조는 너무 거액입니다. 일주일에 100불이면 주의 사업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의 확장으로 인하여 결석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던 목사님께서는 “존! 같이 기도합시다.”하고 둘이서 무릎을 꿇고 목사님께서 기도를 드렸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존에게 너무 크신 복을 주신 것 같습니다. 사업을 너무 번창하게 해주셨고 너무 성공케 해 주셨습니다. 존군의 십일조는 너무 엄청나서 주님께 바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랑하시는 주여! 존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주의 나라 사업을 위해서도 존군의 점포 몇 개만 몽땅 불태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존군의 사업의 일부를 해체해 주셔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시간도 낼 수 있게 해 주시고 수입도 십일조를 낼 수 있을 만큼만 줄이셔서 이전에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고 충성스럽던 그 옛날의 존군으로 되돌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사님의 기도가 더 계속 되려는데 존군이 목사님의 기도를 가로막고 철저히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것은 바로 탕자의 기도였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새 사람이 되겠노라고 서원까지 하였다. 존은 되돌아 왔다. 옛날의 존으로 돌아와 주일학교 부장도, 봉사생활도 잘 감당하였고 십일조도 어김없이 바쳤다. 이제까지 교역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주일을 잘 지키고 열심히 기도하고 수입의 십일조 잘내는 사람이 불행해진 경우는 보지 못했다. 십일조는 성물이요, 주의 것이다. 성도가 그 생활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십일조는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다. 빚더미 위에 앉아 있어도 십일조는 주의 것이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말아야 한다. 성도의 십일조가 1백만원, 1천만원, 1억원이 넘어선다고 할지라도 1/10은 여전히 주의 것이다.
 
*빚보다 더 우선순위는 십일조다.
미국의 실업가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는 일찍이 서점을 경영하여 거부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1887년에 밀어닥친 경제공황으로 그이 사업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10만 달러의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의 가족의 보금자리인 집을 팔아 이미 YMCA에 기부하기로 약속했던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십일조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자네 지금 제 정신인가? 헌금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었을 때나 하고, 먼저 빚부터 갚아야 되지 않겠는가?” 인간적으로 본다면 지당하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하이드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이지. 나는 지금도 하나님께 진 빚을 먼저 갚으려고 하는 걸세.” 그는 사람의 빚보다 하나님께 빚진 것을 더 두려워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을 먼저 드린 그는 결국 3년 후 맨소래담 회사를 창립하고, 이전에 받았던 축복보다 더욱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는 주님의 일에 앞장서는 인생을 살면서, 수입의 구(9/10)를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헌금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사람의 빚보다 하나님께 빚진 것이 더 먼저라는 사실을 깨닫고 행하는 자는 반드시 성경대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죽음의 문턱서 난생 부른 하나님
참존화장품의 김광석 회장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신앙인이 되면서 삶이 완전히 바뀐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운명이었다. 성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종로에 피보약국을 경영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유명인이 되었다. 약국은 날로 번창하였고, 약을 팔아 번 돈으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도봉산 기슭에 절을 짓는 일이었다. 그의 집안은 어머니를 비롯해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피보약국이 유명해지면서 전국의 약사들이 줄을 지어 방문하였다. 전국의 약사들이 방문한 것은 직접 제조해 팔고 있는 약을 나눠달라는 것이었다. 약사들의 간청에 못이겨 전국 60군데에 약을 제조해 조달했다. 그것이 사건의 시작이 되었다. 무허가 제약으로 보건범죄단속법에 걸린 것이다. 79년 ‘잘 나가던 약사’에서 ‘도망자’로 변신한 그는 전국 절을 찾아다니며 도피생활을 했다. 6개월을 피해다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양산 통도사의 냄새나는 작은 방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인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텅빈 방안에 빚바랜 신문 한 장만이 그를 반겼다. 다름아닌 6개월전 자신의 기사가 실려있는 신문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신기했다.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고 울분이 솟구쳐서 신문을 움켜쥐고 울었다. 한참 동안 울고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입술에서 하나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러보는 ‘하나님’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웠다. 왜 하필 그곳을 찾았으며 그 방에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이 있었을까? 그날 그는 눈물 끝에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도 끝에 하나님을 영접하는 행운을 안게 된 것이다. 그 후 절에서 내려와 자수를 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매일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사업도 구상하게 되었다. 아무도 생각 못했던 기초전문화장품회사인 ‘참존’이었다. 기도 중에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한 것이 화장품 업계에 신화가 생긴 것이다. “저는 사업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일조의 역사죠.” 사업가가 십일조를 한다고 하면 모두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십일조는 그에게 놀라운 축복의 간증이 되었다. 십일조 후에는 두배의 경제적 축복이 쏟아졌다. 그래서 김회장은 만나는 사람마다 ‘십일조 축복론’을 강의한다. 매주 월요일이면 그의 비서실은 단체, 개척교회 등 20여 군데나 넘는 곳에 후원금을 보내는 일로 분주하다. 이일은 벌써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선교사업이다. 서울 청담동에 자리잡은 참존화장품은 ‘믿음의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창업 15년만에 화장품업계에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참존화장품은 매주 월요일이면 기도회와 성경공부로 일주일을 시작한다. “오늘 하루 믿음을 더하게 하시고 전적으로 순종하게 하시며 교만은 그 모양이라도 생각하게 마시고 겸손하게 하소서. 섬기는 자가 되게 하소서.” 그는 또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고백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가지 경험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반드시 축복이 내려온다는 사실입니다. 부자가 되길 원하시면 하늘 나라에 저금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한 농부가 웨슬리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웨슬리는 그 때 돈 문제를 말하고 있었다. 그는 3단계로 나누어서 그 문제를 논했다. 첫째- 여러분들은 할 수 있는 만큼 돈을 벌도록 하시오. 그 농부는 옆 사람을 툭툭 치면서“저 분은 속에 무엇이 있는 사람이야, 아주 경탄할 만한 설교야!”라고 말했다. 둘째- 할 수 있는 만큼 모두 저금하시오. 그 농부는 아주 흥분해서“아주 훌륭한 말이로구나!”라고 했다. 웨슬리는 돈을 절약하지 않고 낭비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 농부는 손을 비비면서 ‘그런 것은 젊을 때부터 들어온 말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돈을 벌고 저축하는 것으로 구원이 그의 집에 왔다고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남에게 주시오. 그것이 하늘나라 은행에 저금하는 것이오. 이 말을 듣던 농부는 부르짖기를 “오! 여보, 그는 전부 망쳤소.”라고 했다.
 
 
 
헌금에 대한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 영혼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헌금에 대한 그릇된 기준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그릇된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아 그릇된 자세를 고쳐야 한다.
 
1)억지헌금
억지로 마지못해 내는 헌금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눈 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엡6:6,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충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고후8:7) 성도들 중에는 펌프성도가 있고 옹달샘 성도가 있다고 한다. 펌프성도는 지하수는 풍성하지만 항상 펌프질을 하듯 자극을 주고 권해야 헌금하는 성도들이다. 펌프질을 하지 않으면 한번 주고는 다시 낼 줄 모른다. 그러나 옹달샘 성도는 누구의 간섭이나 자극이 없어도 항상 솟아나는 샘물이기 때문에 길손이 앉아 떠마실 뿐 아니라 누구나 할 것없이 이런 샘에 둘러앉아 마시고 쉬기를 좋아한다. 이런 성도는 강권할 겨를도 없이 항상 단 마음(with good)으로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므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2)기분헌금
기분이 내키는 대로 헌금하는 자들이다. 사전에 준비하여 드리는 계획성이 전혀없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고 되는대로 헌금하는 자들이다. 어떤 이기적인 목적이 있을 때에는 보다 많은 헌금을 하다가도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처럼 하나님 앞에 작정한 것을 속이는 일도 있으며, 때로는 전혀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기분헌금 성도는 인색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대부분의 경우 겸손한 마음으로 앉아서 성경의 교훈 앞에 자기의 헌금 생활에 대하여 조용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성도들이다. 헌금은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기도 드리는 중에 성령이 주시는 감동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그러나 기분대로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일 수 있다.
 
3)말 많은 헌금
교회 안에 부자가 몇 명 있으므로 교회 살림이나 빚더미를 감당했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은 헌금을 안해도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교회예산은 모두 충당이 되었으므로 나는 헌금을 안해도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금은 개개인에게 관련된 문제이다. 하나님께 어떻게 바치느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이 각자에게 따르는 것이다. 바치는 일에 있어서 자기 몫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의 운영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낌없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은 교회 재정 문제에 관하여 불평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말 많은 사람은 언제나 헌금 생활에 인색한 분들인 경우가 많다.
 
4)찌꺼기 헌금
저희 집에서는 가끔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나면 식사는 시작된다. 식사시간만 되면 고양이는 어느새 냄새를 맡고 ‘야옹 야옹 밥좀 주세요’하면서 우리 집을 방문한다. 혹시나 구운 생선이 올라 올 때면 대충 먹고 고양이를 주자고 한다. 우리 집의 고양이 밥은 나 아니면 신애가 챙긴다. 생선 찌꺼기를 모아 밥과 함께 비벼서 접시에 담아 갖다 준다. 이런 찌꺼기는 대부분 고양이, 개, 돼지 밥으로 갖다 준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짐승을 먼저 주는 법은 없다. 좋은 음식을 주는 경우도 없다. 1년 내내 찌꺼기를 준다. 고양이나 개 팔자는 상팔자라고 말들 하지만 찌꺼기를 먹는 팔자가 무슨 상팔자이겠는가? 이처럼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수입이 생기면 승용차 유지비, 아파트 관리비, 자녀 교육비, 세금, 부대비, 외상값, 할부값, 겟돈 등 이것저것을 제외시켜 놓고 더 이상 용도가 없으면 교회 헌금을 생각하는 성도들이 흔하다. 다 쓰고 남은 찌꺼기 중에 일부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 ‘고양이 밥’주듯이, ‘개밥’주듯이 바치는 헌금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리가 없다. 사실상 그런 헌금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했고,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했다.(잠3:9-10) 수입이 있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그의 교회와 사업을 생각하는 정신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5)눈치 헌금
꼭 필요한 사업이나 계획을 의논할 때에는 이런 소리가 종종 들린다. “나도 누구만큼은 내겠다.”순간적으로 들을 때에는 반가운 소리인 것 같으나 알고보면 이 역시 그릇된 헌금 자세다. 각자가 반드시 자기 개인의 능력에 따라 낼 것이요, 다른 사람이 헌금에다가 자기 헌금의 표준을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요한을 보면서 예수께 여짜오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21:19-22)
타인의 태도에 따라 나의 기준을 맞출 필요는 없다. 타인들이야 어떻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드리면 된다. 다른 사람을 보고 헌금하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망하였다. 바울사도는 마케도니아 성도들의 헌금 정신을 높이 칭찬하였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헌금하였고,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 그들은 힘대로 할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했으며,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듯 하나님의 뜻을 좇아 헌금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축복하기를 헌금 생활에 풍성한 것 같이 은혜도 풍성할 것을 기도하였다. 바른 헌금생활은 바른 신앙으로 인도되고 풍성한 은혜가 언제나 임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서 신학자 부시넬(Horace Bushnell)은 성도들이 헌금하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사람이 죄로 멸망하지 않으며, 구주가 필요치 않다는 것.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 “가인과 같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여 남의 영혼에 대하여 책임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의 말은 재능과 재물에 관하여 하나님 앞에 가서 회계(會計)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매월 (월급의 경우) 또는 주일마다 (사업하는 경우) 지정된 십일조 봉투에 넣되 반드시 자기의 이름을 기록하여 내어야 성경적인 자세이다. 구약시대에도 십일조를 드리거나 제물을 드릴 때에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누구의 것인지 똑똑히 안 것 같고 신약에도 예수님께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칭찬하셨다. 특별한 경우가 있을 때에는 별문제이지만, 가능한 한 유기명으로 하여 담임 목회자가 알아야 한다. 담임 목회자가 알아야 만이 헌금한 성도를 위해 복을 빌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는 무기명으로 할 경우를 가르친 곳도 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는 것이다. 이것은 “구제의 경우”에 속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고나서 자랑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예물(헌물)은 유기명으로 하되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온전히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에서 십일조의 기준은 소득의 2/10에 해당된다.
-내가 IS의 십일조(the tithes:십일조들을)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민
  18:21)
-모든 것의 십일조 중 (from all your tithes:ahems 것의 십일조 중에서)에서 여호
  와께 거제로 드리고 (민18:28-(히)미콜 마세로테켐:너희의 모든 십일조로부터)
-너희의 십일조(your tithes:너희의 십일조)와 (신12:6, 26:12)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In tithes and offerings)이라(말3:8)
  모든 소산의 십일조를 바칠 것인가, 아니면 이득의 십일조를 바칠 것인가?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
  호와께 성물이라.(레27:30)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레27:3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신14;22)
   -> 히브리어 원어 :
       아쉘 테아셀 - 너는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라.
       에트 콜 테부아트 - 모든 산출의 (민18:28절 참고)
       잘에카 - 너희 종자의
       하요체 - 나오는
       핫사데 솨나 솨나 - 매년 토지에서
       (NKJV 번역: You shall truly tithe all the increase of your grain that the
       field produces year by year)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말3:10)
  (NKJV 번역:Bring all the tithes into the storehouse,)
   -> 히브리어 원어 :
       하비우 - 너희는 가져오라
       에트 콜 - 의 모든 것을
       함마아세르 - 그 십일조
       엘 벨트 - 의 집으로
       하오차르 - 창고
       우히 - 그것이 있게 하라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IS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대하31:5)
  (NKJV번역:....... and they brought in abundantly the tithe of everything)
   -> 히브리어 원어 :
       웨키프로츠 하다바르 - 그리고 그 명한 것을 선포하자
       히레부 베네 이스라엘 - IS의 많은 자손은
       웨콜 테부아트 - 그리고 밭의 모든 생산물
       우마사르 하콜 - 그리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라롭 - 대부분의
       헤비우 - 가져왔다

하나님의 명령은 부분적인 것이 없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모든 소산물, 모든 소득에서 드려져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십일조를 넘어서”의 저자인 조누가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로 인한 웃지 못할 사례들(p103)에서 그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모든’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대하 31:5절의‘모든 것의 십일조’는 문맥을 살펴보면 그 구절의 ‘모든 것’이 모든 소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뿐만아니라 “모든 것의 십일조가 돈(화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한다. 조누가는 눅11:52절을 인용하면서 십일조를 주장하는 목사들을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율법사’라고 비난했다. 그의 원색적인 비난은 그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레27:31절을 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라고 말한다. 바로 말씀의 해석은 “원천적으로는 땅의 소산물 중 십분 일 그 자체가 여호와의 성물이다. 그러나 형편상 그 소산물 대신 돈으로 대신하려는 경우에는 그 소산물의 산정 가격에다 오분 일 가격에 해당하는 액수를 덧붙여야만 한다”는 것이다.(레6:5, 27:13 참고) 위의 말씀은 소산물을 돈으로 환산하여 드린다면 도리어 20%을 더해 드려야 한다. 이것은 물품을 매매했기 때문에 부당이득을 취한 만큼 하나님 앞에 더 드려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함이 바르다 하겠다. 조누가는 레27:30-33절은 토지 소산과 가축의 1/10을 십일조로 바치라고 하였지‘모든’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한 구절이 아니라고 하면서, 바벨론 포로 이후에 가축의 십일조는 언급되지 않고 토지 소산의 십일조만 언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특히 성전세나 헌금, 다른 세금들은 돈으로 냈으나 십일조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돈으로 내서는 안되고 반드시 양식의 형태로 성전 곳간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십일조의 대상이‘모든’소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고 고지식한 주장을 강하게 펴고 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양식의 1/10은 될지언정‘모든’소득의 1/10은 아닌 것이다라고 하면서 어떤 웃지 못할 사례를 들고 있다. 『어떤 교수가 특강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먼 지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가는 동안에 밥도 사 먹고 커피도 마시고 간식도 사 먹었다. 구두 밑창이 떨어져 구둣방에 가서 수리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강의를 가기 위해 치러진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강의를 마치고 강의료 50만원을 받았다. 자, 이제 강의료에 대한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단 비행기 삯을 강의료에서 빼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그 다음 들어간 경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어쩌면 그 모든 비용들이 50만원을 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 50만원에 대한 십일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다. 우리가 돈을 들고 와서 바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더군다나 돈을 바치면서 그 대가로 복을 기대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신다.”고 하면서 십일조가‘음식’에 국한된 이유를 그의 저서‘십일조를 넘어서 (p37)에서 예를 들고 있는데 풀을 뜯는 소가 웃을 일이다. 따라서 회사원의 십일조의 기준은 “총수령액”에서 1/10을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이다. 세금이나 의료보험비, 교육세 등 여러 기타 세금들을 제외하고 드린다면 이것은 온전한 십일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는 누구신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의 우선순위는 하나님 제일 중심이어야 한다. 우리에게 공기와 물과 환경을 누가 주셨는가? 가장 중요한 생명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의무가 시대가 변했다고해서 의무가 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존속하는 이상은 이런 의무는 영원한 것이다. 조누가처럼 율법의 시대가 끝났느니 십일조 시대가 지나갔으니 하는 망언을 일삼는 거짓 목사들을 지구를 떠나게 해야 한다. 이런 거짓 목사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워지며 하나님 섬기기를 집안의 개나 고양이보다 못하게 섬기고 있지는 않는가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이시다. 다만 오실 메시야, 오신 메시야, 다시 오실 메시야 중심으로 드려졌던 제사의 제도가 예배중심으로 개혁된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오실 메시야 대신에 짐승의 피를 대신 속죄제로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메시야 오신 이후로 그가 대신하여 영원한 속죄제물,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그를 믿음으로 그의 명령을 준행할 때에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대신 제물이 되셨다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다 면제되었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에게 효도를 스스로 해야 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의무를 이행해야 함이 지극히 마땅한 것이다. 율법이나 계명도 의롭고 선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롬7:1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려 오셨는가? 율법이 지나갔거나 폐하여졌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이 물음에 답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심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다.(마5:17-20)
 
*하나님과의 계산
세계적인 치약 상표가 된 콜게이트사의 사장 콜게이트(William Colgate, 1783-1857)는 영국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어린시절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고 비참하였다. 그는 중병 병자인 아버지와 폐병 환자인 어머니 밑에서 살 길이 막막하여, 제 힘으로 돈을 벌어보겠노라고 어린 소년의 몸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어린 콜케이트가 결심을 하고 떠나는 그에게 누워있는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네가 버는 돈의 십분의 일은 반드시 구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니까........” 배삯도 없이 미국으로 떠난 콜케이트는 배표를 검사하는 선원에게 발각되어 어려움을 당했으나 선장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미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장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비누제조 회사에 취직까지 할 수 있었다. 그는 교회를 다니며 열심과 성실로 일을 하여 곧 지배인이 되었고, 얼마 후에는 작은 비누 제조회사를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말을 평생 잊지않고 실천하였는데, “하나님과의 계산”이라는 장부를 만들어서 수익금의 십분 일을 장부에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그의 수익은 날로 늘어났고 회사는 점점 커져 치약과 화장품까지 생산하게 되었다. 그중 치약회사는 그의 이름을 상표로 붙인 “콜케이트 치약”은 세계적인 상표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십분 일을 바쳤고, 그 다음에는 십분 오를 드렸으며, 나중에는 아예 수익금 전액을 하나님 사업에 바쳤다고 한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콜케이트는 이런 말을 즐겨 대답했다. “저의 성공 비결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교육받아 온 십일조 생활에 있습니다. 수입의 10분의 1은 항상 구별하여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고 나머지 십의 구는 경영에 투자했습니다. 한 때, 하루의 수입이 네 사람이 겨우 옮길만한 무게의 큰 금덩이였을 때에도 저는 십일조 바치기를 주저하거나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업하는 경영자들의 십일조 기준
사업하는 경영자들은 십일조를 어떤 기준으로 정해야 하는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계산에 의존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 계산에 의존하다 보니 지극히 작은 부대비용까지 모든 소득에서 공제하여 인색한 십일조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한 온전한 십일조 곧 모든 소출의 십일조는 어떻게 드리는 것일까? 첫째 - 계산하는 방법이 정직해야 한다. 둘째 - 모든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모든 소출이란, 총매출에서 제조원가(제조업의 경우)만을 매입으로 공제한 소득이어야 한다. 그 소득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비용 곧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십일조요, 믿음으로 드리는 십일조이며, 이것이 하나님 제일중심에서 드려지는 온전한 신앙이다. 하나님의 비용이란, 날마다 주시는 공기, 비 햇빛 등 가장 비싼 혜택을 누리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혜택이 없다면 우리 노동댓가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혜택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용(십일조)을 가장 먼저 소득에서 구별해야 한다. 온전한 십일조 계산의 실례를 들어보자.
①총매출이 1천만원이다.
②제조원가는 4백만원이다.
③총소득은 6백만원이다.
④총소득의 십일조는 6십만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용이다.
⑤십일조를 공제한 총소득은 5백4십만원이다.
⑥십일조를 제외한 총소득에서 인건비, 광열용수비, 임대료, 세금, 기타 부대비용 등
  을 계산해야 할 것이다. 단, 주유소나 자동차의 경우는 정부에서 세금이 정해지는
  것은 원가로 계산해야하는 것도 있다.
 
어떤 거짓 선생의 말에 의해, 십일조는
①유대인의 잔재니
②율법시대의 소산물이니
③십일조의 시대는 지나갔느니
④율법은 폐기됐느니
⑤십일조는 돈으로 드리지 않고 음식으로만 드려야 되느니
⑥록펠러와 카네기는 부정한 돈을 받쳤으니
⑦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 관계가 없느니
⑧율법에서 해방된 사람을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없다느니 하면서 성경을 억지 해석
  하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는 이런 거짓 선생들의 말
  에 미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경을 왜곡하는 자들은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거짓
  되고 부패한 자들이다. 친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경고를 잊지말아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
  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우리에게 목숨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은혜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모든 영광과 존귀한 생명을
  포기하고 버리신 사랑의 주님을 생각한다면 십일조 아니 십의 구라 할지라도 무슨
  멍에가 되겠으며, 짐이 되겠는가?
  잠시 성령(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봄으로 십일조에 대한 바른 견해를 정리해 보자.
  “내가 너희에게 다시 말하노니 직장에 다니는 자나 국가의 녹을 먹는 자가 그 받은
  월급중 총액에서 십일조를 나에게 드리는 것이 바로 온전한 십일조인 것처럼, 사업
  을 하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로다. 내가 이미 말하였으되 매출과 매입에서 순수익
  을 드리는 것이 아니요 전체적인 소득에서 나에게 믿음으로 드리는 자가 온전한 십
  일조를 드리는 자니라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하늘 문을 열고 나를 시험하는 자니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답이니라.”
 
*십일조와 헌물은 우리 구원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누가 12장에 기록된 “부자영감”에 대한 교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 영감의 비유를 기록케하신 목적을 발견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 물질을 탐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인색한 자들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물론 이 세상에서 부의 축적을 위해 선하게 노력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 비유는 이 세상의 부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거기에만 몰두된 상태 즉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혼돈된 영적 무지의 상태에 있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세상의 물질, 명예, 권세 때문에 하늘의 영원한 축복을 상실해버린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또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대화에서도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케 하신다. 하루는 어떤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여야,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질문을 던졌다. 부자 관원의 질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는 자의 모습을 일러준다. 먼저 부자 관원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에서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설명하는 교훈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관원의‘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통하여 인간의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역설하신다. 부자 관원은 계명을 지켰다고 했지만, 과연 하나님께 대하여는 계명을 지켰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게 오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근심하고 돌아감으로써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부자 관원은 외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지 않아 율법을 준수한 것처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었음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다. 부자 관원의 마음을 이미 읽은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시험해 본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와 헌금은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율법적으로 드리는 것은 기본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이 두 사람의 비유를 들어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우리는 깊이 상고해야 할 것이다. 물론 돈으로 영생 얻는다는 잘못된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을 강조하고자 함이 아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십일조와 헌금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결국 부자 관원처럼 그의 본심이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드려질 때만이 하늘에 보화가 보장된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누구의 것인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십일조가 그렇게 무거운 짐인가, 멍에인가?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사는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섬김, 우리의 시간, 우리의 몸, 우리의 재능, 우리의 사랑 등에 대한 원초적이며, 선행적인 요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총명한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창조의 원리, 우리를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자비, 구속의 신비,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성품을 부여받은 것, 천국의 언약과 계시의 소망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우리 모두는 모든 선한 은사가 위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느끼고 있다. 풍성한 식탁과 넘치는 잔과 우리의 질병을 치유해 주는 약과 우리의 거처에서 들을 수 있는 기쁨과 건강의 소리, 아무도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는 안정감 등은 모든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모든 간접적인 것들 -기회, 기술, 판단, 친구들, 영향력 등-은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위대한 후원자인 하나님의 종들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잔을 들고 있는 것들이지 잔을 채워주는 것들은 아니다. 주님은 우물곁에 서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기쁘게 할 때 그들의 잔을 가득히 채워 주신다. 당신은 이 부유함을 갖고 있는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는 당신에게 부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다. 당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지어 주는 분은 주님이시며, 당신에게 지혜롭고, 이해하는 마음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이와같은 은총이 주어질 때 우리는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제공해 주시는 주님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의 순종의 제단에 사랑의 산제사, 가장 쾌활하고, 가장 고상하며, 가장 선한 마음을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선포한 말씀을 포기하지 않는 주님
어느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항상 수입의 십분의 일을 주님의 사업을 위해 바쳤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관계로 빌렸던 건물을 1년 이내에 비워 주어야만 했다. 그는 여섯달 동안이나 다른 건물을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사업을 그만 두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에 그는 얼마간의 부지만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담보로 하여 은행이 건물을 내어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부지를 구하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결과 철도 변에 있는 꽤 쓸모있는 유용한 땅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거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땅의 구입 대금으로 3만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에게는 총3만 달러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1만 달러는 바로 주님의 사업을 하는데 쓰기로 작정된 금액이었다. 그는 2만 달러에 철도 변의 부지를 구입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3만 달러를 지불해서라도 그 땅을 사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나서 성경을 펼쳤더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펼쳐졌다. “너의 모든 재산의 십일조를 드려라. 그리하면 하늘 문을 열어 네가 축복을 쏟아부어 주리라” 그는 생각했다. “드디어 문제가 해결됐다. 주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님의 것 곧 십일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그는 그때 그리스도인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네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1만 달러를 가져다 써라. 그 돈은 너를 위해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철도 변의 땅 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 땅을 당신에게 2만 달러에 팔겠습니다.”그리하여 결국 주님께서는 십일조를 받으시게 되었고, 그 사업가는 자신의 몫으로 공장을 다시 경영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사업을 날로 번창해 나갔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자신이 선포한 말씀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독자 이삭을 얻었다. 1백세에 독자 이삭을 얻은 아브라함은 얼마나 기뻤을까, 그후 약15-20년이 흘렀을까. 이삭은 건장한 청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아브라함에게 들렸다. “아브라함아! 네 독자 이삭을 바쳐라” 히브리서11:19 절을 보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십일조와 헌물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비롯된다.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저 하늘에 소망을 심어주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의 명령이다. 십일조와 헌물의 정신은 물질의 탐욕을 조절하기 위한 하나님의 좋으신 방법이다. 결국 십일조와 헌물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16:1-2 절에서 이런 말로 부탁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여기서 조누가는 “이를 얻은 대로”란 무슨 뜻인가?(p140)에서‘있는대로’드리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신약에서 십일조를 강조한 곳이 어디 있느냐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성경 해석을 대조해 보았다.

-> 헬라원어 분해성경
카타 미안 삽바투 - 주간의 첫째날에
헤카스토스 휘몬 - 너희 각자가
파르 헤아우트 - 스스로에 의해서
티데트 데사우리존 - 비축하여 두라
호 티 에안 유오도타이 - 혹 그가 번영하여(얻은 것) 무엇이든지
히나 메 - ∼하지 않도록
호탄 엘도 토네 - 내가 갈 그 때면 언제나
로게이아이 기논타이 - 헌금들이 이루어지지

KJV(KNJV)
매주 첫날에 너희 각자가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신 대로 따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는 모금(헌금)하는 일이 없게 하라.
고전16:1 절에서‘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바울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 사실을 명하였는가. 갈6:5-10 절에 언급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심고 거두는 법칙』을 강조한 것이다. 이 말씀은 또 다시 고후9장에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는 말씀에서 뜻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율법 이전이요 이상이다. 십일조 생활은 축복의 결과로써 감사함으로 드려야 한다. 십일조 생활은 축복의 결과만이 아니라 축복의 원인이니 의당히 드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하라고 명하셨다.(마23:23, 눅11:42) 우리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가장 합당한 자세는?
①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드려야 한다.
②사랑과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
③미리 준비하여 드려야 한다.
④힘을 다해 드려야 한다.
⑤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드리지 말고 자원함으로 드려야 한다.
⑥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⑦섬기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고후8, 9장을 자주 읽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와 헌금을 드려야 하는 이유는?
①십일조는 구약의 명령이며 지금도 그 명령은 계속 유효하기 때문이다.
②십일조는 믿음의 행위의 거룩한 부분이다.
③십일조는 진실한 사랑의 표현이다.
④십일조는 몸된 교회 곧 하나님 사업에 절대 필요한 기금이다.
⑤십일조는 이 세상에 대한 탐심을 버리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⑥십일조는 하늘에 쌓는 보물의 거룩한 부분이다.
⑦십일조는 심고 거두는 법칙을 행하는 것이다.
  
물질과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의 몫을 돌려 드려라. 십일조를 훔치면 전 재산이 부
패하게 된다- (G.Herbert)
 
[출처: 유용한 기독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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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십일조와 헌금 강연 십일조

2006/10/18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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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쉴만한물가 | 작은종
원문 http://blog.naver.com/mokpojsk/130008464814

십일조와 헌금 강연

십일조와 헌금의 의미와 사용에 대한 소고 A Study of the Meaning of Tithe, Offerin g and Their Use 논문...특히 십일조는 개교회 의 경제적인 자립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강조...

sgti.kehc.org/data/person/mgkim/08.htm

 

십일조와 헌금의 의미와 사용에 대한 소고

A Study of the Meaning of Tithe, Offering and Their Use

 

논문 요약

십일조란 자신의 소득의 10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다.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십일조와 헌금을 세계 어느 나라의 신자보다 열심히 드리고 있다. 특히 십일조는 개교회의 경제적인 자립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강조되었지만 십일조의 사용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는 성직자,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떠돌이, 고아, 과부)에게 십일조를 사용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교회는 십일조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대체적으로 준수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게르만족에게 전파된 이후 십일조의 상당한 부분이 교회를 후원하는 사람과 성직자에게 돌려졌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교회의 개혁은 신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실제 생활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한 예로 루터는 신자들의 헌금이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에 대한 글을 1523년 작센 선제후국의 라이스니히市의 성 마태우스교회의 헌물함에 있는 헌금의 사용에 관한 글을 통하여, 모든 복음적인 교회(루터교회)들이 이러한 규정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였다. 루터는 헌금을 공정하게 관리해야 함은 물론 종교적인 목적 이외에 라이스니히시 전체의 복지를 위하여 사용해야할 것을 권하고 있다.

십일조와 헌금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 복지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 기독교인들은 십일조와 헌금을 드릴 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이며 물질은 단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것이므로 인간은 청지기에 불과하며 인간이 결코 물질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고 십일조와 헌금이 교회에서 올바르게 사용되도록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 성서적인 가르침에 따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I. 서언

십일조는 한국 개신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개교회의 살림을 꾸려 나가는데 신자들이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는 없어서는 안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까지 한국 교회는 주로 십일조를 드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드려진 십일조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십일조와 헌금의 성서적인 의미와 사용법, 敎會史에서 본 십일조 그리고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헌금 사용에 관한 글을 통해 십일조와 헌금을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다루려고 한다. 십일조를 드리는데 역점을 두었다는 것은 십일조가 지니고 있는 제의적 성격과 여기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축복을 강조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십일조는 이런 제의적 성격 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격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서를 통해 가르쳐 준 내용에 확실히 드러나 있다.

성서에 나오는 십일조와 헌금에 대한 신학적인 내용은 성서 신학자의 몫이므로 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보다 종교개혁시대에 헌금에 대한 사용을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어떻게 헌금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십일조와 헌금을 어떻게 드렸고 사용했는지를 성서와 교회의 역사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II. 구약성서에 나타난 십일조

구약에서 십일조라는 말의 히브리어 마아세르(????)는 십분의 일을 뜻하며 (에스겔 45:11;14), 소득의 십분의 일에 대한 헌금으로 쓰이고 있다(창 14:20, 아모스 4:4, 말라기 3:8;10, 역대하 31:5;6;12, 느혜미야 10:38. 12:44. 13:5;12). 마아세르의 동사형은 아사르(???)로서 '십분의 일을 부과하다'(Qal, 사무엘상 8:15;17), '십일조를 드리다'(Pi'el, 신명기 14:22, 창 28:22), '십일조를 드리다 및 십일조를 모으다'(Hif'il, 신명기 26:12, 느혜미야 10:39)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 오경에 나타난 십일조

1)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 (창 14:17-20)

구약성서의 맨 처음에 나오는 십일조는 창세기 14:17-20에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라고 말하자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이라는 문장에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십일조의 범위를 규정해주는 단서가 된다. 또 하나는 십일조의 성격 규정이다. 19절에는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멜기세덱이 하나님께 복을 빌었고, 20절에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라는 멜기세덱의 요청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는 아직 모세의 율법이 시행되지 않은 때이다. 또 멜기세덱이 노략물의 10분의 1을 아브람에게 "과세"했다는 암시도 전혀 없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세무요원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보답의 형태가 십일조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더 복을 받기 위한 행위가 아닌 감사제의 행위이다. 이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헌금 방법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태도를 예시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십일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여졌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2) 야곱의 십일조 약속 (창 28:18-22)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중 광야에서 꿈을 꾼 다음 그곳을 베델이라 칭하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는데, 이 서원의 마지막 내용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십일조를 바친 구체적인 사실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해주시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라. 그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라.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3) 제사법전에 나오는 십일조

(1) 레위기 27:30-34

농산물의 십일조와 가축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칠 것을 말하고 있다.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 그리고 소 떼와 양 떼의 십분의 일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할 거룩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특히 가축의 십일조는 새로 태어난 것 가운데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 가축 가운데서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있다 (32절).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밭에서 난 곡식이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이든지, 모두 주께 속한 것으로서,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누가 그 십분의 일을 꼭 무르고자 하면, 그 무를 것의 값에다 오분의 일을 더 얹어야 한다. 소 떼와 양 떼에서도, 각각 십분의 일을 나 주에게 거룩하게 바쳐야 한다. 목자의 지팡이 밑으로 짐승을 지나가게 하여, 열 번째 것마다 바쳐야 한다. 나쁜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을 골라내거나 바꿔치기를 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그가 꼭 바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어떤 것을 바꾸었다면, 처음 그 짐승과 바꾼 짐승이 둘 다 거룩하게 되어, 도저히 무를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주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더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고 내리신 명이다.

(2) 민수기 18:20-32

레위기와는 달리 민수기에서는 십일조 전부가 레위인의 몫이고 그 중에서 십분의 일만 제사장에게 돌리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먼저 레위 사람이 십일조를 받아야 할 당위성을 먼저 언급한다. 주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의 땅에서는 아무런 유산도 없다. 그들과 더불어 함께 나눌 몫이 너에게는 없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네가 받은 몫, 네가 차지할 유산은 바로 나다."(20절).

레위인은 땅을 분배받지 않았기 때문에 땅의 소산물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에게는 회막 일을 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고 오직 레위 지파에게만 주어졌다(23절).다른 지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전적으로 성막 봉사에 대한 의무를 지닌 레위인을 위하여 십일조를 드렸다. 레위인이 받는 십일조는 회막에서 하는 일에 대한 보수의 성격을 띠고 있다(31절).

바로 여기에서 십일조에 대한 용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레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유산이다. 특히 레위인도 자기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25절, 28절). 십일조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비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제사를 정기적으로 드리기 위해 들이나 포도원을 가꾸는 일에 얽매이지 않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비 대책이 가정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종교적 예식들이 정기적으로 시행되고 합당하게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임한다고 믿었다.

4) 신명기에서의 십일조

(1) 신명기 12:6-19, 14:22-27

신명기 12:6-19에 언급된 십일조는 제사와 함께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이 복을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서 가족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축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이 축제에는 자녀들, 남종과 여종 그리고 차지할 몫이나 유산도 없이 성 안에서 사는 레위인을 다 초대하여 함께 즐거워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12절). 여기에서 드려진 십일조는 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었다(17절).

신명기 14:22-27에 기록된 십일조 규정에는 매년 농사를 지은 수확물의 10분의 1을 드리라고 되어있다. 신명기 12:6-19절과 마찬가지로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할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 특히 이 축제에 레위인을 초대할 것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종들을 초대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하나로 이해된다. 십일조를 드릴 때 축제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 축제에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을 초대할 것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2)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 (신 14:28-29, 26:12-15)

너희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 실 것이다.

세 해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되면, 너희는 너희의 모든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따로 떼 어서, 그것을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너희가 사는 성 안에서 마음껏 먹게 하여라. 그렇게 할 때에 너희는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어라. '우리는 주께 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 집에서 성물을 내어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다 나누어 주어서, 주의 명령을 잊지 않고 어김없이 다 실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애곡하는 날 에, 이 거룩한 열의 한 몫을 먹지 않았고, 부정한 몸으로 그것을 떼놓지도 않고, 죽은 자에게 그것을 제물로 바친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 순종하여서, 십일조에 관하여 명 령하신 것을 그대로 다 지켰습니다.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고, 주의 백성 이 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주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주신 땅, 곧 젖과 꿀 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려 주십시오.'

여기에서는 십일조가 사회복지적인 목적과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가장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십일조는 일단 다 모아져서 성소가 아닌 '성 안에 저장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사람은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인데 이들은 일정한 경제적 생산수단이 없던 사람들이다. 거룩하고 구별되게 드려진 것이, 성 안에 저장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했던 대로 쓰임을 받게될 때 거룩해지는 것임을 암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매 삼 년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십일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복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물론 복을 받겠지만,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복을 내리시는 것은 결국 더욱 많은 나눔을 생산하기 위함이라 여겨진다. 이 십일조 제도는 그 당시의 사회사업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십일조를 통해 나타내신 것이다.

2. 말라기에 나타난 십일조(말 3:6-12)

한국의 개신교 강단에서 선포되는 십일조에 관한 설교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성경 본문이다. 여기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하나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8절).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이 범죄 행위에 해당되는 까닭은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인간은 단지 이것을 위탁받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10분 1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인간은 나눔의 최소화를 실천하게 되는데 이것은 물질소유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훈련의 기본단계이다. 이 훈련을 통하여 인간이 물질의 종으로 타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랑의 하나님의 뜻을 위반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일조의 운용을 통하여 복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소득의 재분배를 계획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십일조의 규례를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인위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여기에서 특기할만 한 것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사람에게 저주를 경고하고 바치는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주가 무섭기 때문에 바치거나 축복을 받기 위해서 바친다면 이것은 중세 시대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발행되었던 사면부(indulgentia)와 조금도 차이가 없다. 구약의 십일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현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물질이 필요하지만 물질세계의 지배는 받지 말아야 함을 암시한 것이다.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받게 되지만 궁극적인 바치는 대상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서 재산이 있는 자는 그 재산을 나눌 수 있는 최소단위를 하나님께 바치게 하셨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는 위정자들이 세금으로 거두어가는 십분의 일세와는 성격이 달랐다 (참조 삼상 8:15;17). 제사장과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내게 된 것도 이들에게는 토지분배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하나님이 이들의 유산이 되기 때문이다).

III. 신약 성서에 나타난 십일조

1. 복음서에 언급된 십일조 (마 23:23, 눅 18:9-14)

신약 성서에서는 십일조에 관한 언급이 별로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복음서를 통해서 볼 때 구약시대의 십일조 전승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십일조는 유대인의 형식적인 경건의 요소로 언급되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십일조는 드리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지 않음을 비판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십일조는 바쳐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누가복음 18:9-14에는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것은 외적 종교적 행위를 하는 사람과 내적 심령의 종교를 가진 사람을 대조한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은 성전에서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2절)라고 기도했다. 바리새파 사람의 외적 종교적 행위에는 십일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데 그는 내적 심령의 종교를 가진 사람에 해당되며,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닌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14절).

2. 히브리서에 언급된 십일조 (히 7:1-4)

창세기 14:17-20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내용을 멜기세덱과 예수를 비교하는 가운데 히브리서 7:1-4에 언급하고 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여러 왕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에, 그를 만나서 축복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 그가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족장인 아브라함까지도 가장 좋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IV. 교회사에 나타난 십일조와 헌금

1. 고대 교회

고대 교회에서 헌금은 자발적 이었다. 구약 성서적인 모범에 따른 십일조에 대한 요청은 동방 정교회에서는 대단히 오래된 것이지만 (Did.13) 서방교회에서는 3세기까지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 세상의 소유의 한 부분에 대한 포기로서의 구제는 금욕적인 행위가 되어 내세에 대한 보상을 상속하는 한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가졌다. 이것은 예배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교회에 바칠 헌물로 정해진 것들(농산물과 돈)을 예배 때 가져와 교회의 장로에게 전달하였다. 장로는 이 헌물을 성찬대 위에 봉헌(Oblationen)한 다음에 집사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선물로 자유 재량에 따라 궁핍한 사람들과 선지자, 교사, 교회 직원에게 나누어 주었다.

2. 중세 시대

중세 시대에 십일조의 자발적인 실행은 585년에 열린 제2차 마콘(Mâcon) 종교회의에서 법적인 의무로서 고시되었다(제5조). 그 후 프랑켄 왕국의 카롤링어家 출신인 칼 대제(Karl d. Gr., 768-814)는 교회에 대한 무제한적인 지배를 왕의 의무로 여겨, 외부의 적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내적인 문제까지 관여하였다. 779년 프랑켄 왕국에서 카롤링어가의 법령은 헤리스탈(Heristal)의 주교좌 성당 참사 회원에게 십일조를 국법으로 인정해주었다. 그 결과 교회의 경제적인 기초가 든든해지게 되었다. 십일조의 인정으로 교회는 그들의 반환권리에 대한 과제를 국민의 비용으로 맡게 되었다. 다른 나라들은 이보다 늦게 십일조의 의무가 법제화되었다. 예를 들면 포르투갈은 11세기에 덴마크와 아이슬란드는 13세기에 이루어졌다. 십일조는 거의 전적으로 소득의 십일조였다(개인 십일조: 개인의 수입에서 바침, 물질의 십일조: 농작물과 가축에서 바침; 이 십일조는 밭에서 나온 소산물로 바치는 대십일조와 정원과 과일나무 열매의 소득에서 바치는 소십일조로 구분됨).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곡물의 십일조에서 달성하였다. 십일조에 대한 의무는 원칙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있었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식민지 지역에서 지배받고 있는 주민들의 감소된 십일조 의무(슬라브족 십일조)는 1036년 트리부르(Tribur)의 종교회의에 의하여 표준 십일조로 균등화하게 되었다. 다만 교회 성직자의 소유지, 수도원 그리고 때때로 귀족에게는 십일조 의무가 제외되었다.

교황 겔라시우스(Gelasius, 492-496)의 분배규정은 십일조의 수령 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주교, 성직자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교회의 필요를 위한 것(건물, 시설유지 등)을 위해 각각 4분의 1을 지급한다. 사유재산화된교회제도(Eigenkirchenwesen)의 발전은 교회 후원자가 예배당의 건축과 유지(Baulast)에 대한 보상으로서 교회의 십일조의 많은 부분(일반적으로 3분의 2)을 요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나머지 3분의 1은 성직자에게 지급되었다. 규칙적으로 이 "십일조의 3분의 1"(tertia pars decimarum)은 18세기까지 성직자에게 지급되었다. 사유재산화된 교회제도에 대한 투쟁은 또한 평신도에 대한 십일조 권리를 일으켰지만 이 목적은 결코 달성되지 못했다. 겔라시우스의 분배규정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십일조의 사용 목적에 부합되었으나 교회의 사유재산화는 십일조를 교회 소유주와 성직자에게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에 농민들로 하여금 십일조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게 하였다.

3. 헌금의 사용에 관한 루터의 견해

루터가 살았던 시대에도 십일조는 있었다. 농민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525년 2월말에 독일 슈바벤(Schwaben)에서 농민들이 제시한 "12개 조항"에는 곡물의 십일조는 성직자에 대한 사례,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전쟁시의 곤궁을 대비한 비축식량으로 써줄 것을 요구한 항이 있다. 그리고 가축에 대한 십일조는 면제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한 루터의 답변은 십일조의 폐지는 "도둑"이다 라는 강경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루터는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십일조를 폐지할 생각은 없었으며 그것이 또한 성서에 명시되어 있는 경우 그러했다. 그리고 그는 십일조는 아니지만 교회의 헌금에 대한 용도에 대한 구체적인 제시를 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에 한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오늘 우리의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은 전제해야 한다.

1) 교회의 헌물함에 대한 규정(Ordnung eines gemeine Kasten, 1523)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분리하여 나온 복음적인 교회들은 교회 생활의 실제에 있어서 복음적인 견해의 구체화와 더불어 성직자와 교회 직원들의 보수는 물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와 관련된 교회 재정규정에 대한 새로운 제정이 불가피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루터는 1523년 작센 선제후국에 있는 작은 도시인 라이스니히시에 있는 聖 마태우스 市敎會(die Stadtkirche St. Matthäus)에 보관되어 있는 헌물함에 있는 재물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실례를 '교회의 헌물함에 대한 규정'이라는 글을 통해 자세하게 밝혔다. 루터는 라이스니히시를 방문한 적이 있으며 이곳에 있는 교회가 부흐(Buch) 수도원으로부터 보증된 교회 후원자의 권리를 깰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하여 조언을 주기도 하였다. 헌물함인 라이스니히의 "게마이네 카스텐"(der gemeine Kasten)은 라이스니히市의 교회 안에 4개의 자물쇠로 채워져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이 자물쇠 4개는 각각 다른 것이었는데 그것은 귀족, 시의회, 市 敎會, 농민의 대표가 각각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시대에 교회에 있었던 이 헌금함은 교회 자체 보다는 市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루터는 이 글이 라이스니히에 있는 교회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독일에 있는 모든 루터교회에 모범이 되어 다른 교회들도 이를 본받도록 인쇄를 한다고 밝히고 있다.

(1) 라이스니히 헌물함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

오늘날 교회에서 헌금을 바칠 때 대부분 화폐를 사용하는데 반하여 16세기에는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께 드렸다. 라이스니히시의 헌물함은 상시의 지출을 위한 재산이기 때문에 한 방향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려운 시절을 위한 비축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헌물함에 포함된 것들은 무엇인가? 루터는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이자들, 전답, 조세, 돈 그리고 재산 모든 것이 모아져서 영구히 헌납되고 한데 모아져야만 한다." 루터는 이 헌물함의 몇 가지 수입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① 목사의 재산과 조세에서

② 교회의 재산과 조세에서

③ 네 개의 제단(그리스도의 몸의 제단, 수태고지 제단, 마리아의 수태 제단, 십 자가 제단)들의 수익금, 자선 기관들의 재산과 조세에서

④ 형제단들로부터

⑤ 수공업자들과 농민들이 낸 헌물에서

⑥ 빈민구제함과 헌금함에 있는 음식물과 돈에서

⑦ 건강한 날들에 대한 감사 헌금과 유언을 통해 언급된 헌금에서

(2) 라이스니히 헌물이 사용되는 곳

라이스니히의 헌물이 사용되는 범위는 라이스니히 교구에 한정되어 있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몇가지 예외적인 조항도 있다. 루터는 이 헌물이 사용되어야 할 곳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목사를 위해서-연봉과 일년에 네차례의 보조금.

② 교회의 사찰을 위해서-연봉과 일년에 네차례의 보조금.

③ 학교를 위해서-교사들의 사례비-연봉과 일년에 네차례의 보조금.

④ 장애자, 병든자와 가난한 사람들, 병과 노년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열명의 위원들이 매 주일 또는 부정기적으로 위와 같은 어려운 사람들 을 돌본다(이들이 살 수 있는 집, 옷, 먹을 것). 이렇게 함으로써 구걸행위를 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⑤ 버려진 고아와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서-이들의 교육과 생계를 돌보아야 한 다.

⑥ 구걸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⑦ 나그네들을 위해서

⑧ 교회당, 다리, 목사관, 학교, 사찰 사택, 구빈원의 건축과 유지

⑨ 비축할 수 있는 곡식을 사들이기 위해

(3) 라이스니히 헌물에 있어서 행정적인 사항들

루터는 이 헌물을 지급하기 위해서 10명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위원들은 두명의 귀족, 두명의 시의원, 일반 시민들 가운데 세명은 도시민 그리고 세명은 농민으로 이루어졌다. 루터는 이들이 선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일해줄 것과 사사로운 것들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들은 매주 목사관이나 시청에 모여서 그들에게 위임된 일들을 성실히 수행하고 토의와 협의를 해야 한다. 10명의 위원들은 일년에 네번(사순절 첫째주일 다음의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성령강림절, 9월 14일, 12월 13일)에 걸쳐 헌물의 수익상황을 점검하고 부족함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루터는 라이스니히 헌물함의 규정을 통하여 교회 재산의 사회적 기여도를 심도있게 다루었다. 그는 철저히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이상은 초대 교회의 재산의 공동분배에 있었다. 그는 사도행전 2:44과 4:32과 유대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헌금에 대해 언급한 고린도후서 9:2을 교회 재산의 사용에 있어서 이상으로 보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35-46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최후심판 날에 말씀하신 것과 같이 루터는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을 섬기는 기독교적인 사랑보다 더 큰 예배는 없다고 말한다.

VI. 결론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가와 온전한 십일조를 바친다고 양심있게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제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첫째, 교회의 회계는 투명해야 한다. 모든 교인들이 낸 헌금이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를 단 한푼까지 정확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를 해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건강하게 한다. 이렇게 된다면 신자들이 헌금을 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교회는 십일조를 바치라고 신자들에게 가르치지만 말고 교회 스스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 이 교회의 십일조는 교회 경상비에서 10분의 1을 자신의 교회를 위한 일이 아닌 곳에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이 교회의 십일조는 십일조를 받은 레위인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내는 것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다. 가난한 교회라고 예외일 수 없다. 가난한 신자에게 십일조는 면제가 되는 것인가? 교회의 경상비의 10분의 1에서 모아진 교회의 십일조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제용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 십일조는 개교회가 연합한다는지 지방회 또는 노회별로 연합한다든지 아니면 총회적인 사업으로 발전하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 십일조를 총회적으로 모은다면 한국의 개신교회도 독일 루터교회들이 하는 사회봉사국(Diakoniewerk)을 설립하여 대대적인 사회 복지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헌금이 꼭 필요한 일에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 가장 우선적인 일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교회는 과거의 습성에 젖어 필요하지 않는 일에 재정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 한 예로 매주마다 한번보고 버려지는 주보의 발행을 들 수 있다. 과연 주보를 계속 발행해야할지 우리는 한번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주보를 매주 발행하는 것 대신 그날 부를 찬송과 성경말씀을 교회의 벽이나 앞면에서 알려주면 될 것이다. 그리고 매주 마다 바꾸는 강단의 꽃꽂이이다. 꼭 비싼 생화를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 경비가 소외되고 그늘진 이웃들에게 전해진다면 그곳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지 않을까? 이런 일을 할 때에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일은 교회나 어떤 목사 또는 장로의 이름으로 하지 말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골 3:17)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넷째, 십일조와 헌금은 신자의 소유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준 것의 십분의 일 또는 그 이외의 것을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경제관은 물질이 그의 소유가 아니라 단지 위임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점이 아닌 공유이며 나눔이다. 십분의 일이라는 나눔의 훈련을 통하여 십분의 일 이상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닌 세상을 향해서 전파해야할 복음이다. 십일조의 정신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교회가 진정으로 십일조를 한다면 세계의 굶주림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서구 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십일조에 난색을 표한다. 십일조와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물론 제의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랑과 정의의 실현을 가르치신다. 문제는 이것을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참고문헌

1. 원자료

Luther, Martin.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A), Bd.12, Weimar: Hermann Böhlau, 1891.

―――. Taschenausgabe (LTA), Bd. 3, Berlin: Evangelische Verlagsanstalt, 1981.

2. 단행본 및 논문

임태수.「구약성서와 민중」,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3.

정기덕. "십일조의 강조는 타당한가?", 신학과 문화, 제4집, 1995.

Erler, A. "Zehnten", in Die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Bd. 6, Tübingen: J.C.B. Mohr (Paul Siebeck), 1963, 3.Aufl.

Heussi, Karl. Kompendium der Kirchengeschichte, Tübingen: J.C.B. Mohr (Paul Siebeck), 1981.

Loewenich, von Walter. Martin Luther. Der Mann und das Werk, München: List Verlag, 1982.

Wilson, J. Christian. "Tithe", in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 6, Doubleday: David Noel Freemann, 1922.

Vischer, Lukas. Tithing in the Early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6.

3. 번역서

V. S. 아자리아.「그리스도인과 헌금」, 곽안전·심재원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2.

R. T. Kendall. 「십일조」, 송성진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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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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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쉴만한물가 | 작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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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헌금에 대한 연구
십일조헌금에 대한 연구

십일조에 대해서 말하려면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의 목적을 연구하지 않고는 십일조에 대하여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십일조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한 물질을 인간에게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리라고 하셨다.(창1:28) 이명령을 노동명령이라고도 하고, 문화명령이라고도 하는데 이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소득이 창출된다. 소득을 창출함에 있어서 건강과 재능과 일터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은총이며 하나님의 섭리(보존 통치 동류)가 작용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노동으로 창출된 소득의 전체를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 하지만, 율법(구약)에서는 십일조를 요구하셨다. 그러나 신약에서 헌금은 십일조가 아니라 소득의 전체를 말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헌신(순교)까지도 요구한다. 이렇게 십일조와 헌금을 통해서 구제하고 봉사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데 그 목적이있다. 그러므로 노동(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의 노동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이 땅에서 살아야 가치를 상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노동을 통해서 소득을 창출하고 그 소득의 십일조와 헌금으로 문화를 건설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해서(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의무와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마25장에 보면 최후의 심판대에서 양과 염소로 가르시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자기것으로 알고 잘못사용한 사람을 심판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예수를 믿고 믿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웃에 대하여 물질로 몸으로 헌신한 것에 대해서만 묻는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삶의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있음을 인정하고 노동을 통해서 얻어진 소유물을 하나님께드려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며 의무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몰라도 믿는 사람은 십일조와 헌금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요, 덕목이다. 여기서 십일조와 헌금에대서 의문을 갖는 사람들을 위해서 십일조와 헌금의 역사적인 배경과 성경적인 배경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모세율법 이전의 십일조
십일조에 관한 언급은 이스라엘이나 셈족 이외의 다른 종종교와 문화 안에서도 발견된다.(주:성서백과 대사전 제 7권 pp268, 성서교제간행사) 애급 사람들은 수확의 십분의 이를 바로에게 바쳤다.(창47:24참조) 역사적 자료는 주전 6세기 바벨로니아에서 십일조를 바첬고, 주전 14세기 시리아 팔레스틴에서 십일조를 드린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십일조의 관습은 키르트고, 그리스, 페니기아, 아라비아, 중국,로마,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 살고 있는 종족들에게 계승되었다. 이방 민족에게 십일조는 주로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에 있어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시작되엇다. 성경에서 십일조를 가장 먼저 기록해 놓은 곳은 창세기4:3-4절이다. 여기서 가인과 아벨이 드린 첫것은 십일조로 보았다.(주: 조해수 “헌금계발론” p38, 기독교 문서선교회) 이 첫 십일조는 약6천년전에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에 창14:18-20에 아브라함이 전쟁을 하고 전리품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쳤고, 창28:에 야곱이 벧엘에서 돌을 세워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약했다. 이렇게 모세가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무적으로 심일조를 드리게 한 이전에 십일조에 대한 기록이 있다.

2. 법으로 규정한 십일조
성전에 바친 제물이 아닌 예물로 가장 일반적인 것은 첫 열매, 첫 새끼였다.(출23:16, 34:22 신18:4, 신23:10-14, 민18:12-18) 그리고 처음 깍은 양털도 성전에다 바첫다 (신18:4,창38:12, 삼상25:4-11, 삼하13:23-27참조) 이렇게 첫 열매와 첫 새끼를 바침으로 인해서 성전을 관리하는 비용과 제사장과 직원들의 샐활 보장을 할 수 있었다.

1)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    
민수기18:21-24에 보면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것이라 ...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고했다. 이렇게 기업이 없이 성전 봉사에 책임을 맡은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해 농삼물의 십분의 일을 바쳐서 레위인의 생활비로 지급했다. 그당시 레위인의 총수는 22,300명이였다.

2)제사장을 위한 십일조
민수기18:25-28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가라사대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에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여호와께 드린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 돌리되” 라고 했다. 그당시 모세와 아론의 자손들은 22,000명이였다. (민3:38-39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고 레위인은 받은 십일조에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주라고 했다.

3)축제 혹은 성전을 위한 십일조
신명기12:5-19, 14:20-27에 보면 백성들이 매년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를 드린다음 또 제2의 십일조를 드려서 성전에서 함께 먹으면서 하나님게 감사하는 경비로쓰고, 남은 것은 성전의 갇종 비품을 사는데 사용했다. 즉, 성전 관리비로 사용했다.

4)구제를 위한 십일조
신명기14:28-29, 16:12-13에 “매 3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고 했다. 이렇게 매 3년이 되는 해에는 십일조를 3번드려서 저축해 놓았다가 고아 과부 나그네 기업이 없는 자를 3년동안 구제하고 먹이는 일을 하였다.

3. 신약시대의 십일조와 헌금
신약시대의 십일조는 헌금은 이미 서론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주권과 섭리를 다라서 얻은 소득을 은혜에 감사함으로 믿음과 순종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 십일조헌금은 헌금의 최소 단위이며 헌금의 기본이다. 신약시대는 십일조부터 시작하여 십의 9조 뿐만 아니라 전체를 드리는 자유의지에 의한 헌금이다.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인정하고 구원의 은총을 감사하면서 자발적으로 기쁜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주: www.kpt21.com 홈에서 자료실에 들어가 “성도를 금근심하게 하라”에서 고후 8장 9장 강해설교 참조)

1)마태복음23장 23절에서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이 십일조드리는 것에 대하여 허용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義와 仁과 信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2)사도시대 십일조와 헌금
십일조가 예수 그리스도 이후 약500년 동안 행해졌다
이레내우스는(주후140-202)은 말하기를 “유대인들은 신성한 것으로 그들의 수입의 십일조를 드렸으나,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주님의 사용에 밑겨버렸다. 그들이 더욱 풍성한 가운데 기쁨과 자유로 드린 것은 그들이 더욱더 위대한 소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주: Ibid,p56)

3)로마 케토릭의 십일조 헌금
주후585년에 카토릭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법으로 제정했다. 그후 650년 루인 회의에서 그리고 660년 낭트회의에서 그리고 750년 메츠 회의에서 768-814년 살레망 회의에서 십일조를 제확인했다. 11세게가 끝날 무렵 포루투칼에도 십일조 제도가 확립되었고, 거의 동시에 덴마크 아스란드에도 확립되었으며 13세기 초엽에 스웨덴에서도 십일조제도가 확립되었다. 모든 신도가 신도가 십일조를 소유하는 것은 죄라고 공포했다. 십일조를 반대하는 모든 성도를 트랜드 공의회는 정죄했다.(주: Ibid,p57)

4. 신약시대에 있어서 진정한 헌금정신
고후9: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신약시대의 진정한 헌금은 자유의지에 의한 헌금이다. 이는 십일조도 될 수 있고 십의 9조도 될 수 있다. 고후9;5절에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 말씀에서 자유의지가 대립되는 것 같지만 이 두 말씀은 대립되지 않는다.  헌금은 강제로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의지에 의해서 헌금을 하고, 않하는 것이 헌금하는 사람의 자유에 맡겨져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은 기쁜 마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십일조--9조까지)을 바처야 한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헌금의 기본이며 최소단위이다. 더 나아가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주로 믿는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에수 믿는 사람이 최소한 십일조를 하지 못하면 구원관계에 문제가 있다.
목회자는 십일조와 헌금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성도의 구원사역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바리세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청하고 발씻을 물도 안주고, 감람유(가장 나쁜기름)도 주지 않했지만 구원의 은총에 감격한 여자는 눈물로 발을 씻고 옥합을 깨뜨렸다. 구원의 은총과 물질봉헌과는 비례한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가르칠려고 하지 말고 구원의 감격을 얻도록 구원론을 철저하게 가르처 감사하므로 자유롭게 드릴 수 있도록 해야한다.

1)십일조와 헌금드린 사람을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많이 주신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눅6:38) 이 성경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인 헌금을 유도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데 그 조건이 자기 것을 하나님(다른 사람)에게 주는 조건이다.(마25장 참조)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않고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맞게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흔들어 넘치도록 않겨 주신다” 이 원리는 투자의 원리이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투자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익을 많이 남기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성도가 헌금을 드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 것은 성도의 유일한 특권이다.

2)헌금의 본질은 희생이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의 체험이 없으면 자유로운 헌금을 드릴 수 가 없다. 에수님은 사생애와 공생애를 통해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셨다. 그리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셨다. 제자들도 하나 같이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다가 순교당했다. 이러한 헌신과 희생의 바탕위에 기독교가 세워졌고, 희생과 헌신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본질인것이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요구하시면 항거 할자가 누구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신다. 헌금을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 헌신과 희생의 자세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바울은 집사를 세울때 가추어야 할 덕목을 가르치면서 다 가추어졌다 할지라도 시험해보고 세우라고 했는데 그것은 모든 덕목에도 시험을 하되 헌신과 희생의 각오가 되어있는지 즉, 물질적인 희생을 할 수 있는 지를 시험해보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디전3:10절)

결론으로 십일조는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최소의 기본적인 헌금이요, 헌금의 최소 단위이다. 헌금을 드리되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드리지 말고 기쁨과 감사로 드려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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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복받는 비결 (말 3:10-12) 십일조

2006/10/18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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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좋은군사 | 좋은군사
원문 http://blog.naver.com/jjkkhh2232/50001552695
복받는 비결 (말 3:10-12) print
 


교인들이 선정한 '교회 가기 싫은 7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불신자와 달라야 한다는 부담감
  ② 교회에서의 직분이 계급처럼 느껴져서
  ③ 교회 봉사에 대한 부담감
  ④ 모범적인 믿음의 사람이 없어서
  ⑤ 주일날 잠을 더 자고 싶어서
  ⑥ 꼴 보기 싫은 사람 때문에
  ⑦ 헌금이 부담스러워서

  여러분들은 공감하십니까? 이미 극복하셨습니까? 지금 극복하고 있다고요? 어느 교회에 간들 이런 이유가 없겠습니까? 믿음으로 본인이 잘 극복하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7가지 이유중 하나인 부담스러운 헌금, 즉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부담이나 시험이 아니라 은혜스러운 말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통해 십일조 헌금이 이해되고, 믿어지고, 결단하고, 실천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였는데 부분적이거나 온전치 못한 십일조 생활에서 '온전한 십일조 성도'로 상향되고 상승되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일조 설교로 인하여 한 사람도 시험에 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기쁨과 감사와 감격과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복을 부어 주십니다
  본문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와 헌물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소유를 약탈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드린 십일조와 헌물은 축복과 은혜의 조건일 수 있으나 악의적으로 거스리고 준행치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를 수반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받은 저주는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십일조가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위한 것이란 점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통해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위한 양식을 제공하라는 의미입니다. 실제 느헤미야의 개혁 이전에는 십일조 의무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성전에서 봉사하던 많은 레위인들이 그들의 직분을 버린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해 보라는 요구를 통해 십일조의 의무 이행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한편 '하늘문'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를 상징하는 말이며 '쌓을 곳이 없도록'은 '그 요구가 없어질 때까지'란 뜻으로 완전히 충족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온전한 십일조의 의무 이행이 풍족하고 충만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임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성도가 드리고 복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부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잭 칼슨 목사가 "사명을 잃은 교회는 축복이 원망으로 보일 때가 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왜 이렇게 일이 많으냐고, 왜 이렇게 섬겨야 될 사람이 많고, 무슨 선교가 이렇게 많고, 밤낮 무슨 구제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축복을 모르고 그것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돕고 싶어도 도울 게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임을 깨달았다면 그것은 당연히 나의 감사와 찬송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를 경우에 원망과 불평이 되어 터져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에는 교인이 4명밖에 없습니다. 그 수 이상 교인이 절대로 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 교인들이 새로운 사람들을 쫓아 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 묘지에 남아 있는 묘지수가 4개밖에 없어서 사람들이 더 오면 자기들이 못 들어갈까 봐서랍니다.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우리도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유는 자기 몫의 이익 때문입니다. 자기 눈앞에 있는 것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잘 섬기려면 원망과 불평과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와 섬김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제대로 십일조 신앙생활을 할 때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평생 양심과 신앙의 가책 가운데 제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어느 날 서게 된다면 얼마나 멋쩍고 죄스럽겠습니까? 사람의 것을 떼먹고 도적질해도 부끄러운데 하물며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사기칠 수 있겠습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축복을 체험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황충을 금하십니다
  본문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농작물의 작황이 곧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여부를 가름하는 척도였습니다. 본절은 풍성한 수확에 대한 보장을 언급함으로써 십일조 의무 이행이 그들 소산의 풍성함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상될 것임을 말합니다. 이러한 풍성함은 그들의 십일조와 연관되고 풍족한 십일조는 곧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케 하는 사실까지 확대됩니다. 한편 '황충'은 문자적으로 '먹어 치우는 자'를 가리킵니다. 실제적인 황충 뿐만 아니라 모든 파괴 세력을 상징합니다. 멸하고 떨어지게 하는 각종의 황충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시고 쓸어버리신다는 뜻입니다. 성도들과 생업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보호하시고 물리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벌써 멸하고 떨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을 모든 어려움과 파괴의 황충으로부터 막아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일하고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더라도 황충이 멸하고 떨어뜨리면 헛수고이며 가난해집니다. 천만원을 벌었으나 1억을 쓰게 하시면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나가는 문을 하나님께서 막아 주셔야 합니다. 황충을 잡아 없애시는 것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하면 수입을 부어 주시고 지출을 막아 주셔서 큰 거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편안한 사람, 원만한 사람,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까다로운 사람을 보내주실 때에는, 그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자신이 좀 더 폭넓은 사람, 좀 더 많은 사람을 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일종의 검증 과정에 서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때로는 비열하고, 악의적이고, 부정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방식으로 훈련시킨 대표적인 인물이 야곱입니다. 야곱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자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쓰신 카드가 바로 야곱보다 훨씬 더 비열한 라반이었습니다. 라반은 야곱보다 훨씬 더 야곱다운 사람이요, 야곱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야비하고, 매정하고, 더럽고, 치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자 드디어 야곱이 변화된 것입니다. 라반은 돈을 아끼려고 딸을 팔아먹는 지독한 사기꾼이었습니다. 라헬을 아내로 주겠다고 하고 야곱을 7년이나 부려먹더니 라헬이 아닌 레아를 주고, 다시 라헬을 미끼로 야곱의 노동력을 7년이나 짜낼 정도로 사기의 대가입니다.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한 사람이 라반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 야곱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험난한 사람을 만나고 힘든 사람을 만날 때에 힘들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려고 보내시는 것이 아니요, 변화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결국은 내게 유익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어려움을 통과하면서 더 강한 사람이 되는 복을 받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기쁨으로 드림으로 라반과 같은 인간 황충을 막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사고와 각종 지출의 황충을 막아 주셔서 여러분의 산업과 생업이 잘 되고 수입이 많아짐으로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부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열방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십니다
  본문 12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름다와지다'란 말은 하나님께서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이름인 '헵시바'에 근거한 것으로 '소원한 대로 되다'와 '기쁨이 되다'란 뜻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릴 때 소원을 응답하시고 기쁨의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근거해 그들의 땅이 소원했던 대로 풍성한 소산을 냄으로써 그들에게 기쁨이 될 것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열방이 다 알도록 모든 것이 아름다와지도록 하시고 기쁨의 삶을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을 섬김으로 아름다운 복을 받은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도록 여러분을 높이시고 별처럼 빛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한 불행한 영국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항상 중환자실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심한 기침을 해댔습니다. 소년은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거부가 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미국행 선박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미국으로 가던 도중 선장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저를 미국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세계적인 부호가 되어 조국에 보답하겠습니다."
  선장은 그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선장이 늙어 병들자 소년은 배를 팔아 치약회사를 차렸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콜게이트. 콜게이트사의 설립자입니다. 콜게이트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치약회사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경영철학은 '철저한 십일조'였습니다.
  "나는 오른쪽 주머니에는 십일조, 왼쪽 주머니에는 이익금을 담는다."
  콜게이트사에는 현재 십일조를 관리해 주는 직원만 30명이나 됩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최고의 인생 자산입니다.

  세계적인 대부호 록펠러가 처음 십일조를 드린 것은 여섯 살 때였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록펠러는 어머니로부터 1주일에 20센트씩 용돈을 받았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록펠러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20센트 중 십일조인 2센트는 하나님의 몫이란다. 오늘 교회에 가서 제일 먼저 2센트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록펠러는 그 날부터 98세로 소천할 때까지 십일조만큼은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그는 어느 신문기자에게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굉장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이름의 유산이었습니다. 나는 사업에 대한 모든 비전을 기도 중에 얻었고 십일조로 보답했습니다."
  부모가 남긴 재물은 형제간의 우애를 끊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고귀한 유산입니다.

  우리 번동제일교회 성도를 모두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이 시대의 콜게이트와 록펠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업과 후손들이 번창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복받은 것을 모든 열방들이 다 알고 부러워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시고도 남습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십일조 설교로 인해서 시험받지 않으셨습니까? 오히려 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일조 축복은 하나님의 강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이제부터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가정과 생업에 복을 부어 주시고 황충을 금하시고 열방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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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민수기18장21절-32절 십일조

2006/10/18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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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imple Life의 블로그 | 심플하게
원문 http://blog.naver.com/younsilh/10005132338

민수기18장21절-32절

 

본문은 제사장을 도와 성막 업무를 담당하는 레위인 들에게 주어지는 십일조에 관한 언급입니다. 즉 레위인 들은 백성들이 여호와께 드린 십일조를 분깃으로 받아 생활하였으며 받은 십일조 중에서 십일조를 다시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26-28절).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레위인으로 하여금 십일조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하심으로,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막을 위해 선택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손길만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십일조 제도는 비단 레위인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도 자신의 삶의 근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백성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과 순종입니다. 성도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사랑의 표시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반드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소득이 있는 사람이면 액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그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려야합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중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성물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것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어떤 의무사항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8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성도들 가운데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십일조를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찾아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복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의 표현입니다.
모든 천지 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주관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그 주신 것 중 십분의 일만을 하나님의 것으로 정하시고 이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십일조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사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맨 처음 십일조를 드릴 때 망설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이 가진 자는 액수가 많기 때문에, 적게 가진 자는 십일조를 떼지 않아도 모자라는 형편이므로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출석 잘하는 사람들도 십일조 설교를 듣고 난 후에는 시험에 들거나 신앙을 저버리고 교회 다니기를 그만 두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돈 내라고 해서 부담스러워 못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염려를 버려도 되는 분명한 이유는 십일조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넘치는 복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십일조를 드리는 바람직한 자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십일조는 우리의 소득 중에서 맨 먼저 정성스럽게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2. 십일조는 감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3. 십일조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4. 십일조는 등록하고 다니는 교회에 드려야 합니다.  

   
<기도제목>
1.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고 늘 감사하는 백성 되게 하소서.
2. 물질 때문에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 물질을 드릴 때마다 물질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