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교 정책의 필요성과 네비우스의 방한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선교를 위한 총체적인 선교전략(the overall strategy)으로 1890년 채택한 것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Methods)이다. 초기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브라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 뛰어난 잠재력은 있었지만 모두가 20대의 젊은이들로 선교 경험이 없었다. 게일이 25세, 언더우드 가 26세, 아펜젤러가 27세, 알렌 의사가 27세 그리고 그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던 스크랜턴 선교사도 29세에 불과했다. 그래서 패기와 복음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지만 전혀 선교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처녀지와 같은 이 한반도에서 선교 방향을 정립할 수 있도록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었다. 이때에 한국에 와서 젊은 선교사들에게 선교방법에 대한 도전을 준 사람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네비우스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1890년 6월 중국 산동반도에서 1854년 이래 30년 이상 선교 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 네비우스(John L. Nevius) 목사 부처를 초빙하여 2주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한국 선교사들이 앞으로 명심하고 실천할 선교방법의 원칙을 제공받았다. 주로 재한(在韓) 북장로회 선교사들 십여 명은 그의 강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가 쓴 선교 정책에 관한 저술들을 탐독하며 그의 선교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언더우드와 그의 선교회는“비록 우리 사업이 좀 더 느리게 시작되고, 여러 해 동안 눈에 보이는 열매를 크게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결국에는 다른 방법보다 이 계획을 조심스럽게 따르면 더 확실하게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결정”했다. 그 시점부터 네비우스 선교 방법은 북장로교뿐만 아니라 전체 장로교 선교회의 중요한 선교 정책이 되었다.
이들은 한국선교 정책의 통일과 후에 도착하는 선교사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1년 후인 1891년에, 네비우스의 원리를 선교 현장에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일련의‘규범과 세칙’(Rules and By-laws)을 채택했다. 이 원리를 채택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울에 있는 미션스쿨 학생들의 부모들이 학비 일부를 부담하도록 하는 것과 방학 동안에는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정책을 변화시킨 일이었다. 한국에 새로 파송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은 누구나 도착한 후“네비우스 선교정책에 관한 책을 한 부 받아 첫 해 말에는 언어에 대한 시험을 합격해야 함과 아울러 이 원리를 완전히 터득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 시험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습득은 적어도 한국에 입국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고, 따라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선교 정책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2)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내용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여 전도한다. ②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게 한다. ③ 자전: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모든 개인과 집단(소수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휘묻이 법에 의해 사역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한다. ④ 자치:모든 그룹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교구들은 나중에 목사가 될 유급 조사들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집회 시에는 교인들을 훈련시켜 훗날 구역, 지방, 전국의 지도자가 되게 한다. ⑤ 자립: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한다. 각 그룹은 창립되자마자 순회 조사의 봉급을 지불하기 시작한다. 학교조차도 부분적인 보조금을 받도록 한다. 이것은 설립될 당시에만 필요하다. 개 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⑥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 공부를 한다. 그리고 모든 영수와 조사는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 ⑦ 성경적 권징을 통해 엄격한 징계를 실시한다. ⑧ 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한다. 아니면 최소한 영역이라도 분리한다. ⑨ 법정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⑩ 민중의 경제 문제에서 가능한 경우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3)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
지금까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은 자립(Self-Support), 자 치 (Self-Government), 자 전 (Self-Propagation)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시카고 대학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한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곽안련 (Allen D. Clark) 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이 성경공부에 있었고, 이것이 자립, 자치, 자전의 실현을 가져다 주었다고 지적했다. 성경의 구체적인 연구와 삶 속에서의 실천이 결국 자립, 자치, 자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비 칸 선교사 역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근간이 성경연구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해서 하비는“네비우스 방법의 중심은 자립이 아니며 자치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모든 기독교 사역의 기초로 강조한 것과 성경공부 모임을 통한 훈련에 있다. 이것에 의해 성경은 연구되고 신자들의 마음에 적용되었다.”고 하였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성경 중심의 선교 정책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그 중심 되는 원칙은 성경공부를 장려하여 모든 교인으로 하여금 성경지식을 얻어 어떠한 사람을 상대해서든지 자신 있게 전도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선교사들은 각 지방의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했고, “배출된 지도자들은 각기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성경을 가르쳤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신자나 불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먼저 자신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권위 있는 성경의 토대 위에 구축된 윤곽이 뚜렷한 신뢰할 수 있는 진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곽안련 선교사가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경공부 제도가 없었다면 네비우스 선교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강조하는 성경공부는 단순한 성경공부가 아니라 오늘날 소위 말하는 제자훈련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 여섯 번째 항이 말해 주듯이 모든 신자들은 그룹의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실시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공부가 아니라 일종의 신앙양육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조사들과 영수들은 선교사들로부터 사경회나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그들이 현장에 가서 다시 그룹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던 것이다. 리더가 먼저 훈련을 받고 훈련받은 대로 현장에 가서 조원들을 모아 놓고 훈련시키는 오늘날의 제자훈련 공부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성경공부 방식이 모든 교회 현장에서 실천에 옮겨져 초기 한국교회는 설교보다 말씀 공부를 더 중시했다.
이 네비우스 방법은 단순히 네비우스의 선교 경험에서 우러나온 선교 정책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선교 전략을 세운 것이었다. 네비우스는 고린도전서 7장 20절의「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선교이론을 발전시켰고 적용하였다. 이는 성경적인 방법이었고, 초대교회의 발자취를 따라 행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교회가 세워진 후,「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고 했다. 그리고「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고 했다.
사도들은‘백성을 가르치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행 4:2)고 전했으며, 그「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행 4:4)고 하였다.
사도들은「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행 6:4)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에 집사들을 세우게 되었고, 업무를 분담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져서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는 환난을 당했다. 이때 핍박을 피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여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헬라인(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였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보냈고, 바나바는 사울 (바울)을 데리고 와서 일 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큰 무리들을 가르쳤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으며, 저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고 저들을 후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처음 교회들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고, 그 가르침을 따라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으며,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고, 집사를 세워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워 나갔으며, 지도자(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여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립, 자치, 자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 원리는 선교지의 신생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독립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적인 방법을 통해 제시해 주었으며, 이 원리를 채택하여 한국교회에 적용한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및 다른 장로교 선교부는 이 원리를 택하지 않은 다른 선교부보다 더 많은 성장을 가져 왔다.
(4)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사경회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한국교회에 가져다 준 큰 결실은 사경회 운동이었다. 1909년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은 한국선교 25년을 회고하면서“그(네비우스)로부터 우리 선교사역의 두 개의 위대한 원리-사경회(the Bible training class system)와 자립-의 사상적 씨가 나왔다.”며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사경회와의 관련성을 언급했다.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솔직히 말해, 모 든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위대한 성장의 가장 큰 비밀은 사경회 제도였다고 믿고 있었다.”사경회는 한국교회에 요구되는 교회 지도자들을 육성 발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경회를 통해 영수와 조사와 권사를 발굴할 수 있었다.
사경회의 시작
사경회의 기원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채택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8년 새문안교회 주일예배에 50명이 참석할 정도로 성장하고 한국의 전역에서 복음이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언더우드는 한 해가 지나기 전 몇몇 한국인 사역자들을 집중적으로 양육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1889년 10월호‘미셔너리 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의하면“막 한 해(1888년)가 끝나기 직전에 8명의 한국인 사역자들이 자신들의 고향과 사역으로 돌아가기 전 교육을 받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도록 기도하기 위해 서울에 모여 함께 한 달을 보냈다.”고 하였다. 언더우드는 자신의 집에서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한국인 사역자들을 교육시켰다. 이것이 후대 사경회의 모체가 되었다.
하지만 사경회가 하나의 중요 선교 정책으로 정착한 것은 1890년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채택하면서부터이다. 1890년 언더우드는 서울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여 한국인 7명을 한 달 동안 훈련시켰다.“ 언더우드의 집 남서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열린 첫 사경회에 참석한 이들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서울 출신이 세 명이었고, 북부 출신과 황해도 출신이 각각 두 사람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사경회 참석자가 전 해보다 배 이상이 늘어난 18명이었다. 그 중에서 경성의 서상윤, 홍정후, 의주의 한석진, 송석준, 구성의 김권근, 양순백, 문화의 우종서, 해주의 최명오, 장연의 서경조, 비성의 김병갑 등 한국교회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경회의 정착
초기에는 전국에서 선택된 이들을 대상으로 중앙의 한 지역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였으나 1894년 이후부터는 여러 지역에서 사경회를 열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들을 훈련하는 기간도 대폭 조정되어 훈련생들을 1, 2개월 동안 신학 교육을 시키는 대신 2주 동안 전교인을 대상으로 훈련시키는 방식으로 수정되었다. 그때부터 전국 주요도시에서 사경회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그 후 사경회가 보편화되면서 도(都) 사경회의 경우 500명에서 1,000명이 참석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평양, 선천 그리고 재령 등 교세가 놀랍게 확장되고 있던 이들 주요 서북지역에서는 1,100명, 1,300명 그리고 1,800명이 참석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지나고 백만인구령운동이 한창 일고 있던 1909년에는 이들 세 개 선교부에서만 600개 이상의 사경회가 열렸으며, 총 41,000명이 참석했다. 그 해에 전국에 흩어진 8개 선교지부 중 여섯 개 선교지부에서 열린 사경회에 32,000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숫자는 여섯 개 선교부의 전체 교인의 39%에 해당한다. 사경회 참석자들이 쓴 1909년 한 해 동안의 비용만도 2만 5천 달러가 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인들의 성경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1893년부터 1901년까지는 전 교인이 사경회에 참석하다가 1901년 정규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좀 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교회 지도자를 위한 상급반과 일반 교인들을 위한 하급반으로 분리되어 운영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경회는 크게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사경회와 교회 지도자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사경회로 구분되어 실시되었다. 초창기 사경회는 대개 선교사들이 순회하면서 열흘 동안이나 두 주일 동안씩 지도하고 가르쳤다.
일 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상급반 사경회는 대개 모이기 편리한 큰 도시에서 개최되었고, 사경회를 마친 후에는 각기 교회로 돌아가서는‘교인들을 위한 사경회를 열거나 성경반을 조직하여 배운 것을 가르치게 했다.’지도자 육성을 목적으로 한 사경회는 각 지방의 형편에 따라 보통 10일간씩 개최되어 올바른 성경지식을 심어 주었고, 참석자들은 교회로 돌아가서 자신들이 배운 것을 가르치고 그대로 설교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경회는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평신도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개 교회에서는 봄이나 겨울 농한기를 이용해 사경회가 열렸는데 주로 개 교회 사경회는 한국인 목회자들이 담당했다. 이와 함께 각 지방에는 정월이나 2월 혹은 7월 농한기를 이용해 15일에서 1개월 동안 모든 교인들을 대상으로 단기간 성경학교가 개설되어 평신도 지도자들을 육성했다.
연중 2주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사경회는 당시 90퍼센트가 농민들이었던 직업 분포 상으로 볼 때도 매우 적절한 방식이었다. 추수를 하고 난 후 겨울철은 농한기라 농부들에게는 시간을 내기가 용이했고, 봄철 농번기가 끝나고 전답에서 제초 작업을 한 직후인 7월에도 두 주 동안은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이 기간을 이용하여 사경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특히 신정이나 구정이 시작되는 2주간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연휴 기간이었기 때문에 사경회 기간으로 가장 적합했다. 평양대부흥운동 수년 전부터 한국교회는 신년 초 두 주간을 사경회 기간으로 지켜 오기 시작해 오랫동안 장·감을 초월해 한국교회의 중요한 행사로 이어져 왔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의 겨울 남자 사경회가 1907년 1월 2일부터 14일까지 개최되었던 것도 그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사경회 경비의 자립
1901년부터는 사경회에 참석하는 이들이 자비로 경비를 부담하도록 하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책과 소책자를 무료로 나누어주는 대신 소정의 금액을 받고 판매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것은 학교 교육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학비의 일부는 학생이나 부모가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 후 입학을 허용했다. 1899년 설립된 평양숭실중학교의 경우 어느 정도 선교회의 지원이 있었지만, 모든 학생들을 자립시킨다 는 원칙하에‘각 학생은 매일 한나절 동안 노무과에서 일하고 그 대가로 양식을’제공받았고, 모든 학생들은 방과 후‘길 닦기, 새끼 꼬기와 신발 만들기, 문지기 일, 책 제본하기, 인쇄소에서 일하기 등’과 같은 노무를 통해 자신들의 학비와 식비는 물론 ‘의복과 서적 등도 학생이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사경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왕복 여비는 물론 사경회 기간 동안 체재비 일체를 본인들이 감당해야 했다. 1910년 곽안련 선교사가 인도한 서울의 한 사경회에는 14명이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신들이 왕복 여행비용과 체재비용을 부담하면서 강원도 동해안에서 200마일을 걸어 왔고, 세 사람은 130마일을, 그리고 80명이 평균 20마일을 걸어서 왔다.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며 매년 도처에서 이러한 일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사경회 프로그램
보통 2주 혹은 1주간 계속되는 사경회 프로그램은 오전, 오후 그리고 저녁 세 부분으로 나뉘어 오전에는 성경공부를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오후에는 전도를 나가 사람들을 저녁 전도 집회에 초청하고, 저녁에는 전도 대상자들은 물론 원근 각처에서 모인 사경회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 집회가 열렸다. 이것은 일종의 부흥회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기성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새롭게 다질 수 있는 기회였고, 초신자들에게는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저녁 집회는 보통 300명, 500명, 혹은 1,000명 또는 그 이상 모인 가운데 지명도있는 부흥사를 모시고 열렸기 때문에 기성 신자이든 교회에 처음 참석한 이들이든 일단 참석만 하면 영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더구나 참석자들 모두가 말씀을 사모하여 원근 각처에서 모인 이들이었기 때문에 사경회 저녁 집회는 개 교회에서는 보기 힘든 영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러한 부흥집회와 그 결과들은 교회와 교인들의 전 삶에 계속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경회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훈련의 수단으로 뿌리 내렸다. 때문에 사경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배우고 그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배려되었다.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중에서 우러난 것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권위가 그들의 삶을 지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조사나 선교사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일찍부터 그리스도인의‘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되었다.
사경회를 통한 생활 교육
사경회는 체계적인 말씀 교육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의 구체적인 말씀의 실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한국교회를 한단계 도약시키는 역할을 했다. 사경회는 단순히 성경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교회 치리법, 주일학교 운영법, 교수법, 불교와 다른 종교, 위생 문제, 안식교와 같은 타 교단, 아동 교육, 건강법 그리고 기독교 문화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이것은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 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줘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경회는 단순히 말씀을 공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에 실천할 수 있도록 주일학교, 금연, 금주, 청결, 결혼관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종교적 소양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바른 신앙생활의 출발은 주일성수에서 시작된다는 확신 때문에 처음부터 주일성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때문에 학습과 세례문답의 자격 조건 가운데 주일성수는 가장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만약 교회 임직을 맡은 자나 입교인이 특별한 이유없이 주일을 범했을 때는 권징조례에 의해 엄격히 권징에 처해졌다. 마펫은 오늘날의 학습교인에 해당하는 원입교인과 세례교인으로 교인을 대별하고 원입교인은 3개월의 훈련과정을 거치도록 하였고, 우상숭배, 조상제사금지, 성수주일, 부모효경, 축첩금지, 여자에 대한 처우개선, 음주, 거짓말, 도둑질, 잡기, 간음 등 악습관을 버릴 것 등 신자의 규범을 준수하는 이들에 한해 문답을 거쳐 세례를 베풀었다. 이외에도 술 취하거나 노름, 포도주와 아편을 만들거나 파는 행위, 도박을 하거나 도박 집을 개설하는 것도 금했다.
브라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엄격한 주일성수, 교리주의 신앙, 반자유주의 신앙관을 한국교회에 뿌리내려 주었다. 객관적인 말씀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태동시키게 되었고, 따라서 엄격히 주일을 성수하게 만들며, 교리주의적인 보수신앙을 심어 주어 말씀을 이질화시키는 어떠한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게 만들어 주었다.
(5)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주일학교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주일학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고, 주일학교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가장 큰 실천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채택되던 1890년에 시작된 주일학교 사업은 곧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보완하는 질적 성장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아 갔고, 그 수도 놀랍게 신장되었다. 1897년 평양에만 5개의 주일학교가 운영되었고, 교재를 인쇄하여 사용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시작된 성경 중심의 주일학교는 장로교뿐만 아니라 감리교 안에도 견고하게 자리 잡아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복음에 기초한 교회로 출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주었다.
감리교는 선교 초부터 주일학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1888년 스크랜톤 여사에 의해 주일학교가 처음 시작되었고, 1892년 10월 노블 선교사의 아내 노블 여사에 의해 정동교회 청년주일학교가 시작되었으며, 유년주일학교는 노블 선교사가 1893년 9월 아현교회로 옮겨 가면서 시작되었다. 1893년 감리교는 주일학교 연합회를 조직하였는데,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 趙元時)가 위원장을 맡으면서 주일학교가 상당히 발전했다. 1893년에는 5개의 주일학교가 있었는데, 1930년에는 359개로 급성장했으며, 주일학교 학생 수도 1893년 133명에서 1930년 13,303명으로 급증했다.
감리교 중 가장 주일학교가 잘된 곳은 평양 남산현교회였다. 1896년 부임한 노블 선교사 부부의 노력에 힘입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등급별 유년주일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공과는 미국교회에서 사용한 만국통일공과를 번역 등사해서 사용하고 매주 금요일 저녁에 교사들을 모아 놓고 예습을 시켜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1903년 1백 75명이 모이는 주일학교가 얼마 후에는 평균 500명이 모이는 주일학교로 발전했다. 1911년 100명으로 처음 조직된 영아부도 이듬해엔 500명이 모이는 영아부로 성장했다. 1910년대에 이르러 남산현교회 주일학교는 영아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청년부, 장년부로 세분화되어 운영했다.
선교회가 이렇게 주일학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어느 교회나 주일학교를 잘 육성하면 아이들이 심히 많아 한 학교로 발전할 수 있고, 또 이들이 장차 중요한 교회 일꾼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주일학교는 곧‘장래 교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감리교회는 이와 같은 안목을 갖고 주일학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1888년 주일학교가 조직된 후에는 바로 배재학당 안에 설치된 인쇄소를 통해 여러 종의 주일학교 교재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알렌 클락(Allen D. Clark)이 지적한 대로‘1905년부터 1911년까지 주일학교가 급속히 성장’했는데, 이것은 부흥운동이 발흥하면서 장·감이 연합으로 주일학교 사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조직된 후 그 첫 사업으로 주일학교 공과위원회를 조직했다. 1907년 장·감연합공회는 세계 주일학교 연합회에 한국 주일학교 발전을 위해 사역할 사람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전국 주일학교 공과를 통일하고, 장·감 선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공과를 출판할 기금 확보에 들어가는 한편 전국 주일학교 사업을 총괄할 총무를 세웠다. 1910년에 처음으로 세계 통일공과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1911년에는 주일학교 사업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장·감연합공회 산하에 13인으로 구성된 종교교육위원회를 설치했다. 1913년에는 세계 주일학교 대표자 한 명이 스위스 취리히(Zurich)에서 열린 세계 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 한국에 들러 한국의 주일학교 현장을 시찰하였고, 이때 한국주일학교를 위해 기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 해 4월 19일에는 서울 경복궁에서 세계 주일학교 대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에서 14,700명이 모여 처음으로 주일학교 대회를 열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주일학교 수가 급증했고, 주일학교는 곧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블레어 선교사의 노력에 힘입어 1920년 한 해에만 주일학교는 1만 개에서 1만 4천 개로 증가했다. 그 해 일본에서 열린 세계 주일학교 대회는 한국의 주일학교 사업의 발전을 위해 향후 3년 동안 세계 주일학교 지도자를 파견하여 해마다 6개월 동안 전국의 주일학교를 방문 지도하고 전국 각처에서 주일학교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1921년 제1회 전국 주일학교 대회가 열렸고, 1925년 제2회, 그리고 1930년 제3회 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이와 같은 놀라운 주일학교의 성장 이면에는 블레어와 1920년부터 주일학교 총무로 일해 온 홀드크로프트(J. H. Holdcroft, 許大殿) 그리고 부총무로 일해 온 정인과(鄭仁果)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주일학교 교육이 교회의 성장에만 기여한 것은 아니었다. 주일학교 교육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그들의 의식과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복음이 개인의 의식변화와 영적 각성을 촉발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 줌으로써 민족과 사회 앞에서 부끄럼이 없는 일원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복음이 문화 변혁으로 이어지고, 애국, 애족으로 이어졌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6)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영향 및 평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한국교회를 주목받는 선교지로 올려놓는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에서 선교를 개시한 지 불과 25년 만에 세계가 주목할 만큼 놀라운 결실을 맺었던 것은 성경 중심의 선교 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매년 세례를 받은 교인의 수도 1890년 약 40명에서 1900년에는 1,986명, 1910년에는 10,082명으로 급증했다. 그 결과 1886년에 9명이었던 세례교인의 숫자가 1900년에는 7,500명, 1910년에는 119,273명, 1920년에는 144,062명, 1930년에는 194,678명 그리고 1936년에는 341,700명으로 급증했다. 1884년에는 단 한 명에 불과하던 장로교 선교사가 1910년에는 206명이라는 엄청난 숫자로 증가했고, 1920년에는 269명으로 그리고 1927년에는 323명으로 급증했다. 1901년 199개에 불과했던 교회의 수는 1910년에 1,157개, 1920년에 1,738개, 1930년에 2,335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분명 하나로 획일화 시킬 수는 없지만 수많은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 한국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한 가장 근본적인 요인을 성경중심의 선교 정책에서 찾고 있다.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가 지적한 것처럼 북부지역의 놀라운 교회성장, 장·감이 거의 동시에 북부지역 선교를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50년이 지난 1930년대에는 이 지역 장로교 교세가 감리교에 비해 약 6배나 높았던 것도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말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촉진시킨 다른 부차적인 요인들이 없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리차드 베어드는‘네비우스 선교 정책’외에 다른 부차적인 요인으로 서북지역의 특별한 사회 경제적인 상태, 초기 서상륜, 서경조 형제의 활발한 리더십 그리고 이 지역에의 장로교 선교사들의 대거 유입을 들었는데, 이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성장 요인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은혜였고,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 한국의 국내·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사상적 환경을 조성하시고 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확장될 수 있도록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셨으며, 그 중심에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있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선교 현장에 접목시켰던 언더우드, 마포삼열, 아담스, 리, 위트모어, 헌트, 스왈른, 블레어 등 1세대 선교사들 모두가 한국선교의 놀라운 결심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깊은 연계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하나같이 공감하고 있었다.
곽안련 선교사는 그의 시카고대학 논문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오늘날의 한국선교의 기적은 그 배후에 의심할 바 없이 전통적인 종교들, 한국인의 유순성, 리더십에 잘 따르는 한국인의 국민성, 평안함에 대한 한국인의 갈구, 국왕의 호의, 여성의 지위향상, 한국인의 애국심, 참되고 신비한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종교심성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지만, 가장 큰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성경중심의 선교 정책을 통해 처음부터 한국교회를 성경중심의 교회로 구축하면서도 단순히 성경공부로 끝나지 않고 소위 사경회를 통해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모임, 곧 부흥 사경회로 연결되어 한국교회에 부흥운동을 촉진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복음을 배우고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고 그리고 그것을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도록 훈련시킴으로써 한국교회의 질적 성장을 가져다 주었다.
이와 같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감리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감리교는 속회제도, 전도부인, 순회 사경반, 신학회 등을 도입하여 실천에 옮겼는데, 이들 제도의 근간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정신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근간을 이룬 사경회가 감리교 안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렸다. 감리교는 감리교 본연의 속회제도를 도입하여 도시의 교인들을 몇 개의 속회로 나누어 각기 지도자를 하나씩 정하여 속회를 인도하게 했으며, 새신자들을 관리하도록 만들었다. 그와 함께 비록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지방 전도사, 권사, 전도부인을 임명하여 교역자가 해야 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부여했다.
감리교는 장로교 사경회 제도와 유사한 순회 사경반을 조직하여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방 교회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사경반을 조직하여 목사가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이들이 교회로 돌아가 교인들을 가르치도록 하는 일종의 지도자 사경회였다. 지방 교회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과정을 가르치고 그것을 졸업하고 장래 교역자가 되기를 원하면 신학반으로 보내 완전한 감리교 교역자로 교육시켰다.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사경반도 운영했다. 지방 교회는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모이기 편리한 중심 도시에서 1주에서 2주 동안 사경회를 개최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사경회 때에 성경 가운데 한 권을 택하여 가르치거나 적당한 종교서적, 교회사 개관, 성경인물 전기, 감리교회의 규례, 때로는 음악이나 위생도 가르쳤다. 장로교의 사경회 제도를 그대로 본 딴 것으로 이 제도는 곧 감리교의 중요한 연중행사로 정착되었다.
신학 교육, 사경회 제도, 주일학교, 전도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중심 원리였고, 이것은 적어도 장로교 내에서는 더욱 철저하게 지켜졌다.
한국교회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입각하여 처음부터 사경회와 다른 신학 훈련의 제도를 통해 평신도 지도자들을 육성하여 이들을 사역에 동참시켰다. 성경 중심의 평신도 지도자 육성은 독립정신을 앙양하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자립과 자전과 자치를 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제공해 주었으며,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를 육성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형성해 주었다. 또한 한국의 개신교는 한국인에게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쳐 복음을 통한 문화 변혁의 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이능화는‘조선기독교 및 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에서“한국 개신교는 재래의 악습관을 개변시켰고 민족정신을 개조시켰는데 그 주요한 것을 예거하면 음사(淫祀)의 폐기, 계급의 파제(破除), 여성의 지위향상, 근로정신, 혼상례(婚喪禮)의 종간(從簡), 민주주의 사상의 도입 등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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