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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설교

맑은샘77 2013. 12. 28. 19:50

성탄설교

       

                 

1.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

성경:마태복음 1:12~21

 

이 계보에서 대단히 놀라운 것은 다섯 여자의 이름입니다. 다말, 라합, , 밧세바, 마리아인 여자의 이름이 족보에 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의 법률상 족보에 쓰여질 권리가 없었습니다. 여자는 하나의 인격으로써가 아니라 물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자는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그 주인의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의 이름은 족보에 오르지 못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다섯 여인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시아버지를 통해 쌍둥이를 얻었습니다. 23:3에 보면 암몬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암몬과 모압 족속은 롯이 자기 두 딸과 관계해서 얻은 부정한 족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요, 룻은 모압 여자입니다. 밧세바는 솔로몬의 어머니로서, 다윗 왕은 이 여인을 얻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에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복음에는 모든 장벽들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여리고 여인 라합과 모압 여인 룻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위대한 진리는 기독교가 혈통과 국경을 초월하는 종교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남자와 여자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족보에 남자 이름만 기록하는 것이 원칙인데 여자의 이름이 기록됨은 하나님 앞에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같이 소중하고, 그의 목적을 위해서는 다같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성도와 죄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당신의 목적을 위해 힘쓰고, 당신이 계획하시는 일에 합당케 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9:13)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8-19절 말씀에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고 끊고자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법으로 정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면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 천사는 요셉을 향하여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였으니 네 아내 마리아를 데려오기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의 결혼 풍습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결혼은 세 가지 절차가 있습니다.

(1) 약 혼

약혼은 흔히 나이가 어릴 때 했습니다. 약혼은 양친에 의해서거나 혹은 직업적인 중매인에 의해서 성립되었습니다. 약혼은 당사자들이 맞선 보는 일 없이 흔히 이루어졌습니다. 결혼은 너무나도 진지한 것이 되어서 인간의 애정이나 마음에 따를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2) 정 혼

남녀가 성숙하여 약혼한 사람들의 사이가 원만치 않으면 파기하고, 원만하면 계속 약혼자로서 인정하되 정혼을 하는 것입니다. 정혼하면 결혼식을 올리지 알아도 부부와 같이 서로 남편과 아내로 불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혼이 아니고서는 파기할 수 없습니다. 정혼 기간은 1년으로써 이 기간 안에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처녀 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서로 부부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사이도 바로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3) 결 혼

결혼은 정혼 기간이 끝날 때 성립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해야만 비로소 부부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결혼을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들을 잉태했고 이를 안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냥 끊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유대의 이름으로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성경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은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요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에는 일곱 천사가 있는데 이 일곱 천사의 이름은 우리엘, 자라엘, 라구엘. 미가엘, 사라지엘, 가브리엘, 르미엘입니다. 미가엘은 천사장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는 천사장이요. 가브리엘은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메시야 탄생과 성령으로 잉태될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신경을 통한 신앙 고백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성자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 때 이같이 초자연적인 최대의 기적으로 오신 것입니다. 요셉은 다윗 왕의 후예이고, 마리아는 다윗의 사촌인 제사장 나단의 후예입니다. 즉 마태복음은 다윗의 후손 요셉의 족보를 기록하였고, 누가복음은 다윗의 사촌 나단 제사장의 족보를 기록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을 알고 조용히 약혼을 파기하려 하였습니다. 그 자체가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간음한 자에 대해서는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이스라엘의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약혼자 마리아가 잉태된 것을 알고 밝히지 않으려 하고 조용히 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의 잉태는 사람의 행위가 아니요, 성령의 역사임을 계시할 때 요셉은 두말없이 순종하였고,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까지 동침치 아니하고 산모 마리아를 잘 지키어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성육신의 역사에 참여하였고,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애굽으로 피난갔고 예수가 성자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때까지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요셉을 가리켜서 의인이라 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를 향하여서 은혜 받은 자라고 누가복음 1:28-33에서 말씀하였고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여자를 천대하던 세계 역사는 바뀌고 남녀평등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탄생이 자기 몸에서 이루어지는 임마누엘의 역사(8:8, 7:141100년 전에 예언한 말씀) 가 자기 몸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들을 때 기쁨보다는 놀라서 어찌할꼬 했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여 놀라지 말라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1:34-38에서 마리아가 가로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가브리엘이 가로되 '하나님께서 하시느니라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1:38절에서 마리아는 "나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의 탄생이 두렵기도 하였고, 놀랍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히 주 앞에 순종함으로 마음을 정리하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잘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2.임마누엘

성경:마태복음 1:18~25

 

세계 모든 사람들은 성탄절을 성대히 축하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어떤 날입니까? 예수의 탄생, 이 사건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는 어떤 큰 위인이 이 세상에 출생했다고 기뻐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성자가 탄생하였다고 감격하는 날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어 인간 역사 속에 인간을 찾아오셨다고 하는 데서 경이와 감사와 감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22절 말씀은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약에 있는 예언의 성취로써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서는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많이 기록했습니다. 구약에 상징적으로 기록된 말씀도 있고, 간접으로 기록된 말씀도 있으나 직접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자세히 기록된 말씀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 시간과 장소까지 또 그의 생애와 그 마지막 십자가의 고난까지 또 재림의 주님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 예언이 456회나 기록되어 있고, 본문 21절 말씀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심이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 그대로 만민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9:13)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뚜렷한 목적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X-mas 사건은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어 죄인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구원시키기 위해 오셨던 날입니다. X-mas 사건은 지극히 미천한 나에게 하나님 사랑의 구원이 임하는 것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불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목사된 사촌 목사가 말하기를 "나는 죄를 속하기 위하여 참선을 하는데 정좌를 하고 손끝에 촛불을 켜가지고 그 촛불이 다 타고 손끝의 살이 타기까지 하기를 수 없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기 죄를 속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좌를 하고 부동 자세로 참선을 하는 동안 둔부의 살이 썩기까지 하고 왼쪽 눈이 실명을 하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죄가 없어질 리 만무했습니다. 인간의 어떤 수단도, 어떤 방법도 죄를 속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완전하신 방법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실로 환희에 넘치는 기쁨이 사실이요, 크게 기뻐할 아름다운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으로 오셨고 구체적으로 인간의 죄를 지시고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속죄물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주시는 무서운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마지 못해 온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그리스도께서 마지 못해서 지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견딜래야 견딜 수 없는 불타는 사랑을 가지시고 그 무서운 고난을 친히 자취하시어 받으신 것입니다.

본문 23절 말씀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X-mas 는 곧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를 봄으로 하나님을 친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기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느니라" (14:9)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이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마 하신 말씀은 참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또 마 28:20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X-mas를 맞이할 때마다 저 베들레헴의 한 초라한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생각하면서 영광과 권세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의 겸손을 먼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임마누엘로 오심은 시간적으로 초월된 이가 시간으로 지배 받게 되고 또한 공간적으로도 지배를 받게 되심을 말합니다. 무소부재, 어디든지 계시던 분이 세상에 오신 것이며 인간의 고통을 맛보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의 역사에 뛰어드신 임마누엘 사건, 주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어떻게 지켜야 되겠는가의 참 정신을 알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첫째, 성탄절은 감사한 마음으로 지키고, 감사한 마음을 더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탄생하신 사실만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프신 심정, 주님의 고난의 시작인 성탄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고통도 우리의 죄가 아니면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역사가 가장 힘이 들었습니다. 천지 창조도 말씀으로 하셨는데 인간 구원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고통이 있어야 완성됩니다. 주님께서 임마누엘로 오신 사건을 생각하며 성탄엔 미안하다, 감사하다, 고맙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인간들끼리 선물을 주고 받으며, 먹고 마시며, 노래하며, 메리 크리스마스만 부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고 인간 세상에 오신 주님을 향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나는 이제 주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하는 심정을 가지고 성탄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세상 인간들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 역사에 뛰어든 것처럼 우리도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의 역사에 뛰어드는 것이 있어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X-mas를 즐거이 보내며 돈을 쓰며 노는 것은 좋습니다. 선물을 보내며 음식을 차려 파티하며 즐겁게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탄생하신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인간 세계에 뛰어 드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나보다 어렵고 괴로운 분들의 역사에 뛰어드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성탄 주일만은 사람으로 태어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심정으로 굶주리고, 헐벗고, 옥에 갇히고, 앓아 누워있는 분들을 찾는 것이 도리어 주님을 맞이하는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임마누엘의 축복이 어려운 한사람, 한사람에게 임하여 참으로 축복된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3.별을 보고 왔노라

성경:마태복음 2:1~12

 

1. 별을 따라온 사람들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그날 베들레헴의 거리는 복잡해졌습니다. 여관은 만원을 이루었고, 이슬을 가리울 만한 곳이면 어느 곳이나 사람의 거처가 되어 있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을 따라 호적하러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과 이 기회를 놓칠새라 돈벌이에 정신이 팔린 장사꾼들이 법석이고 있을 때 이곳에 색다른 목적을 가진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개인이나 시대의 운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구의 명령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어떤 욕심에 끌려온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진리를 찾기 위한 노력뿐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에 오기 전에 예루살렘의 헤롯 왕에게 나타나서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뇨 우리들이 동방에서 그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2)고 하였습니다. 그 동방박사들의 이름은 캐츠피, 밀초어, 팔다사라고 합니다. 그들의 고향은 동방의 페르샤이며 마니교도들의 선생이며, 천문학 박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상한 별을 발견하고 별을 따라온 것입니다. 페르샤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긴 여행의 길입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골짜기를 지나 사막과 국경을 통과하는 지루한 여행에 그들은 지쳤습니다. 그러나 피곤을 모르고 찾아온 것은 하늘에서 빛나는 별이 인도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별을 보면 피곤이 풀리고 새로운 소망과 용기를 얻게 되어 길을 찾아 전진하였습니다. 우리는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손들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 여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고달픈 여로에 지쳐서 쓰러질 때도 있고, 갈림길이 많아 정로를 찾아 나아가기에 곤란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악하고, 위험하고, 어둡고, 고난과 위험이 많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 세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더 사모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장망성을 떠나 천성으로 여행하는 하늘의 길손인 기독교인 여러분! 심신이 고달프고, 불안하고, 고독해도 저 동방박사들처럼 머리를 높이 들어 새벽별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2. 어두움을 헤치고

 

진리탐구의 여행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어려움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1) 첫번째 어려움은 신앙의 열심이 식어 버린 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에게는 이상이 있었고, 열심이 있었고,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고 있는 예수 탄생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는 46년간이나 걸려 지은 웅장한 성전이 있었고 오랫동안 연구하여 얻은 성경의 지식이 있었고, 그들의 생활을 담당해 주는 나라의 보호 밑에서 얻는 생활의 안정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것을 알기에는 제일 좋은 조건 가운데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열심이 식어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은 것을 알려면 몸의 체온을 확인해 보면 압니다. 그 사람의 정신이 죽었는지 알려면 그의 열심을 측정해 보면 압니다. 사데 교회를 향하여 주님께서 책망하시기를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었다고 하심은 사데 교회의 정신이 죽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동방박사들의 모습은 진리를 찾기 위한 열심으로 가득 차 있던 것입니다.

(2) 두번째는 사회의 정의가 잠들어 버린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말 구유에 탄생해야만 했겠습니까? 주님이 탄생하실 때 여관에 누일 곳이 없었다는 사실은 베들레헴에는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넓은 거리로 나가보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예루살렘 성의 모든 죄를 다 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해산하는 산모 마리아가 구유로 쫓겨난 어두운 장면을 보았을 때 이방인인 그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자기네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고 율법을 가졌노라고 자랑하는 그들이 마리아가 말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낳는 광경을 이방인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잠든 밤입니다.

(3) 셋째는 율법이 잠들어 버린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생명을 보호하는 법률은 간데 없고 베들레헴에 죄 없는 사내 아이들만 죽어 갔습니다. 그 곳은 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법률이 잠들어 버린 나라였습니다. 법이 살면 백성이 살고, 법이 죽을 때 백성이 죽습니다. 이런 베들레헴 거리에 동방박사들은 찾아 왔습니다. 이 무서운 베들레헴의 어두운 밤에 길거리마다, 가정마다 탄식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백성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적인 어둠을 헤치고 전진하는 박사들이 그립습니다.

 

3. 어두운 밤에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이 어두운 베들레헴에 주님을 찾으러 나섰는데 그들에게는 어두운 밤에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2:10)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찾았을 때의 모습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기뻐했겠습니까?

(1) 그들은 별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별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는 어느 유명한 정치가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용사의 손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동방박사들은 별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이 세상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흑암이 덮인 세상입니다. 그러나 고요히 구유에서 새로운 소망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 그들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왕자의 탄생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소망을 예수님 안에서 찾아 본 것입니다.

(3) 그들은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리면서 기뻐했습니다.

이 예물은 그들의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들의 영과, 혼과, , 그들의 생명과, 재산과, 권력 전체를 예수님에게 드리는 표시라고 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드리면서 세상에서 사는 보람을 예수 안에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 어두움의 세계에서도 빛을 발견한 자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4.기독교의 세 가지 보배

성경:마태복음 2:7~11

 

옛부터 세상에는 보배라고 일컫는 것이 많습니댜. 세상 사람들은 금전과 지식과, 권력이 보배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불, , 승을 보배라고 합니다. 유교에서는 토지와. 인민과, 정사를 보배라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보배는 황금과 같은 믿음이요 유향과 같은 마음과 실행이요 몰약과 같은 희생입니다. 즉 돈, 마음, 몸으로 완전히 드리는 이가 참 기독자입니다. 그렇게 볼 때 동방박사는 장차 어떻게 되실 것을 예시한 동시에 우리 신자가 무엇을 예수님에게 바쳐야 하는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무엇을 바쳐야겠습니까?

 

1. 황금과 같은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어떤 물체와 같이 그 모양이 네모나고 둥글다든지, 그 빛이 희고 검다든지 하면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겠지만 신앙은 정신적인 문제이므로 영적 생활에 입각하지 아니하면 설명하기가 곤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1:1)라고 하였습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영에 잡히는 느낌과 감정이 곧 종교적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악의 세력은 강하고 인간의 힘은 약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안심하고 살 수 없습니다. 어떤 청년이 무디 선생에게 '신앙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무디 선생은 그 청년을 뒷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벼랑에 있는 큰 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 위에 올라가 가지를 붙잡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무디 선생님께서 하라는 대로 나뭇가지를 붙잡으니 무디 선생님은 그 손을 놓으라고 명했습니다. 그 청년이 아래를 쳐다보니 수백 척이나 되는 벼랑아래에는 푸른 물이 흐르는데 나뭇가지를 놓으면 당장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화를 내며 말하기를 "선생님은 나를 아무도 모르게 죽이시렵니까?" 하였습니다. 이때 무디 선생은 그 청년을 안아 내려놓고 하는 말이 "당신이 내게 물은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당신이 나뭇가지를 붙잡으면 살고, 놓으면 죽을 줄 아는 것 같이 당신이 예수를 붙잡고 의지하면 살 수 있고, 놓으면 죽을 줄 아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서 예수를 열심으로 믿었다고 합니다.

 

2. 유향과 같은 마음과 실행입니다

 

믿음도 귀하지만 실행이 더 귀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14, 17)고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말 잘하고 설교도 잘 하고, 기도도 청산유수처럼 잘 한다 하더라도 실행이 없으면 다 위선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자기는 간음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도적질하며 계명을 범한다면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동방박사가 예수님에게 드린 유향은 그 냄새가 오리 밖까지 풍기고, 그 냄새가 100일까지 지속된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행실도 세계에까지 날리고 이 생명 다 하도록 날려야겠습니다.

무디 선생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예배당에 빈 자리가 많으니 전도하러 나가자"고 하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거리로 전도하러 나갔습니다. 일주일 동안을 다녔으나 그 누구에게든지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일에 예배당에 사람이 가득 찼습니다. 제자들이 이상히 여겨서 묻기를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믿으라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예배당이 가득 찼습니까?" 무디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무언의 전도를 잘했다. 그 동안에 길 가에 넘어진 애를 일으켜 주었고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차를 밀어주지 않았느냐? 말로 전도하는 것보다 착한 행실로 실행함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3. 몰약과 같은 희생입니다

 

희생이란 남을 위하여 내 소유를 바치는 것이니 결코 이기주의가 아니요 이타주의입니다. 이타주의는 다른 사람도 잘 살게 하고, 나도 잘살게 합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어린아이가 가졌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리매 5,000명이나 배불리 먹게 하셨다는 사실은 희생의 유익을 보여 줍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려니와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느니라" (12:24).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이 원칙에 의거한 것입니다.

남강 이승훈 산생님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 생활을 마치고 임종 시에 제자들에게 "나 죽은 후에 내 몸을 땅에 묻지 말고 내 뼈는 오산학교 박물관의 표본으로 써달라"고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얼마나 고귀한 희생적 정신입니까? 자기의 유골까지라도 오산학교에 바치신 그 희생적 정신은 천추만 대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그런고로 인생의 가치는 죽은 후에야 높아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앞으로 황금과 같은 믿음으로 귀하고 빛나게 살며 유향과 같은 희생의 정신으로 가치 있게 살아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5.그리스도의 나심과 그 반응

성경:마태복음 2:13~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축복 중의 축복이요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을 읽어 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반응이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는 헤롯 왕의 반응입니다

 

헤롯 왕은 새 임금이 나셨다는 소문을 듣고 미움과 적의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새 아기가 왕이 되면 자기의 위치와, 자기의 세력과, 자기의 영향력에 대한 어떤 침해를 당할까 하여 염려가 되어 두려웠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대로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하고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였습니다. 악은 선을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의를 행하는 자가 핍박을 받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는 의로운 자를 미워합니다. 부정을 거행하는 공무원들 틈에 양심대로 살려는 사람이 있으면 자연히 미움을 받습니다.

포은 정몽주 선생님의 어머니는 어릴 때 그 아들에게 교육시키며 다음과 같은 한 시를 읊어 선물로 주었습니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노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불의로 더럽혀진 심령들은 공의로 바르게 사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미워합니다. 죽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욕망으로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운 사람들이 그리스도처럼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신 곳은 마굿간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어두움이 세상은 알지도 못하였으므로 푸대접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신 그 이튿날 멀리 애굽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의 생은 출발부터 험난하고 기구하였던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처럼 오늘날도 불의를 행하는 통치자들은 기독교를 미워하고 없애 버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북한을 위시한 공산 국가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헤롯 이상의 독재로 다스립니다. 김일성 독재 체제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학생 데모도 없습니다. 반체제 운운하는 말도 없습니다. 있다면 김 일성 만세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완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세계의 독재는 곧 무너지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완전한 나라요, 완전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민주주의가 좋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없고 서로 협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많은 의견을 모아서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일사분란하게 통치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공산주의가 제일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를 늘 미워하고 박해를 합니다. 헤롯의 말로가 비참했던 것처럼 김일성의 말로도 비참할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2.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반응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이들은 무관심이었습니다. 그들은 헤롯 왕의 야단 때문에 성경을 펴고 미가서 5장을 찾아 "베들레헴에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는 예언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론만 알았지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예수의 탄생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성탄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자가 있다면 바로 서기관의 비극이 그의 비극이 될 것입니다.

 

3. 동방박사의 반응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들이 가진 값진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드렸습니다. 전에부터 사람들은 박사들이 가져온 그 선물이 아주 적합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들고 온 황금은 임금을 위한 예물이요, 유향은 제사장을 위한 예물이요, 몰약은 장차 우리를 위해 죽으실 예수를 위한 예물이었습니다. 홀몬 헌트의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나사렛 목수집 문에 서 있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아직 어린 소년 시절 때였습니다. 기울어지는 저녁 햇빛이 문에 비칠 때 소년 예수는 일하느라 피곤했던 몸을 펴기 위해 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문간에 서서 팔을 펴고 기지개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뒷면 벽에는 기울어 가는 석양에 그가 비취어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것이 십자가의 그림자였습니다. 배경에는 마리아가 서 있는데 마리아는 그림자를 보면서 다가올 비극의 공포를 그 눈에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가져온 황금, 유향, 몰약의 선물은 참 왕이시요 완전하신 최고의 제사장이시요 마침내 인간을 위한 가장 높으신 구주가 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떠나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하니 일어나 어서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해서 내가 이를 때까지 거기 있으라" (2:13)고 하셔서 그 즉시 애굽을 향하여 피난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피난을 떠난 후 헤롯 왕은 베들레헴의 2세 이하의 모든 아이를 학살했습니다. 아기 예수도 함께 줄이자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에 울음소리가 베들레헴에서 하늘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헤롯의 학정은 그 후 얼마 가지 않아 300명의 법령위원을 살해하고 그의 처 마리아를 죽였고, 장모도 죽였고, 처남인 안티파티와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도 불러스를 죽였습니다. 이렇게 악한 헤롯이 새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예수를 환영할 리는 없었고 베들레헴의 아이들만 희생시킨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벙글벙글 웃는 아이를 빼앗아 땅에 들어 메치고 창 끝으로 찔러 죽이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하는 그 어머니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위로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였겠습니까? 비통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고통과 가난과 슬픔 속에 죽으려 태어났습니까?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슬픈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슬픈 이들이 당하는 고난 속에 자기 자신이 뛰어들어 와서 함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슬픔을 당하는 자가 인제 주님과 함께 위의 받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힘이 우리에게 임하여 새 역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X-mas의 의미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길입니다.

 

6.좋은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

성경:누가복음 1:14~25

 

1. 주 앞에 큰 자

 

14-16절에서는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말라기 이후 첫 선지자로서 400년 만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출생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7:28, 11:11)라고 한, 세례 요한을 가리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요한이 앞으로 크고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며 생활하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부르짖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물밀듯이 찾아왔습니다. 세례 요한의 성결한 생활이 대중을 충분히 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을 찾아 다니면서 전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예언을 하며 살았던 것은 그는 강직하여 거짓에 굽히지 아니했던 것이요 겸손하고 성결하여 인기나 명예를 취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3:30에서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세례 요한이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세상의 인기나 명예를 탐내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돌리는 진실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이것은 하나님 앞에 드림이 된다는, 곧 나실인의 생활방식입니다. 사사기 13장에서 삼손도 그러한 사람이었고, 사무엘상 1장의 사무엘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봉사할 때에 술을 마시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15절의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란 말씀은 세례 요한이 모태에 있을 때에도 주님의 모친이 오실 때에 뛰놀았다고 한 것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모태에 있을 때에도 성령의 감화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입었다는 것은 그가 자기의 사명을 잘 실행하기에 족한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어 있어서 신령한 일을 잘 깨달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술에 취하고, 세상 일에 빠지다 보면 신령한 일에 대하여 감각이 없어지지만 성령이 충만하면 신령한 일에 대한 분별력이 민첩하여집니다. 진리의 증인은 이와 같이 신령한 일에 대하여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기도의 응답

 

17-19절에서는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수태치 못했을 때, 부부는 늘 기도하였고 가브리엘은 수태한다는 기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 54:2에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즉 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요, 찾는 자는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 것을 보고 사가랴는 두려워 놀랐으나 천사는 사가랴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하여 요한의 출생 예고를 들은 것입니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기도의 응답보다 더 기쁜 것은 세상에서 다시 없을 것입니다.

 

3. 불신앙의 저주

 

20-23절에서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라도 불의를 행하고 불신앙을 가질 때는 진노하십니다. 요나가 비둘기 같이 순하고 착한 자로 인정될 때는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탁하였지만 불순종할 때에는 풍랑으로 진노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공경할 때에는 축복하였으나 불순종할 때에는 진노를 발하여 전쟁에 패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가랴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이 모든 계명과 율례를 잘 지킬 때에는 그 기도에 응답하였지만 그가 불신앙을 가질 때에는 불가불 진노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간구하는 것을 듣고 긍휼히 여겨 천사로 하여금 장차 요한의 출생과 아울러 그가 위대한 존재가 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이것을 믿지 못하고서 천사에게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말할 때에 천사는 다시 말하기를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고 마른 해골로도 큰 군대를 이루는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신 것이 없으십니다.

 

4. 하나님의 축복

 

24-25절을 보면 "이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시고 악인을 저주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99명의 의인보다 한명의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불신으로 말미암아 벙어리가 된 사가랴가 1년 동안 말을 못하고 지내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확신할 때 드디어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어 말을 했으니 이는 곧 아이의 이름을요한이라고 지을 때였습니다.

 

5. 결 론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사는 공의로우시니 인생들은 불신을 버리고 진실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7.가브리엘

성경:누가복음 1:18~19

 

우리는 성경에서 미가엘 천사나 가브리엘 천사에 대해서 많이 듣고 또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일곱 천사가 일곱 인을 떼며 일곱 나팔을 불며 일곱 대접을 각각 쏟아 부어 이 땅에 말세 심판의 재앙들을 내리는 것을 봅니다. 일곱 나팔을 가지며 일곱 인을 떼며 일곱 대접을 쏟는 일곱 천사는 천사장과 똑같은 권한을 가진 천사들인데 일곱 천사의 이름은 우리엘, 자라엘, 라구엘, 미가엘. 사라지엘. 가브리엘, 르미엘입니다.

미가엘은 단 10:13에서 "바사국 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중 중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에서 볼 수 있고, 또한 단 10:21에서는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1:9를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이라 했습니다. 또한 계 12:7에서는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라고 한 바와 같이 미가엘은 사탄의 용의 권세를 깨뜨리는 천사장입니다.

가브리엘은 일곱 천사 중 하나로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입니다. 8:16"내가 들은즉 을래강 두 언덕 사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있어 외쳐 이르되 가브리엘아 이 이상을 이 사람에게 깨닫게 하라 하더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눅 1:19에서도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발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하고 있으며, 1:26-27에서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즉 미가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원수와 영계의 악의 세력과 대항하여 여호와의 전투를 행하는 용감한 하나님의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두 번 보였고, 제사장 사가랴에게는 그의 처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들 '세례 요한'을 낳을 것을 예고하였으며 (1:26-33). 마리아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낳을 것이라(1:19-25)고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였으니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에게 전달하고 또 그것을 해석해 주는 것을 그의 직무로 하는 천사인 것입니다.

미가엘이나 가브리엘이 하나님을 시위하는 천사라고 불리운 것에는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저들은 특별한 명예를 누렸습니다. 왕을 모시고 있는 신하가 특별한 명예를 누렸던 것처럼 가장 큰 은혜를 입고 왕에게 받은 세도는 하늘의 새라도 떨어뜨릴 정도였습니다. 왕을 모신 신하는 왕의 영광을 함께 누릴 특권이 있었습니다. 미가엘 가브리엘 천사장은 이런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명예 이외의 것이었습니다. 왕을 모시는 것이 특별한 명예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왕 대신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은 하나님 대신 보냄을 받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명예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기 위해 예비되는 것으로 이것이 미가엘, 가브리엘 천사가 가지고 있는 명예입니다.

 

1.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을 받았을 때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명령자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천국민이 지켜야 하는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구속받은 성도들은 현세에서도 이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하며, 내세에 천국에 들어가서도 이 법칙에 순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권리면에서는 어디서나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이성에 불합리한 주의 명령일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주님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2:7-8)고 하셨습니다. 혼인집 하인들은 주인의 명령에 한 마디의 물음도 없이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불합리한 것이지만 주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지체 없이 순종했으며,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실 때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순종으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최고 최대의 신앙은 순종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 길조는 한 마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는 그 행동이 올바른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가브리엘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여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해야겠습니다.

 

2.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 곧 복음의 전파는 주님의 기상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 전파의 중대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복음화시키고, 지역 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을 복음화시키며, 나아가서는 동남아시아를 거쳐 세계를 복음화시켜야 할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세계 인구는 교회와는 비교될 수 없는 비율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현대는인구폭발의 시대입니다. 전도 폭발은 인구 폭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을 충만히 받아 복음 전파에 총력전을 기울일 때입니다.

온 세계를 복음화시키려면 '영적 기하급수 증가를 위한 운동' (The movement for spiritual multiplication)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이 운동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16:15에 주님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한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탁상공론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이론의 전개로써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직접 사람에게 뛰어들어가 복음을 증거해야 하며 그를 교회당으로 인도해내야만 합니다. 딤후 4:2의 말씀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합니다.

이 일은 희생과 봉사, 헌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끈기 있게 전진하는 것은 사람의 좋은 특색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일하는 자 앞에는 어려움이 많기 마련입니다. 인재가 부족하고 경제가 낙후하며 일손이 모자랄 때, 그리고 협조와 협력이 없이 뒷말만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일하는 사람은 낙심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는 인간이기 때문에 사실은 거창한 일을 혼자서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큰 일을 할 사람은 어떤 고난에 부딪쳤을 때라도 쉽게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강한 의지와 원대한 이상과 큰 비전을 가지고 후회 없는 전진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나님 말씀을 받아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종의 사명을 완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8.동정녀 탄생고지

성경:누가복음 1:26~38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약혼 기간이 일년이나 계속되면 결혼과 같은 구속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약혼은 이혼에 의해서만 파기할 수 있었습니다. 약혼한 사이에 남자가 죽으면 그 상대인 처녀는 법적인 과부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상으로 과부 처녀라는 이상한 말도 있었습니다. 과부 처녀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남편이 될 죽은 약혼자와의 이혼수속을 밟아서 이혼한 여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두 사람이 약혼을 하게 되면 그들 사인에는 죽음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그 약혼을 파기할 수 없는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동정녀 마리아와 예수님 탄생에 관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메시야의 탄생, 곧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리라는 것을 마리아에게 고지하였습니다.

지금도 성지 나사렛 동네에는 그때의 마리아가 살던 곳으로 믿어지는 곳에 수태고지교회라고 불리우는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 1:18-25의 임마누엘과 관련된 기사로 처녀탄생의 근거가 되는 기록입니다. 이 교회는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써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삼위일체 성자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이같이 초자연적인 최대의 기적의 경로로 오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요셉과 마리아

 

26-27절에서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여섯째 달에" 란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수태한 지 6개월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갈릴리 나사렛 동네"란 갈릴리 남방에 있으며, 이스라엘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입니다. 현재 그곳은 나지아라 하며, 인구는 오천 명이나 되는 동네로 베들레헴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촌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정혼한 처녀 마리아"란 말씀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야의 별명이었습니다(1:1).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친족으로 제사장의 후손이며, 아론의 후예입니다. 마리아는 높이 된 자(지존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상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외에 여러 마리아가 있습니다. 1: 27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19:25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이며, 15:40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이고 눅 10:39에서는 베다니의 마리아, 16:6에서는 로마의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리아는 이스라엘의 흔한 여성의 이름입니다.

 

2. 은혜 받은 자여

 

28-33절에서는 "가로되 은혜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로마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은혜를 입었다는 말을 과찬하여 '아베 마리아'라 하였고, 마리아를 숭배하여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문까지 지었습니다. "거룩하신 마리아여, 하나님의 어머니시여! 이제 우리 위해 기도해 주시오며 또한 우리가 죽는 순간에도 기도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문입니다.

"은혜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리라"는 말씀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로서 높은 복을 받은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사실을 가리킨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어머니가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하나님의 딸로서 가장 높임을 받은 사실을 말합니다.

29절에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동정녀 탄생, 임마누엘의 역사가 자신에게 이루어진다는 고지에 기쁨보다는 도리어 놀라고 염려하였습니다.

이때, 가브리엘 천사는 말하기를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하고 마리아를 안심시켰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데서 친근감과 마음의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아니할 이유로써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네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얻었기 때문이며, 은혜 받은 것을 알리는 기쁜 일이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예수라 하라." 예수는 히브리 음으로 여호수아이며,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이며 마 1:21에서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고 하였으며, "이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바로 메시야의 별명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메시야를 가리켜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칭했습니다.

 

3.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34-38절을 보면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이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의 말씀에서 마리아의 이 질문은 그의 처녀로서의 정결성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즉 메시야 탄생에 관해서 의심하여 묻는 물음이 아닙니다.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에서 어찌하여 그 어떤 방법으로 이런 수태가 있겠습니까? 하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 탐구에 대한 귀한 마음이 보입니다. 여기에 대한 천사의 대답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됨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으로 잉태된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는다"고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베드로가 권능을 행할 때 병인들이 베드로의 지나가는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랐고, 누가복음 9장의 변화산상의 기사에서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더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뜻은 하나님의 능력의 그림자가 와서 가리우듯이, 구름이 와서 덮듯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즉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이적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37절을 보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능력은 늙은 엘리사벳도 수태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약속하신 대로 다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38절은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마리아가 주의 종으로서 겸손과 순종과 감사로 기도하는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놀라고 당황도 하였으나 조용히 주 앞에 순종하므로 마음을 정리하였고, 마리아의 믿음은 더욱 완숙해졌으며, 천사는 사명을 마치고 떠나갔던 것입니다.

 

 

9.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찬미

성경:누가복음 1:39~56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왜 마리아로 하여금 약혼자도 알지 못하게 한 채 성자를 잉태하게 하셨을까? 또는 인간성을 무시하고 인도에 어긋나는 듯한 방법을 왜 사용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낮추시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최대의 빈곤과 굴욕의 곤고를 당하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의 말로 표현하자면, 고급 승용차를 굴리며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물을 분배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천한 자리에 뛰어들어 그들의 친구가 되어 고통을 같이 당하면서 그들의 내면적인 상처를 치유하고 동시에 전체의 지위를 향상시킨다고 하는 방법입니다.

마리아의 성령잉태 또한 그 출발부터가 구주 예수께서 당하시는 굴욕을 대신 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법률적 위험, 세상적 굴욕을 각오해야 했던 것입니다.

 

1. 엘리사벳의 축복(39-45)

 

엘리사벳은 45절에서 "주의 약속이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소리쳐 마리아를 진심으로 찬양하였습니다. 마리아에게는 하나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축복이 허락된 것입니다. 이에 관련하여서 눅 11:27"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고 한 여인이 마리아를 부러워했습니다.

41절에서는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천사로부터 수태 통고를 받은 후 마리아는 산에서 수양 중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였던 것입니다. 큰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 얼마 동안 조용한 곳에서 고요한 시간을 갖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문안을 듣는 순간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태아가 뛰놀았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기뻐할 이유가 되겠습니까? 마리아의 방문이 반가와서 입니까? 그의 문안 소리에 놀라서입니까? 아닙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메시야의 방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설교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청중으로 하여금 기뻐서 뛰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는 설교자가 먼저 주님을 모셨을 때에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빈 말만 가지고는 청중에게 아무런 은혜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잉태한 설교자는 설교를 자신의 독백으로만 끝나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었다고 해서 온 세상의 태아가 다 기뻐 뛰는 것은 아닙니다. 유독 엘리사벳의 태아만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가 세례 요한이요, 하나님 앞에 먼저 보냄을 받은 사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청중도 그리스도가 보내신 설교가가 설교를 한다고 해도 세례 요한이 내 안에 있어야 그 설교가 기쁨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주님께서 설교하신다고 해도 청중 속에 세례 요한이 잉태되지 아니했다면 지루함과 시간 낭비만 가져오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받으려는 자는 있으나 옳게 전해주는 자가 없거나, 주려는 자는 있으나 바로 받는 자가 없는 것은 둘 다 불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마리아의 찬송 (46-56)

 

46-47절에서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하며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삼상 2:1에서도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에서 "내 마음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란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송도 한나의 찬송과 비슷하지만 그 마음은 훨씬 깊습니다. "내 마음이 구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48걸에서는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도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송과 감사의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그녀가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녀를 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그녀 외에도 많은 부녀자가 있었고, 궁전에는 화려한 미녀도 많이 있었고, 성서에 정통한 자와 랍비의 가정에서 자란 여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택하시지 않으시고 목수의 아내이며, 지위도 없고, 재능과 학식도 그리 깊지 못한 그녀를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입니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하는 점입니다. 마리아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겸손에 있습니다. 후세 미술가들이 마리아의 아름다운 상을 조각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은 실은 마리아의 아름다움은 외형이 아닌 내적 미, 즉 정숙하고 겸손하고 유화한 영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1-53절에서는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신이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그 영광을 자기가 받고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한 고로 주의 사자가 쳐서 벌레가 먹어 죽었습니다. 또한 역대하 26장에서 웃시야 왕은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이 하는 일인 분향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람된 일이어서 아사랴 제사장이 충고를 하자 웃시아 왕은 진노하여 그 즉시 문둥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니엘 5장에서도 바벨론 왕 벨사살은 교만하여 예루살렘 성전 기명으로 술을 마시다가 벽에 글자가 나타나서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선고를 받아 그날 밤에 벨사살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18:27에서는 "주께서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15:25에서도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비천한 자를 높이신다"고 하였고, "주린 자들을 배불리시고"라 하였으니 마리아는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다 성취시켜 주심을 찬미하며 하나님의 신실성을 찬미한 것입니다.

56절에서 보듯이 "석 달쯤 함께 있다가"라고 했으므로 엘리사벳이 잉태한지 9개월에서 해산 시기까지 같이 있다가 마리아는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갔고, 마리아가 떠난 후 엘리사벳은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10.구유에 나신 주님

성경:누가복음 2:1~7

 

성지 베들레헴에 가면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곳을 기념하는 (구유 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옛날의 초라한 외양간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낮고 험한 집 위에 큰 교회당을 세워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세계 위인들의 탄생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멕카 성에 있는 모하메트의 집, 스트라드 본에 있는 섹스피어의 집, 프랑크 프르트에 있는 괴테의 집, 본에 있는 베토벤의 집 등, 제 나름대로 유서가 있고, 뜻이 있어 인류의 고적이 되어 있습니다만 베들레헴은 보다 독특한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1. 겸손하게 나신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또 친히 하나님이신 주님은 천하고 낮은 구유에서 나신 것입니다. 근본이 하나님이신 주님이 사람의 육을 입고 태어나신 그 자체가 비하요 겸손입니다. 더구나 사람의 육을 입으시고 오신 주님께서 사람의 집도 아닌 짐승의 처소에서 나신 것은 겸손의 극치요, 황송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의 교조인 석가는 왕자로 왕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공자도 상류의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는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베들레헴 외양간에서 태어나셔서 구유에 그 귀한 몸을 누이게 되었습니다. 구유에 나신 주님은 가장 소박하고, 가장 겸손한 인간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겸손합니다만 가장 위대하신 사람이 되신 주님은 가장 겸손하셨던 것입니다. 구유에 나신 주님은 스스로 겸손하실 뿐만 아니라 겸손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 11:29에서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아무 어려움이 없이 호사하게 자란 사람은 인생의 깊은 뜻을 배우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거기에 대항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가정에서 간고를 겪고 자란 사람은 첫째, 겸손을 배우며 자랍니다. 둘째, 견디고 좀처럼 동하지 아니하는 투지를 기르며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의 주님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2. 호적령과 용신할 사관도 없으신 주님

 

로마 제국은 그의 국권이 미치는 지경 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매 14년마다 정기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것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징병과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정치적인 수단이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는 요셉도 이 호적령에 의하여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옛 다윗 조상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사렛에서 갈릴리까지는 130로 약 320리나 되니 험악한 산악길을 도보로 나귀를 타고 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요, 그나마 마리아는 잉태한 몸이니 그 행로의 어려움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셉이 베들레헴에 도착하였을 때에 베들레헴에 모여든 사람들로 사관은 초만원을 이루었고, 때를 만난 베들레헴 사람들은 돈벌이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만삭을 한 마리아에게 단 한 칸의 방을 제공해 줄만한 친절한 마음을 가진 자는 없었던 것입니다.

주막에 방이 없어서 마리아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잠깐이나마 피곤한 몸을 외양간 안에서 쉬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셨지만 그 추한 마굿간에서 탄생하셨으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눕는 몸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은 4-5천 명이 사는 고을인지라 주님을 위하여 한 칸의 방을 드릴 수 있음직도 한데 누가복음 2:7에서와 같이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을 위해 드릴 남은 방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손님이 다 찬 나머지 방, 남은 사관 방을 요구하시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자는 단칸방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 쓰고 남은 방을 주려고 하였기에 이런 호적령이 난 비상시에는 남은 방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마리아와 예수를 남은 방이나 드려서 대접하려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말구유로 내쫓았습니다. 또한 사관이 없다는 말은 주님에게 무료로 제공할 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돈 받고 주는 방을 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을 요구하심이 아니요, 그들이 자는 방을 요구하셨고, 주님의 일이라면 세를 받지 않고 셋방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가 창조한 땅에 왔으나 자기에게 제공할 방이 없다는 말을 듣고 외양간으로 가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오신 것은 큰 은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련한 베들레헴은 이 은혜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뭇심령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3:20에서도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둔 교회였습니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자는 주님의 방문시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베들레헴 사람을 나무라서는 안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탓할 것도 아닙니다. 술람미 여자를 책할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내 자신은 어떠하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주님의 탄생을 맞이하여 자신이 주님을 모시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둔 채로 있는지에 대해 우리 자신을 반성해 봐야 할 것입니다.

내 마음이 주님을 모신 구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 보좌를 떠나 찾아와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거룩하신 몸으로 십자가에서 죄를 담당하심으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내가 고달픈 생의 길을 걸을 때 함께 하시고, 내가 눈물을 흘릴 때 같이 흘려주시고, 내가 고통을 당할 때 함께 당하여 주시며, 내 무거운 짐을 함께 져 주시는 분입니다. 자나 깨나 나를 지켜주시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 나그네 길을 다 마치는 날, 나를 데리러 오십니다. 이같은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영접하고 있습니까? 행여나 우리 주님을 박대하고나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문 밖에 서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 역사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 새 역사는 바로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모신 자로서 주님을 영접한 사관으로서 성탄의 진정한 의미가 우리 안에서 드러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3. 아우구스트와 구유에 누우신 주님

 

8월에 자기 생일이 있다고 하여 자기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8월을 자기 이름인 August라고 달명을 바꾼 가이사 아우구스트는 시이저의 양자로서 수많은 정적들을 물리치고 로마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벽돌의 로마를 대리석의 로마로 바꾼 명군입니다. 그의 권세와 영광은 지극했으며, 그의 판도는 무한대로 넓었습니다. 그러나 이천 년이 지난 오늘을 보십시오. 로마가 신이라고 받들던 아우구스트는 가고 없습니다. 권세도 영광도 간 곳이 없습니다. 그의 역사는 한낱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유에 누이신 주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온 땅끝까지 사랑으로 정복하였고, 하늘에서는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고 계십니다. 창검의 힘으로 이룩해 놓았던 제국의 영광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사랑과 십자가로 이룩한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그 옛날 베들레헴의 초라한 외양간의 구유! 그 구유에서 이루어진 이 위대한 사실과 교훈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을 영접하는 자는 영생과 영광과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4. 베들레헴과 예수님

 

베들헴이란 떡집이란 뜻입니다. 유대의 땅은 비교적 박토이지만 베들레헴만은 비옥합니다. 이 곡식이 많이 나는 베들레헴 떡집에서의 예수의 탄생은 생명의 떡과 관계가 깊습니다. 주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생명의 떡을 영접하면 영원한 삶을 누릴 것입니다. 이 영생의 떡을 영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1.큰 기쁨의 좋은 소식

성경:누가복음 2:8~14

 

예수님의 탄생을 제일 먼저 선포한 이는 주의 사자, 곧 천사입니다. 그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이들은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특별히 그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성지 예루살렘 성의 제사드릴 흠 없는 양떼들을 책임 맡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성전용의 양을 치는 목자들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양을 제일 먼저 볼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특권입니까? 이스라엘은 한 아이가 탄생하면 그 지방의 악사들이 그 집에 모여들어 그에게 소박한 노래로 축하를 하는 것이 전통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베들레헴의 외양간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예식은 베풀 수가 없었고 천사들이 지상의 악사들을 대신하여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때는 고요한 밤이었습니다. 홀연히 고요한 새벽에 적막을 깨뜨리는 소리, "무서워 말라" 하는 이 소리는 천사의 말의 첫 마디였습니다. 목자들은 이렇게 주의 영광이 두루 비칠 때에 무서워하였습니다. 목자들만 무서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언제든지 죄 많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가까이 나타날 때에는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내산 기슭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모세는 두려워서 얼굴을 가리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성전에서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을 직면하게 될 때에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렇듯 두려움에 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서워 말라"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주는 하나님의 첫 메시지는 바로 "무서워 말라"는 음성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는 인류의 종말을 바라보면서 떨고 있습니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주의 사자는 한번 더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는 자기의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흉하게 뛰놀던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또한 천사가 계속하여 하신 말씀은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망하던 좋은 소식은 메시야가 땅에 오는 소식입니다. 메시야의 오심은 "온 천하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것은 한국 땅뿐 아니라 중국, 미국, 세계 온 천하에 미칠 큰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의 내용은 눅 2:11"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는 것이요,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온 세계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독생자를 하늘에서 이 땅 위에 내려 보내신 이 사실은 얼마나 큰 사건입니까? 이 소식이야말로 온 우주 최대의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다른 뉴스를 아무리 많이 들었다고 하여도 이 최대 뉴스를 듣지 못했으면 그는 불쌍한 사람이요, 세상을 알았다고 하나 헛세상을 사는 것이요, 헛세월을 보내는 삶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마음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해방을 주시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시되 사랑을 주어 그 죄를 대신하고 희락의 기쁨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질병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여러분. 이 최대 기쁨의 큰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옛말에 "조문도면 석사가이"(朝聞道夕死可而), 곧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최대의 기쁜 소식,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의 소식을 믿고 깨달았다면 우리는 이제 죽어도 유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생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년에 한번씩 연례적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합니다. 만일에 연례적으로만 크리스마스가 행해진다면 분명히 우리의 신앙이 형식화, 의식화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첫번째 크리스마스의 밤은 고요한 밤이었고, 거룩한 밤이었습니다. 밤은 깊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밤도 고요했고. 작은 촌 베들레헴도 고요히 잠들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성 밖 들에도 양치는 목자들도 지쳐서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적막을 뚫고 들려오는 천사들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목자들은 암흑의 밤, 절망의 밤, 깊은 밤을 뚫고 비춰오는 하늘의 영광의 빛에 눈을 떴습니다. 그 순간 그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전개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역사의 깊은 밤, 어두운 밤, 불안의 밤, 캄캄한 밤이 우리 앞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죄악의 검은 구름에 덮여 있습니다. 험난의 밤, 방탕의 밤, 부정의 밤, 억압의 밤, 온갖 수치의 밤이 우리를 덮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가고 있습니다. 눈물, 탄식, 애통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지금도 말합니다. 크리스마스의 별을 통해서 동방박사에게 비취시고 별을 통해 인류들에게 말씀해 줍니다. 우리도 눈을 들어 크리스마스의 별의 인도를 받으십시다. 우리는 이 시기가 바로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느냐,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로 정하느냐를 정할 시기인 줄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계기로 해서 세속주의의 침범에서, 또는 악령의 역사에서 승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금년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온 만백성에게 전하여지고,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져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자가 이 기쁨의 큰 소식을 듣게 되고, 눈먼 자가 광명을 찾게 되고, 묶이고 억압을 당한 자가 해방의 은총으로 구원에 이르는 뜻있는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2.평화를 갈망하는 인생

성경:누가복음 2:14

 

자연계를 보면 모두 평화스럽게 보입니다. 저 뜰 앞에 웃고 서 있는 꽃을 보든지, 꽃의 향기에 칠하여 꽃 사이로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든지, 저 울창한 숲 사이로 날으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새들을 보든지, 저 무수한 별들이 하나도 어김없이 궤도를 운행하는 것을 보든지, 그 어느 것 하나도 자연계에는 평화스럽지 않은 것이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자연계는 평화스러운데, 왜 우리 인간 사회에는 동에 가나 서에 가나 평화를 찾아볼 수 없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사회는 근심과 걱정, 불평과 원망, 공포와 불안, 시기와 분쟁, 기근과 병고, 싸움과 죽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사실 누구나가 이런 불행을 싫어하고, 반면에 무엇보다도 평화를 갈망합니다. 고대광실보다 평화를, 명예보다 평화를, 호의호식보다 평화를 더욱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바람아, 바람아, 너는 쉬지 않고 땅 위로 달려 다니니 잘 알겠지. 만일 싸움과 고통이 없는 곳을 보았으면 너는 본 대로 나에게 가르쳐다오. 북빙양의 얼음길이나 적도직하의 사막 여행도 나는 싫어하지 않고 네 말대로만 쫓아 즉시 그곳에 가려 하노라"고 하며, 무엇보다도 평화를 갈급하는 심령을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딜 가던지 평화를 갈급해하는 부르짖음을 귀가 아프리만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열망하는 평화를 가져다 줄 그 무엇이란 이 세상 가운데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만 있으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죄도 범하지 않게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싸움도 없어지리라고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돈이란 밥이 없는 자에게 밥을 줄 수 있고, 옷이 없는 자에게 옷을 줄 수 있고, 집이 없는 자에게 집을 줄 수 있을지언정, 인간 생활에 진정한 평화와 즐거움은 돈 그 자체가 보장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돈이란 없어도 근심이 되지만 있는 연고로 도리어 화근이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우리에게 평화를 이룩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오늘날 과학의 혜택을 놀라우리만큼 우리가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과학 그 자체가 우리 인류에게 무서운 핵전쟁과 불안과 공포를 얼마나 많이 가져왔습니까? 과학은 세계 만국 대표들을 위해 비행기, 기선, 호텔을 제공하여 줄 수는 있을지언정 회의 진행 중 세계 평화를 위해 자신들의 나라의 입장을 양보하는 능력은 갖지 못합니다.

세계의 평화는 돈의 힘으로도, 과학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세계 평화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 국경 근처에 있는 불란서의 작은 마을에 지난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전사한 불란서의 게릴라 부대 10명의 무덤이 있는데 이곳에는 어느 한 무명의 독일 병사의 무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까지 무명 독일 병사의 무덤 앞에는 계속 헌화되는 꽃다발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인즉 10명의 불란서 게릴라들이 독일군들에게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의 집총을 기다리는 한 병사가 말하기를 "이 게릴라는 사실 전투 능력을 상실한 중상을 입은 자입니다. 사형이 아닌 포로로 취급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중상을 입은 병사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나치 대장은 잔말 말고 쏘지 않으면 너도 죽이겠다고 호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 병사는 총을 놓고 불란서 군인을 인간애로써 부축하여 안았습니다. 다음 순간 독일 병사들은 이 두 병사를 총살했고 두 병사는 끌어안은 채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 독일 병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죽음이라고 할 것입니까? 이미 죽어야 할 게릴라를 위하여 내가 왜 희생해야 하나? 자신이나 사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 독일 병사의 죽음은 독일군 나치하에 포악 잔학성을 보인 독일 민족에게도 이런 선량한 백성이 있고, 국경을 초월한 인간애의 독일인이 있다는 사실을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독일인에게도 전쟁의 전범죄를 속죄하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치의 독일은 미워하지만, 그러나 이 병사의 죽음이 독일을 입증해 주는 독일인의 양식과 선의를 세계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평화는 어떻게 하여야 습니까? 여기에 하늘로부터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2: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에 베들레헴 성 밖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인류의 평화의 구주가 탄생하신 것을 알리는 복된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불과 38자의 노래에 불과하지만 큰 진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평화란 말의 뜻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툼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땅에 평화"는 그런 얕은 평화가 아니요 보다 더 깊은 근원적인 뜻이 있습니다.

곧 이 천사의 노래에서 가르치는 평화는 먼저 하나님과 사람이 평화를 맺을 수 있어야 진정한 평화를 사람끼리도 맺을 수 있다는 글입니다.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평화스러운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평화는 이 땅에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는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만인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너희에게 전해 준다",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강보에 누인 겸손하신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땅의 평화"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땅의 평화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평화를 맺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맞이할 때 죄에서 구속 받아 참 평화를 이룩하여야 할 것입니다. 참 평화의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3.목자의 성탄 축하

성경:누가복음 2:15~20

 

 

1. 신앙의 축하

 

15절 말씀에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한 것은 천사들이 전한 기쁜 소식이 반드시 이룰 줄을 확신한 것입니다.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원어가복음이란 뜻이니 목자들은 복음의 신자입니다.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은 성경학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에게 임하지 아니하고 한낱 광야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들렸습니다.

목자들은 사회에 나가면 로마 군인들을 무서워하여 떨고, 교계에 들어가면 제사장 계급에 시달리고, 동네에 들어가면 부자에게 눌리우고, 마음이 늘 편하지 못하고, 밤낮으로 쉴 사이 없이 목축 생활을 하는 노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활이 비록 고달플망정 마음씨는 선하였습니다. 그들은 순진한 마음에 매일 주야로 헤르몬 산을 바라보고 도울 이가 오기를 바라며 노고 심야에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메시야 강림하시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사람에게 하늘의 영광이 나타나고, 천사가 임하여 구주 탄생의 희소식을 전하고, 천군천사의 찬송이 들렸습니다.

이 놀라운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에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베들레헴 초장에 나타났다는 이 사실이 중대하며, 또한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이 번제물을 사르는 제사장에게 들리지 아니하고 양치는 노동자에게 들렸다는 소식 또한 관심 깊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목장도 영광이 나타나는 성전이 될 것이요, 믿음이 있으면 양치는 목자도 복음의 선지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들에 나타난 광경을 자연계의 우발적인 현상으로 본 것이 아니요, 정신적 착각에서 본 황홀 지경도 아니요,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었습니다. "베들레헴에 가서 이 일이 이룬 것을 보자"고 하며 이 사실을 믿었으며,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의 계시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신앙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10절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구주시니라"고 믿었습니다. 목자들은 이런 바른 신앙으로써 첫번 크리스마스에 제일 먼저 축하객으로 갔던 것입니다.

전 세계가 주의 성탄을 축하하는 오늘,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세계의 위대한 인물, 성자로서 축하하거니와 우리 믿는 성도들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고 축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전파의 축하

 

16-17절에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자들은 복된 소식을 듣고 믿을 뿐 아니라 빨리 가서 예수를 찾아보고 계시대로 전파하였으니 복음을 신앙하는 대로 곧 실천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의 복음을 믿을 뿐 아니라 전파하는 것이 진실한 성탄 축하입니다. 목자들은 천하만민의 구주가 탄생하였다는 천사의 기쁜 소식을 듣고 찾아갔는데, 나사렛 촌 목수 요셉과 나사렛 촌 처녀 마리아가 낳은 외양간 말구유에 누운 구주를 보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같으면 목장에 나타났던 광경을 깊은 밤중 별빛 속에 나타난 한 장면의 꿈일 것이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릅니다.

석가모니가 탄생할 때는 궁중에서 탄생하였는데 예수는 외양간 말구유에서 탄생하였으니 그 누가 이 아이를 메시야라고 전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목자들은 말구유에 누운 아이를 향하여 구주라고 말했으니 그 신앙은 참으로 큰 신앙이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에게 들은 소식은 대주재 하나님의 외아들이었는데 실제로 찾아가 보니 외양간에서 낳은 시골 사람 요셉과 마리아의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외적인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외양간 속에 묻혀있는 보배를 알았던 것입니다. 목자들은 믿었고 예수님을 찾아가 찬양하고 이웃에 전파하였습니다. 우리의 성탄 축하도 목자들처럼 믿고 찾아보고 전파하는 성탄 축하라야 합니다.

 

3. 영광의 축하

 

20절에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비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자들은 예수의 탄생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탄 축하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예수 탄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고, 땅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고, 만물도 창조자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타락하여 하나님께 영광되지 못하고 만물도 그러하였습니다. 예수의 오심은 이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니 성탄은 영광의 축하가 아니면 아니됩니다.

그러므로 천군천사들이 14절에 "지극히 높으신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 평화로다"라고 찬송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사람에게 평안!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1: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는 말씀대로 의의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5:16에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베들레헴 목자들처럼 신앙의 축하, 전파의 축하, 송영의 축하는 년년세세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성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4. 찬송의 밤, 경성의 밤

 

첫번 크리스마스는 찬송의 밤이었고, 경성의 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탄생하시던 밤에 천군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송하며 기쁜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즉시 일어나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찾아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돌아갔습니다.

오늘 성탄을 맞은 우리들은 마땅히 이날의 의의를 힘껏 찬양하여야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에게 참된 평화를 전하는 그러한 복된 기쁨의 날임을 인하여 찬송하여아겠습니다.

또한 첫번 크리스마스는 경성의 밤이었습니다. 양떼 곁에서 졸고 있던 목자들이 경성하였습니다. 저들은 아기 예수에게 찾아가 경배 드리기 위하여 깨어 일어났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도 수백 리 머나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만나 크게 기뻐하였고, 꿇어 엎드려 경배 드리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이 절기를 당할 때마다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의 신앙을 경성하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잠에서, 안일과 무관심의 졸음에서, 냉정의 깊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경성해야 할 것입니다.

안델센의 동화에 "성냥 파는 소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거리는 화려하고 집집마다 맛있는 음식이 마련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성냥 파는 소녀는 성냥을 한 갑도 팔지 못한 채 거리의 어느 한 집, 처마 밑에 기대어 앉아 성냥불을 켜서 손을 녹이며, 성냥불을 하나씩 켤 때마다 빛나는 불빛 속에서 따끈한 방, 따끈한 난로 곁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환상을 꿈꾸면서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음식을 먹으며 노래하고 연락하는 동안에 거리에 버림받은 가련한 사람은 어느 집 처마 밑에서 온 몸이 얼어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있을까 늘 염려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한 왕 외양간 말구유에 탄생하시어서 가난하고 배척 받고 눌린 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기쁨을 맞는 교회는 이 빛을 저 가난하고 갈 곳 없는 가련한 자들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거리에 내버려진 한 소녀가 사관에서 쫓김을 받아 외양간에서 탄생하신 주님이신지도 모릅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들어보는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4.독생자의 영광

성경:요한복음 1:6~14

 

14절 말씀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사도 요한은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중에서,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중에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최고 계시를 체득하였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주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이 말씀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체시요 그 지위는 하 나님의 영광스럽고 존귀하신 보좌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이신 주님은 이런 존귀한 자리와 지위에 그대로 머물러 계시지 아니하시고 온유하고 겸손하사 그 자리를 비우시고 낮아지시어 종의 형체를 취하여 육신을 입고 오셨던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는 어떠한 길을 걸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와 능력으로써 비록 하나님의 뜻과 어그러질지언정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탄생 때부터 가장 비천하게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스스로 "공중에 나는 새와 여우도 편히 쉴 곳이 있지만 자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비참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비참은 온전히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 아버지 결에서 가장 좋은 선물과 은사를 얻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이 육체가 되신 "말씀"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도 않거니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주의 뜻만 생각하고 주의 영광만 생각하였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주시면 족하겠다"고 하는 말 에 주님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라고 대답했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겸손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눈을 돌려 봅시다.

6절 말씀에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즉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7절 말씀에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생애에 대해서는 눅 1:5-80, 3:1-7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 사가랴와 그 아내 엘리사벳 사이에서 탄생되었습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 세례 요한의 외침은 오직 그리스도가 왔다고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같이 성도의 제일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습니다.

8절 말씀에 "그는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의 본성을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하나님의 종이요 말씀을 증거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빛은 원어에 태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밤에 나그네들이 들고 가는 등불이나 플래시나 자동차가 밝혀서 가는 헤드라이트와 같은 불은 곧 어두움에 잠기고 맙니다. 그러나 태양은 온 세계의 어둠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빛이신 그리스도,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러 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메시야에 대한 오랜 대망에 살던 시대입니다. 이런 상황에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은 빛이 아니며 메시야가 아니고 증거하러 온 종인 것을 말합니다.

9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 참 빛이라는 말은 원어로 거짓에 대한 참, 불완전에 대한 완전을 의미합니다. 참 빛은 거짓 빛에 상대되는 것이고 완전한 빛은 불완전한 빛에 상대됩니다. 세상에 인간의 길을 가르쳐 준 빛이 많이 있습니다. 석가, 공자, 철인들이 그들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불완전하고 세상에 삼킴을 받는 빛입니다. 여기에 대해 그리스도만은 참 빛, 완전한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빛이 세상에 왔다고 했습니다. 여기 세상이라는 말은 네 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 영토 거주지 문명권의 지역 생활 시간적인 생애, 우주 온 세계가 그것입니다. 여기 본문은 우주, 전 세계 (헬라어로는 코스모스)를 말합니다. 참 빛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주적 세계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는 지엽적인 분이 아니라 우주적인 분이신 것입니다. 또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본문은 계속됩니다. 여기 각 사람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도매금으로 통칭하는 뜻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각각 개별적으로 그리스도는 관심을 두시고 우리에게 빛으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시었으나 그는 세상의 창조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11-12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라는 것은 자기 집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이스라엘 자기 백성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한 집에 왔으나 자기 백성들은 영접치 아니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던 것입니다. 권세라는 뜻은 능력 정력 폭력 하나님의 능력 합법적 권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는다는 것은 의 합법적인 권리를 얻는 것, 즉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로이 행동하는 권리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13절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니하고 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중생에 대해서 그 본질을 역설적인 것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첫째, 중생은 혈통으로 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혈통이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중생은 육정으로도 구원을 얻지 못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정이 라면 인간의 본능입니다. 인간의 위안이나 만족한 것을 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중생은 사람의 뜻에도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의지적인 수양이나 노력으로 중생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중생은 부족한 사람이지만 하 나님께서 택한 자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새롭게 태어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예수를 바라보니, 즉 예수를 믿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오르셨을 때 주에게 나타나신 그 영광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 영광을 보고 여기가 좋사오니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까지 했던 그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은혜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진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감격하여 본문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영이 충만한 종,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종이 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선택 된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경험하며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손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 입니다.

 

 

15.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경:요한복음 1:15~18

 

17절에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은혜는 사랑으로 끼치는 신세, 베풀어 주는 혜택이라고 국어사전에서는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의 은혜라는 개념은 이런 국어사전적 인 의미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달리 더 좋은 단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일상 사용하는 은혜 의 개념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든가 신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적 의미처럼 어떤 동정적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과 영속에 주시는 사랑의 힘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심판의 성령, 불을 살라버리는 뜨겁고 무서운 성령의 불이 아니라 죄를 사하시고 죄를 멸하시며 선의 의지의 영의 힘을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만이 사랑의 힘, 용서의 힘, 죄를 사하시는 힘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며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이런 변화는 교육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자녀의 권세를 힘입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에 율법은 모세에 의해 전해지고 진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칫 잘못 생각하면 모세의 율법은 진리가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이 발생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모세 의 율법도 진리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십계명을 살펴봅시다.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요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계명입니다. 예수도 우리에게 새 계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것은 모세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하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에 의해 전해진 율법이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확실히 많은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 17절의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는 귀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까?

요한복음에는 진리에 대한 말이 많이 쓰여져 있습니다. 14:6"나 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16:13"진리의 영이 오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장래 일을 알게 하시리라," 17:17"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는 대표적인 것이고 그밖에 요한복음에 진리를 22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요한복음에 자주 사용되고 있는 진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철학적 진리라든가 과학적 진리, 흑은 도덕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언어의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그 원어가 알레테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고 참이란 뜻에, 즉 실체라든가 본질이라는 뜻에 가깝게 해석되는 말입니다. 또한 그림자가 아니라 실물이라는 뜻, 자태의 상이 아니라 본채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에 사용된 진리는 그림자에 대한 본체요 실물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원어의 접근으로 17절을 보면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진리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예수의 진리, 즉 복음의 그림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 10:1에서 "율법은 그림자이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전하여 준 율법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참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 모습이 구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 15절부터 18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생각하면서 음미하겠습니다.

15절에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볼 때 눅 1:36은 예수님은 요한보다 육 개월 늦게 탄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는 자신보다도 먼저 계셨고 아브라함보다도 앞서 계신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대적인 전후가 아닌 절대적인 전후, 시간

을 초월하고 영원한 시점의 선재로서 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16절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우리 자녀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히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충만이라는 원어는 플레로마토스곧 잔이 넘치는 상태, 우물물이 아구까지 차고 넘쳐 흘러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은혜를 떠서 받는 것이 아니고 넘쳐흐르는 것으로 자연히 받아지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하는 것은 은혜가 중단이 아니고 계속 흘러나오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넘쳐 나오는 은혜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엘리야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에 모세 (24:10, 33:23), 엘리야(왕상 19:13), 이사야(6:1)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지극히 작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를 보이는 역사상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계시하여 주었습니다. 자신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역사상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우리는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육정으로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충만하신 영광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20곡(성탄 찬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