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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주일(송구영신)설교자료 모음

맑은샘77 2013. 12. 28. 14:37

송년주일(송구영신)설교자료           

                  

 

 

송년주일

헛수고의 밤을 지난후(5:1-11)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 우리는 새로운 한해를 다시 맞아들이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살아온 한해를 돌아보는 심정이 어떠하신지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우리 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세월의 빠름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금년한해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세월을 보냈는가 하는 자괴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금년한해 내 인생이 후퇴하거나 내 삶의 터가 망가진 실패감으로 한해를 결산해야 하는 가슴아픈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하신 분들, 건강에 실패하신 분들, 혹은 인간 관계에 실패하신 분들, 그 결과로 가정이 망가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직장을 잃고 방황의 한해를 보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마포불백이 되신 분들도 계시겠지요--‘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말입니다.) 금년 한해 몸부림치고 애쓴 세월이었지만 도무지 내 인생의 강에서 내가 낚아올린 수확이 변변히 없다고 허무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제자 베드로가 바로 그런 심정으로 그 어느날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날 호숫가에서 만난 낯선 나그네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밤이 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 지난 날 그는 날마다 그렇게 했듯 최선을 다하여 어부로서 고기를 낚고자 땀을 흘려 일했지만 이상하게 수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집에 돌아올 것을 포기하고 밤을 새며 고기를 낚고자 했지만 헛수고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운데도 베드로처럼 금년 한해 헛수고의 밤을 지난분들이 계시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제자 베드로에게서 그 대답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헛수고의 밤을 지난후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1.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제자 베드로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4:21에는 그물을 깁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든지 혹은 그물을 깁는 행위가 어부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물이 씻겨져 있지 않으면 통상적으로 그물에는 바다 잡초식물들이 걸리게 되고 이것들은 그물을 속히 부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그물을 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물을 수선하여 다음의 고기잡이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어제는 헛수고였지만 고기잡이를 아직은 포기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제의 실패 때문에 내일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쓰기 어려워하는 인생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사회가 나를 포기하고, 내 형제들도 나를 포기하고, 내 마누라도 나를 포기했어도(마포불백이 되었어도) 나 스스로 아직 나 자신을 포기하지만 않았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포기는 곧 절망이고 절망은 희망의 유일한 적인 것입니다. 난치의 질병과 싸우시는 분들을 관찰해 보면 한 동안 잘 견디시다가 한 순간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스스로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병세가 위중해도 악 조건 속에 잘 견기다가 한 순간 극적으로 호전되고 기적을 체험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포기하지 않는 분들입니다.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한후 영국의 참전이 불가피하게 되면서 전쟁의 공포와 절망이 영국국민들을 붙들기 시작한 19411029일 저 유명한 윈스톤 처칠 수상이 런던시내에서 40여분 떨어진 자기의 모교였던 명문 사립학교 Harrow School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참 세계전세는 영국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내일의 희망을 갖기 어려웠던 청소년들은 거의 공부를 포기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때 이 학교의 학생들을 방문한 자리에서 처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인상적이고 짤막하면서도 위대한 연설을 남겼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날 그의 연설은 불과 2-3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영어의 유명한 일곱 단어로 시작된 연설이었습니다. “Never-Give-In. Never-Never-Never-Never--"(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코-결코-결코-결코.) 그렇습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다. 그러면 새해에 우리는 새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헛수고의 밤을 지난후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예수께서 한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베드로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단초는 예수님이 그의 배에 오르신 후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먼저 그의 배를 사용하기를 요구하셨고 시몬 베드로는 기꺼이 예수님을 그의 배에 초청해 들이신 것입니다. 본래 2절에 보면 두 척의 배가 있었는데 한배는 야고보 요한 형제의 배였고, 또 한척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의 배였을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야고보 요한은 시몬의 동업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날 아침 호숫가에 모인 무리들을 대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할 필요를 느끼셨고 그래서 시몬의 배를 강단삼아 해변가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시몬은 이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배를 내놓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며 발견하는 흥미로운 사건의 하나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실 때 마치 그것이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종려주일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중에 나귀타고 입성하실 일을 위해 제자들에게 건너편 마을에 가서 나귀새끼를 끌고 오너라고 요구하신 일이 생각나시는지요? 만일 그때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마태21:3)고 말씀하십니다. 자신과 상관없어 보이는 마을 한 집앞에 있었던 나귀새끼에 대하여 그가 주인이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또 한번은 유월절이 가까운 어느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디에서 유월절 식사파티를 할 것인가를 걱정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성내에 들어가면 물동이 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터인데 그를 따라가 그 집주인에게 내가 나의 제자들과 네 다락방을 사용하겠다고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가14:12-16) 도대체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모든 것을 소유하시는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기도하며 주여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본문 8절에서도 시몬 베드로가 마침내 예수의 무릎앞에 엎드리며 주여라고 고백합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예수의 주인되심-곧 주권(Lordship)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예수의 주인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 그분을 주인으로 초청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님, 내 배를 쓰십시오.” “내 집을 쓰십시오.” “ 내 돈을 쓰십시오.” “내 재능을 쓰십시오.” “ 내 시간을 쓰십시오.” “ 내 몸, 내 존재를 쓰십시오.” 이것이 기적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를 디디고 일어서는 그리스도인의 비밀인 것입니다. , 그러면 한해동안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내 인생의 영역에 예수를 주인으로 다시 모셔들이시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 예수님이 참으로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초청되신다면 이제 곧 기적은 시작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헛수고의 밤을 지난후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인으로 초청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제부터 주인되신 그분의 말에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주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자기가 아직도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도 한동안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된 인생을 산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오늘도 그렇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가장 보편적인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만나기까지 그렇게 산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의 베드로의 실패는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이렇게 고백할수 있었습니다. 다시 5절을 읽어보십시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그러나 우리는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 그가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상식과 이성의 우상을 깨뜨렸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 이 헛수고의 밤을 지난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4절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에 따른다면 해가 뜬 후에는 깊은 물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상식을 깨트리는 명령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바닷가에서 어부로 지금까지 고기잡이의 전문가인 베드로가 이 아마츄어의 말에 순종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6절에 보면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저는 베드로가 사용하던 그의 그물이 찢어지던 그 순간 그의 이성과 상식이 찢어지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이성이나 상식을 무시하는 종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저는 기독교가 단순히 이성과 상식에 매여있는 종교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상식이 실패한 곳에서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어내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파스칼은 참된 신앙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금년한해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내 인생이 코너에 몰려 있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면 이제 내 이성과 상식의 우상을 깨트리시고 당신의 인생의 참된 주인이신 예수님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아니 새해부터는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며 살겠습니다.”. 더 이상 과거처럼 내 잘난 것, 내가 자랑하던 내 판단력, 내 경험에 의지하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 붙들고 순종하며 살겠다고 말입니다. 사실 주인되신 하나님을 떠나 내 판단만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바로 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의 주께 대한 순종이 놀라운 기적을 가져왔을 때 그는 본문 8절에서 주인되신 그앞에 엎디어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의 인생의 장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저는 적어도 예수의 주권을 고백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결단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본문에 근거하여 두 가지를 약속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축복을 이웃들과 더불어 나누며 사는 인생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 본문에서 찢어지는 그물에 넘쳐나는 고기를 인해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을 불러 나누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축복의 근원된 성도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요! 둘째는, 사람들의 영혼을 낚는 어부의 인생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네게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는 이제 고기 잡고, 고기 팔아, 아파트 평수 넓히고, 좀더 큰차 타고 다른 사람들보다 잘먹고 잘사는 인생만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나를 통해 내 이웃들이 구원받고 변화되고 새 인생을 사는 이 재미, 목장교회 목자 하는 재미로 인생을 살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제 인생에서 두 번쯤 목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까 하는 유혹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를 돌려세운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세상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이 보다 더 보람있는 일이 있을까?”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보람찬 일은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은 꼭 목사가 아니더라도 평신도로서도 걸을수 있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을 낚는 인생을 살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시면 됩니다. 인생의 최후의 후회는 목적의 결여나 목적의 저급함을 위해 인생을 낭비한 후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의 인생이 헛수고의 한밤으로 결론나지 않기 위해 이렇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러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결심하고 새해로 가시겠습니까?

송년주일

최 후 의 칭 찬

고린도전서 4:1-5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동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성한 자존감입니다. 그래서 신성한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자기 자신이 받아야 할 평가를 일반적으로 칭찬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에 대해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데 그것이 바로 칭찬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칭찬 들으려는 자녀들은 부모에게 효자가 됩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자기 자존감을 가지고 칭찬을 받으려고 할 때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리고 착하게 자랍니다. 이런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직장에 들어가서도 그 능력이 뛰어난데 자기 직장에서 칭찬받는 사람으로 창의력을 개발합니다. 또 이런 사람들은 사회와 국가에 기여하는 인물로 자기를 발전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도 성실하게 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칭찬받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자기가 압니다. 우리는 자기 존재에 대하여 언제나 분명한 평가를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한 해가 기울어갈 때 우리는 이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 ‘한 일 없이 세월이 갔구나!’ 하는 그런 아쉬움, 그리고 내 인생에 종말이 다가오고 있구나!’라는 경고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미래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생각한다면 오늘은 우리 생에 최후의 날입니다. 금년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에 웃는 사람이 바로 성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후에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면서 매 어떤 계기마다 소년시절, 청년시절, 장년시절 그때 그때마다 자기 자신을 점검하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최후의 칭찬은 사람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여기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마땅히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신분에 대한 기억이고 하나는 미래에 주님 앞에서 받아야 할 상급에 대한 기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분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 내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것은 내 공로와 관계가 없습니다. 내 자격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일 뿐입니다. 이것은 바로 지금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에 받아야 할 은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상급입니다. 내 인생이 끝나는 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자기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또 종말을 생각하는 사람은 가치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자기 노년을 생각하고, 종말을 생각하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퇴직을 생각하고, 학생은 졸업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과 상은 두 가지 상관된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입니다.

구원은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상은 노력으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미 지금 받은 것이지만 상은 미래에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는 자마다 공평하게 받는 것이지만 상은 차별해서 받는 것입니다.

상은 성경에 면류관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는 다섯 가지 아름다운 면류관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기쁨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사람들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의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면서 소망 가운데 산 사람들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가르치며 선포한 사람들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썩지 않는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면서 진실하게 산 사람들이 받는 면류관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을 참고 주님의 그 날을 위해서 순교자의 은혜를 사모한 사람들이 받는 면류관입니다.

면류관은 헬라어로 스데반이라는 말입니다. ‘stevfano"’ 면류관을 받을 사람들은 스데반처럼 살아라 그 말입니다. 이 스데반이라는 이름은 개인에게 준 이름도 되지만 모든 성도에 대한 이상적인 표본을 하나님께서 스데반으로 제시하면서 너희는 모두 다 스데반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믿음으로 가기 때문에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믿음으로 간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신앙적인 교리이고 이것을 실존적으로 현재 신앙고백으로 다시 펴놓는다면 천국은 누가 가나?” 이렇게 묻는다면 가고 싶은 사람이 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천국은 상 받을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상 받을 것도 없는데 뭐하러 천국에 가겠습니까 간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허상에 그칠 수가 있습니다. 천국을 사모하지 않으니까요. ‘내가 일생동안 예수 믿었으니까 천국에 간다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에 대한 믿음의 보상을 얘기하지만 구체적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천국은 가고 싶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고 또 다른말로 말하면 상받을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예배드리는 사람마다 다 주님을 만나고 있지요.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이해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5)

그 때라는 말은 종말의 때에 주님 재림하시는 날, 내 인생이 끝나는 날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칭찬받을 사람이 누구냐? 소명받은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꾼, 충성스러운 일꾼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소명받은 일꾼

믿는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이요여기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말은 당시에 노예들 중에서 배 밑층에서 노 젓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영화 벤허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벤허가 배 밑창에서 계속 노를 젓는 것을 말입니다. 선장의 지시를 따라서 계속 노를 젓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자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종은 일은 하지만 삯을 받지 못합니다. 소유가 없습니다. 명예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노예 가운데 자원적 노예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노예는 불행한 노예요, 강압에 의해 억지로 된 노예지만 자원적 노예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나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기에 일생동안 그리스도에게 종노릇 하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이런 자원적 노예는 아무나 못됩니다. 일반적인 노예는 돈에 팔린 사람, 조상적부터 노예인 사람, 전쟁의 포로자들입니다. 그런데 자원적 노예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난 후에 자원해서 나는 일생동안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노라이렇게 고백하고 자원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거저 은혜를 받았고, 공로없이 받았고,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나는 주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일꾼은 삯꾼과 다릅니다. 일꾼은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고 삯꾼은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일꾼은 주인이 원하여 일하는 사람이고 삯꾼은 자기 욕구에 따라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일꾼은 주인을 위해서 일하고 주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고 삯꾼은 자기를 위해서 일하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찬양을 해도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이 생각을 갖고 해야 합니다. 직장에 가서 일하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일할 뿐이다.’ 그 심정을 지녀야 됩니다.

사명자가 하는 일은 세상들이 하는 일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사명자는 다른 사람이 열심히 하니까 나도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으니까 나도 그만 둔다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그 마음에 감동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전 4:3)고 했습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인정하고 주님께서 나에게 대한 기대가 큰 것이 중요하지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말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세 번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두 번째는 정신적으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정신적으로 새로운 깨달음이 있을 때 두 번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는 철 들었다고 말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 두 번 태어납니다. 세 번째 태어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자기 할 일을 깨닫는 사명을 받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두 번까지 태어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 사명을 받았다이런 숭고한 정신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꾼

내가 마땅히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다이것이 두 번째 칭찬받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반드시 그 사명에 대하여 마음속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뭡니까?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오늘날 이 비밀은 다 공개되었지만 지난 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오신 그때도 이것은 비밀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이 복음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들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벨은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비밀을 맡은 자로서 죽었습니다. 노아는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비밀을 맡은 자로서 재산을 다 팔고 일생동안 방주를 만드는데 그의 생을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이 비밀을 맡은 자로서 본토를 떠났습니다. 자식을 재물로 드렸습니다. 모세는 이 비밀을 알았기에 이 비밀을 맡은 자로서 애굽을 떠났으며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렸고 그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이 비밀을 알았기에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비밀을 안 룻은 모압을 버리고 기대할 것도 없고 미래에 아무런 희망도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서 그의 생을 이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밀을 아는 자요, 맡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에 죽는 예수를 아는 것과 십자가의 죽음의 비밀을 자기가 맡은 자, 이것이 바로 위대한 일꾼 되는 비밀이요, 칭찬의 비밀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 비밀을 맡은 자들이 소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가 많았으나 이 비밀을 맡은 자는 소수였습니다. 이 비밀을 맡은 자는 제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중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들었으나 그 비밀을 맡은 자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머리에 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가 나에게 좋은 일을 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맡았다는 것입니다.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움직이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대통령과 대통령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넓은 차원에서 이 세계를 움직이는 큰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역사를 움직이는 통치자들이 아닙니다. 이 교회를 움직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장로나, 목사나, 권사나, 직분 가진 자들이 교회를 움직이는 것 같지요? 아닙니다. 이 교회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있습니다. 자기 몸으로 주님의 비밀을 맡아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를 움직이고 역사를 움직이는 핵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누구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비밀을 듣기는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듣습니다. 그런데 비밀을 맡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말은 입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별세의 비밀입니다. 최고의 성서의 비밀은 바로 별세입니다.

 

충성스러운 일꾼

이 비밀을 맡은 자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사실이 뭡니까? 충성입니다. 충성은 몸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에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동력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구한다는 말은 얻는다는 말이 아니고 발견한다는 말입니다. 맡은 자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래서 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을 맡은 자입니다. 여기에 발견되고 있는 것이 충성입니다. 충성은 그 원어의 뜻이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한결같은 진실입니다. 처음과 나중이 같다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일꾼은 일관되게 전진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합니다.

일본 동경에 유명한 선교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미국의 스탠다드 석유 회사에서 극동 담당 대리자를 선정하는데 이 선교사가 유창하게 영어도 잘하고 꼭 적임자인지라 사람을 보냈습니다. “당신이 여기 선교사로 와 있는데 우리가 연봉 10만불을 줄테니 우리 극동 담당 대리인을 맡아주시오.” 선교사는 거절했습니다. 20만불로 올렸습니다. 그래도 거절했습니다. 30만불, 40만불, 나중에는 50만불까지 올렸습니다. 그래도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연봉을 준다는데도 왜 거절합니까? 더 올려드리면 가시겠습니까?” 선교사는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주려고 하는 연봉은 5만불도 많소. 그러나 내가 이것을 거절하는 것은 그 하는 일이 너무 작기 때문이오. 나는 극동 석유 담당 대리인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이오. 나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요.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오. 그래서 이것을 못하는거요. 미안하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이 뭡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한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오는 충성이 있어야 됩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헌신된 일꾼 찾기가 참 힘듭니다. 매 해 연말이 되면 주일학교 교사 찾는 광고, 성가대원 모집 광고, 차량 안내자 모집 광고를 내지만 자진해서 일하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주일학교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도 여전히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고 주일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나서도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가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 사람을 가르치고 세우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현우씨가 최근에한국이 미국에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원래 반미주의자요, 미국의 나쁜 것과 제국주의 국가가 약소국가를 착취하는 나쁜 것만 골라서 책을 4권이나 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미국의 약점을 더 많이 알기 위해서 유학을 갔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8년동안 공부하면서 신기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련도 망했고, 사회주의는 다 망했고, 동유럽도 비틀거리고 있고, 일본도 시들거리고 있는데 미국은 전혀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도대체 미국은 왜 망하지 않는가를 그가 8년동안 연구하고 쓴 책이 바로 이 책인데 그는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미국은 Volunteer 정신이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Voluntee'는 자원봉사 정신을 말합니다. 자원 봉사가 미국을 살리고 있다는 것을 그가 발견한 것입니다. 형편이 어렵거나 가난하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1년에 4천만명이 미국의 자원자입니다. 3억 인구를 계산한다면 7분의 1이 자원자입니다. 미국의 청소년은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자원 봉사 성적이 낮으면 대학에 못갑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했어도 자원 봉사 성적이 나쁘면 대학에 못갑니다. 이렇게 훈련을 쌓았기에 저들은 공부를 해도, 연구를 해도, 무엇을 하든지 봉사하는 마음이 밑에 깔려있습니다.

우리는 돈 받는 일이라면 눈이 커지는데 자원봉사 하자고 하면 자라 목 들어가듯이 뒤로 쏙 빠집니다. 충성스러운 일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원자입니다. 자원에서만 충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2년 전에 스코틀랜드에 있는 에딘버러에 갔는데 한 곳에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줄을 서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개 무덤을 보려고 서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무슨 무덤인가 하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봤습니다. 주인의 무덤 옆에 개 무덤이 있었습니다. 사연인즉은 주인이 죽었습니다. 주인이 죽자 개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아무리 끌고 가도 또 다시 거기에 와서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밥을 갖다 주면 먹고 안그러면 굶고 했는데 그러다가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주인 무덤 옆에 개를 묻어주고 그 무덤에 비석을 세워주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종 주인 곁에 잠들다.”

주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은혜를 보답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그의 비밀을 맡은 자요,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동대문에서 장사하는 우리 집사님이 나보고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특별한 재능이 없습니다. 가졌다고 한다면 장사해서 돈 버는 것입니다. 나는 돈벌어서 교회에 많이 바칠 것이니 목사님은 이것을 가지고 선교 사업을 하십시오.” 이 분은 동대문에서 장사해서 돈을 벌어서 매년 최고의 헌금을 해 왔습니다. “나는 돈 벌어서 주님의 일을 해야지이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재능이 뭡니까? 직장의 지위가 높습니까 그 지위로 일을 하십시오. 말을 잘합니까 말로 일 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오. ‘네 가진 것으로 주님의 일꾼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송년주일

벧엘로 올라가자
창세기 351-8


묵은해를 어떻게 보내며 새해를 어떻게 맞이하느냐 하는 것은 오는 새해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성공하고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문제와 크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금년 마지막 주일, 뜻 깊은 시간에 "벧엘로 올라가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와 축복을 받고자 합니다. 야곱의 가족이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지나면서 과거에 벧엘에서 체험했던 은혜와 첫 믿음, 첫 사랑을 다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세겜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고 큰 낭패를 당하였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세겜에 머물러 산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에게는 디나라고 하는 예쁜 딸이 있었는데 그 낯선 땅에 왔으니까 밖으로 구경을 나갔다가 그 땅 추장 세겜이 디나를 보고 반하여 자기 장막에 데리고 들어가서 성폭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디나와 결혼하도록 허락만 해 준다면 무슨 예물이라도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하니까, 야곱의 아들들은 우리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결혼을 하지 않으니 정말 결혼하기를 원한다면 너희 땅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겜 사람들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3일쯤 되니까 모두 움직이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을 때 디나의 동복 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밤에 쳐들어가 족장을 비롯하여 모든 남자를 다 칼로 쳐죽였습니다. 게다가 야곱의 아들들이 쳐들어가 소와 양을 비롯한 모든 재물을 다 약탈해 왔습니다. 야곱이 이 말을 들으니까 큰일났습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3430)"고 했더니 디나의 오빠들이 대답하기를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라고 불평했습니다. 이제 야곱의 온 가족은 몰살을 당할 수밖에 없는 큰 환난이 다가왔습니다. 야곱은 앞이 캄캄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절망적인 때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35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잘못하여 환난 당하는 때에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피할 길을 주시고 구원해주십니다.




1. 벧엘은 어떤 곳인가?




벧엘이 어떤 곳이기에 절망에 빠진 야곱에게 나타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고 하셨을까요?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후 에서가 사냥하러 나간 사이에 야곱이 먼저 양을 잡아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들어가 축복기도를 받고 난 후 에서가 복수심을 가지고 야곱을 죽이려고 할 때에 괘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도망하여 가다가 캄캄한 밤에 돌을 베개하고 잠을 잘 때에 사닥다리가 하늘에서 땅으로 놓여지고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축복의 말씀을 하시고 또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기를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하고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베개 했던 돌을 세워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곳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서원하기를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했고,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한 곳입니다.


벧엘은 사닥다리가 놓여지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하늘 문이 열린 곳입니다(2812). 사닥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한 것으로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고 영접하여 거듭난 체험이 있는 곳입니다. 그 체험이 있던 곳으로 다시 올라가라는 명령입니다.


요한계시록 24절에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회개치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신앙의 체험이 있는 곳입니다(2813-15). 그러므로 타락한 데서 다시 일어난 신령한 체험의 신앙을 다시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성전을 짓겠다고 서원한 곳이므로 야곱을 다시 일깨워 주시려고 "일어나 벧엘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약속하고 서원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신명기 2321-2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대로 행할찌니라"고 하셨고, 민수기 302절에는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를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실 무망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도 언젠가는 지키시는 분이고 동시에 우리도 하나님께 서원하거나 약속한 것은 꼭 지키기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십일조도 하기로 했으면 온전한 십일조를 제대로 해야지 십일조가 안 되는 것을 십일조라고 드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십일조를 했다 안 했다 하지 말고 꾸준히 하면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2. 벧엘로 올라가려면?




벧엘로 올라가려면 끊을 것을 끊고 버릴 것을 버리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이방신을 버리라.


하나님이 제일 가증히 여기시는 죄,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는 죄가 바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야곱은 하나님만 섬겼으나 그의 가족은 세상 물질 문명에 속화되어서 죄악에 물들었던 것입니다. 이는 야곱 자신의 신앙이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가졌는데 그것은 점치는데 쓰는 것입니다(창세기 3119).


우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자식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탐심도 우상 숭배라고 했습니다(골로새서 35).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하는 것과 완고한 것도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사무엘상 1523). 귀걸이는 옛날 점치는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런 우상과 죄악을 묻어버렸습니다. 그런 비싼 보물도 땅 속에 묻어 버린 것은 그런 보물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회개하기 위해서는 물질의 손해도 감수해야 참된 회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과 몸을 다 정결케 해야 벧엘로 올라갈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도로써 합당치 못한 생활 습관이나 먹고 마시는 것은 있지 않습니까? 묵은해와 더불어 깨끗이 정리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야곱은 과거에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을 정결케 하고 다시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갔습니다.


그릇을 깨끗이 준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447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정결케 해야 죄를 안 짓게 되고 마귀가 침투해 들어오지 못합니다.


의복을 바꾸라고 하셨습니다.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의복을 바꾸라고 했는데 의복은 행위를 의미합니다. 거짓된 행위, 더러운 행위를 벗어버리라는 뜻입니다. 더러운 행실을 버리고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2002년 새해의 벧엘로 올라가려면 모든 죄악된 행위, 거짓된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더러운 몸과 마음과 행실로 새해를 맞이해선 안되겠습니다.


야곱이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리라(353)"했더니, 야곱이 전에 형 에서가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고 해결해 주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야곱의 가족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몰살당할 뻔한 환난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두려워 떨며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단을 쌓고 엘벧엘이라고 했습니다. 즉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창세기 357).




3.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




벧엘이란 곳이 다른 지역보다 1,000여 척이나 높은 곳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올라가야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했고, 하나님도 "올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끊임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보호를 받는 비결은 날마다, 해마다 올라가는 신앙이라야 합니다. 영적 상태가 내려가면 머지 않아 큰 환난과 실패를 당하게 됩니다. 전진하고 올라가야지 후퇴하고 내려가면 큰일납니다.


히브리서 10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신앙 생활은 자전거 타는 것과 같습니다. 자전거를 타면 계속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야지 제자리걸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뒤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전진하고 올라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재물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는 곳이요 "여리고"는 강도가 들끓고 죄악이 관용한 곳입니다. 즉 마귀가 들끓고 죄악이 관용한 곳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던 성도가 믿음이 식어져서 교회를 멀리하고 곶감 빼 먹듯이 예배 시간을 빼먹고 십일조를 하다가 건너뛰기 시작하면 큰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계속 올라가야 합니다.


룻기에 보면 엘리멜렉의 가족이 베들레헴에서 살다가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이방나라 모압땅으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베들레헴은 후에 예수님이 탄생한 곳이지만 그 이름의 뜻은 "떡집"이란 뜻입니다. "말씀의 집" 교회를 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벌어먹고 살기 힘들다고 이방 땅 모압, 즉 교회도 없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세상으로 타락하여 내려간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엘리멜렉 가장도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는 큰 슬픔을 당했습니다. 결국 나오미와 그의 두 자부 오르바와 룻만 남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내려간다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힘들어도 계속 올라가고 계속 전진해야 됩니다. 새해부터 올라가는 신앙 생활을 합시다. 그 때에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저는 목회생활 시작할 때부터 계속 주일 헌금도, 감사 헌금도, 십일조도 계속 올리곤 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도 계속 부흥되고 커지고 올라가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새해 첫 주일부터 마음먹고 주일 헌금 단위를 올립시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온전한 십일조, 둘째가 풍성한 감사, 셋째가 밤 예배 출석입니다. 그렇게 될 때 분명히 여러분이 복을 받고 우리 나라가 복을 받게 됩니다. 기왕 십일조 할 바에는 온전하게 제대로 하고 그렇지 못하면 감사 헌금으로 드리고 매 주일 못하면 한 달에 적어도 한 번 이상씩 감사 예물을 드리도록 합시다. 100200리 멀리 계신 분은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밤 예배에도 잘 참석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더 크게 기도하고 더 많이 기도하도록 합시다.


몇 일 전 기독교 방송도 아닌 일반 TV 방송에서 의학 연구팀의 발표를 보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묵상 기도하는 것보다 목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것이 병 치료가 두 배 이상 빠르고, 암 병에 걸리지도 않는다고 미국 심장 건강 협의회 회장인 스미스 박사가 발표했고, 불임증 치료하는데도 기도해 준 사람들이 기도 안 해준 사람보다 두 배 이상 치료가 빠르더랍니다. 미국의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대학의 의학 연구팀의 팀장인 콤스톡(Comstock) 박사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정기적으로 교회에 다니며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사람이 교통 사고 나는 비율이 훨씬 적고, 자살자도 훨씬 적고, 암 병 특히 후두암 같은 병에 걸리는 일이 몇 분의 일로 적다는 것입니다. 그는 설명하면서 아마 교회에 나와서 찬송하고 기도할 때 나쁜 것들이 다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 바라고 예수 믿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런 유익한 점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금식기도도 기도 중에 제일 강한 기도이며 영력을 얻고 응답 받는데 제일 좋은 기도이기도 하지만, 신체적으로도 간도 좀 쉬게 해 주고 신장도 좀 쉬게 해 주면서 생수만 마시면 속에 노폐물 묵은 찌끼를 씻어내기 때문에 육신 건강에도 좋고 정신 건강에도 좋다는 것입니다. 새해 1, 2, 3일 가급적 금식하며 기도하여 응답 받도록 합시다.

 

송년주일

날이 저물어 가도

누가복음 9:10~17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 가운데 유독 선민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 가나안(팔레스타인)이 있었습니다. 그 땅 가운데서도 고기잡이 집혹은 어촌이란 소박한 이름을 가진 벳새다(Beth-Said)가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벳새다가 여러 개 있었으나, 신약에 언급된 벳새다는 요단강 입구, 갈릴리 호수 북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곳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의 고향 벳새다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예수께서 세계선교를 출발시킨 복음의 고장(故場)이 되었습니다. 여기 벳새다에 해가 기울어지는 하루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날이 저물어 가매…」(9:12)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2003년 마지막 연종주일을 맞으면서 날이 저물어 가도라는 말씀에 마음을 열기를 바랍니다.

. 머무름이 없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날이 저물어 가매…」(9:12)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415절에는 저녁이 되매…」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635절에는 때가 저물어 가매…」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다 서산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하루의 마지막 지점을 알려주는 시간의 표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저녁이 되매라는 말의 관념에 두 가지 경우의 저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경우의 저녁은 늦은 오후를 뜻하였습니다. 오후 3시부터 일몰까지를 의미하였습니다. 두 번째 경우의 저녁은 일몰 이후부터 4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을 의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날이 저물어 가매…」라는 말이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저녁이 된다’, ‘때가 저문다’, ‘낮이 저물어간다등의 말은 첫 번째 경우의 저녁, 곧 해가 기울어지는 늦은 오후를 뜻합니다. 우리에게 주는 이 장면의 영감 가운데 하나는 예수께서 그 시간 속에 머물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예수께서 지구가 햇빛을 등지는 저녁의 장면을 수용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창조하신 24시간의 창조의 법칙을 수용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1: ) 창조질서를 수용하시는 주님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 대속을 위하여 화육강세하신 예수님의 시간 속에서의 사역을 보여줍니다. 아니 그가 창조하신 시간은 머무를 줄 모르고, 창조주의 통치와 섭리 아래 지배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13:33)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머무름이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구속운동의 진행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날이 저물어 가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도 그 저녁과 아침은 위대한 하나님의 죄인 구원의 진행을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시간임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바울의 영감의 표현대로 말하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1:9) 시간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시간의 흐름은 결코 무의미의 반복이 아니라, 죄인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의미 있는 자기 시간의 사용이고, 통치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사가 성취되어 낮과 밤의 경계가 필요 없는 영광 충만의 세계(21:23~25)가 도래하기까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시간의 흐름은 계속될 것입니다.

 

. 무리들의 생존을 위해 200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그 시간에 재빠르게 계산한 결과의 수치였습니다. 요한복음 67절에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때는 저물어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께로 모였던 군중은 여자와 유아 외에 남자 장정만 5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벳새다의 빈들이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도 모여든 큰 무리에게는(6:5) 당장 생존을 위한 빵이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9:12)라고 제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계산이 빠른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6:5)라고 넌지시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그 옆에 섰던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6:6)고 주님의 속뜻을 알아 맞추었습니다.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인생은 생존을 위하여 먹이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그 장소가 빈들이든, 그 시간이 날이 저물어 가는 저녁이든, 시간 속에 사는 인생들은 빵이 필요한 존재들임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침을 알리는 시간, 대낮을 알리는 시간, 저녁을 알리는 시간은 생존을 위해 빵을 먹으라고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날이 저물어 가던 벳새다의 빈들에는 큰 무리들의 생존을 위하여 을 요구하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의 재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 그 장소, 그 무리들에게는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최소한 200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필요하였습니다.

 

. 예수께서 그 시간, 그 장소에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1414절에는, 그곳에 계신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큰 무리를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보시고 불쌍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있는 여러 종류의 병인들을 고쳐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911절의 경우에는, 그 시간 그곳에 계시던 예수께서는 저희를 영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병 고칠 자들은 고치셨다고 하였습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똑같이 예수께서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향하여 축사(감사기도)를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떡을 떼어 나눠주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거기 모인 모든 무리(유아, 여자, 남자)들이 저희의 원대로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다 배불리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버리지 말고 다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거두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하였습니다(9:10~17). 실로 날이 저물어가던 벳새다에 축복의 잔치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 기적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생명의 공급자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곧 생명의 떡으로, 그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아니함을 예고해주신 진리의 선언과도 같았습니다(6:35).

 

문제는 벳새다의 빈들에 날이 저물어 가도, 그곳에 모인 큰 군중들이 시장하여도, 그곳에 예수님이 계심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벳새다 빈들에도 주님이 계셨습니다. 큰 무리를 쳐다보시는 주님의 긍휼이 있었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있었습니다. 병을 고쳐주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환영하는 주님의 영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먹여 주시기 위한 주님의 축사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열두 바구니의 여분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벳새다는 빈들이 아닙니다. 꽉 차버린 벳새다였습니다. 큰 무리로 꽉 차고, 주님으로 꽉 차버린 부요의 벳새다였습니다. 주님의 긍휼, 주님의 말씀, 주님의 능력, 주님의 축복기도, 그리고 다 배불린 무리들로 꽉 차버린 벳새다였습니다. 그렇다면 빈들 벳새다의 날은 저물어 가도, 결코 어두운 밤이나 배고픈 밤이 아닌 광명의 벳새다, 축복의 벳새다가 아닌가! 주님이 부활하신 오후에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날이 기울어지는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바로 그 시간, 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였습니다. 저들은 날이 기울어지는그 시간에, 주님의 축사를 받는 그 순간에 저희 눈이 밝아졌습니다. 길에서 들었던 그 말씀이 저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주었습니다. 저들은 날이 기울어지는 그 어둠 속을 헤치고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뛰었습니다. 그리고 모인 제자들에게 예수 부활의 사실을 토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고 말았습니다(24:29~35). 날이 기울어지는 시간과 장소에도 주님이 계시면 새 광명의 세계를 맛보게 됨이 아닌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3년의 해가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2003년의 날이 저무는 연종 마지막 주일입니다. 2003365일의 아침은, 대낮은, 저무는 이 연종의 시간은 머무름을 모른 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나간 2003년의 시간은 주님이 사용하신 구속역사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온갖 영육의 필요를 풍족하게 채워주신 시간이었습니다. 그 큰 이유는 이 시간의 흐름 속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 경향인들에게는 선지와 사도의 터 위에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계승하고, 평화시대를 사는 몫으로 21세기 세계선교의 보루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 생애의 최고를 드려 새 성전을 헌당한 표적의 해였습니다.

 

바울의 영감은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고전 7:29)라고 하였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5:16)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영감 속에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영감에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3:1)라고 하였습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그 시간은 유한합니다. 짧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은 일종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칼라일(Car1lyle)시간은 기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은 생을 받은 모든 자들이 함께 공유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문제는 모든 인생이 공유하는 그 시간을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벳새다의 날이 저물어 감은 결코 무의미의 흐름은 아닙니다. 때가 찬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의미를 담뿍 싣고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벳새다의 날이 기울어져 가도 그곳은 결코 빈들일 수 없고, 어둠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공간, 그 시간 속에 구원의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날이 기울어가는 벳새다의 저녁은 새로운 동이 트는 아침의 벳새다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간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예외없이 자신이 받은 날이 기울어가는 인생의 저녁이 있습니다. 저 애굽의 통치자 바로 앞에 나타난 가나안의 정신적인 지도자 야곱은 당신의 연세가 얼마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바로의 이 질문을 다르게 말하면 인생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때 야곱의 대답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험악한 세월 130년이라고 대답한 것은 바로 인생을 대답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은 인생을 묻고 인생을 답하는 것이 됩니다. 시간은 인생 그 자체의 출생과 진행과 내용과 마지막을 알려주는 표식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적 황혼이 다가오는 역사의 날이 기울어지는 저녁이 있습니다. 바로 이때입니다. 신약시대는 저녁이 되는 역사의 종말기입니다. 깨어 있는 종들과 교회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전파의 마지막은 시간의 끝이라고 하였습니다(24:13~14).

 

벳새다의 날이 저물어가도 주님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저물어 가는 벳새다에 계신 주님은 날이 밝은 벳새다의 아침에도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저무는 2003년의 오늘의 역사 속에도 주님은 우리 중에 계십니다. 그리고 축복의 마침표를 찍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가 보지 못한 2004, 미래의 새 아침에도 주님은 우리 중에 계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쓰시는 자신의 시간은 인류구속을 성취시키는 때가 찬 경륜의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 아 멘 -

형통한 인생

왕하 18:1-8

 

사람은 누구나 형통한 인생을 소원합니다. 형통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형통은 내 마음, 계획, 그리고 차질없이 뜻을 이루어 얻은 결과입니다.

27세에 유다의 왕이 된 히스기야를 성경은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더라고 평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셨기에!

창세기 39장에서 요셉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다. 실로 우리가 깨달아야할 것은 재앙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재앙이 있었다는 것은 과거지사입니다. 히스기야가 형통한 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형통한 인생이 되게 하십니다. 그의 형통의 비결을 함께 터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왜 정직하였을까요? 우리는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볼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그는 다윗왕을 삶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아사, 요시야, 히스기야와 같은 성군들은 다윗을 다같이 그들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우리야의 일외에는 정직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야의 일을 내가 야훼에게 범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웅의 삶에도 하나님의 사람의 삶에도 부끄러운 오점이 있으며 그는 이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있습니다. 옥에 티와 같으나 하나님은 티가 있는 그의 이름 위에 이스라엘을 맡기셨고 나아가서 그의 후손에 메시야가 태어나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찾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정직하여 현장에서 즉사하였습니다. 아간도 부정직하여 그와 그의 가문이 멸문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다윗과 히스기야는 형통한 사람이 되었고, 아브라함 링컨도 정직하였기에 위대한 이름을 남긴 것입니다.

 

2.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연합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의지함이 바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왕권, 군사력, 그리고 이방 앗수르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 앗수르정책을 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친앗수르정책의 왕들은 난 앗수르의 신복, 앗수르의 아들이라는 식으로 말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지면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 사람의 권력, 명예, 그리고 물질 앞에 무릎을 끓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찾아가지 않고 이렇게 비굴하게 사람 앞에 먼저 무릎을 꿇는 것을 굴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형통하게 그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나를 버리시지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칠 때 칼과 단창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하여 승리하였습니다. 하박국은 야훼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사람이 형통하리라 하십니다.

히스기야는 심지어 죽는 순간에도 사람을 찾거나 의원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룩한 고집으로 뭉쳐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음의 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침상에서 벽을 향하여 모로 누워 진실과 전심으로 행한 것을 기억하여 달라고 하면서 눈물어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병은 낳고 수명은 15년이나 연장되고, 그가 생존하는 동안에 예루살렘은 태평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세상적 방법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함으로 계속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만을 향하므로 그리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그는 형통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3.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는 유다에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는 일에 일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놋뱀을 부수고, 모세 계명을 지켰고,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는 우상을 척결하고 종교개혁을 시도하여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실천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형통한 사람으로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더 사랑하니 하나님은 그를 형통한 길로 인도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믿음을 보셨고, 그의 실천적인 삶을 보셨고 그러므로 그를 가장 형통한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가 히스기야처럼 하나님 제일주의로, 신앙제일주의로 사는 모습을 보시면서 흐믓한 모습으로 우리를 형통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한해가 다 저물어가는 시점에 한해를 돌아봅니다. 과연 우리는 형통한 한해를 보냈는가말입니다. 그렇지 않았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인도하신 한해였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본 히스기야의 모습을 통하여 형통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연합하여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므로 형통한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힘으로 않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형통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되리라.

성경:딤후 2:20 -21

(20)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우리는 매일 많은 그릇들을 만납니다.

식사때나,차를 마실 때나,물을 마실 때나 만나는 것은 그릇들입니다.

그 그릇들은 용도에 따라 다 다르게 쓰이는 것을 봅니다.

 

1.나는 무슨 그릇일까?

 

어떤 그릇을 금과 은,쇠나 놋으로 만들어져 있어 견고합니다.

어떤 그릇은 흙을 빚어 도자기 굽듯이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어떤 그릇은 나무를 자르고 깍아 만들었습니다.

나는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을까요?

 

금과 은,쇠나 놋입니까?

던져도 깨어지지 않고,불이 붙어도 타지 않습니다.시험과 환난이 와도 염려없습니다.견고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흙을 빚어 만들어졌습니까?

떨어트리거나 던지면 깨어집니다.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보기에는 좋아 보여도 작은일에 실수하면 복구가 어렵습니다.외양에,외식적인 믿음의 소유자일 수 있습니다.남보기에는 좋아 보여도,시험이 오면 견디지를 못하고 흩어져 버립니다.

나무로 만들어졌습니까?

특수한 일에 쓰임을 맏습니다.잘깨어지지 않고 견고합니다.그러나 불에는 못견딥니다.타서 재가 되어버립니다.환난의 불을 견디지 못합니다.

 

나는 어떤 재료일까?아무쪼록 쇠나 놋으로 만들어진 것이길 바랍니다.

 

2.귀히 쓰이기 바랍니다.

 

그릇들을 보면 막그릇이 있습니다.막쓴다는 뜻입니다.자주 쓰이긴 하나 일회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깨어져도,누가 가져가도,잃어버려도 그저 그만입니다.

어떤 그릇은 깊이 진열하여 두었다가 필요한 행사에만 등장하기도 합니다.

값비싼 그릇입니다.자랑스런 가풍을 나타내기도 하고,품격을 보여주는 그릇들입니다.귀한 손님이 오면 내어놓고 음식을 대접하거나 차를 마실 때 사용합니다.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그릇입니다.

어떤 그릇은 진열하는데 의미를 부여 하고 바라보는데 목적을 둔 그릇도 있습니다.아무나 손대지 못하게 하고,주인만 특별한 경우에 사용하는 그릇입니다.중요한 의미를 그릇에 부여하고 있습니다.골동품일수도 있으나 하여간 값비싸거나,역사적인 흔적을 담고 있는 그릇일 수 있습니다.

자주 쓰인다고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전혀 쓰이지 않는다고 천한 그릇이 아닙니다.

주의 일에 자주 등장한다고 중요한 자리에 있다고 귀한 것으로 쓰인다고 꼭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어쩌다가 한번 그것이 오히려 모든 역사와 현장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릇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처세는 좀 달라질 것으로 봅니다.귀하게 쓰이는 것은 결국 주님의 손에 잡혀 있는 그릇이냐 아니냐의 문제이지,중요한 자리에서 내가 이름을 높이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자주 등장하면 막그릇일수도 있음을 아는 것에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릇의 용도를 보면 사람이 사용하는 것,짐승이 사용하는 것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그릇이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주님의 손에 잡혀서 사용되길 바랍니다.

 

3.항상 깨끗한 그릇이 되시길 바랍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사용되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더러운 것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깨끗한 그릇은 속이 비어 있습니다.채워지기 위하여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더러운 죄악과 정욕으로 가득차 있으면 주님의 일에 합당하게 쓰임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항상 성결한 삶에 최선의 목표를 두고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이웃의 영혼을 위하여 대기상태에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쓰임받아야 합니다.

쓰이는 경우,대부분 선한 일입니다.

그릇은 그 안에 담긴 음식 맛을 미리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나의 인격,나의 삶 즉 나의 영혼이 하나의 영적인 그릇입니다.나의 언어 말씨 말투가 그릇입니다.나의 행동,일거수 일투족이 바로 그릇입니다.나의 모습 자체가 그릇입니다.그래서 누군가 우리를 볼 때,우리 안에 무엇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나의 안에 좋은 것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처세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좋은 것이 담겨 있는지 ,나쁜 것이 담겨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좋은 그릇은 만사를 긍정적으로 생산적으로 적극적으로 선한 말로 표현합니다.다른 사람을 칭찬하고,격려하고,도움이 되게합니다.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그는 항상 감사로 인사를 하고, 감사로 작별하고, 감사로 일관된 자기 표현에

익숙합니다.소망스럽습니다.그는 성령에 이끌림받는 사람입니다.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나쁜 그릇은 만사를 부정적으로,파괴적으로,소극적으로,악한 말로 표현합니다.다른 사람을 욕하고 비방하고 비난하고 끌어내리는 사람은 그가 바로 나쁜 그릇 악한 그릇임을 스스로가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는 악한 일에 쓰임받으니 사탄의 노리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바울이 그의 후게자인 디모데에게 당부하고 있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딤후2:21)

자기를 깨끗하게 하라 합니다.

그러면 귀히 쓰임받는다고 약속하십니다.

거룩하신 주인이 선한 일에 사용하려고 하신다고 합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거룩하신 주인이 아닌 악한 영에 이끌려 부정적인 악한 일에 쓰임받는 깜짝 놀라운 경우를 많이 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날의 예수님의 보혈로 모든 악행을 씻어 버리고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선한 일에 적극적으로 쓰임받는 그읏이 되십시다.

선한 일에 말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항상 우리는 무슨 일이든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 일에나 쓰임받아서는 않됩니다.분별하여야 합니다.

선한 일입니다.

좋은 일입니다.긍정적인 일입니다.칭찬하는 일입니다.격려하는 일입니다.

채찍으로 쓰이지 마시기 바랍니다.한번 쓰이곤 버림받게 되어있습니다.꺽어 잘라 버리고야 맙니다.

좋은 것은 오래도록 보존하고 한번 쓰이고,또 다음을 위하여 깨끗하게 보관하여 대기하게 하는 것입니다.오늘 여러분이 모두 귀하게 쓰임받는 그릇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믿음의 경주"

 

본문성경/히브리서 12:1-3

참고성경/고전4:6, 11:12, 12:1-3

외울말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부를찬송

543, 444, 313

도 입

 

히브리서를 개론적으로 보면 유대교로 기독교로 개종한 많은 유대인 성도들은 지역 사람들로부터 받는 핍박을 피하기 위해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단계로 '정진해 나가도록 ' 권고하고 있습니다(6:1).

 

저자의 이 같은 간청은 유대교 체제보다 더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이유는 천사들이 그분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단번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율법보다 뛰어나신 이유는 그분이 더 나은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당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은 유대교로 복귀하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정진해 나가는 것은 시험을 이기는 믿음과, 자기 훈련과, 선한 일에 드러나는 사랑을 만들어 냅니다. .

 

전 개

 

현대인들은 운동경기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이 시대를 가리켜 스포츠 시대라고까지 합니다. 현대인들은 스포츠를 비롯한 몸이 건강해지는 것이라면 모두 하려고 하며 또 구경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운동 잘하는 사람들은 스타로 또는 왕처럼 군림합니다. 예를 들어 '월드컵 축구 왕', '야구 홈런 왕', '올림픽 금메달 왕'등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어쨌든지 현대는 운동경기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 당시에도 운동경기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편지할 때도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사람이 상을 받도록 경주하지 않느냐 이와 같이 믿음의 경주를 열심히 달리라"고 했으며, 또한 우리의 삶도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삶의 경기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앞선 사람이 되어 믿음의 금메달 왕으로 군림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인사도 만나면 '할렐루야' 헤어질 때는 '승리하세요'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영적인 믿음의 경주자, 삶에 경주자의 모습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경주자의 자세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본문에서 찾아 보고자 합니다.

 

1 . 믿음의 경주자는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 않고 달리기만 합니다.

 

진짜 선수는 경기장에서 실패와 좌절을 모르며 혹시 실패할 때는 하더라도 꾸준히 달리는 사람입니다. 미국에 홈런 왕 베이브 루드는, 714개의 홈런을 날려서 왕으로 군림하기까지는 1,330번의 스트라익 아웃도 당하는 실패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인생의 삶과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실패가 두려워 달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아무 것에도 성공할 수가 없으며 어디를 가도 누가 써주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행진이나 믿음의 경주에서 실패의 정거장이 오면 다음 정거장은 꼭 큰 승리와 성공의 역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달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 후 1914년에 에디슨은 66세의 노령에 이르러서 뉴저지주에 있는 그의 200만 달러에 달하는 실험실이 불에 타버리자 그 잿더미 위를 걸으면서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의 모든 실수는 다 불에 타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이것이 성공하는 사람의 삶의 태도요 믿음의 경주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세상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만이 승리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자에게는 실패와 좌절도 계산에 넣어야 승리의 은총이 오는 것입니다. 단 한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실패의 원인을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어도 실패했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크게 성공했으며, 바울은 주님의 명령대로 따라갔어도 풍랑과 시련이 왔으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그의 사업이나 가정에 풍랑을 주실 적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요셉이 그러했으며 야곱이 그러했고 나의 목회경험 이 그러했고 내 자녀들의 삶이 그러한 것을 저는 지금 체험하고 있습니다.

 

2.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버리고 달리라고 했습니다.

 

경주하는 자에게 얽매이는 장애물이 있어서는 힘껏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46절 이하에서는 구경거리가 된 우리에게는 벗고 뛰고 법대로 뛰고 힘껏 뛰며 나가라는 교훈을 깊이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에디오피아의 마라톤 왕 '아베베'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올림픽대회 때에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뛰어서 우승을 했습니다. 인생의 삶과 믿음의 경주에도 우승을 하는 사람은 과거에 실패와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고 주위의 부정적인 요소를 모두 떨쳐버리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로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에게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질문하고 부탁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실패에 집착하지 말고 벗어버리고 뛰라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아랍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대에게 잘못을 행한 일이 떠오르거든 모래 위에 적어두라. 그러나 그대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대리석 위에 이를 조각하라." 우리의 약점이 생각나면 다 지워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가능함을 믿고 미래를 향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자신의 실수와 남의 잘못을 바라보는 사람은 옹졸해 집니다. 스스로 왜소해집니다. 스스로 초라해 집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유치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 잘못한 것을 다 회개하고 지워버리십시오. 하나님은 다 지워버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도 회개하고 벗어 버리십시요. 삶의 실수와 범죄함을 회개하고 지워 버리십시요. 그 동안 좋은 일 성공한 일은 백 배 천 배 더 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고 뛰십시오. 하나님이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앞에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버리는 주님의 은혜가 오기를 축원합니다. 옛 생활과 질병과 가난에서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신 갑주를 입고 승리의 길로 뛰실 수 있는 주의 능력이 오기를 축원합니다.

 

3. 인내하며 집중적으로, 그리고 전심전력으로 달려 가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사는 사람들이 주님 오실 날이 가까와 온 것을 알고 일도 안하고 놀고 먹었습니다. 그때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일 예수님이 오신다고 할지라도 오늘 최선을 다해 규모있게 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삶을 충실하게 살 때에 내일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충실한 삶은 내일에 인생의 종말이 와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누가 요한 웨슬레에게 "내일 당신이 죽는다면 지금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니 "지금 하던 일 계속하겠다"고 대답했다니 얼마나 성실한 집중적인 삶입니까?

 

나와 여러분의 삶이 이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983년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는 나이 40세에 많이 배우지 못한 목수의 아들로 자신을 희생하며 자유노조를 창설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며 국내와 국제적으로 평화에 공헌한 바가 커서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일한 공적대로 노벨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면류관이 오기까지 바웬사는 군정에 짓밟히고 투옥을 당하면서까지도 전심전력을 다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 리

 

우리는 축복받은 믿음의 경주자입니다.

 

(1) 믿음의 경주자는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 않고 달리 기만 한다고 했습니다.

(2) 믿음의 경주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은 벗어버리고 달린다고 했습니다.

(3) 믿음의 경주자는 인내하며 집중적으로 전심전력으로 달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표를 잃지 말고 달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달리는 자를 도우시며 축복하십니다. 자녀를 향한 목표와 경제적인 목표와 승진에 대한 목표를 이를 때까지 계속 달리시다가 끝날 때는 영적 소망의 목표까지 성취하시기를 빕니다.

 

석수쟁이가 대리석을 깔 때에 한번 내리치고 두 번 내리치고 열 번, 스무 번, 쉰 번, 목표를 놓고 내리칩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칩니다.아혼 번 백 번 백 한 번 칠 때에 와르르 목적한 대로 대리석이 쪼개집니다. 백 번까지 치는 동안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 치는 동안 힘이 저축되어 있다가 한방을 칠 때에 무너집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해서 낙심치 아니하고 전진할 때에 어는 땐가는 그 목표를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경주자로 실족치 않고 목적지까지 이르러 땅 위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보장받고, 생명이 다하여 주의 나라로 부름을 받을 때는 영생과 부활의 은총에 참여하시는 구원받은 승리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적 용

 

1. 내게 있어서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느꼈던 적은 언제 인가요?

2. 어떻게 극복하셨지요 ?

3. 분명한 인생의 목표는 정하셨는지요?

 

합심기도

 

1. 실패는 하되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2. 믿음의 주를 바라보고 전진하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3. 오늘도 승리하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

인생의 여정 중에 실패는 있어도 좌절은 없게 하소서

실패를 거울삼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게 하소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나아가게 하소서

가정에, 일터에 늘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새사람을 입고서

성경:4:22-24

 

하나님의 은총으로 한해가 지나가고 새로운 해를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새사람을 입고서 언제나 있는 그 자리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들입니다.

 

1.새로운 출발입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도다!(고후5:17)고 선언한 삶의 출발입니다.

실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 생활이 시작된 성도는 하늘나라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서의 생활이 출발된 것입니다. 믿음 생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된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으며 축복의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를 나의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확신함으로 하나님의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얻고 섭리 가운데보고 교회와 성도가 교제하면서 부활 영생의 소망 속에서 그 믿음이 성장하므로 이 땅에서 신령한 은혜를 입어 승리하는 생활이 이루어지니 이 또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딤후 3:16)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그 가운데서 구원을 확실히 하고 성도의 생활원리를 알면서 교회를 통하여 예배드리고 성결을 배우고 교제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면서

승리하기 위하여 (7:7-8)

기도하고 상급 받기 위하여(고전 6:19-20)

더욱더 헌신하고 봉사하여 자신을 드리고 가진 것을 드리고 복음을 증거 하는 의미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늘나라의 연습이요 훈련인 것입니다.

이같은 성도의 생활의 행동 강령은 무엇일까요?

 

2. 거룩한 삶의 실천입니다. (17-24)

 

새사람은 어떻게 된 사람입니까? 새 사람은 거룩하여야 합니다.

1)그는 이방인과는 다릅니다.

2)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습니다. (18)

3)진리 안에 삽니다. (21)

4)옛사람은 벗었습니다. (23)

5)의와 진리로 새롭게 지어졌습니다.

이같은 생활은 끊임없이 훈련과 모험이 요청됩니다.

1943년 모느댐 파괴의 작전이 있었습니다. 기브슨 중령이 이끄는 18대의 항공중대가 이것을 성공시키고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주르계곡을 사용 불가능케 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는 작전이었습니다. 2,000피트를 급강하하여 시속 240마일을 유지하면서 수면 60피트로 내려가 공중 기뢰를 발사하여 댐에 명중시켜야 하는 어려운 작전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2개월간 훈련 2천 시간의 억센 연습, 25백개의 연습용 폭탄이 사용되었습니다. 모험의 기술이란 책에서 이를 소개한 앨릭링크레터는 성공이란 별것이 아니다. 그것은 훈련과 모험자체를 말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삶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으로 됩니다. 모험심이 있어야 합니다. 모버트슐러 목사는 나는 아무 것도 해보지 않고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위대한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새 사람으로 살며 거룩한 삶의 실천은 그 행동강령입니다. 거룩한 삶은 훈련과 모험에서 얻어지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를 모두 얻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새로워진 사람들을 바라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는 죄인이었으나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바른 삶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그리하여 그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으나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그렇습니다.새로워진 대표자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전에는 사울이었습니다.큰 자란 뜻입니다.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작은 자,바울이 된 것입니다.겸손한 복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그는 핍박자요,포행자였으나,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영혼들을 누구보다더 사랑하였고,이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그가 새사람이 됨으로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고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예수님 믿고 새로워진 사람들을 한번 찾아 보십시오.얼마든지 그 예가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한해의 시작을 기다리면서 성경 속의 인물들을 돌아보아 나의 삶을 새롭게 가다듬고 도전하는 삶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원합시다.

새롭게 변화된 거룩한 삶을 통하여 우리는 바른 삶을 살 수 있고,세상의 빛이 되고,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새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드립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새로운 삶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믿습니다.

새로워진 삶으로 거룩한 삶을 여행하고 있는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능력을 더하사 더욱더 하나님이 기쁘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믿아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아멘

 

 

화려한 완성

성경:디모데후서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사도바울은 그의 인생을 뒤돌아볼 때 참으로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그가 산 인생의 길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요,성령에 이끌림을 받은 길이요, 복음을 위한 전적인 헌신의 길이요, 선교의 길이요,참 삶의 길을 인생에게 제시한 길이기에 참으로 의미와 보람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참다운 목표에 최선을 다하였기에 후회함이 없는 개선의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오늘 우리도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바울 사도와 같은 자신감에 넘치는 믿음이 되도록 새로운 각오로 다짐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바울 사도의 삶을 정리하여 우리의 신앙여정에 큰 귀감이 되어야할텐데 과연 바울은 어떤 일생을 살았습니까?

 

1.선한 싸움을 싸워왔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영적전쟁입니다.그리스도가 없는 가슴,복음이 없는 인생 그리고 지역은 사단에 매인 것입니다.여기에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심는 것은 바로 사단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요 영적인 전쟁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바로 영적인 전쟁의 자리입니다.그러기에 복음으로 완전무장하고 영적대결에서 승리의 삶을 향하여 달려나가야하는 것이며 패배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에 패잔병을 소탕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전쟁준비를 하고 전쟁에는 한시도 소홀함이 없이 임해야할 것입니다.바울 사도는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영적전쟁에 대비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에베소서610에서 20절까지 보십시다.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우리의 현장이 바로 준비된 현장이요 전쟁수행능력이 극대화되는 현장이 되어야 바울 사도처럼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인생을 살았는데 다 산 뒤에 달려갈길을 다 마치고 승리의 길이었다고 자랑할 사람이 과연 우리 인생가운데 몇사람이나 되까요?그런데 사도바울은 달려갈길을 다마쳤다고 승리의 삶을 정리하고 있습니다,그는 하난미을 향한 복음을 향한 인류 구원을 향한 아름다운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잘 달렸기 때문에 후회함이 없는 일생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우리도 이처럼 후회함이 없는 일생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1923년 시카고의 에지와트 비치 호텔에 당시 미국 최대 부호였던 9명이 자리를 같이했을 때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이 '20세기의 신화'라고 보도했읍니다. 그때는 황금 만능 시기였읍니다. 그들은 돈만 번것이 아니라 큰 회사의 사장들이었기 때문에 교육도 많이 받았고 명성도 있는 성공한 사람들이 었읍니다. 세상 표준으로 볼 때 스타이고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러나 25년 후인 1948년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는 미치고 셋은 파산해서 빚에 쫓겨 도피 생활을 하다 죽었으며 둘은 출옥해서 자살 직전 있었고 셋은 자살했읍니다.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읍니다.

왜 그렇게 되었읍니까? 인생의 궁극 목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애의 기로 어디에선가 주님의 내게로 오라는 음성을 거부하고 다른 것을 목표로 삼아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를 잃어 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거나 허무주의로 살고 있읍니다. 동양 최대의 성자이고 인도인의 태양이었던 간디도 죽기 전에 자신은 괴로운 사람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읍니다. 부지런히 뛰어보았지만 그것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었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가 왕후재상이든지,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구두닦이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촛점이 있고 목표가 있읍니다. 우리는 목표가있는,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믿음을 지켰습니다.

 

사람이 끝까지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일입니다.삶의 현장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약속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약속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그 약속을 세상 끝날까지 지킨다는 것은 바로 생명의 보장이요 영생의 보장이요 천국의 보장인 것입니다.이 약속은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교활 수 보화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보화를 잃고 후회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북아메리카 서북쪽에 있는 넓은 알래스카 주는 1867년까지는 러시아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별로 가치가 없는 땅으로 여겨 72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다 팔아 넘겼습니다.

미국은 알래스카를 산 지 13년 만에 무려 3억 달러 어치의 황금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땅속에 3억 달러 어치의 황금이 묻혀 있는 것을 모르고 당장에 손에 쥘 수 있는 720만 달러에 유혹된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금 못지않게 귀중한 석유와 천연가스가 엄청나게 땅 밑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은 숨겨진 미국의 보화로 온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 현실적인 것에만 작념하여 살다가 영원한 값진 보화를 잃어버리고 후회할 우매자의 삶이 이러합니다.

천국은 무엇과 같습니까?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천국은 보화입니다, 그 보화는 믿음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이기에 바울사도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의의 면류관입니다.이것은 참으로 화려한 완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상급이 기다리는 인생 참으로 가치있는 인생입니다.상급이 보장된 삶 그것이 바로 영광스러운 구원인 것입니다.오늘 우리는 마지막 주간을 보내면서 송년주일을 보내면서 나에게도 상급이 있으리라는 확신과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다만 바울 사도처럼 될 때 이는 보다더 확실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오늘 송년주일을 맞아 화려한 완성을 향하여 달려온 나의 인생을 점검하였습니다.바울 사도에 비교할바는 아니지만 믿음의 거성인 바울 사도의 길을 바라보며 우리를 점검하였습니다.아무쪼록 선한 싸움에 승자가 되십시다.달려갈 길을 다 달려 끝까지 완주합시다.그리고 믿음을 지킵시다.변절자가 되지 맙시다.끝까지 주님에게 잘했다고 칭찬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다.그리하여 화려한 완성을 이룹시다.의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개선합시다.그렇게 될 것입니다.아멘

 

기도드립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부르신 그날이후

우리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우르잘 싸우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끝까지 의의 길을 잘 달려나가도록 나날이 임마누엘로 역사하시고

에벤에셀로 도와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우리는 잠시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과 그 권세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하고

의의 면류관도 소망하게 하셨아오니

남은 인생 가는 길에 항상 화련한 완성을 향하여

아름답게 도전하여 상급받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믿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동방의 의인

성경:욥기1:1-8

 

욥은 이유 없는 고난 속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을 경외한 동방의 의인이었다. 그의 이름 <>'울부짖는 자, 박해받는 자' 혹은 '회개하는 자'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욥은 우스 땅에 거한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칭찬과 복을 받은 부자였습니다. 그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로 평가받을 정도로 거부였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내리신 결과였습니다.

 

1. 그는 경건한 자였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1). 욥은 경건한 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순전하다는 말과 정직하다는 말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온전함을 뜻합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욥이 순전하고 정직함은 완전하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욥도 모든 인간과 같이 원죄 아래 태어난 불완전한 존재였지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인격과 신앙이 온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의 속성을 소유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악을 떠남은 하나님과 동행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셔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거짓과 함께 거할 수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기에 욥은 자신의 삶과 인격 속에서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욥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 본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에게서 더러움과 거짓과 행악의 열매가 맺어진다면 그의 믿음은 헛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심 같이 성도도 거룩하여야 합니다.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모든 성도의 삶 속에서 맺어져야 할 성령의 열매입니다.

 

2. 그는 동방의 큰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욥은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들 일곱과 세 딸이 있었고, 그의 재산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소유로 인하여 욥은 동방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성경 저자는 욥이 이렇게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이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의 자녀들이 생일날이 되어, 잔치를 하고 나면 그 다음날 그들을 불러 성결케 하려고 그 명수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욥의 행실 속에서 그가 거부가 된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경건함과 성결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열심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를 축복하신 것입니다. 물론 욥이 아무리 노력했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욥의 열심있는 마음을 감찰하시고 그에게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물질로 축복하심은 영적인 축복의 표현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하나님께 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의 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을 내리시므로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가 세상에서도 으뜸이 되며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영혼 구원 문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생활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32).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동방의 큰 자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3. 그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이와 같이 욥을 칭찬하며 자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은 욥의 신앙은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도 언제나 욥을 유의하여 보시면서 기뻐하심을 뜻합니다. 욥과 같이 경건하며 정직한 자는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며 언제나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자 사단은 하나님의 욥에 대한 칭찬에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즉 사단은 욥을 시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칭찬과 사랑을 받는 자는 악한 세력에 의해 미움과 시기를 받게 됩니다. 욥은 사단에 의해 시기를 받음으로 모진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사단과 악한 자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받아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 사랑과 칭찬을 받는 자가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욥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복된 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경건한 삶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또한 칭찬을 받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욥은 진실로 하나님만을 섬기며 경외하는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겸손하면서도 큰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품고 그 고통을 인내하고 참는 위대한 모습까지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의 오해와 멸시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변호하려는 실수도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회개 기도를 할 정도의 신앙 인격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기에 게을리 하지 않고 순전한 믿음을 지킨, 축복받아 마땅한 의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의 이러한 신앙과 인격은 세상 풍파 속에 살아가며 때로는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해야 하는 성도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자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은 이러한 신앙 자세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욥과같이 인정받고 칭찬받아 환란을 이기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기도드립니다.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거룩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시고 돌보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욥처럼 믿음의 인내를 통하여 각가지 환란을 이기게 하심도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욥처럼 끝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모두를 무장시켜 주옵소서.

믿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아멘

 

 

진정한 쉼을 향하여

마태복음11:27-30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일년 열두달 쉬임없이 달려왔지요? 한주간도 쉬임없이 달려왔지요? 인생은 무엇이냐면 달리는 것이라고 누가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달리는 삶 그래서 쉬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거나 지쳐 쓰러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잠시 쉬는 마음을 가지고 지난 날을 돌아보고 앞날을 내다보는 마음을 가집시다. 쉴때 인생은 충전되는 것입니다. 탈진된 인생에게 쉼은 바로 충전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전을 중요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창조의 섭리적인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하루를 쉬셨습니다. 그날을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쉬시면서 그날을 축복하였습니다. 거룩하게 성별하였습니다.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것은 창조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지내라는 것입니다. 모든 본업에서 떠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의 쉼은 바로 창조신앙의 고백이요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는 놀라운 은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한 쉼을 바로 이 창조주 하나님의 품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시적인 삶을 말씀하십니다.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특히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 아들이 허락한 사람 이외에 계시의 세계를 알 사람이 없습니다.

계시의 세계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비밀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은총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온갖 좋은 것이 나타나는 능력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진정한 우리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세계입니다. 우리가 누려야할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능력의 본체인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알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그 세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지는 세계라고 가르쳐 주십니다.그리고 그 세계는 안식의 세계라고 가르쳐 주십니다.천국은 바로 안식입니다. 안식이 없는 세계는 더 이상 천국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안식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안식이 없으면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안식이 없으면 짜증이 납니다. 안식이 없으면 화가 납니다. 안식이 없으면 기력이 빠집니다. 안식이 없으면 탈진합니다. 힘이 빠집니다.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안식이 없으면 삶의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안식이 없으면 희락이 없습니다. 안식이 없으면 유희가 없습니다. 안식이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으집니다. 안식이 없으면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자기 안에 진정한 쉼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쉼의 방법을 모릅니다.어떻게 하는 것이 쉬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쉽은 결과는 더 지치게 하고 피곤하게 만듭니다. 쉬는 것을 논다고 말합니다. 한번 놀아보세요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음을 알 것입니다. 놀아본 사람은 압니다. 노는 것은 결국 인생의 의미를 퇴색시킵니다. 탈락자가 되게 합니다. 놀지 말아야 합니다. 노는 것이 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른 어떤 레크레이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레크레이션이 우리를 땀흘리게 합니다. 흘리는 땀이 우리를 개운하게 한다고요 천만에 말씀을 땀은 노역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몸이 지친 것입니다.적당한 땀을 흘리길 권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적당한 땀이 어디있습니까? 모두 과도하여 쓰러질 때까지 땀을 흘리는 멈출줄 모르는 사람들을 우리는 무수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쉼의 의미와 장소와 방법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쉼은 바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삶의 방식입니다.

주님은 내게로 오라 하십니다.그에게 가면 쉼이 오는 것입니다.

그의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쉼은 그리스도 에게로 오는 것이요 쉽은 그가 계신 곳으로 나오는 것이요 쉽은 그가 주시는 짐을 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관계된 삶이 바로 쉽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나를 맡기고 무들링에 빠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그에게 나의 짐을 다 맡기고 그가 주신 축복의 짐을 지고 인생을 새롭게 출발 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해가 다 저물어가는 즈음에

이제 우리는 모든 한해동안의 짐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왔습니다. 그의 부름을 받고 그의 이끄심을 따라 우리은 그의 앞에서 우리의 짐을 내려놓고 그가 주시는 축복의 멍에를 기꺼이 지는 것입니다. 진정 새로운 삶이 출발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 멍에를 기꺼이 지려는 마음의 출발입니다. 이 멍에는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해를 향하여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쉼의 은총이 우리에게 풍성하게 임할 것입니다.

아멘

       

       

      주님따라 사명따라

      마태복음4:23-25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어디를 가든지 간에 그곳의 안내지도가 있답니다. 그곳을 더 잘 소개하기 위하여 길라잡이가 있답니다. 오늘 우리는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병술년을 길라잡이를 따라 잘 왔는지를 돌아봅니다. 그래고 새로운 마음으로 또 새로운 해 정해년을 향하여 출발하는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우리의 길라잡이입니다.

      그분을 따라왔다면 이 한해는 승리입니다. 그분을 놓쳤다면 한해동안 무척도 많이 헤맸을 것입니다. 다시 그분을 따라 잡기를 바랍니다. 정해년이 복된 해가 될 것입니다.

      그분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따라잡기를 바랍니다.

       

      1. 온 갈릴리에 다니셨습니다.

       

      그분은 발닿는데로 가신 분은 아닙니다.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하는 위인이 아닙니다. 그분은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목적을 가지고 온 갈랄리를 다니셨습니다. 무슨 목적입니까? 영혼구원의 목적입니다. 인류구원의 목적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을 따라가려면 목적있는 발걸음이어야 합니다. 목적을 가지고 한해를 사셨습니까? 이렇게 살았다면 그분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방랑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목적이 있는 삶입니다.

      특히 영적인 삶을 통하여 자신의 구원을 견고히하고 이웃을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살았다면 이는 더말할나위없는 길라잡이를 잘 따라간 것입니다. 그분의 길의 방향이 바로 이것이니까요!

       

      2. 잘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잘 가르쳤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천국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천국복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되는 여러 가지입니다. 한마디로 구원받는 길에 관한 것입니다.

      잘 가르치려면 몸소 실천에 옮겨야합니다.

      바닷가의 게들 선생께서 게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앞으로갓하니 모두 옆으만 갑니다. 선생님은 화가 났습니다. 가르치는데로 안한다고, 그런데 똑똑한 학생이 선샘께서 시범을 보여주세요.” 라고 합니다. 게 선생님이 시범을 보입니다. 앞으로갓! 그런데 그도 옆으로 갑니다. 모든 게들이 까르르 웃었답니다.

      잘가르치려면 내가 먼저 경험하여야 합니다.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써 천국시민으로써 축복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야 잘 안내하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럴려면 예수님을 내가 먼저 잘 따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잘 따라랴 합니다. 그분의 말씀, 말투 그리고 표정 하나 하나를 놓치면 않됩니다. 그분의 동작 하나 하나를 따라 잡아야 합니다.

      어떤 MC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고향선배인 아나운서의 모든 것을 보고 녹화하여 그것을 가지고 반복하여 연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도 방송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라보고 나도 그렇게 완전히 그렇게 될 때까지 해야합니다.

       

      3.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인정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사랑은 깊은 관심과 이해, 그리고 배려 돌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싫어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신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손을 쓰는 것입니다. 달려드는 것입니다.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동정과 연민 그리고 나눔이 다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바로 동일한 현장으로 갑니다. 예수님이 가신 곳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간에 함께 수행하고 그리고 부지런히 손을 거들고 그리고 나도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그곳에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구경꾼이 되었습니까? 훼방꾼이 되었습니까? 방관자가 되었습니까? 이제 새롭게 합시다. 지난날의 이같은 모습을 다 청산하고 주님의 진정한 추총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판박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주님을 따라간 결과 무었입니까?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어떻습니까?

      소문이 나고 허다한 무리들이 좇는 결과를 봅니다.

      사명따라 산 결과이기도 합니다. 주님 뒤를 따라 가는 것, 진정한 길라잡이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사명자의 길인 것을 압니다. 한해를 청산하면서 우리는 주님 뒤를 얼마나 잘 따랐는지를 살펴보고 이제 정해년 새해를 의미있는 결심을 하고 맞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