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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의 비명] <3> 맞고 살아도 피할 곳이 없다"폭력남편과 1년 사느니 감옥에서 10년 살래요" 극단 선택

맑은샘77 2013. 11. 29. 00:27

[안방의 비명] <3> 맞고 살아도 피할 곳이 없다

"폭력남편과 1년 사느니 감옥에서 10년 살래요" 극단 선택
25년 참았던 40대 주부 "딸들에겐 고통 못물려줘" 남편 죽이며 폭력서 해방
사회·공간적 특수성 탓 폭력사슬 끊기 어려워 "10년 이상 피해" 48%
가정 유지에 무게 둔 현행법 체계도 문제

입력시간 : 2013.11.26 21: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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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의 폭행으로 사망한 이주여성 추모제에서 한 참가자가'때리는 남편, 이웃에서 신고합시다'라는 피켓을 든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윤필정(가명ㆍ48)씨는 매일 아침 하루를 어떻게 넘길지 두려웠다. 자신이 안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남편 손에 죽을 목숨이었으니까. 하지만 딸들에게 윤씨가 겪어온 그 공포, 고통, 절망을 물려줄 순 없었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윤씨는 지난 9월 25년간 함께 살았던 남편 박모(54)씨를 살해했다. 구치소에 수감됐지만 윤씨는 비로소 폭력으로부터 해방됐다. 윤씨는 "누가 예전처럼 남편과 1년을 살겠냐, 감옥에서 10년을 살겠냐고 묻는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감옥을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장녀 박수지(가명ㆍ25)씨에게서 남편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던 윤씨의 고통을 전해 들었다.

 

구치소 와서야 가정폭력에서 해방


수지씨의 가장 충격적인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집안이 부서진 물건들로 엉망이 된 채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모습이었다. 아빠는 화투를 치러 가야 하니 돈을 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당시 윤씨 부부는 집에서 전기미터기를 만들어 팔았다. 한 달 수입은 150만원이 채 안 됐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빠는 글을 쓸 줄도, 은행에서 혼자 돈을 찾지도 못했다. 모든 일상생활을 엄마에게 의존했다. 엄마는 "내가 죽으면 그만 둘 거냐"며 유리조각으로 손목을 그었다. 아빠는 피가 뚝뚝 흐르는 엄마의 손목을 보면서도 "그 정도는 수건으로 묶으면 된다"며 돈이나 내놓으라고 고함쳤다.

아빠의 폭력은 일상이었다. 니퍼 스패너 등 작업 공구가 흉기로 변했다. 인두로 지지고, 전깃줄로 채찍처럼 때렸다. 엄마 몸은 항상 상처와 멍투성이였다. 아빠에게 맞아 한쪽 귀가 들리지 않고 코가 부러진 적도 있다.

아빠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었다. 밖에선 '천사 같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집에선 폭군이었다. 수지씨는 아빠가 무서워 재채기를 시원하게 해본 적이 없다. 재채기가 나오려 하면 옷장에 들어갔다. 밤에 샤워를 하거나 컴퓨터를 쓰는 것도 금기였다. 아빠는 노름에서 돈을 잃어도, 길가다 돌부리에 채여도 다 엄마 탓이었다. 짐승 다루듯 때리고 욕한 뒤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신 안 그럴게, 열심히 살자"며 엄마에게 사과했다. 엄마는 그렇게 25년을 살았다.

하지만 엄마는 아빠에게서 벗어날 엄두를 못 냈다. 아빠가 외갓집 식구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8월엔 경찰서와 법무사 등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하지만 경찰은 "지금 폭력이 발생한 게 아니면 증거가 없어 도와줄 수 없다. 쉼터를 알아 보라"고 했다. 법무사도 법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지금 도움을 받아 격리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아빠가 돌아오지 않겠니. 나만 참으면 되지. 25년을 참았는데…"라며 체념하고 말았다.

사건 발생 3일 전 아빠는 차녀 수연(17)양에게 "총과 칼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라"고 했다. 이날 엄마는 노끈에 목이 졸려 실신했다. 얼마 전부터 잠자리 머리맡에는 칼이 놓였다. 아빠는 "기분 안 좋으면 바로 찌를 거니까 눈 뜨고 자라"고 말했다. 사건 직전 아빠는 엄마에게 망치를 들이대며 "머릿속을 들여다봐야겠다"고 했다. 윤씨는 이번엔 정말로 죽는구나 싶었다. 나이 50이 다 되도록 인간다운 대접 한번 못 받고 사는 현실을 끝내고 싶었다. 윤씨는 "나 죽기 전에 우리 딸들에게만큼은 날개를 달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정 지키려다 죽어가는 피해자들

국가가 관련법을 만들어 가정폭력에 개입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안방의 범죄는 줄지 않고 있다. 윤씨의 사건처럼 폭력이 쌓이다 시한폭탄처럼 터진다. 전문가들은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통념을 버리고 피해자 구제를 최우선하도록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가정폭력은 일반적인 폭력과 달리 장기간 지속되며, 이혼이나 쉼터 이용 등 가정을 해체하지 않고는 해결이 어렵다. 6월 정부가 발표한 가정폭력 종합대책안에 따르면 피해자의 48.2%가 10년 이상 폭력을 당했고, 평균 지속기간이 11년2개월에 이른다. 재범률은 2008년 7.9%에서 지난해 32.2%로 4년 새 4배 이상 치솟았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폭력은 일반적으로 반복될수록 강도가 심해지고, 가정폭력은 장기간 지속되는 특성이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며 "윤씨의 사례는 이런 가정폭력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런 가정폭력의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윤씨의 변호를 맡아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있는 법무법인 '원'의 원민경 변호사는 "사법부는 누적된 학대는 배제한 채 사건 당시의 정황만으로 죄질을 판단해 왔다"며 "피해 여성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신고를 받아도 "부부싸움은 알아서 해결할 일"이라거나 "지금 일어난 폭행이 아니어서 안 된다"며 피해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흔하다. 피해 여성들은 "나를 도와줄 곳은 없다"고 체념하며 다시 폭행의 소굴로 돌아가게 된다.

학대받는 여성과 아동을 가해자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을 '가정 해체'라고 보는 시각부터 문제다. 장기간 폭력에 시달리다 이혼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이 상담을 명령하는 바람에 남편에게 살해당한 여성 사례는 '폭력 가정'을 지키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보여준다. 여성보다 더 취약한 아동은 국가기관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만 친권을 제한하는 일도 1년에 한두 건 정도로 드물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장은 "피해자의 안전과 인권보다 가정의 유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현행법으로는 가정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고 소장은 "가정폭력 자체를 중대 범죄라고 여기는 의식이 확산되지 않는 한 가정폭력은 줄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