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상담/폭력

[안방의 비명] <1> 이 폭력,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16년간 폭력 시달렸지만 사회 무관심 속에 방치… 결국 주검으로

맑은샘77 2013. 11. 29. 00:28
[안방의 비명] <1> 이 폭력,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6년간 폭력 시달렸지만 사회 무관심 속에 방치… 결국 주검으로
살해 당한 30대 주부 이혼소송 냈지만
법원은 상담 명령 내려… 그새 남편 보복에 희생
입력시간 : 2013.11.24 20: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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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긴급전화 1366' 상담원들이 22일 오전 서울 중구 서소문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가정폭력방지본부 사무실에서 피해 여성과 전화로 상담을 하고 있다. 전국 공통 전화 1366은 긴급 구제가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 연중 24시간 상담전화를 받는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헤어지면 되지 왜 맞고 산대?"

가정폭력 사건이 알려지면 "맞고 살 만했던 것 아닐까"라며 피해자 책임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격리된 채 상습적으로 반복되는 안방의 폭력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고 상담원들은 입을 모은다. 도움을 요청해도 범죄로 보지 않는 인식이 가장 큰 문제다. 지난 5월 이혼 소송 과정에서 법원이 명령한 부부 상담 진행 중 남편 서모(62)씨에게 살해당한 김영희(가명ㆍ37)씨의 사례와 전문가 분석을 통해 왜 피해자 스스로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고 사회적 관심과 도움이 절실한지 살펴봤다.

 

김씨는 1988년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한 서씨를 처음 만났다. 김씨에게 남편은 첫사랑이었다. 늘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서씨를 흠모했다. 고1 때는 성관계도 맺었다. 고3 때 서씨가 다른 교회로 갔지만 연락은 이어졌다. 얼마 후 서씨는 부인과 이혼했고 그 이듬해 대학생인 김씨에게 결혼하자고 했다. 김씨가 반대하자 서씨는 1년 뒤 헤어지겠다며 동거를 제안했다. "동거마저 안 하면 학교에 누드사진을 뿌리고 죽이겠다"는 협박과 함께였다. 김씨는 이런 협박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착각했다. 이렇게 시작된 동거와 결혼 생활 16년 동안 김씨는 모진 가정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왜곡된 가부장적 가치관 학대 낳아

서씨는 김씨를 정말 사랑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단언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은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기 위한 하나의 소유물로 아내를 필요로 할 뿐 결코 대등한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여자와 북어는 팰수록 맛이 난다'는 왜곡된 가부장 문화의 극단인 셈"이라고 분석했다. 김지영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피학대 경험, 폭력성, 사회부적응 등 특질이 가부장 의식과 결합된 경우 가족 학대로 발현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는 상당수 가정폭력 가해자들이 사회 생활을 하며 만난 사람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밖에서 억누른 분을 집에서 푸는 것이다. 서씨는 목사로서 교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물론 성폭력가정폭력 상담사이자 사회복지사이기도 했다. 이 교수는 "주변 사람들은 '여자가 맞을 짓을 했겠지'라고 생각하게 된다"며 "심지어 경찰마저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말에 설득돼 개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음주와 경제난 등은 가정폭력의 원인이라는 견해와 촉발시키는 계기일 뿐이라는 견해가 엇갈린다.

도움 요청해도 귀 닫는 사회

김씨는 남편 서씨와 1년간 동거한 뒤 약속대로 헤어졌다. 하지만 헤어짐은 그리 오리 가지 못했다. 동거 중에도 목이 졸려 죽기 직전까지 가는 등 폭력을 경험했지만 7개월 만에 정식 부부가 됐다. 헤어져 있는 동안 서씨가 "네가 그리워 함께 다녔던 길을 하염없이 헤맨다"며 매달렸기 때문이다. 김씨는 결혼 중에도 두 번의 쉼터 생활을 경험했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가정으로 되돌아왔다. 아이들에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고, 서씨가 끈질기게 연락하며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2010년 형사정책연구원의 '남편 살해 피학대 여성의 사회심리적 특성에 따른 형법적 대응방안' 연구는 학대 끝에 남편을 살해한 여성 수감자 12명의 면접과 2개의 재판기록을 분석한 결과 여성들이 학대 남성을 떠나지 못한 이유로 ▦남편에 대한 양가감정 ▦가족과 사회의 무관심 ▦가해남성의 뉘우침과 끈질긴 추적 ▦이혼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적 수치심 ▦가족과 여성의 생명에 대한 위협을 들었다. 김씨의 사례가 고스란히 해당된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무관심과 냉대 등 피해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상황이 더 큰 문제"라는 게 연구의 결론이었다. "여성들이 경찰에 신고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상담소나 쉼터의 존재는 알지 못했으며, 상담소에 전화를 한 사례조차 무성의한 응답만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장기간 폭력에 노출된 여성은 무기력에 빠져 폭력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이론이 있지만 이조차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위 연구에서 대부분의 피학대 여성들은 자존감이 낮기는커녕 생활력이 강하고 자기 삶에 적극적이었다. 김씨도 결혼 후 목회활동을 그만 둔 남편을 대신해 한의원, 무역회사, 텔레마케터 등으로 일하며 혼자 생계를 책임졌다.

보복에 내동댕이쳐진 피해자

느슨한 법과 제도, 사회적 인식은 피해자들을 보복 위협에 내동댕이치고 있다. 김씨가 이혼소송을 내자 서씨는 김씨를 살해했다. 김씨가 만삭의 몸일 때도 "임신한 배는 칼로 찌르면 안 들어갈 줄 아느냐"며 폭언을 서슴지 않던 남편이 급기야 아이들마저 때리기 시작하자 지난 3월 김씨는 법원에 재판 이혼을 청구했다. 7살 쌍둥이가 초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받고 싶었다. 서씨는 절대로 이혼할 수 없다고 말했고, 법원은 부부 상담 10회 명령을 내렸다. 서씨는 상담 중에 "아이들과 마지막으로 단란하게 하루를 보내면 이혼해 주겠다"고 했다. 그것이 김씨의 마지막이었다.

신상희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팀장은 "가정폭력에 의한 이혼 재판의 경우 법원이 부부상담을 명령하거나 가해자에게 자녀 면접권을 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며 "법원이 서씨에게 보복할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이수정 교수는 "가정폭력 피해자는 신고에 대한 보복에 노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 받은 경우엔 경찰이든 상담소든 적극적으로 개입해 격리시켜야 한다"며 "보복 범죄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을 세우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