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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의 비명] <5·끝> 가정폭력은 범죄다

맑은샘77 2013. 11. 29. 00:25

[안방의 비명] <5·끝> 가정폭력은 범죄다

"남의 집 일로만 치부하지 말고 사회가 함께 나서 막아야"한국일보 | 김경준기자 조아름기자 | 입력 2013.11.28 21:07 | 수정 2013.11.28 22:35

 
 
 
 
 
 
 
"친구들, 선생님, 아빠에게 엄마 없이 자라는 아이라고 손가락질 받지는 않는지, 눈치 받고 사는 건 아닌지 엄마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 너희들이 아픈 것에 비하면 아픈 게 아니겠지. 엄마는 너희들이 너무도 보고 싶다. 내 품에 꼭 안고 너희들의 모든 것을 느끼고 싶다. 때론 비겁하게도 너희들을 만날 자신도, 바라볼 자신도 없을 것만 같다. 아프고 아픈 내 새끼들아, 못난 엄마를 용서하지 말아라. 하지만 엄만 그곳에서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너희들이 할머니 집 앞 마당에서 놀고 있을 때 엄만 뒤뜰에서 목을 매고 싶었다. 왜 엄마는 이렇게 멀리서 너희들을 애타게 마음으로만 그려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묻고 또 묻는다. 사랑하는 아들, 딸! 언제나 너희들을 위해 기도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보고 싶다."

↑ 왼쪽부터 고경숙 여성긴급전화1366 중앙센터장,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장, 신지영 한국여성상담센터장,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가정폭력을 피해 수년째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는 린(가명)씨가 아이들에게 쓴 편지다. 린씨가 말한 '누군가에 대한 물음'은 바로 우리 사회를 향한 원망은 아닐까. 린씨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전문가들은 "가정폭력이 심각한 범죄행위라는 사실에 대해 당사자는 물론 사회 구성원 모두가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가정폭력 근절의 출발점"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고경숙 여성긴급전화1366 중앙센터장,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장, 신지영 한국여성상담센터장,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이상 가나다 순) 등 가정폭력 전문가들에게서 가정폭력의 해법을 들어봤다.

경찰, 초동 대응 엄중히 하라

남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던 여성이 신고를 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피해여성에게 "남편이 가정폭력으로 처벌 받으면 어차피 벌금 나올 텐데, 같이 살 거면 결국 당신이 벌금내야 한다. 그래도 고소할거냐"고 물었다. 최근 한국여성의전화에 들어온 한 상담 사례다. 고미경 소장은 "경찰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게 되면 피해자들은 공권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좌절감에 더 이상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폭력 상황에 고립된다"고 말했다.

안방의 폭력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공권력의 도움을 요청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 경찰은 변화의 첫 걸음이어야 한다. 신지영 센터장은 "가정폭력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가해자가 '욱해서, 실수로 뺨 한대 때렸다'거나 겁에 질린 피해자가 '괜찮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을 때 그냥 돌아서지 말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이 문을 닫고 뒤도는 순간 피해여성은 신고에 대한 보복으로 더 큰 폭행을 당하는 일이 다반사다.

이 같은 미온적 대응은 경찰부터 가정폭력이 범죄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5월 지역경찰관 8,932명과 가정폭력 담당 수사관 93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경찰청 조사에서 '가정폭력 사건은 가정 내 해결이 우선'이라는 응답이 57.9%였다. 이런 인식을 버려야 피해자를 구하고 가해자를 엄벌할 수 있다.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라

피해자 보호 인식이 너무 미약하다는 점은 우리 제도의 큰 구멍이다. 가해자를 격리시키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폭력 발생 직후 피해자들을 가해자로부터 격리시켜 보호하는 긴급임시조치권부터 한계가 크다. 경찰이 현재 진행 중인 폭행이 아니라는 이유로 발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일회성에 그치는 일반적인 폭력과 달리 집안에서 장기간 반복되고 심해지는 가정폭력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대응이다. 고미경 소장은 "가정폭력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고 이후인데, 피해자들이 긴급임시조치권을 발동해 달라고 해도 경찰은 종료된 상황만을 기준으로 삼아 '현재로선 그 정도 상황이 아니다'라고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며 "100m 접근금지 의무를 감시하기가 쉽지 않고 이를 어겼을 경우에도 과태료 부과로 끝나 보복 폭행을 방지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형사 처벌을 받아 가해남편이 격리되지 않는 한 이혼 소송을 내야 하지만 법원도 피해자 중심으로 돌아가진 않는다. 부부상담 명령을 내려 피해자를 위험천만의 상황에 몰아넣는다. 부부상담 중 살해당한 여성의 사례가 그렇다. 고 소장은 "이혼 소송 과정에서 가정폭력 피해자임을 입증하려면 쉼터에서 생활한 기록이나 상해진단서 등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런 증거를 가지고 있는 피해자는 소수에 불과하다"며 "상담 사실 확인서나 피해자의 증언까지 증거로 채택해 가정폭력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범위를 넓히고, 또 피해자로 입증된 경우 부부상담 명령이나 자녀면접 교섭권 등을 전면 금지하는 것이 비극을 막는 길"이라고 말했다.

학대 아동은 더 취약하다. 가해자인 부모가 친권을 갖고 있어 떼어 놓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다. 성폭력 가해자가 아니면 아무리 심각한 학대를 저질렀어도 친권이 박탈되는 경우가 없다. 이수정 교수는 "심지어 부모가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경우마저도 처벌 후에는 친권을 회복하는 기회가 주어질 정도로 우리 제도는 친권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동학대 부모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이를 근거로 친권을 박탈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최선"이라고 덧붙였다.

'가정보호' 얽매이지 말고 처벌 강화하라

전문가들은 현행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의 가장 큰 문제는 법의 목적이 가해자의 처벌이 아닌 가정보호에 있다는 점을 꼽는다. 명백한 형사사건마저 '가정보호'라는 법의 목적에 따라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정보호사건으로 분류되면 기소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앞서 언급한 '어차피 벌금형'이라는 경찰의 말은 '솜방망이 법'으로 불리는 특례법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수정 교수는 "가정폭력으로 징역형을 받으면 대부분 항소할 것이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나 벌금형이 내려지면 가해자는 가정으로 돌아와 보복 폭행이 일어나고 결국은 누군가가 죽어야만 끝나는 사건으로 치닫게 된다"며 솜방망이 처벌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이 교수는 "상습 폭행도 1년 이상의 징역 정도여서 가정폭력만 처벌을 강화하는 게 옳은지 양형의 형평성 측면에서 이견이 있다"면서도 "가정폭력은 지속적 학대, 보복 등 일반 폭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다른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사망해도 상대적으로 처벌이 가벼운 학대치사죄를 적용하는 것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 교수는 "가정폭력으로 인한 사망사건의 경우 대부분의 가해자는 살인죄보다 형량이 가벼운 학대치사사죄를 적용받는다"며 "과거력을 면밀히 분석해 우발적 살인이 아니라 피해자의 사망 가능성을 가정할 수 있는 경우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살인죄를 적용해 가정폭력의 경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무조건 살인죄를 적용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대신 "피해자들 스스로 신고 기록이나 진료 기록 등 사소한 것부터 차곡차곡 쌓아서 우발적 살인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할 수 있도록 증거를 남겨둬야 기록 미비로 학대치사죄를 적용하는 관행을 깰 수 있다"고 당부했다.

피해자 주변인 모두 인식 바꿔라

가정폭력을 '남의 집 일'로 치부하지 말고 사회가 함께 막아야 할 '범죄'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피해자부터 사적인 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미경 소장은 "가정폭력은 집 안에서 은밀하게 벌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법과 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도 피해자 스스로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며 "집안일이니 쉬쉬해야 한다, 밖에 말하는 건 창피한 일이라는 생각을 과감히 타파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상담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피해자 10명 중 4명이 '폭력이 끝나기를 기다린다'(28.5%)거나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12.1%)는 대응에 그쳤다.

고경숙 센터장도 "상담을 통해 신고를 권해도 신고하지 않거나 나중에 마음을 바꾸는 피해자들이 많다"며 "가해자에게 경고를 주는 효과와 더불어 나중에 폭력이 반복됐다는 사실을 증명할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신고, 고소를 꼭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나이가 어리거나 장애가 있어서 스스로 신고하지 못하는 약자에 대해선 주변 사람들의 신고가 절실하다. 남의 집 일에 어떻게 끼어들겠느냐고 주저하는 사이 아이는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 몸에 있는 상처나 때리는 소리 등을 접할 수 있는 교사, 이웃 등의 관심이 한 사람의 인생을 구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가정폭력이 사회의 다른 범죄로 전염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가정폭력 근절은 좀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라고 말한다. 고미경 소장은 "가정폭력의 본질을 아는 게 문제 해결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가정폭력은 엄연한 범죄이고, 집안일이 아닌 인권과 생명권의 문제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옆집에서 비명이 들린다면, 나서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의 가치이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조아름기자 archo1206@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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