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사모의 행복찾기 방법
푼수는 행복하다
1. 사모는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야
사모라는 사람은 참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다. 교회에는 많이 배운 석.박사나 의사, 변호사, 대학교수도 있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이도 있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이도 있다. 교양이 있는 이도, 무식한 이도 있으며, 지혜로운 이도 있고 미련한 이도 있다. 예의바른 이도 있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이도 있다.
이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지키며 목회를 해야 하니 사모는 대인관계에 달인(達人)이 되어야 하고 사람에게서 오는 스트레스가 많다. 유식한 사람과는 함께 유식한 입장이 되고 무식한 사람과는 함께 무식한 입장이 되어 풍부에 처할줄도, 비천에 처할줄도 알아 각 사람과 잘 어울리다 보면 마치 나 자신이 푼수가 된 듯한 느낌이다.
힘겨운 노동으로 오는 육체적 고통이나 경제적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이 정신적 고통인데 그 중에서도 더 힘든 것이 사람에게서 오는 고통이다. 목회 한?두해 하고 마는 것 아닌데 계속 참고만 살수도 없는 일이고 또 억지로 참으면 속병 되고 화병 된다. 참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여 스트레스를 안 받으면 더 좋다.
인내 이전에 절제(벧후1:6)가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다. 절제(self-control)하지 못하고 인내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절제는 모든 언행심사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적용하면 절제가 되지만 내 마음이 굳어져 있으면 잘 적용되지 않는다.
내가 25세에 거듭날 때 삶의 목표가 바뀌고, 무의미하던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이유없이 느껴지던 천근?만근 인생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7-8시간을 무릎 꿇고 기도해도 다리가 저리기는커녕 30분처럼 아쉽고,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면 낫는 등 각가지 은사 체험을 했는데도 누가 내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토라져 나는 늘 의인이고 상대방은 늘 죄인으로 취급하니 겉으로는 표시 안 해도 내 안의 불만. 불평. 원망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 중앙의 의자에는 내가 앉아 있고 주님은 내 쫓기셨으니 나는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 큐티를 통하여 은사위주로 들뜬 신앙을 차분하게 잡아주며 언행심사를 말씀으로 절제하는 훈련을 쌓았지만 그래도 정말 살전5:16 말씀처럼 항상 기쁘고 모든 것이 감사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내가 정말 항상 기쁘고 모든 것이 감사하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해진 것은 푼수가 되고부터이다.
2 푼수의 기대치
나는 푼수다. 예전에는 거듭난 이후에도 공주병이 덜 나아서 모든 것이 기대에 맞아야 하고 이치에 맞아야 하고 경우에 맞아야 했다. 물론 모두 나의 기준에서다. 그러니 내 경우, 내 기대, 내 이치에 안 맞는 사람은 상대하기 싫고, 특히 남편과의 갭(gap)을 이겨내지 못해 모든게 불평, 불만 이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지만 하나님께만, 또 기도할 때만 죄인이지 사람에게는, 특히 남편에게는 언제나 당당한 의인이었다. 그래서 내 눈에, 내 생각에 안 맞으면 지적하고 탓하고 정죄했다. 밖에서는 근사해 보이는데 나의 안방에서나 나 자신에게는 늘 못 마땅한 것이 많았다.
많은 사모님들이 필자에게 “정말 그렇게 항상 행복하냐”고 물어온다. ‘행복한사모, 행복한목회’라는 사모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한사모, 행복한목회를 하게된 이면에 사실은 그런 어려움이 있었고 내 성품이 바뀌고 부터는 이왕 하는 목회 행복하게 하자는 뜻이다. 나의 체험 때문에 나는 이런 저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모님들게 “당신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던지 앞으로 행복한사모, 행복한목회가 될수 있다”고 확실히 말하곤 한다.
아무튼 푼수가 되어보니 내 기준의 잣대의 눈금이 희미해지고 흐물흐물 해져서 고무줄처럼 무엇을 재던지 다 알맞고, 아름답고, 가치 있어 옛날 그대로인 남편도, 옛날 그대로인 자식들도, 성도들도, 환경도 하나하나 모두 아름답게만 보인다. 기대치가 제로로 내려가니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던지 섭섭하지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처음 예수님 믿고 거듭날 때, 전에 불평하던 나의 인생과 모든 환경이 아름답게 변했었는데 사모가 된 후에 쌓인 스트레스와 상처와 탈진으로 마음의 제단이 퇴락하고 먼지가 쌓였다고 할까? 잡초가 나고 무너진 제단을 새롭게 수축하였고 또 한번 거듭난 것과 같았다. 이웃과 환경뿐 아니라 부족한 나 자신도 내 모습 이대로, 아름다운 주님의 걸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까지도 사랑스럽고 귀중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니 날마다 순간마다 삶이 기쁘고 행복할 수밖에 없다. 처음 성령충만 받고 느꼈던 그 행복보다 좀더 깊고 넓고 높은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평생 푼수가 되기로 했다. 푼수가 되니 말도 많아졌다. 남의 잣대가 되어 무엇을 지적하고 탓하는 말은 사라지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신바람 나는 말이 많아졌다. 전에는 실수할까봐, 나의 부족한 부분이 드러날까봐 늘 입을 다물고 살았다. 그러나 입이 조용한 사람은 속이 시끄럽고 속이 조용한 사람은 입이 시끄럽다는 말처럼 입이 조용한 나의 속은 늘 불평, 불만, 스트레스로 긴장되어 살았었다.
헌데 푼수가 되고 보니 앞뒤 재지 않는 자연스러운 말, 위선이나 과시로 포장되지 않은 말,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말이 나오고 좀 실수를 해도 실수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이 편하다. 사모웹이 신나게 잘 운영되는것도 사모님들이 내숭을 버리고 서로 솔직하게 교제하기 때문이다.
또 전에는 요구사항이 있어도 그것도 내게 흠이 될까봐, 사모는 무엇이든 참고만 살아야 하는 줄 알고 참기만 했다. 외로움이 와도 사모가 외롭다는 말을 하면 안되지 싶어 표현하지 못하고 심지어 아픈것까지 감추었는데 자연스럽게 ‘나 외로워요, 오늘은 몸이 아프네요’ 할 수 있고 사랑받고 싶을 때 ‘나 사랑해줘요’ 할 수 있고 사랑스럽고 칭찬하고 싶을 때도 ‘당신 사랑해요, 멋있어요’라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니 심신이 건강해지고 삶이 아름다워진다.
3 푼수는 언제나 오래 참고
사모홈피 에는 ‘이럴땐 어떻게’라는 상담실이 있고 그곳에는 수 많은 사연이 들어온다. 이러 저러한 사연들을 듣고 함께 아픔을 나누고 문제해결의 방안을 제시한 후 한 가지 공통적으로 첨가되는 마무리 말은 ‘참으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분이 왜 사모들에게만 참으라고 하느냐, 여자가 그렇게 약하냐, 어째서 사모가 억울하게 참아야 하느냐고 항의가 들어오기도 한다.
사모가 약하고 힘이 없어 참는 것 아니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서 참고 사는 것이 아니다. 부부는 동등하니 누가 하늘이고 누가 땅이겠냐마는 사람들은 하늘보다 땅에 관심이 많다. 하늘값 보다 땅 값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하늘 값은 세월이 지나도 한 푼도 안 오르는데 땅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매일 매일 치솟고 있다. 여자가 약해서 참는 것 아니고 강해서 참는 것이고 죄가 많아서 참는 것 아니고 사랑이 많아서 참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주신 귀중한 존재인 것을 알기 때문에 건강한 자아상과 건강한 자긍심이 있어서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고 잘 참는다. 누가 억울한 말이나 억울한 대우를 해도 잘 참을 수 있다. 주님께서 부부로 맺어 주셨으니까, 주님께서 사모로 세워주셨으니까 인내해서 좋은 남편 만들어 행복한가정, 행복한목회 하기 위해서 즐겁게 참을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하셨으므로(고전13:4)
예수님도 사도들도 참으셨으므로.(벧후3:9)
참으면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나음으로(전7:8).
참으면 앞에 즐거움이 있으므로(히12:2).
오래 참으면 약속(응답)을 받을수 있으므로(히6:15)
하나님께서는 어려운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므로(롬8:28)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므로(롬8:18).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하셨으므로(롬8:25).
핍박을 참으라고 하셨으므로(고전4:12).
이것까지(참을수 없는 것) 참으라 하셨으므로( 눅22:51).
환난중에 참으라 하셨으므로(롬12:12).
시험을 참는자는 복이 있다 하셨으므로(약1:12)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고 하셨으므로(벧전 2:19).
상대방이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롬2:1-4).
하나님께서는 나를 참아주셨으므로 그 빚을 갚기위해(후세에 본이되게).(딤전1:16).
결혼할때, 사모가 될때, 돕는 배필로서 행복할때도 괴로울때도 사랑하겠노라고 서약했으므로.
선배 사모님들도 참음으로 승리하셨으므로.
더 많은 이유가 있지만 지면상 생략한다. 남편에게, 성도에게 내가 약자가 되어서 참으면 스트레스되고 속병 되지만 주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즐겁고 속병도 되지 않고 주님께 영광을 드리게 되고 주님께서 상급으로 갚아주신다.
4. 푼수는 항상 기쁘다
소녀들은 나뭇잎이 굴러가도 웃는다. 별일 아닌 일로 늘 깔깔대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단순하다는 것이다. 꼭 기뻐서 웃는 것 아니고 단순한 마음으로 웃다 보면 기뻐진다. 특별히 부부 사이에는 사소한 일에도 헤픈 웃음으로 낄낄, 깔깔, 호호대면 건강과 행복과 부부애가 솟아난다.
하품이 전염되듯 웃음도 전염된다. 대개 남편이 말이 없고 전혀 웃지 않고 재미가 없다고 불평하는 내담자들(사모)을 살펴보면 바로 그 모습이 자기 자신인 것을 알 수 있다. 남편은 아내의 얼굴인 것이다. 모든 기쁨과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똑 같은 환경에서 기뻐할 수도 있고 짜증낼 수도 있다.
나의 내면 세계가 건강하고 즐거워 늘 정겨운 말을 하고 유머도 잘 하여 자신이 즐거워지면 부부는 닮는다는 말처럼 상대방도 닮는다. 사모의 유머가 목사의 유머실력을 키워준다. 조금 우스운 일에 남편이 안 웃어도 혼자 배를 쥐고 웃으면 아무리 안 웃는 남자라도 언젠가는 웃는다. 웃음이 전염되어서 웃고 내가 혼자 웃는 것이 우스워서라도 웃는다.
내게서 기쁨과 행복이 나가면 내 주위에 기쁨과 행복의 열매가 나타난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가정에 심겨져 남편도 자녀들도 온 가족이 그 열매를 먹고 산다. 어떤 분은 자존심이 상해서 절대 먼저 웃기 싫단다. 부부사이에 자존심은 암(癌)이다. 조그만 암세포가 항우장사도 죽이듯이 자존심은 부부를 함께 죽이고 만다. 왜 내가 먼저 해? 하며 서로 먼저 하기를 기다리면 결코 열매는 없다. 심지 않은데서 열매가 맺힐리가 없으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격언인 일소일소일노일노(一笑一少 一怒一老)도 웃음이 얼마나 좋은 약인가를 말하고 있다. 화 낼 때마다 늙고, 웃을 때마다 젊어진다니 많이 웃고 볼 일이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위한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우리를 위한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 ,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난다”고 말씀하셨다.
실지로 의학적인 연구결과로 병의 85%가 신경에서 오고 화 내는데서 생긴다고 한다. 크던 작던 트러블이 생길 때 화내고 원망하고 분내면 신체의 면역력이 떨어지고 감기, 간염, 고혈압, 온갖 성인병이 생긴다. 하지만 웃는 동안에는 혈압이 떨어지고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세포는 더 많은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 받으며 인체는 면역성이 높아 진다. 병원에 입원할 정도의 심한 류마티스, 신경통 환자도 웃을때만은 아픔을 전혀 못 느낀다는 임상보고가 있다. ‘유머는 마음의 모든 병을 고쳐주는 심의(心醫)이며 웃음이 가장 좋은 약이다’ 라는 말은 근거 있는 말이다.
그러나 웃고 사는 데는 어느 정도의 자료, 즉 노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 생각도 없이 허공을 보고 웃으면 정신병원에 예약이 필요 할 수도 있다. 목회의 긴장과 염려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방법을 소개해 본다면.
먼저 웃으며 살고자 하는 유머마인드(humor mind)가 있어야 한다(내가 웃음을 좋아하면 웃음도 나를 좋아하게 된다)
기뻐서 웃지 말고 웃어서 기뻐지자.(윌리엄스는 기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기쁘다고 했다.)
작은 기쁨을 즐겨야 큰 기쁨이 온다.(모든 것을 단순히 생각하고 작은 기쁨에도 소리내어 하하, 호호, 깔깔, 낄낄…)
매일 한 가지씩 새로운 유머를 찾아 써보라(마음에 저장하라. 무딘 연필끝이 명석한 두뇌보다 낫다)
매일 누군가에게 특히 가족에게 사용하라(웃음은 전염된다)
즐겁지 않을 땐 즐거운 노래, 특히 동요를 부르면 금방 즐거워진다.
내가 연극 배우냐고, 어떻게 늘 웃느냐고 주장하는 사모님도 있다. 속은 기쁘지 않은데 억지로 얼굴 표면만 웃으려면 그것처럼 힘든게 없다. 정말 배우나 할수 있는 짓이다. 그러나 나는 왠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웃음으로 인사할 때가 너무 행복하고 그들을 모두 만나는 주일이 일주일 내내 기다려진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주님과 나를 위한 나의 선택이다.
사모라서 웃는 것 아니고 성도라서 웃는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 때문에 행복하고 주님 때문에 기쁘다. 우리의 위대하신 주님께 많은 성도들이 힘을 합쳐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기쁘고 흥분되고 기대된다. 그것을 속마음에 묻어두지 않고 성도들에게 전할 때 그것이 살아있는 복음이요 생명력 있는 전도다. 우리 교회를 다녀간 성도들이 후에 편지, 이 메일 등으로 “목사님의 설교가 좋았고 사모님의 밝은 웃음이 있어서 우리 교회가 좋았어요”라고 안부 인사가 온다.
설교 말씀이 성도 하나하나에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말씀으로 와 닿아야 하는 것처럼 사모의 웃음이나 인사도 성도 하나하나에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와 닿을 때 사랑이 전달되고 그들도 교회에 오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워진다. 인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뀌고 교회 분위기도 바뀐다. 그래서 우리 교회 성도들은 주일마다 모두 웃음꽃이 활짝 핀다. 이민 교회에 별별 사람이 다 모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인상 쓰거나 심각한 얼굴은 없어지고 주일날 만큼은 행복한 미소로 모두 모두 훤하다.
5. 푼수는 건강하다
목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건강이 안 따라 준다면 마음은 원이로되 할 수 없는 일이다. 30대는 비전으로 목회하고 40대는 목회철학으로 목회하고 50대부터는 건강으로 목회한다는 말도 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건강을 위해 목사님과 사모님의 영적 혼적 육적 건강이 필수다. 나의 목회돕기 22년. 30-40년 되신 분들께는 명함도 못 내밀 숫자이지만 내 나름대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 10년은 사모라는 신분이 싫어 늘 불평 불만 뿐이었다.
자라면서 온 가족에게서 섬김만 받던 나는 여자는 모든 집안일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며 남자에게 사랑과 대우만 받는 줄로 알았고 나 아니면 죽을동, 살동 하는 남자를 만나 행복의 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부풀어 결혼하였다.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었지만 70년대 초의 한국 환경이 구차해 미국은 영화처럼 mercedes convertible(벤츠오픈카)타고 주말마다 롱 드레스 입고 파티 하는 줄 알고 파티 드레스를 여러벌 맞추어 가지고 미국에 왔는데 남편이 갑자기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니 신데렐라의 드레스는 작업복으로, 황금마차는 터덜대는 중고차로 바뀌고 말았다.
365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하고 식당 종업원으로, 식품점 점원으로, 세탁소 점원으로 전전하며 온종일 서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 공부 도와주고 저녁밥 해 먹고 심방 나갔다가 밤10시 30분쯤 돌아와 다음날을 준비하고 자정에야 잠자리에 든다. 기다리던 주말이면 교인들 점심준비에, 주일학교 교사에, 아기들 베비시터에, 청소에, 저녁예배후 뒷치닥거리까지 해야 늦은밤 귀가한다. 정말 손 발이 다 닳도록 희생과 고생을 해도 남편은 알아주기는커녕 점점 교회와 교인에게만 몰두하고 아내나 자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그림을 방마다 부치고 또 침대 머리에까지 부치고 말씀 그대로 죽기 살기로 기도와 목회에만 전념하며 남편이 머슴이면 마누라도 자식들도 머슴이니 온 식구 주님 위하여 함께 죽자는 사고방식으로 몰아 부쳤던 것이다. 그때 일을 회상하며 훗날 말하기를 목사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인줄 알았단다.
나에게 주신 성령체험, 각가지 은사체험, 깊은 기도와 그 귀한 말씀체험도 과로와 탈진과 불평과 불만으로 내게서 점점 희미해져 가고 말았다. 무식하고, 예의 없고, 경우 없고, 교만한 모든 부류의 사람들까지 참고 섬겨야하는, 그러나 남편을 포함해서 이 세상 아무도 안 알아주는 사모로서의 삶이 구차하고 자존심 상하기까지 했다. 배운것 없고 영어도 못하면서 조그만 가게라도 해서 3-4년이면 벤츠 타고 큰 집 사서 으시대고 사는데 나는 새벽4시부터 밤11시까지 힘에 넘치도록 뛰어도 구질구질한 월세 아파트에서 다 큰 아이들에게 제 방하나 못 마련해 주고 밥 먹고 살기도 힘드니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불평은 쌓여가고 나의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더 이상 보고만 계시지 않았고 욥에게 오셔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38:2)” 하신것과 같이 얼마간 고통속에 기도하던중 나에게 다가오사 “네가 누구이기에 남의 하인을 판단하느냐(롬14:4)”는 말씀과 “너의 기대치를 버려라, 저 사람은 나를 위하여 있는 사람이지 너를 위하여 있는 사람이 아니다” 는 깨달음을 주셔서 남편에 대한 나의 모든 기대치를 버리고 나니 전에는 마음에 안 들던 모든 부분이 당연하게 받아 들여지고 나의 마음은 평안해지고 몸은 건강해졌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면 세상만사가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전과 똑 같은 모든 환경과 전과 똑 같은 사람인데 내 기준의 기대치와 욕심을 버리니 모두 소중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이다. 나의 태도, 믿음, 감정 등이 마음을 결정하고, 마음은 뇌를 지배하며 뇌에서 나오는 메신저들에 의해 몸의 건강 상태가 결정된다. 마음의 감정, 생각은 막연한 별개의 추상적 관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호르몬의 작용으로 육체의 반응을 일으킨다.
불만 불평으로 화가 나고 분이 날 때는 부신피질에서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혈압, 혈당이 올라가며 근육이 수축되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면역이 떨어진다. 그와 반대로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때는 소화도 잘 되고 심장도 천천히 박동하며 엔도르핀이 솟아 난다.
기뻐하고 웃을 때 우리 뇌 속의 ‘탈라무스’라는 곳에서 ‘베타 엔도르핀’이라는 뇌 호르몬 물질이 분비되어 심한 통증도 치료되는데 이 ‘베타 엔도르핀’은 누구에게 빌릴 수도, 돈 주고 살 수도, 훔쳐올 수도 없다. 본인이 기뻐하고 웃을 때만 생긴다. 생각과 육체의 반응에 따라 건강하느냐, 질병에 걸리느냐가 결정되니 나의 건강은 나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오기까지 애정결핍증, 관심결핍증의 불평, 불만은 이름 모를 잦은 병치례를 만들기도 한다.
목회, 주님께서 맏기신 일이니 한.두해 하다 그만두지도 못하고, 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만두지도 못하니 이왕 사역하는 것 기쁘고 행복하게, 자신과 가족과 성도 모두에게 유익하고 보람되게 하려면 환경이나 나 자신, 또 이웃에게 정답만을 요구하지 말고 알아도 잘 모르는듯, 좀 모자란듯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푼수가 되면 기쁘고 건강하여 삶이 행복하고 목회가 행복하다는 것이 나의 사모관(觀)이다
* 배명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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