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이단-안티기독교

[스크랩] 유다 복음서의 복원

맑은샘77 2010. 4. 3. 10:16

물론 이 글을 퍼가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당연하다는 것처럼 막 가져가는 양식없는 사람들 보라고 쓴 것도 아니고 어차피 누가 스크랩해 가는지 다 표시되는데 기본적인 덧글이나 딴데 올릴 때 출처 표기 정도는 남기고 가는 게 어떠신지? sower22 같은 미친 객이라면 그냥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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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논란을 불러일으킬 이 고문서가 발견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 중 가장 유력한 가능성으로 꼽히는 이야기는 한 인간의 욕망이 그를 이 문서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1978년 이집트의 나일 강변에서 보물을 찾던 한 농부는 동굴을 찾아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곳은 고대의 무덤이었다. 그가 찾는 것은 금과 보석 같은 것으로 농부는 해골 사이에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돌로 만든 그 상자 속에는 가죽 커버를 씌운 고대 파피루스 문서가 들어있었다. 농부는 그 고문서를 골동품 가게에 팔면 돈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떠났다. 이 농부는 그것이 1800년 전의 이단 문서라는 것도. 본인이 성서 고고학 상 가장 위대한 발견을 했다는 것도 알 리 없었다.  그 후 이 문서는 긴 여정 끝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2002년 스위스로 간 이 문서는 콥트어 전문 학자와 고문서 복원 전문가의 손에 맡겨졌다. 그들은 많은 고문서를 다뤄왔지만 이처럼 상태가 나쁜 고문서는 본 적이 없었다. 이 문서는 바싹 건조되고 바스러져 조각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전문가들은 그것이 유다 복음서일 것이라는 추측만을 갖고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너무 상태가 나븐 이 문서는 함부로 손만 대도 바스러질 지경이 되어 있어 그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했다. 일단 낱장의 사진을 찍어 그것을 맞춰보고 질, 색, 섬유 분석으로 실제 문서 조각을 이어붙이는 식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끼워맞춘 끝에 제목과 간간히 몇 구절이 드러났다. 13장의 파피루스의 양면에 이집트 콥트 어로 적혀있는 그 문서의 제목은 '에반게리온(EVANGELION) 유다', '유다 복음서'였다.

 

20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최고의 악마이자 배신자의 대명사로 표현되어 왔던 자. 이름조차 모욕이 되어 짐승이나 자식의 이름으로 짓는 것조차 죄악시된 영원히 저주받은 자 가룟 유다, 이스카리옷의 유다라고 알려진 13번째 인물. 유다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문화 예술 속에서 온갖 단죄와 오욕의 대상이 되어온 그 명성에 비해 성서 상의 내용 외에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후대에 알려진 그의 이미지는 예수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갈릴리 출신이 아닌 유대 본토 출신으로 여겨지며 재정 담당자, 그리고 헌금을 훔치는 도둑, 예수를 은 30세겔에 팔아넘긴 극악한 배신자라는 정도이다. 그러한 유다의 이름으로 씌여진 복음서라니? 그보다 더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복음서에 담긴 내용이었다.

 

유다 복음서의 존재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서기 180년, 초대 교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한 인물이 남긴 기록 때문이었다. 리옹의 주교였던 이레나에우스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한 복음서에 대해 강하게 반박하는 내용의 글을 썼다. 그 복음서는 정통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문서였는데 이레나에우스를 특히 불쾌하게 한 것은 예수를 팔아넘긴 악당의 이름이 기쁜 소식, 복을 가져다준다는 뜻을 가진 '복음서'의 제목으로 들어있다는 점이었다.

 

두 학자는 확인 즉시 몇 명의 전문가를 초빙해 문서의 진위 여부를 감정하기 시작했다. 콥트어와 고문서 전문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가 등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대부분 이 문서가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첫째는 문서의 파피루스가 그들이 인정하듯 그 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문서들과 같다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제목이 유다 복음서라는 것과 문서에 씌인 콥트어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손으로 씌여진 콥트어로 현대에 그 정도 콥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감정한 학자 두 사람을 포함해 네 다섯 사람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위조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세번째는 180년 주교 이레나에우스가 단죄했던 그 복음서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이 문서가 어떻게 이집트로 들어갔으며 어떻게 발견되고 제작 연대가 언제인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이 문서가 중동에서 씌여졌고 콥트 어로 번역되어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 이집트로 들어왔다는 결론을 내렸다. 설득력 있는 것은 이 문서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는 정통 기독교, 그노시스와 같이 다른 분파나 민족 간에 활발한 사상의 교류가 이루어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나머지를 밝히기 위해 전문가 팀은 직접 이집트로 떠났다. 이 문서를 내놓은 최초 구매자를 찾아 문서의 출처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초 구매자는 나타나려 하지 않았다. 암시장을 떠돌던 이 문서를 손에 넣은 구매자는 골동품 암시장에 속한 사람이 분명했다. 골동품 도굴과 밀매가 이루어지는 골동품 암시장은 매우 넓게 퍼져 있었고 이런 루트에 대해 나서서 발언하는 사람은 범죄자로 경찰에 체포당하거나 골동품 밀매 조직에게 습격 당할 위험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최초 구매자를 찾는데 실패한 전문가 팀은 할 수 없이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존해 장소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이 문서는 자벨 카라라라는 마을 인근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인근이라는 게 너무 광활한 나머지 전문가 팀은 현지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인근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찾아낸 곳은 마을 근처의 한 고원지대였다. 수많은 동굴이 뚫려있는 이 곳은 거의 도굴당한 상태였는데 파헤쳐진 유골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주변에는 그릇 조각이나 벽돌 등 고대 유물 파편들이 널려 있었는데 그 중 콥트 어가 새겨진 것들도 있었다. 유물이 많은 도굴 장소, 굴러다니는 유골, 늦게는 10세기에서 빠르게는 3세기 것인 유물 등으로 보아 그들은 복음서가 발견된 장소가 이 곳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른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 복음서는 3,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그와 비슷한 고문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낸 그들은 인근의 박물관을 찾아가 둘을 비교해 보았다. 그 고문서는 바로 이집트에서 발견된 그노시스 파의 경전, 나그함마디 문서였다.

 

나그함마디 문서 역시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제작 방식도 비슷했다. 두 문서는 사용된 이름에도 같은 것이 많고 기본적으로 같은 세계관을 담고 있었다. 무엇보다 두 문서가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전문가 팀은 글귀, 연대, 위치로 보아 유다 복음서는 진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 문서는 어떻게 제작되었고 왜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을까?

 

서기 100년, 예루살렘은 저항 의지가 뜨거운 종교적 열정으로 표현되던 시기였다.  유대교, 로마, 기독교가 유대 내부에서 서로 경쟁하던 시절, 초기 기독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책으로 된 성서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신자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얘기가 복음서라는 이름으로 씌여진 것은 더 훗날의 일이다. 현대의 신약 성서에 실린 네 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는 사실 익명으로 씌여졌고 제목은 후대의 다른 사람이 붙인 것이다. 거기다 최초로 씌어진 복음은 서기 60년 경 씌여진 마가 복음으로 마태 복음은 마가로부터 100년이나 후에 씌여진 것이다.

 

예수의 사후 100~200 동안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여러 버전이 돌아다녔고 복음서의 수는 30권이 넘었다. 특히 인기를 끌었던 것이 도마, 막달라 마리아, 빌립, 유다 복음 등이었다.

 

기독교는 소아시아, 이집트, 로마, 마침내 북아프리카 일부까지 퍼졌다. 당시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일반 신자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고 이러한 복음을 들었다. 그 중 신비주의 종파인 그노시스는 독특한 사상을 지녔는데 그들은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인간의 통찰과 직관을 중요하게 여겼다. 오늘날에도 네 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서들에 대해서는 거의 대학이나 대학원에 가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에 대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그것들은 이단이며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대에도 이 복음서들에 대한 인식은 마치 매카시즘 시대에 공산주의 배척 수준과 맞먹는데 초대 정통 교회는 말 할 것도 없었다. 특히 교회 지도층을 발끈하게 한 것은 그노시스가 육신을 신성을 가두는 감옥으로 여겼고, 따라서 예수의 육체를 해방시킨 유다를 해방 영웅으로 본다는 점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신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유다를 선택해 그 대업을 맡겼고 이로 인해 다른 사도들의 분노를 샀고, 예수를 해방시켰으니 유다는 무죄란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신경을 이렇게 건드리던 유다 복음서가 본격적으로 쫓겨난 것은 180년, 분류 작업이 행해지면서였다. 이 '분류'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로 대량의 유혈 사태가 일어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177년 기독교를 믿는 것은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체포당해 고문과 신앙 포기를 강요받았다. 로마의 총독은 유흥 거리를 만들어 시민들을 즐겁게 해줄 의무를 갖고 있었는데 검투사를 사는 것보다는 체포된 기독교인들을 구경거리로 내세우는 것이 훨씬 비용이 싸게 들었다. 그 해 백 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한꺼번에 구경거리로 학살당한 사건에 교회 지도자, 특히 리옹의 주교 이레나에우스는 큰 충격과 분노에 싸였다.

 

이레나에우스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로마에 대항해 싸우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로 인해 몹시 고민했다. 무엇 때문에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 그렇게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신앙이란 대체 무언가? 그는 그 신앙의 정체에 대한 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유대 해석자들이 예수 제자들과 논쟁을 벌이며 "원래 마태 복음의 저자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것을 읽고 그것을 오역하여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쓴 것이고 사실은 이사야가 본래 히브리어로 '처녀'가 아닌 '젊은 여자'가 잉태해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했음"을 지적했다. 실제로 처녀의 성자 잉태는 예수만이 아니라 예수가 출생하기 이전부터 미트라나 호루스 출생 등의 신화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던 이야기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이레네이우스는 이를 크게 부정하며 오로지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만 주장하며 그것이 사실이 되어야 기독교인들을 묶을 수 있고 그러기 위해  부정한 복음들을 쓸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선지자들'의 글에 그의 진리의 증인, '사도들'의 글 일부를 더했다. 마태복음만을 쓰는 에비온 파나 누가복음만을 쓰는 마르키온 파처럼 복음서 하나만 읽는 여러 기독 종파들이나 여러 복음서를 쓰는 사람들을 배격했다. 그는 야고보 외경이나 막달레나 복음 등 '외경이나 비정통적' 복음들을 쓸어내고 네 개만을 골라냈다.

 

"하늘과 땅이 네 개로 이루어졌듯 그들을 받치는 것은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네 개의 기둥이며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도라는 기둥이 있다"고 이레나이우스는 주장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한심스럽기 그지 없는 주장이지만 그는 네 개의 복음 외에는 읽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음으로서 현대 성경 체계를 정립하는데 큰 공로자로 꼽히고 있다. 그가 어떤 기준으로 복음을 골라내고 분류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당시 가장 많이 읽혀지던 네 개의 복음서만을 골랐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살펴보면 인기를 끌었음에도 추방당한 경전들은 거의가 정교와는 경쟁관계에 있는 것들이다. 특히 이레네이우스의 신경을 긁은 것은 배신자 유다의 이름을 제목으로 달고있는 불경한 문서가 세간에 인기리에 읽혀진다는 점이었다. 유다 복음을 비롯한 비경전이 탈락한 것은 우연인 척하지만 우연이 아닌 것이다.

 

세상에서 잊혀진 이 복음서는 1800여년이나 지난 후에야 다시 세상빛을 보게 되었다. 어떤 경로로 암시장을 떠돌아 다니던 이 고문서는 1983년 한 이집트인 골동품 딜러의 손에 들어왔다. 그는 미국으로 그것을 가져가 학자들을 불러 보여주며 팔겠다는 제안을 했다.

 

딜러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고 단지 가치있는 고문서로 박물관에 전시할 수 있을 거라는 말만 했다.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와 사진도 찍지 못 하게 하는 것에서 학자들은 그것이 불법 유출된 유물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만지는 것은 허락되었는데 문서를 훑어보던 콥트어 전문 학자는 그것이 유다 복음서라는 것은 알지 못 했지만 유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과 몇몇 특징적인 부분을 찾아냈고 이 문서가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그것을 사고 싶었지만 딜러는 무려 300만 달러라는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다. 불법 거래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학자들의 주머니를 다 털어도 수중에는 겨우 9만 달러가 넘는 금액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일단 튕기는 거라고 생각한 딜러는 학자들을 다음날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잠시 자리를 뜬 콥트어 학자는 이런 편지를 썼다. '이 문서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원주인의 손에 계속 있게 한다면 더 훼손될 가능성이 크다. 빨리 이 문서를 구입해야 할 것 같다' 편지는 대학 측에 전달되었지만 끝내 거래는 결렬되었고, 그 골동품 딜러는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그렇게 바라던 일을 했다. 믿을 수 없게도 문서를 뉴욕 힉스빌에 있는 금고에 넣어버린 것이었다. 철제 대여금고에 갇힌 문서는 초대 교부들이 바라던대로 또 한번 세상에서 잊혀져 학자의 걱정대로 무려 16년이란 세월 동안 바싹 건조되고 바스러져 마침내 먼지가 될 지경까지 이르렀다. 

 

1999년 복음서에 흥미를 갖고 있던 프리다 차크스라는 학자는 케네디 공항에서 딜러로부터 30만달러의 가격에 고문서를 손에 넣었다. 그녀는 이것을 예일 대학에 넘기고 팔려고 했지만 대학 측은 그것을 거부했다. 대신 대학측은 그것이 유다의 복음서란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프리다는 그것을 안 순간 오랜 세월 영원히 저주받은 자가 되어버린 유다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대상으로 자신을 선택해준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한다.

 

유다의 이름을 가진 복음서는 묻히고 도굴되고 아마도 도둑도 맞았을테고 암시장을 떠돈 끝에 대여 금고에 갇혀 말 그대로 썩고 있다가 스위스의 복원 전문가 손으로 넘어온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 기구한 운명의 고문서는 전문가와 학자 모두가 그것이 진본임을 확인했다.(그 중에는 1983년 그 밀매 현장에서 복음서를 처음으로 읽고 사들여야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다.) 2005년 거의 완성된 복음서에 남은 순서는 문서가 만들어진 시기를 검증해줄 과학적인 절차였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위해 문서의 글자가 없는 여백의 일부와 가죽 커버 일부를 떼어낸 샘플 다섯 개가 애리조나 물리학 센터로 옮겨졌다. 여기서 샘플들은 초대 교부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하던 일을 당하고야 말았다. 측정을 위해 태워진 것이다. 측정 시간 동안 기계에 나타난 숫자들이 가르쳐 줄 진실을 두고 초조한 기다림이 계속 되었다.

 

마침내 나온 측정 결과는 이 문서가 진짜라는 결론이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3~4세기 사이 제작된 것으로 위조되지 않은 진본임을 입증한 것이다.

 

복음서가 진본임을 확인했으니 이제 다른 부분을 살펴보자. 서기 66년 예루살렘은 열심당의 선동에 의해 대폭동이 일어났다. 4세기 동안 계속될 항전의 시작, '위대한 봉기'였다.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장래 황제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유대인들을 살육하고 정신적 지주인 제 2 성전에 방화를 했다. 불타는 성전을 바라보며 통곡하던 그 때 유대인의 자손들은 지금도 통곡의 벽에서 그 날을 애도하고 있다. 성전을 잃고 나자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잃은 마당에 신앙이 다 무엇이냐고 좌절할 때 기독교가 성전을 방화한 외국인들을 끌여들여 전도하는 짓은 유대인들의 심기를 더욱 할퀴었다.

 

십자가 형은 로마의 정치범에게 가하는 것이고,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본 것은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의 신성모독죄에 대한 형벌은 돌로 쳐죽이는 것이었다. 로마의 입장에서도 신자들이 대량으로 모이면서 로마에 대항할 세력이 되어가는 예수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당시 로마를 물리칠 메시아에 대한 유대의 염원을 로마가 모를 리 없었다. 이런 이유로 자신들 방식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로마는 예수를 죽인 자신들의 행위를 유대인의 몫으로 떠넘긴다. 이렇게 유대인은 구세주를 매달아 죽인 죄를 쓰고 하필 유대 출신인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그 유대인을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가 득세하면서 구세주를 죽게한 유대인에 대한 인식은 더욱 가혹해졌고 유다가 유대 본토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유다의 행위는 전 유대인의 죄가 되어 버렸다. 20세기 초중반 배신자 유다를 소재로 한 연극이나 예술 소재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이런 소재에 관심을 가진 사람 중에는 히틀러도 있었다.

 

원래 가장 처음 씌어진 복음서 마가 복음에 유다는 그다지 악역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유다는 요한 복음의 3/1 정도밖에 언급되지 않지만 예수를 팔아넘길 배신자로 처음부터 낙인찍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복음에서부터 점차 악역으로 묘사되면서 악마로까지 돌변한다.

 

유다는 '유대인'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유다의 이미지는 유대인 전체에 덧씌워지고 확대되어 20세기의 가장 잔혹한 비극 중의 하나인 반유대주의로 이어져 유대인 집단 학살이라는 광기로 발전했던 것이다.

 

2006년 너무 심한 훼손으로 잃어버린 부분 15%를 제외한 유다 복음서의 85%가 완전히 복원되었다. 예수는 다른 복음서에서 칭찬하던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주 웃으며 제자들의 의식을 보면서 비웃기도 한다. 유다를 제자들 중 가장 큰 자로 칭하며 자신을 육체에서 해방시켜줄 사도로 칭했다. 유다 역시 다른 복음서의 악마적 이미지가 아닌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문답을 나눈다. 그는 다른 사도들에게 돌로 맞고 박해당하는 자신을 보았다.

 

 "나는 당신이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왔는지 압니다. 당신은 바벨로의 불멸의 세계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보내신 분의 이름을 언급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떠나라. 그러면 내가 네게 그 나라의 비밀들을 말해 주겠다. 너는 그곳에 다다를 수 있겠지만 큰 슬픔을 맛볼 것이다. 왜냐하면 열두 [제자들이] 그들의 신과 함께 다시 완전하게 되도록 누군가가 너를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네가 그 나라와 그 모든 세대를 보면 많이 슬퍼질 것이다."

 

"내가 받아들인 그것은 좋은 것입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저 세대를 위해 저를 떨어뜨려 놓으셨습니다."

 

"너는 열세번째가 될 것이며 다른 세대들에 의해 저주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들은 네가 거룩한 [세대]로 올라간 것을 저주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들 모두를 능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나를 싸고 있는 그 남자를 희생제사로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유다 복음서의 충격적인 내용 뿐 아니라 이 복음서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이나 유다의 자살 장면은 나오지 않고 유다가 예수를 넘기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단한 의미를 두고 있는 정교와 그노시스의 갈등을 더욱 깊게 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 복음서의 내용으로 보아 유다는 예수의 희망대로 그를 넘기고도 스승을 죽게 한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목을 맨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2세기 그노시스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과거의 박해를 피해 현대에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는 고대의 복음 문서들. 이 문서들로 인해 기독교의 신앙과 역사를 의심하는 시선들이 나타나는 원인은 정통을 자처하며 성서를 당연하다는 듯이 왜곡하고 분류하고 이단으로 단죄해온 기독교의 의식 자체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서들의 존재가 현대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실은 자명하다. 초기의 기독교는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으며 여러 형태의 소멸된 분파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지키려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 문서들은 몇 가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예수와 기독교는 과연 역사 속에서 변질되지 않고 초기 신앙 그대로 내려온 것이 확실한 것인가?

 

 

출처 : 흑기린의 도서관
글쓴이 : 흑기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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