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문화

이황 이이 사단칠정론

맑은샘77 2007. 10. 31. 01:11
한국사상 / 이황,이이의 4단 7정론
2007/10/24 오후 10:51 | 주색잡기(主索雜記)

이황,이이 / 4단 7정론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 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 (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28년 진사가 되고 34년 식년문과 (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39년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52년 대사성에 재임, 54년 형조·병조 의 참의에 이어 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 (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 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 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 (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 命圖說·聖學十圖·自省錄·朱書記疑·心經釋疑·宋季之明理學通錄· 古鏡重磨方·朱子書節要·理學通錄 ·啓蒙傳疑·經書釋義·喪禮問答·戊辰封事·退溪書節要·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 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4단 7정론(四端七情論)

조선시대의 석학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 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 (懼)·애(愛)·오(惡)·욕(慾)을 말한다.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 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 서막이 되었다.

즉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내세웠으며, 이를 다시 이이(李珥)가 뒷받침하여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을 말하여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과(畿湖學派) 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 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 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 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 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 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 (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 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 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 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치사상】 이이가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尹元衡) 등 그간 정사를 전횡한 권신이 차례로 쫓겨나고, 을사사화 때 죄를 입은 사람들이 신원되는 등 정세가 일변함에 따라 사림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정계 진출은 더욱 본격화되어 그동안 훈척정치하에서 이루어진 폐정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의 고위관직을 상당부분 차지한 구신(舊臣)과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포진한 사림이 대치한 정국 의 구도 속에서 구체제 인물에 대한 처리 방식을 놓고 사림간의 견해차이가 드러났는데, 강온의 입장차이 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렸다.

이이는 처음에는 훈척으로부터 사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집단인 붕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나, 이 때에 사림이 분열하자 붕당의 지나친 분파활동이 수반하는 폐단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사림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해져가는 정쟁(政爭)의 격화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그의 붕당관은 그가 가진 시국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 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제 막 정권담당층으로 자리굳힌 사림의 총력을 결집시킬 필요성 에서 그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 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안민(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경장론(更張論)’이다.

《만언봉사》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 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가 당시 조선 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한 구체적 증후로서 지배층의 기강 해이와 백성의 경제적 파탄을 들었는데, 그 원인은 각종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잘못된 제도를 경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 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 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사창계약속(社倉 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함으로써 향촌에서의 농민생활 안정과 사족중심의 향촌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안민을 이루어 중세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장론은 동·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 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의를 쫓아 실공(實功)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 일관 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철학사상】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사단칠정론·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과 학문적 심화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이이와의 우율논변(牛栗論辨)이 벌어 지고, 서경덕과 이황이 각기 기(氣)와 이(理)를 둘러싸고 학설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이는 이들의 주장을 아우르며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견지하여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사단칠정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순선(純善)인 사단(四端)은 이발(理發)의 결과이고 유선악(有善惡) 인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의 결과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취급하여 ‘사단대칠정’ 논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는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라 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一途)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 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에 찬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하였다.

이들 이 이런 사상을 갖게된 현실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황의 경우 이이보다 35년 연상으로 훈척정치하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타락한 정치윤리와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보다는 이, 칠정보다는 사단, 인심보다는 도심에 역점을 두어 선(善)을 지향하는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이의 경우, 정권 담당층이 훈척에서 사림으로 교체되는 등 개선된 정치 여건속에서 시급 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실사(實事)가 결합되고 이와 기가 통합된 일 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가 현실 속에서는 구체적 기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보편적 이는 구체적인 변화상을 떠나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한 경장론의 변통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이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 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하였다.

이를 서경덕의 주기론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 이이는 그가 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기불리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서경덕이 궁극적 존재를 기, 즉 태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한 데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여 궁극적 존재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바로 이, 즉 태극지리(太極之理)라고 주장하여 이의 중요성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이이는 서경덕의 기 위주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를 들어 기발일도설(氣發一 途說) 이기지묘를 주장하였으니,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