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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儒林 689.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35

맑은샘77 2007. 10. 31. 01:03

고봉이 ‘천명도설’을 구해보고 크게 의문점을 가졌던 것은 정지운의 학설을 수정하여 강조한 퇴계의 ‘사단은 이의 드러남이고 칠정은 기의 드러남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란 열자의 문장이었다.

 

특히 ‘이(理)는 장수요, 기(氣)는 졸병’이니, 어디까지나 경(敬)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으로 ‘이로써 기를 선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한 강력한 의문점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우선 고봉은 ‘모든 현상은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다.(理氣不相離)’는 성리학의 기본 전제에 퇴계의 명제가 어긋나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이와 기를 이분화함으로써 이와 기를 병립관계로 대치시키고 있다고 고봉은 본 것이었다. 고봉은 ‘모든 현상은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찌 형이상학적인 이가 형이하학적인 기의 현상세계에 스스로 드러낼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이와 기는 퇴계가 생각하듯 장수와 졸병의 종속관계나 혹은 병행관계가 아니라 포함관계(因說)이므로 이분화될 수 없음을 문제제기하였던 것이다.

 

또한 만약 퇴계의 ‘사단은 이의 드러남이요, 칠정은 기의 드러남이다.’라는 명제가 옳다면 사단은 ‘기 없는 이’가 되어 ‘이는 죽은 물건(死物)’이 될 것이며, 칠정 역시 ‘이 없는 기’가 되어 ‘죽은 물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모순점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퇴계와 고봉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사칠논변’은 명종14년(1559년)부터 시작되어 명종17년(1562년)까지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퇴계의 나이 59세 때부터 시작되어 62세 때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의 논쟁은 고봉으로부터 3회의 편지와 퇴계로부터 3회, 도합 6회의 논쟁으로 꼬박 4년간이나 전개되었던 것이다.

 

주자를 신봉하는 같은 성리학자이면서도 퇴계와 고봉, 두 사람 사이에 4년간이나 전개된 논변은 후세의 이른바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의 사상적 대립을 이끌어낸 발단이 되었고,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율곡의 ‘이기일원론’을 탄생시킨 분수령이 됨으로써 한국철학의 발전에 주춧돌을 놓는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와 고봉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사단칠정론’은 성리학의 기본명제인 ‘이기론(理氣論)’에서부터 비롯된 것.

 

그렇다면 ‘본성이 곧 이(性卽理)’를 주장함으로써 유학에 있어 새로운 사상체계였던 주자학 최대의 성과인 ‘이기론’을 제창하였던 주자,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던가.

 

기존의 유학에서 주장하였던 ‘무극(無極)’과 ’태허(太虛)’를 곧 이(理)로, 음양과 오행(五行) 그리고 만물을 곧 기(氣)로 해석함으로써 우주론에서 인성론으로 회귀를 제창하여 ‘이기이원론’을 완성하였던 주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것일까.

 

또한 주자를 모든 학자가 ‘도(道)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어디까지나 주자에, 주자에 의한, 주자학의 적자였던 퇴계를 낳은 주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던 것일까.

 

자료출처 : 서울신문

출처 : 느린나라
글쓴이 : 黑面書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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