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목회

[스크랩] 오늘 이 세대에 외적 내적으로 가히 코페르니쿠스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유해룡 영성목회시리즈4

맑은샘77 2007. 5. 20. 23:48
4. 영성목회를 위한 제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막 2:22)." 복음의 진리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양상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지금 우리는 자고나면 새로운 정보가 쏟아져 나와 미래를 도무지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변화에 대처해야겠다는 분위기 속에서 영성목회라는 말까지 나온 것이다. 목회자체가 영성적 차원을 다루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영성목회라는 말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동안의 한국교회의 목회에 대한 자성과 아울러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 포두주를 마련해 보자는 열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여러모로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미래를 조망할 수 없을 만큼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고 있다. 소위 신세대들이 점점 교회에 대해서 매력을 상실하고 있다. 이러한 성향을 단순히 영성적인 욕구에 대한 상실감 내지 시대적인 사조로 그 책임을 떠넘길 수만은 없다. 교회가 이 새로운 세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 되어있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 교회의 미래를 위한 건설적인 태도일 것이다.

오늘 이 세대에 외적 내적으로 가히 코페르니쿠스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현실적으로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성을 형성해 가고 있다. 정신적, 종교적 흐름은 보이는 국경선이 없기에 그 어느 분야보다도 신속하게 교류가 일어나고 있다. 일찌기 초기 기독교가 당시대를 풍미하고 있던 영지주의에 의해서 수많은 도전을 경험했던 것처럼, 이 세대는 동양의 신비종교나, 내면 세계를 추구하는 경험의 종교가 외형적인 형식에 치우쳐 가는 현대교회를 심각하게 도전해 오고 있다. 한국교회가 그 동안 보다 심도있는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일에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인도의 힌두교나 수피 이슬람, 그리고 한국의 선불교적인 요소등이 새로운 세대에 매력을 주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특징이 바로 이러한 세계적인 교류를 타고 다원화 주의적인 사고에 깊게 젖어들고 있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절대적인 가치관이 있다는 것에 회의를 표명한다. 그렇기에 신세대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이고 초합리성을 더 신봉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논증하기 위해서 편의상 보이는 논리를 사용할 뿐이다. 신세대들이 신뢰하고 있는 것은 오래된 권위가 아니고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감성적인 경험의 세계다. 이미 객관적인 것은 천재성이 없다고 단정을 내린다. "진정한 천재성이란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이의 가슴 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이 세대를 반영한다. 여기서 천재적란 다른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공명할 수 있는 경험체계를 의미한다. 토마스 오덴(Thomas Ode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너무도 사사롭고 개별적인 것이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기대치 못했던 감정이 정확히만 표현하면 청중의 경험과 지속적이고 깊이있는 공명을 일으키는 것을 여러차례 목격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독특하고 개별적인 방법으로 경험한 바를, 잘만 표현하면 듣는 사람들의 유추작용을 통해서 그들에게 강력히 전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이런 시대적인 징후를 고려하면서 새 세대의 목회의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기독교적인 절대적 가치관을 가르치기 위해서 힘쓰면서 동시에 이 세대의 내적인 경험에 대한 갈증을 기독교적인 전통 안에서 찾아주어야 한다. 우리 기독교 역사 안에도 적지않은 영성적인 유산이 있다. 과거 영성 형성의 경험이나 과정을 탁월한 통찰력을 통해서 기록해 놓은 영적인 저서들을 보다 진지하게 발굴하고 탐구되어져야 한다. 그것들 안에서 영성적인 갈증에 목말라하는 세대들에게 빛을 전해줄 수 있는 천재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의 방향도 여기에 촛점을 맞출 수 있다. 그 동안 많은 설교가 목회자 자신의 외적인 성취나 목적사업의 추진등을 고려한 요소들이 강하게 작용했다. 이제까지 그러한 류의 설교가 외적인 효용성을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네의 집단주의적 정서와 잘 맞아 떨어져 가시적인 성장과 성취를 이루는 동기를 부여해 준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내적인 성찰을 이끌어 주는데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가시적인 성장과 더불어 질적인 저하를 가져다 주었다. 오늘 교회가 침체기에 들어간 것은 사회적인 요소외에, 그 동안 교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가 비로소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이제 숫적인 감소를 어느정도 감수하면서라도 설교의 방향은 외적인 성취를 위한 선동적인 설교보다는 각 개인의 內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보다 심도있는 영성적인 설교로 바뀌어져야 한다. 자기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고,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전인적인 인격형성에 촛점을 맞추는 설교와 교회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기도 역시 도구적인 의미보다는 이제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을 위한 경험적인 차원으로 인도 되어져야 한다. 이를 위하여 현재 거의 전무한 상태인 기도 교육과 기도훈련등이 기독교 전통의 빛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탁월한 설교가요, 유능한 상담자요, 프로그램 진행자이지만,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경험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기분으로 영성지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각 사람의 내적인 영성상태를 식별하고 그 상황에 적합하게 대응하여 영성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줄 '영혼의 전문진단醫'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이러한 영성적인 지도력은 부단한 기도와 묵상훈련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성령의 선물이다. 깊은 침묵과 묵상훈련에 의해서 객관적인 지성경험을 감성적인 주관경험으로 변형시켜 내면화할 수 있다. 토마스 머튼은 '모든 인간은 眞自我(the true self)와 僞自我(the false self) 사이에서 끊임없는 투쟁을 겪고 있기 때문에, 내면적인 침묵과 훈련이 요청된다'고 했다. 기독교 전통 안에는 기도 경험과 그 태도에 대해서 탁월한 모범을 보여준 영성가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기도의 태도와 방법을 개발하고 익히는 것에 목회의 한부분을 할애할 때 영성 목회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될 것이다.

후기 중세시대 때 널리 행해졌던 영성훈련으로부터 하나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중세말이란 교회의 영성적인 권위가 상실되고 수치스러운 윤리적 타락이 넘실거리는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이나 비제도권적인 범주에 있는 수도자들은 잘 규정된 영성훈련 및 명확한 기도 방법 등을 개발하면서 영성적으로 어두운 시대를 극복해 나가려 했다. 그 중에서 종교개혁의 전야제라고 할 수 있는 신경건 운동(Devotio Moderna)의 산물인 공동생활 형제회(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가 영성훈련에 기여한 바가 크다.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나 그의 친구 존 그란스포트 (John Wessel Gransfort)등이 기독교 명상법에 대해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란스포트는 세단계의 묵상법을 제시한 바가 있다. 첫째 분심을 버리고 묵상 자료를 선정함으로써 묵상 준비를 한다. 두 번째는 정신, 판단력 및 의지를 활용함으로서 실제로 묵상으로 들어간다. 세 번째는 고무된 열망을 하나님께로 지향하게 함으로 묵상의 총결산을 이룬다. 시스네로 (Garcia de Cisne- ro) 역시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관상하는 법에 대해서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세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거룩한 인성을 깊이 생각함이다. 둘째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으로 관상한다. 세 번째는 거룩한 인성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에 초점을 맞춘다. 시스네로는 각자는 각자의 기도 생활의 단계에 맞게 자신의 영이 이끌리는 데로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단계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일찍이 베네딕트 수도원으로부터 전수된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길이다. 거룩한 독서란 시각과 청각을 이용한 독서식 기도법이다. 성서본문을 천천히 반복하면서 그 내용이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오도록 한다. 귀로 들은 것을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들은 것을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독서법이다. 이 독서 즉 lectio를 통해서 독서자와 텍스트가 상호 작용하면서 개인의 영혼과 개인의 상황으로 파고 들게 된다. 그 결과로서 우리의 영혼은 영적인 가치내지 영적인 세계와의 접촉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는 말씀의 성취를 그 목적으로 한다. 초기 수도자들은 경건과 기대감과 준비성을 가지고 lectio에 접근했다. 그러나 만약 그 기대가 좌절된다면 내적으로 읽혀진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결코 실용주의적인 목적으로 즉 설교준비나 가르침을 목적을 가지고 lectio divina에 참여하지 않는다. 즉 lectio divina는 헌신과 경건의 훈련형태이지 성서공부의 방법은 아니다.

'거룩한 독서'는 lectio(읽기), meditatio(묵상), oratio(기도), contemplatio(관상)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진실된 기도로 연결된다. 은밀한 장소에서 선택된 텍스트를 반복해서 읽는다. 예를 들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시편 23편 말씀을 'lectio divina'한다고 한자. 이 텍스를 반복해서 읽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명상하고 그 안에 머문다. 'lectio'는 단순한 반복적인 독서로부터 출발하여 점점 그 내용에 대한 내적인 반추가 일어나고, 마음의 눈으로 성서의 장면을 영상화 하게 이른다. 예를 들자면 푸른 초장으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를 상상으로 그려볼 수 있다. 이것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명상법이다. 즉 어떤 것에 관하여 생각하고 평화롭게 그것을 마음 위에 떠올린다. 그 명상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그 목자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느낀다. 그것은 주님과의 대화를 하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를 의미한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지성과 마음이 움직임으로서 비로소 대화적인 기도가 시작된다. 관상은 기도 경험의 정상이다. 자신의 모든 삶을 포함하고 변화케 하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일치의 체험이다. 'lectio divina'가 진행되는 동안 잡념이 떠 오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이미 읽은 텍스트에 촛점을 맞춘다. 마귀나 혼돈된 자기 자신과 싸우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사막에서 시험을 당하고 있는 동안 예수님이 사용하신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조용히 텍스트를 읽는동안 우리는 거룩함(하나님의 일)과의 대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적당할 때 lectio divina는 기도로 인도된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서 시작하고 우리의 응답은 하나님과의 일치의 경험으로 인도된다. 우리는 선포되어지고 들려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현존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가슴으로 들어가기를 힘쓴다. 이것이 lectio divina의 목적이다.

'lectio'를 하는 사람은 하루에 적어도 30분이상의 기도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lectio'를 하는 동안 비평적이고 학문적이고 분석적인 기능은 멈추는 것이 좋다. 하나님과 단 둘이 하는 시간으로 기대하는 태도를 가져라. 텍스트를 읽을 때 전 텍스트의 핵심을 꿰뚫을려고 할 필요는 없다. 단지 특별한 단어나 구 혹은 문장에 머물러 그 깊은 의미를 깨달으라. 우리는 결코 그 lectio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른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텍스트를 조정하는 것을 포기하라. 그럴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아의 깊은 곳으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 매일의 lectio의 연습은 하나님과의 진지한 관계 형성을 위한 기도와 내면적인 영성을 형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lectio divina'라는 독서와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게 하고, 해방케 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능력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지혜에로 여행을 가능케 하며, 성령께서 자유롭게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락하는 행위이다.

이제까지는 주로 수직적인 영성형성의 길을 생각했지만, 사실 그 자연스러운 응답으로서 수평적인 삶이 따르기 마련이다. 수평적인 영성적 삶이란 그 동안 제기되어 왔던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의미한다. 그 동안 한국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이란 매우 임기 응변적이요, 즉흥적이었다.내면적인 자각으로부터 비롯된 활동이라기 보다는 활동을 위한 활동이 많았다. 그렇기에 효용성이 매우 떨어진 소모적인 사회적 활동이 비일비재하다. 교회가 참으로 사회가 요청하는 효율적인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기관과 개방적인 자세로 유기적인 관계성을 맺을 필요가 있다. 예측하는 대로 미래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주의화를 향하여 달려갈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공동체적인 삶의 모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공동체는 아닐지라도 내용적인 공동체는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교회는 전문적인 영성센터나 목회연구소와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요청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으며 새로운 영성목회의 방향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미래의 목회 방향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은 평신도의 활용이다. 이미 이 시대는 일인 영웅주의적인 집단체제가 붕괴되고 있다. 수직적인 체제보다는 수평적인 체제를 선호하고 있다. 평신도가 목회 사역에 깊히 관여하게 될 때 교회의 영성적인 분위기가 살아난다. 종종 외국의 교회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방문하면서 두가지 상반된 느낌을 피력한다. 처음 느낀 소감은 매우 활기가 넘치고 생동력이 넘치는 살아 움직이는 교회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점점 교회 내부의 분위기를 파악하면서 활동하는 교인들로부터 자유함을 느낄 수 없으며, 평신도의 활용도가 매우 낮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평신도들이 개별적인 성찰을 통한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며, 교회가 평신도들의 개별적인 재능을 충분히 자유롭게 개발하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평가이다. 영성목회란 대중적인 설교목회 보다는, 개별적인 목양에 촛점을 두기에 목회자 중심의 목회는 한계성이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각 평신도들이 지니고 있는 은사등을 발굴해 내어 더불어 목회를 하면서 목회자 개인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민감한 평신도들은 영성센터의 도움을 받아 영성 지도자로 훈련시켜 목회자의 협력자로 영성목회에 참여시킬 수 있다. 또한 사회적인 의식이 남보다 투철한 사람은 사회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목회연구소등의 도움을 통해 훈련받게 하여 교회의 대사회적인 프로그램에 참여케 한다. 이렇게 목회자와 평신도의 협력목회가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영성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것이 곧 영성목회의 목표이다.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