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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늘의 교회 현실을 한 마디로 일컬어 영성의 위기시대라고 한다. (영성 목회의 의미와 장애물): 유해룡 영성목회 시리즈 2

맑은샘77 2007. 5. 20. 23:46
2. 영성 목회의 의미와 장애물

앞부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설교목회, 상담목회, 심방목회라는 기능 중심적인 목회의 유형을 언급한 바 있다. 이 항목들 가운데 영성목회라는 또 다른 주제를 나열식으로 늘어놓는다면 또 하나의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할 뿐이다. 그것은 목회라는 일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이들에게 더욱 그 의미와 본질에 있어서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이미 목회의 의미를 추적한 결과에 비추어 볼 때 영성목회란 또 다른 어떤 행위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목회자의 존재 형성에 관한 문제이다. 사실 모든 목회행위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를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이 곧 영성이다. 그러므로 정도와 본질에 벗어나지 않은 목회라면 그것이 곧 영성목회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영성목회는 결코 어떤 방법이나 프로그램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태도나 자세의 개선과 형성에 관련된 문제이다.

오늘의 교회 현실을 한 마디로 일컬어 영성의 위기시대라고 한다. 도날드 부러쉬는 그의 저서 {The Crisis of Piety (경건의 위기)}라는 책에서 현대 개신교가 점점 생명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데 그 주요한 이유는 경건생활의 결여에 있다고 한다. 그는 '현대 개신교 신학교들이 경건한 사람들을 양성하기 보다는 신학자들을 양성하는데 촛점을 두고 있으며, 개인의 영적생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예의인 것처럼 되어 있다'고 신학교육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한 성향이 교회 전영역으로 확산되어 개인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침묵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신교회는 내면세계나 영성생활에 대한 탐구나 훈련보다는 외적인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특히 그러한 경향은 개혁 교회 노선에 속한 교회일 수록 더 심화되어 있다고 부러쉬는 지적한다. 그 이유를 몇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개혁 신학에 대한 편협적인 이해에 그 문제가 있다. 개혁 신학의 핵심인 은총과 以信稱義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이 능동적인 내면생활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신학의 우파 쪽에 속해있는 소위 신정통주의자 바르트에게서도 그러한 경향이 역력하게 나타난다. 그는 稱義와 마찬가지로 聖化도 전적으로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능동적인 영성훈련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바르트 신학에서 발전된 계시의 탁월성에 대한 강조와 아울러 인간종교에 대한 철저한 부정은 능동적인 경건훈련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주의해야 할 문제점이 있다. 개혁가들이 재발견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以信稱義의 위대한 진리와 능동적인 영성생활과의 관계 문제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개혁신학의 오해의 측면을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가능한한 고생을 하지 않고서 기독교인답게 보이기를 원하는 세속성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세속성은 루터를 주목하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훌륭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 냈다. 모든 것은 오직 신앙으로 말미암아 임한다!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우리는 모든 행위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루터 만세!' .... 이것이 기독교를 개혁한 하나님의 사람 루터의 삶의 의미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날카로운 이 지적은 곧 본훼퍼가 {제자의 길}(Cost of Discipleship)에서 밝힌 "값싼 은혜(cheap grace)"라는 지적과 같은 맥락에 서있다. 본훼퍼의 값싼은혜란 영적인 훈련을 하나의 '공적사상'으로 치부해 버림으로써 개혁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듯한 모호한 당시의 신학적인 입장에 대한 반성의 소리였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영성훈련의 전통들이 개혁교회 신앙생활의 중심에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도외시 당했던 것이다.

두번째 이유로는 사회 참여적인 신학의 대두가 내면 훈련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전통적인 신학의 패턴이 위로부터의 신학이라면 참여적인 신학의 패턴은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다. 위로부터의 신학이 계시의 이니셔티브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사회적인 책임을 소홀히 함으로서 그 도전으로서 아래로부터의 신학함(Doing Theology)이 좌파로부터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로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에, 수직적인 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곧바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인간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발전시킨 반면에 초월적인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소홀히 여긴 것이다. 참여적인 신학은 존재이전에 행동에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그들은 영적인 내면형성과 중생없는 사회적인 책임을 실현할 수 없다는 성경의 메시지를 간과한 것이다(행 6:1-4). 토마스 머튼은 기도를 통해서 얻은 내적인 자유와 평화, 영적인 통찰력과 내면적인 변화없이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그 사회를 타락시킬 수 있는 요인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요소는 영성훈련에 대한 오해가 개혁교회 안에서의 영성훈련을 소홀히 하게 하고 있다. '영성'이라는 말만 들으면 습관적으로 극단적인 이원론과, 금욕주의적인 중세 수도원적 영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상은 단순히 선입견만은 아닌 것이 사실이다. 개혁가들이 일찌기 신비경험의 극단적인 일면을 위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중세 신비주의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비판적인 통찰력 없이 수용함으로서 나타낸 반응이다. 그러나 개혁가들이 객관적인 계시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인간의 타락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중세 신비주의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중세 신비주의자들 중에는 계시의 이니셔티브를 무시하고 인간의 영혼에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과대 평가하여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일치(union)의 가능성과 친밀성(intimacy)을 강조함으로서 삼위일체적인 신관을 무너뜨린 신비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신비경험의 절정에서는 인간성이나 신성이 구분없이 연합됨으로서 각 영혼이 지닌 독특한 인격성을 상실하고 마치 인간의 신성화를 주장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 중에는 분명히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기독교 영성에 위협을 주고 있는 극단적인 신비가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동시에 이들을 경계하고 그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건전한 다른 기독교 신비가들이 또한 엄연히 존재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후기 중세시대(13세기부터 종교개혁 이전)에는 역사적인 예수와의 일치를 특별히 강조하는 신비가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아시시의 프란치스꼬(Francis of Assisi)는 가난을 통해서 철저히 역사적인 예수와의 일치성을 추구했다. 그의 극한적인 가난의 추구는 일면 자학적인(saddistic) 금욕주의 정신이 다분했던 것처럼 보이나 그는 가난을 통해서 단순성을 배우고, 내적인 정화를 이루어 가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지 가난 그 자체를 自己義로 삼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이란 내적인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 주는 삶의 기쁨이요, 풍요였다. 그는 소유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무한하신 자연의 풍로움을 경험하였고 또 그것을 가르쳤다. 웨슬리나 살레의 프란치스꼬(Francis de Sales)등도 금욕적인 삶을 중시 했는데, 그것은 육체나 세상을 부정하고자 하는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죄된 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정화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합일을 추구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수직적인 일체성을 경험한 신비가들은 수평적으로 이웃과의 일체성으로 나아갔다. 수평적인 일체성이란 곧 자신이 경험한 영적인 풍성함을 나눌 형제 자매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꼬가 "태양의 노래"에서 일체의 피조물을 형제와 자매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맥락에서의 건전한 신비경험이요, 영성적인 경험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선입견으로부터 그동안 내면적인 삶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목회가 다분히 활동과 기능중심적으로 흘렀으며, 뿐만 아니라 목회의 본질이라고 해야할 영성적인 부분이 기능적인 활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적인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활동을 멈춘 침묵이나 관상생활(contemplative life)에 몰두하는 이들을 향하여 사치스러운 유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또 한편으로 聖과 俗의 구별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서 활동을 기도요, 기도를 활동으로 미화시키기도 했다. 물론 일찌기 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노동은 기도요, 기도는 노동이다"라는 표어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표어 배경에는 그들에게 깊은 내면적인 침묵과 관상 생활이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깊은 침묵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시장' 속에서도 만날 수 있을 만큼 통찰력과 영성을 배양한 것이다. 개혁교회의 영성목회란 '이신칭의'를 근간으로 삼아야 하지만 이신칭의에 대한 적합한 응답을 위하여 기꺼이 이신칭의를 내면화 하는 성화 작업과 관상생활(contemplative life)이 선행되어야 한다. 칼 바르트의 논리대로 이신칭의는 지적인 동의에 의해서 시작될 수 있지만, 결코 칭의에 대한 내면화는 그러한 동의에 의해서 결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칭의가 내면적인 성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그 응답으로서 목양적 행위가 수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칼빈주의 계통의 교회에 속하지만 웨슬리적인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주자 찰즈 피니의 입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종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매우 중시한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종교는 인간의 일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믿음에 의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영성훈련을 통해서 내면화 하는데 힘써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는 신학에서 처럼 행위 문제를 존재 문제로 단순하게 환원시킬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요소는 서로 조화할 수 없는 갈등적인 관계도 아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에 대한 확신과 내면 형성이라는 존재적인 성숙을 통하여 이웃사랑이라는 행위로 연결되면서 바람직한 영성목회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목회란 물러감의 영성과 나아감의 영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물러감을 통하여 수직적인 하나님의 경험과 나아감을 통하여 사람들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한 수평적인 하나님의 임재 경험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영성목회의 가능성을 보게된다. 물러가는 훈련없이 행위의 덕행만을 강조한다면 그 행위는 매우 공허하고 의미없는 것이 되어 버릴 수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의미있는 '나아감'을 위하여 전략적인 '물러감'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울 있다. 그들은 존재적인 내면 형성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추상적인 영성의 세계를 마치 보이는 구체적인 세계 처럼 표상화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전통이 유산으로 남겨준 영성훈련을 열린 눈으로 바라본다면 오늘 우리에게 영성목회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전해줄 것이다.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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