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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교회의 영성목회의 현실 : 유해룡 영성목회 시리즈 3

맑은샘77 2007. 5. 20. 23:45
3. 한국교회의 영성목회의 현실

영성목회를 설교목회나 상담목회나 심방목회처럼 어떤 또 다른 종류의 목회방식이 아니고 목회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태도나 자세를 결정짓는 내면형성의에 관련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영성목회는 결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아니다. 이미 우리가 해오고 있는 목회 자체가 영성목회의 성격을 띄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미 영성목회가 상존해 있음을 전제하면서 그 현실과 보완점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목회 행위 전체를 통해서 원숙한 영적인 사람을 형성해 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진정한 목회란 영성목회일 수 밖에 없다. 목회의 수단으로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행위 과정등을 영성훈련의 장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주요한 목회적 수단들을 영성훈련의 차원에서 평가해 보려고 한다. 그 동안 한국교회 영성훈련의 특징은 다분히 反響(reflection)이 없는 일방통행적인 성격을 띠었다. 각 개인보다는 대중을 상대하는 프로그램에 의존해 왔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그 동안 행해졌던 영성목회의 형태로서 사용되어 왔던 수단들은 대중적인 설교와 기도와 성경공부를 들 수 있다.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보기 드물만큼 한국교회는 목회적 수단들 중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여단 수단들을 현저히 압도하고 있다. 그 횟수나 다양성 열정등이 참으로 엄청나다. 따라서 신자들의 영적생활의 상당부분이 대중설교에 의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대로 한국교회 성장의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설교라는 통계 보고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설교가 주는 영성목회의 특징은 보편적이고 평준화된 신앙 의식을 형성해 주는데 기여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설교란 각 개인의 독특한 성향이나 환경을 고려할 여지가 없다. 반추가 없는 설교는 획일적인 형태를 지닌 신앙인을 생산해 낸다. 때로 목회자가 개인의 목회적 성취나 어떤 특정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설교가 이용되어질 때 목회자 개인의 독특한 경험을 보편화 시키는 위험성도 있다. 예를 들자면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카리스마(지도력, 혹은 추진력등)를 형성하기 위해서나 혹은 어떤 외형적인 사업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 선동적인 설교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설교가 단지 개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어진다면 엄밀히 말해서 그 설교는 영성목회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자발적인 內省이 일어나게 하지 못하는 설교는 결코 목양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성목회를 위한 설교란 청중들이 듣고 싶은 설교나 목회자가 들려주고 싶은 설교가 아닌 청중들이 들어야 할 주제를 선정하여야 한다. 설교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듣는 이들을 內省으로 인도하고 소명을 자극시켜 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이 있다면 청중들의 사고방식을 목회자 개인의 사상으로 뒤바꾸려는 의도이다. 그러한 태도는 듣는 이로 하여금 근본적인 내성에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 설교자가 허구적인 감정을 토로하거나 신학적인 편견을 주입식으로 강조한다면 듣는 이로 하여금 내적인 통찰력을 상실케 한다. 설교는 청중과 설교자와의 진실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내성으로 인도해 주도록 해야한다. 그럴려면 설교는 대화적인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이야기가 맞부딪혀서 내적인 결단과 통찰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설교가 된다면 설교를 통하여 영성목회가 가능하게 된다. 내성을 일으키게 하는 설교란 개인의 능력이나 기교라기 보다는 무엇보다 진실한 자아와 하나님과의 대화의 결과이며 목회자 자신의 영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칼 로저스(Carl Rogers)의 말대로 영성적으로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목회자만이 청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설교에 참여케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설교가 합목적성이 있는 영성목회에 기여하려면 청중이 그 설교로 인하여 개인의 효용성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효용성이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쓸모있는 존재라는 인식에 이르도록 해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소명적인 자각'을 일으킬 수 있도록 자극시켜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 역시 설교자의 개인적인 영성과 직결된다.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효용성에 대한 확신이 분명해야 하며, 더우기 설교자로서의 효용성 있는 도구라는 인식이 분명해야 한다. 그러한 영성이 겸비된 설교자는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고통과 희망을 진솔한 대화로 엮어갈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중들은 설교자를 통하여 비추어 주는 성령의 빛 안에서 자신들이 안고있는 희망과 고통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두번째는 오늘 한국 교회에서 특징을 이루고 있는 영성훈련은 기도이다. 한국교회가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종종 변함이 없고, 내적 성찰과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의식할 수 없는 평면적으로 반복되는 기도에 실증을 느끼고 기도에 대해서 흥미를 상실해 가는 사람이 적지않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기도가 점점 의미 없는 주문처럼 타성화 되고, 인위적인 습관성으로 굳어져 가기 때문이다. 사실 물질적으로 풍요로와지고 있는 이즈음에 그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몰이해와 훈련 부족으로부터 비롯된 결과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본보기로 가르쳐진 기도는 하나의 청원목록을 작성하여 그것을 보고해 드리는 정도의 도구적인 이해에 치중해 있었다. 기도는 도구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형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에 대해서 적절하게 응답하는 하나의 영성적인 본능임을 인식하면서, 도구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기도훈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도는 한 영혼의 내면적인 존재를 형성하기 위한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이다. 그 곳에서 유한적인 실존이 기도라는 장을 통하여 영원한 실존에 참여하는 경험이다. 이 만남의 장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증진이 일어나며, 그 단계로서 자각과 정화와 진리에의 조명과 사랑에의 일치를 이룬다. 이렇게 자의식적인 성장을 기약하는 기도훈련과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목회가 있다면 그것이 또한 영성목회의 한 차원이 된다.

세번째는 한국교회의 목회 수단으로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성경공부를 살펴보자. 그 동안 성서를 열심히 읽고 배우는 목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서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나 지식 수준은 상당히 향상되었다. 그러나 지적인 향상이 바로 영성적인 향상과 곧바로 연결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실시해오고 있던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가 경쟁적일 만큼 열심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내성적인 반추가 없는 일방 통행적인 것이었다. 그 결과 지식적으로 거룩한 식자층은 양성했으나, 행동력이 없고 내면적인 성숙이 없는 절름발이 신앙인격을 양산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영성 형성으로 연결되지 못한 성경적 지식은 다분히 세속적인 것으로 전환되어 그 지식이 스스로의 행동이나 삶을 정당화 하거나 변호해 주는 도구로 전락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 동안 실시해 왔던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이 소명적인 자각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열망이나, 헌신적인 삶에 대한 동력을 불어넣어 주는 영성 형성에는 별로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이끈 지도자이며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1758)는 그의 유명한 작품인 {종교적인 감성}(Religious Affection)이라는 저서에서 영향력 있는 영성형성의 외적인 양상을 情意(affection)라고 표현했다. 정의란 의지적이고 지성적인 요소가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요소와 건전하게 조화를 일룰 때 일어나는 영성적인 성향을 의미한다. 에드워즈는 메마른 사변이나 지성적인 가르침은 종교적인 신성함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했다. 지성과 정서적인 요소가 함께 어우러질 때 건전한 경건성이나 영성적인 성숙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교회는 열광적인 기도와 감정에 호소된 설교를 중시하는 감상주의적인 신앙형태이든지, 혹은 합리주의적이고 이성주의적인 성서주의를 중시하는 지성주의적인 신앙형태등을 편파적으로 선호함으로서 이 두면이 서로 동전의 앞뒤면으로서 조화를 이루기 보다는 갈등적이고 대립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우리는 종종 교육목회라는 소리를 듣는데 그것도 역시 방법론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분명한 한계성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교육이 영성목회로 연결되어지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방법론 보다는 존재들과의 만남과 참여로서의 교육과정이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도교육 혹은 쌍방교육이라는 말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7 유도교육이란 선생의 가르침 안으로 학생을 들어오도록 함으로서 선생의 체험을 간접적으로 전해받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교육과정은 결코 어떤 방법론적인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의 내면적인 태도나 영성의 문제이다. 쌍방적 교육과정의 목표는 교사와 학생과의 밀접한 관계형성으로부터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형성으로 연결되어지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객관적인 지식을 매개체로 하여 주관적인 경험에 이르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렇한 교육과정을 통해서 영성의 교류가 가능하다면 각 개인은 참신하고 효율적인 內省의 기회를 얻게 된다. 대중 목회적인 차원에서 볼 때 매우 비현실적인 처사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방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진정한 영성 목회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회중)이 교육을 받으면 받을 수록 심리적으로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낳게하는 교육을 한다면 결코 목회라 할 수 없다. 반면에 진솔하게 자기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열어 보이도록 유도하는 교육과정이 있다면 그것이 곧 영성목회의 길이다.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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