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세상 읽기

공허한 진보

맑은샘77 2006. 6. 3. 09:21
‘공허한 진보·개혁’부터 제대로 혁신하라
사설
한겨레
5·31 지방선거 결과는 단순히 노무현 정부와 집권여당의 참패만을 뜻하지 않는다. 10여년간 국정을 주도해온 진보·개혁세력 전체에 대한 엄중한 경고의 의미를 갖는다. 민심은 진보와 개혁을 기치로 내걸어온 열린우리당에 등을 돌렸을 뿐 아니라,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 대한 시선 또한 싸늘했다. 열린우리당은 그동안 특정 정당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았던 수도권에서조차도 완패했으며,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 이탈표를 전혀 흡수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미 예고됐던 것이기도 했다. 집권당은 지역주의 청산이라는 이상주의적 정치 과제에만 치중했을 뿐 부의 집중을 완화하는 문제 등 사회 경제적 과제를 다루는 데 실패했다. 민족 문제에 대한 혼선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고, 미국과의 관계도 오락가락하면서 민족적 자존심을 형편없이 훼손시켰다.

그것은 아마추어로서의 미숙성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은 국민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가려고 했다. 게다가 대통령은 구체적인 성과는 없이 말만을 앞세웠고, 말로써 무수한 갈등을 빚어냈다. 두 번씩이나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줬는데도, 의석이 모자란다며 터무니없는 대연정 발상을 고집스레 밀어붙였다. 개혁의 우군이랄 수 있는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도리어 적대시했다. 자신을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하여, 지지자들을 경멸했다. 그 결과 부동산 투기 근절, 양극화 해소, 증세론, 복지재정 확충, 균형개발 등 개혁적 목표를 잡아놓고도,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해 시행착오만 되풀이했다. 민주노동당이나 전교조, 민주노총, 시민운동 진영도 마찬가지다. 노 정권을 올바로 견인해내고 개혁과제를 선별해 힘을 모으기보다는 각자 자기 목소리만 내는 등 기득권화한 측면이 없지 않다. 물론 여기에는 탈권을 위한 수구언론들의 집요하고 악의적인 여론 전파나 야당의 발목잡기도 한몫했다.

진보 개혁세력의 반성은 치열하고 엄격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해온 진보적 가치에 대한 회의로까지 확대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는 여전히 이 땅의 희망이다. 이번 선거 결과는 개혁주체를 자처하는 정치세력들이 보여준 행태와 미래를 향한 희망을 국민에게 제시하지 않는 데 대한 국민들의 실망일 뿐이다. 사학법 개정 때 나타났듯이 다수 국민들은 아직도 우리사회 개혁 과제에 대해 동의한다. 해방 이후 제대로 청산된 적이 없는 역사적 비리를 철저히 규명해 다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의 정기를 세우는 작업에 대한 지지도 마찬가지다. 교육 복지 소득에서의 양극화 해소 등에 대한 열망도 외면할 수 없다.

개혁과제를 역동적으로 밀고가는 것은 내년 대선의 승패보다 중요한 문제다. 그 과정은 오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계도가 아니라 설득으로, 분열이 아니라 통합적이어야 한다. 개혁 진보세력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역사의 한 시대를 장식하고 말 것인지, 아니면 시행착오를 딛고 민주주의를 생활 속에 구현하는 헌신적 동지로 다시 뛸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