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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되려는 이에게

맑은샘77 2015. 6. 20. 11:22

목사가 되려는 이에게

작성자김기현|작성시간15.06.17|조회수8,156 목록 댓글 4

, 목사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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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제게 신학교를 가고자 상담하는 이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에게 꼭 권하는 책이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생명의 말씀사)입니다. 흐릿한 기억에 그 책은 목사의 길이 얼마나 고된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뜨겁고도 치밀하게 기술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이들 중에 몇몇이 신학교 가기를 포기했습니다. 아마 사모가 되기를 꿈꾸는 이들은 같은 저자의 책,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두란노)를 읽으면 유익합니다.

이번 주 수요일 경건의 시간 본문은 디모데전서 31-7절이었습니다. 감독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들려준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어떤 이들을 감독으로 세워야 할지를 디모데에게 조언한 내용입니다. 우리 침례교회는 전통적으로 감독과 장로의 직분을 목사의 다른 호칭으로 파악합니다. 오늘 본문의 감독도 그러하거니와 517절에는 장로의 역할을 설교와 교육(preaching and teaching, NIV & NASB)으로 말한 것을 보면, 목사로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가 성서가 요구하는 목회자의 자격 요건에 미달한다는 것이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내가 애초에 왜 목사가 되고자 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바울처럼 자신을 본받으라 결코 말할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나의 실패나 실수, 약점과 단점이 후배들에게 조금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시에 지금도 목회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몇 자 적어 보는 것이 좋으리라 봅니다. 자신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열정입니다.(1) 목사의 직분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열정이라 할 수도 있고, 소망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비전이라는 말도 참 좋습니다. 저는 지금도 왜 목사가 되었어요?’라고 물으면 내가 하고 싶었다고 대답하곤 하지요. 바울은 하나님의 활동 방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 개정)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자면, 이미 예정하신 바이고, 그분의 기쁘신 뜻 가운데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의 자리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일에 대한 저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었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었고, 그러다가 죽기를 갈망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목사님이 정말 훌륭하고 대단해 보였고, 과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보였습니다. 아마 당시 은혜 받았다 하면 신학교 가는 것이 대세이던 시대 분위기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원치 않았던 이들도 있습니다. 제 절친한 친구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두 번이나 연이은 부흥회와 은사집회에서 하나님이 목사로 부르셨다는 말을 듣고 방황도 하고, 좌절도 겪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바울도 그랬지요.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된 그를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소망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따른 선택입니다.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목사의 일을 하고 싶어 하고, 목사의 일이 즐거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고 싶습니다. 작은 교회나마 하나님의 집에서 일한다는 것, 신학이 갖는 학문적 깊이와 역사를 읽으며 정말이지 신학공부하길 잘했다 싶습니다. 물론 마냥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내적 불안과 외적 시련이 닥칠 때면 후회도 하지요. 그러나 목사의 직무가 주는 희락과 고통을 잴 수 있다면 전자가 훨씬 큽니다. 앞으로도 굴곡이 있겠지만 그래도 계속 고(go)할 랍니다. 저는 지금도 목사의 일을 사모하고 사랑합니다.

둘째, 개인입니다. 2-3절은 목회자 개인이 갖추어야 할 자질을 말합니다. 인격과 실력입니다. “가르치기를 잘하며라는 구절 외에는 전부 인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목회를 잘 하는 능력보다도 성품이 우선합니다. 요즘 목회자 청빙 조건 중 박사학위를 받았느냐가 제일 순위로 내세우는 곳이 많은가 봅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중심을 보십니다. 외모와 외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격과 성품은 좀 다릅니다. 우리는 각자 성격이 다릅니다. 급한 이가 있고 느린 이가 있고, 다혈질도, 담즙질도 있고, 외향적인 이도, 내성적인 이도 있습니다. 술을 즐기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단정하고 등의 단어는 성격이 아니라 성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목회의 많은 내용이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지성이 출중해도 인격적 결함이 크면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 저를 보니 뼈에 저려 옵니다.

또한 양자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해야 합니다. 설교와 교육과 행정, 심방 등의 사역을 하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종종 너무 심하다 싶으리만치 전달력이 떨어지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인격과 함께 말의 탁월성보다도 진정성이 있으면 눌변 같아도 달변 이상의 감동을 줍니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참 딱합니다. 그러니 목회자가 되려면 선포할 내용을 갈고 닦아야 하고, 전달하고 소통하는 훈련도 평신도 시절이나 전도사 때에 해두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가정입니다.(4-5) 예비 목회자와 현직 목회자가 가장 걸려 넘어지기 쉬운 영역이 가정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령 충만을 주관적인 정서의 들뜸에서 찾지 않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예배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부부와 자녀를 포함하는 가정이 등장합니다. 부흥회와 수련회에서 은혜 받았는지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영성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최고의 공간입니다.

바울은 목회자를 가정을 잘 다스리는 이들에서 선발하라 하십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교회를 가족으로 비유한 바 있습니다. 교회를 납득하도록 설명할 수 있는 최상의 비유 대상은 가정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큰일을 맡긴다는 주님의 말씀의 빛에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교회도 잘 돌보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 목회자가 가정을 내팽개치면서까지 사역을 열중하는 것은 가족밖에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해야 할 잘못입니다.

복음주의자의 아내들(두란노)은 위대한 목회자들도 가정에서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인격과 실력 양면에 견줄 수 없고, 교회는 날로 성장하는데도 자녀들이 신앙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회의 동력을 상실하여 좌절합니다. 반대로 자녀를 잘 양육하여 칭찬과 부러움을 사면 목회도 같이 빛납니다. 그러기에 가정을 돌보는 것을 선발 요건으로 명시한 것입니다. 앞선 선배들의 모습에 위안도 되고, 도전도 받습니다. 에베소의 가정 규례대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순종하는 일에 날마다 헌신해야겠습니다.

넷째, 교회입니다.(6) 하나님의 부르심과 열망, 개인의 준비와 자질, 가정을 잘 꾸리는 것 다음으로 바울은 교회라는 영역에서 요구되는 조건을 기술합니다. 이번에는 부정적인 측면을 말합니다. 새로 입교한 자, 곧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이들이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간혹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이들이 그의 재력이나 지력에 의지하여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된다는 흉측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선무당 사람 잡는다 했습니다. 선무당은 신은 내렸는데 굿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이를 가리킵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말씀 공부와 신학 수련이 부족한데 성령 받았다고 물불 가리지 않고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의 위험을 바울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교만은 인간의 원죄이고, 마귀는 교만해서 타락했습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위험이 많기에 사도는 주의하라 합니다. 너무 섣불리 하겠다 마시고 열심과 열망을 묵히고 익힌 다음에 해야겠습니다.

본뜻은 영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생물학적인 성장과는 좀 다릅니다. 자연은 건너뛰는 경우가 없습니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영혼은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로, 그리고 길게 보면, 자연의 순리와 영적인 이치가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과 시련을 통과해야 성숙합니다. 저는 목회 하면서 많이 깨어졌습니다. 준비가 덜 되어서 그리 된 것이지요. 영성 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회 안과 밖으로 구분하면 내부에 해당합니다. 7절은 교회 밖의 시각으로 말합니다. 최근 기독교가 이래저래 동네북입니다. 언론과 방송은 물론이거니와 인터넷은 정말 무섭습니다. 읽기 두렵습니다. 시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무척 화가 나 있습니다. 반감이 극심합니다. 교인이라 하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듭니다. 한국교회사에 이런 전례가 없고, 얄팍한 지식으로는 아마 중세 후기에 이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한 가운데 목회자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목사는 교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고, 말도 안 되는 말을 우기는 지적으로 덜 갖추어진 사람, 그러면서도 교회를 이용해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사는 유한계급으로 여깁니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 미안하고 화나고, 부끄럽습니다. 제가 보기에 목사는 3절에 나온 바와 같이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고, 지성을 단련해야 하고, 영성을 훈련해야 하고, 성품이 좋아야 합니다. 변명 같지만, 그러기가 퍽 어렵네요.

사회 전체뿐만 아니라 지역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먼데보다 가까운 곳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교회가 위치한 지역 사회를 돕는 역할과 기능에 충실하다면 비판은커녕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목사가 한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영적인 리더십과 더불어 지역에서도 리더로서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대개 그러지 못하다는 것이 저의 자화상이고 현실입니다. 분발할 일입니다. 비방거리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목회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집사에 대한 규칙(8-13)을 보면 됩니다. 목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에 못지않은 엄한 요구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구절은 목사에게만 한 것이니 나랑 상관없고, 묵상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모두가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그런 목사가 된다면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