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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가장 큰 적- 교회로 구복신앙을 끌어들인 것 또한 목사들 아닌가

맑은샘77 2015. 6. 10. 21:05

한국교회의 가장 큰 적교회로 구복신앙을 끌어들인 것 또한 목사들 아닌가

임종석  |  seok9448@daum.net

입력 : 2015년 06월 01일 (월) 01:16:23
최종편집 : 2015년 06월 03일 (수) 00:06:27 [조회수 : 12650]

 

목사가 한국교회의 가장 큰 적인가

슬픈 일이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목사가 한국교회의 가장 큰 적인가’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우리 교계의 현실이 슬프다. 그런데 더 슬픈 것은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 당위성이 충분히 있다는 데에 있다.

목사들의 비리나 위법‧탈법 행위는 이제 너무 많이 듣고 접해 또다시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부터 난다. 성도들이 헌금으로 드려 하나님의 것이 된 돈에 군침을 흘리다 못해 비열한 방법으로 제 지갑을 채우고, 교인수의 증가와 헌금의 상관관계를 계산하느라 머리가 바쁜 자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을 가지고 못 가진 순으로 서열화하여 교회의 문턱을 높이는 자들, 그들이 누구인가. 그러고도 모자라 횡령, 사기, 절도, 성추행, 간음, 폭행에 최근에는 지하철에서의 치마 속 몰카와 보이스피싱 가담까지 가히 범죄의 백화점 수준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 더 큰 문제점을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데, 그것은 구복신앙이라고 하는 이단이다. 구복신앙이 이단이라니 너무한 게 아니냐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아니다. 심할 경우에는 놀랄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그럴 일이 아니다. 구복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단이다.

구복신앙이란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복을 구하는 신앙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 구복신앙이라는 것이 나쁠 수 없다. 신‧불신을 막론하고 복 받기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오래 사는 수(壽), 재산이 넉넉하고 많은 부(富), 건강하고 마음 편안한 강녕(康寧), 심성의 후덕한 유호덕(攸好德),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고종명(考終命)의 오복을 복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복의 개념도 많이 바뀐 것 같다. 입으로는 아니라 하면서도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그것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통이고, 출세나 건강, 자손번영 등을 위해 별의별 짓들을 다한다. 믿는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아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한쪽으로 제쳐둔다. 그런데 그런 것이 기복신앙이라고도 하는 구복신앙이다. 탐욕으로 인해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현세적이고도 육적인 것들로 바꿔 놓는 것이 구복신앙이라는 말이다. 거기에 구복신앙을 이단이라고 하는 까닭이 있다.

문제는 복 아닌 것을, 아니면 복은 복이로되 결코 큰 복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화까지도 부를 수 있는 것들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 하여,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시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간다는 데에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이 따로 있는데도 그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엉뚱한 것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것들이 복이라고 말씀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예수께서 마5:3-10를 통해 하신 말씀으로 이른바 팔복이다. 모두가 어떠어떠한 사람(朱色)에게 어떠어떠한 복(靑色)이 내린다고 하는 것으로, 받게 될 복보다 복을 받게 하는 행위 즉 과정에 방점이 찍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정이 아니라 복 자체에 중점이 주워졌다면 ①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게 될 복과 ⑧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받게 될 복은 둘 다 “천국이 저희 것”으로 팔복이 아니라 칠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 알아야 할 것은 과정만이 우리 사람의 몫이고 결과는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어떠한 일이든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 우리 사람의 일은 끝이 난다. 신앙생활에 있어 많은 문제가 결과에 너무 연연한 나머지 생긴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 즉 기독교의 복은 세상의 복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 복을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여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그런 구복신앙이 이단이 아니면 무엇이 이단이겠는가.

필자는 여기에서 한국교회의 가장 큰 적은 타락한 목사들이 아니라 구복신앙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구목신앙이라는 이단도 목사들이 잘못 가르쳐 교회에, 교인들에게 끈질기게 뿌리를 내린 것이니 역시 우리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타락한 목사들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 목사들은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불가피한 일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하는 일이 잘되어 부자가 되고, 자식들이 출세를 하고, 건강하게 된다고 사기를 쳐 교인들을 늘리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교회를 세속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말이 맞는다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 하신 예수와 그 제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흙먼지 풀풀 날리는 뙤약볕 길에서 뭣 때문에 그분들이 땀을 흘렸겠는가. 고대광실 좋은 집에서 산해진미로 배불리며 ‘참 좋다. 하나님의 은혜로다’ 타령만 하고 있어도 되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목사는 “축복을 해도 발꿈치로 꾹꾹 눌러 넘치도록 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구복신앙이 성경에 위배되는 줄은 알지만 할 수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더 말할 것까지도 없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갈1:10) 이 같은 말씀이 있는데, 말은 더해 뭐하겠는가.

그렇다면 목사들만이 죄인이고 구복신앙으로 물들어 있는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것일까. 구복신앙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구복신앙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도 거의 없다 해도 좋다. 필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필자도 죄인이다. 그렇다면 독자 여러분은 어떠한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약4:17)인 것처럼 구복신앙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나는 구복신앙으로부터 자유로운 크리스천인가

비리나 위법 또는 탈법으로 기독교에 오물 칠을 하고 있는 목사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지 않은 목사가 훨씬 더 많다. 그러니 다대수의 목사들은 일부 목사들의 범법행위가 매스컴을 통하여 드러나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고 탄식의 한숨을 토한다.

그러나 구복신앙이라는 이단적 요소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목사는 극히 소수이다. 목사뿐 아니라 일반 성도도 ‘나에게는 구복신앙의 오물이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천지나 구원파 같은 이단들을 탓하기 전에, 적어도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서 구복신앙적 요소를 제거하는 노력부터 기울여야 한다.

교회나 크리스천들에게 생기는 많은 문제는 이 구복신앙을 버림으로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목사들의 비리도, 교인들의 탐욕도 이를 버리면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다. 사실 우리가 그토록 끔찍해하는 맘몬도 구복신앙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어렵지만 이를 버려야 한다. 아프지만 참고 버리지 않으면 내가 망하고 교회가 사단이 좋아하는 공동체로 전락하고 만다.

네가 하면 불륜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식의 사고는 나를 크리스천은 물론 인간이기조차 포기하여 사단이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만다. 남만을 탓하거나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끌어낼 수 없다. 자기변화 없이 지적질에 익숙한 사람은 교회가 됐건 사회가 됐건 더욱 혼탁하게 할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다. 아무리 소중하고 또 소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없으면 내게 있어 그것은 없는 것이 된다. 기독교가 어떻고, 한국교회가 어떻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목사가 어떻고 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어떠한 일을 두고도 자신부터 돌아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자기의 지적과 비난으로 한국교회가 달라지고 목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해도 정작 자신은 그대로 있다면 슬픈 일이다. 그리고 뭣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대로 있는 한 타(他)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가. 정말 나는 한국교회 최대의 적인 구복신앙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다면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신천지나 구원파에 대해, 그리고 교회나 목사에 대해 비난을 하기 전에, 아니면 동시적으로라도 자신에게서 구복신앙의 요소들부터 제거해 나가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구복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러니 이단이다. 그러니 우리가, 내가 온힘을 다하여 가장 시급하게 제거해야 할 것은 이 구복신앙이라는 이단이다.

목사들이 잘못 가르쳐 구복신앙이 기독교에 만연되었으니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해결의 바른길은 내 안의 구복신앙적 요소부터 제거해 나가는 일이다.

그러기 위한 첫 단계는, 구복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이단이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 구성원들 거의 모두가 교회와 자기 자신을 부패시켜 반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구복신앙에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조차 하고 있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솥 안의 개구리가 가열이 시작되면 따스함에 기분이 좋아지다가 온도가 천천히 올라가 뜨거워져도 그것을 느끼지 못해 결국 죽고 마는 것처럼 우리도 우선은 입에 단 구복의 열매들로 기분 좋게 배를 불리다가 영혼을 죽여 가고 있지 않은 지 돌아봐야 한다. 몸 안의 암 세포가 번져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데도 통증이 없다고 방치했다가는 목숨을 잃고 만다. 그런데 구복신앙이라는 암 덩이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갉아먹어 나를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적이 구복신앙이듯이 내 신앙의 가장 큰 적도 구복신앙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