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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께 드리는 질문내친김에 교인들께도 묻고 싶다

맑은샘77 2015. 6. 19. 09:56

목사님들께 드리는 질문 내친김에 교인들께도 묻고 싶다 / 임종석  |  seok9448@daum.net

입력 : 2015년 06월 14일 (일) 15:55:07
최종편집 : 2015년 06월 18일 (목) 01:36:36 [조회수 : 104

 

이것은 목사님들께 드리는 질문입니다만, 저도 목사이니 제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친김에 성도님들께도 여쭤 보고 싶습니다.

 

주의 종은 교인들의 상전인가

목사를 가리켜 흔히들 ‘주의 종’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또는 ‘하나님의 종’이라 했고, 야고보도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 했고,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목사가 스스로를, 그리고 성도들이 목사를 지칭하여 ‘주의 종’이라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종’이란 어떠한 존재일까요. 신약성경이 기록되었던 당시의 헬라 사회에서의 종(둘로스)이란 가장 비천한 노예를 표현하는 말이었는데, 바울도 야고보나 베드로도, 그리고 유다도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철저한 자기인식에 의해 자기를 그리 말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의 종’의 ‘종’이란 가장 비천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은 은연중 자신들이 높고 거룩한 주님의 종이니 일반 성도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노골적으로 교인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드러내어 행동하기도 합니다. 종이라면 낮을 대로 낮아져야 하는데, 상전이 된 것이지요.

제가 초신자 시절 교인 몇 명이 목사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목사들을 가리켜 ‘주의 종님들’이라 했습니다. 이를 들은 목사님은 언짢은 표정으로 ‘종’이란 하찮은 존재인데, 거기에 ‘님’자를 붙이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럼 목사를 ‘종님’이라 하지 않고 그냥 ‘종’이라 해야 하느냐는 말에 ‘종이 아니라 사자(使者)’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로는 ‘종’이라 하면서도 상전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보다 어쩌면 이 목사님의 말이 조금은 더 정직하고 논리적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설마한들 지금도 그 같은 목사가 있겠습니까마는, 목사는 만왕의 왕의 종이니 일반 백성에 해당하는 평신도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목회자가 없다고는 장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질문을 시작할까 합니다.

 

第1問: 목사님께서는 자신이 교인들과 평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실제로 자신을 평등한 위치에 놓고 행동하십니까?

① 심방이라든가 식사 등에서 상석(좋은 자리)이라고 생각되는 자리를 다른 성도, 특히 자기보다 연상의 성도에게 양보하고 있습니까?

② 차로 이동할 때에도 상석을 자기가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마23:6, 눅14:8 이하 참조).

③ 은연중에라도, 또는 무의식중에라도 주의 종인 사역자들에게 특권이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일은 없었습니까?

* 믿음의 사람들은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 특권 아닌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목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④ 목사를 비롯한 사역자들만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믿는 사람 모두가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⑤ 주의 종인 목사에게 잘하면 축복을 받고 잘못하면 징벌을 받는다는 식의 설교를 한 적은 없습니까?

* 설령 일반교인들은 아니고 목사 등의 사역자들만 주의 종이라 할지라도 믿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까지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이 더 소중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더 소중할까요? 이는 물론 말장난에 지나지 않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라 하셨고, 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마25:45)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를 대접함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주의 종이라는 목사를 대접하는 것이 더 옳을까요?

 

시체가 사람이 아니듯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은 믿음입니다. 지옥에 갈 사람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믿음 하나만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그렇게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누구누구는 믿음이 좋다 하기도 하고 믿음이 좋지 않다 하기도 합니다.

저는 방금 아무런 조건도 없이 믿음 하나만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럴까요. 맞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그야 성삼위 하나님을 나의 구주(구원의 주)로 믿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2:26)이라 했습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께서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를 가리켜 ‘빛’과 ‘소금’과 ‘향기’라고도 하시는데, 그 ‘빛’과 ‘소금’과 ‘향기’로 사는 것이 곧 착한 행실이 됩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믿음의 믿음 된 증거가 됩니다. 여기에서 또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第2問: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고 있습니까? 그리하지 못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혹 죽은 것으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① 목사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라서, 목사님이라서 역시 다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직접 드러내어 한 말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그런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느낀 적이라도 있습니까?

②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을 떠나서 상대방을 배려하며 생활하고 있습니까?

③ (시시하게 느껴지기 쉬운 것입니다만,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 믿음의 인격을 만드는 것인데), 아파트 현관이나 엘리베이터에 떨어진 과자껍질 같은 것을 보면 어떻게 하십니까? 줍습니까, 그대로 둡니까? 좁은 길을 가다가 마주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불편하지 않게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 주는 일 등이 습관처럼 되어 있습니까?

④ 자신을 얼마나 진실하다고 생각하십니까?

⑤ 작은 것일지라도 나누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내려 주신 가장 큰 은총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내려 주신 가장 큰 은총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계시는데도 없는 것이 됩니다. 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본모습이 아니라 미신의 대상처럼 됩니다. 성경을 무시한 꿈이나 환상, 또는 기도 중에 받았다는 계시 같은 것이 위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읽으라는 사람은 많지만, 그대로 실천하라는 사람은 적다는 데에 있습니다. 성경은 읽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행하기 위해 있는 책이니 말입니다. 이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第3問: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읽으실 때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까?

①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읽으라는 것과 그대로 행하라는 것 중 어느 것에 역점을 두고 설교를 하십니까?

② 성경에 따라 살게 해 주시라는 기도를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③ 성경에 따라 살려고 하는 노력은 어느 정도 하고 있습니까?

④ 헌금에 관한 설교를 헌금이 성경에 나온 비율(또는 중요도)만큼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이상으로 하고 있습니까? 나는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는다고 자랑처럼 말하는 분도 있는데, 목사님께서도 혹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까?

* 헌금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성경에 헌금이 나오고, 기독교 신앙에서 헌금이 무척이나 중요한 게 사실인데, 그에 대한 설교를 전혀 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⑤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이라 하셨는데, 목사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분의 마음을 닮아 가려고 얼마나 기도하며 노력하고 계십니까?

 

기도는 육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인가

기독교에서 성경(말씀)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요 기도는 그 호흡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인들은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말과 함께 기도 많이 하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안도록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구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이 또한 수도 없이 많이 들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게 대부분 바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육적 필요도 “더하시리라”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마6:31-33 참조)

우리가 구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 가장 중점적인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그에 우선하여, 그리고 중점적으로 육적 필요를 구하는 것을 가리켜 기복신앙 또는 구복신앙이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질문 드리겠습니다.

 

第4問: 목사님께서는 구복신앙 타파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계십니까?

① 목사님께서는 구복신앙의 비기독교성에 대한 설교를 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목사님 자신에게서 구복신앙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도와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② 일용할 양식의 소중함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설교도 하고 계십니까?

* 현대에 있어서의 ‘일용할 양식’은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농경사회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의식주만이 아니라 최소한의 자녀교육과 취미생활 등도 포함됩니다.

③ 기도소리로 남에게 피해를 주어도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괜찮다는 식의 생각을 하신 적은 없습니까?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기도가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에 무신경하지는 않습니까?

④ 하나님의 목이라도 조르는 것처럼 강요하는 것을 간절하여 좋은 기도라는 식으로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앞에서도 언급한,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요 기도는 그 호흡이라는 것은 적절한 비유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숨을 쉬지 않고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듯 성경을 읽어 그것을 영적 생명의 양식으로 하지 않고, 기도하여 영적으로 숨을 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바라만 보고 먹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호흡을 하되 유독가스로 오염된 공기로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죽게 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성경말씀을 정말 생명의 양식으로 섭취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기도로 호흡하여 영생하는 힘을 얻고 계십니까?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양인가, 목사의 양인가

‘목사’의 ‘목’자나 ‘목자’의 ‘목’자는 둘 다 기를 목(牧)를 쓰는데, ‘목사’는 ‘목자’처럼 보살펴 기르는 것이 주된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거듭 거의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네 어린양’이나 ‘네 양’이라 하지 않고 ‘내 어린양’과 ‘내 양’이라 하셨을까요. 우리는 모든 것에 있어 주님의 청지기 일뿐이지 소유주는 아닙니다. 그러니 주님의 양인 교인들은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한국이 낳은 성자 손양원 목사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목사는 목자이옵고

목자는 양을 치는 자인즉,

양이 목자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위해 있는 것인즉,

주여,

나, 양을 위해 있게 하옵소서.

 

나의 배와 명예와

주장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해 일하는 자가 목자이오니

주여,

양의 털 깎아 나의 옷 해 입고

양의 젖을 짜 내 배 채우고

양들 위에 군림하여 호령하는 나

아니 되게 하옵소서.

 

여기에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第5問 : 목사님께서는 주님의 양을 자기 양이라고 착각하신 적이 없습니까?

①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교인들이 목사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② 양(羊)이 많으면 털도 많이 깎고 젖도 많이 짜는데, 그렇게 불어난 양(量)과 자기에게 돌아올 양(量; 收入)과의 상관관계를 무의식중에라도 염두에 두신 적은 없습니까?

③ 양을 기르고 치는 것은 보호하고 꼴을 먹이는 것인데, 꼴의 많은 부분은 설교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들에게 먹여 살을 찌워야 할 그 꼴을 가지고 소위 미운털 박힌 교인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신 적은 없습니까?

 

목사님들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어찌 이것밖에 없겠습니까만, 생각나는 대로 대충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만을 가지고 자기 평가를 한 번 해 보시는 것도 무익하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자기반성의 기회를 가져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몇 가지의 질문을 드려 보았습니다.

 

성도님들께 드리는 질문

내친김에 성도님들께도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까지의 목사들에게 한 질문을 읽으시며 그것들의 상당부분이 평신도에게도 적용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비추어볼 때 자신은 어떠한가 하는 생각도 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도님께서는 어떻습니까? 목사만 주의 종이고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신 적이 없습니까? 앞에서 이미 운을 떼었습니다만,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가 다 주의 종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니, 질문이 아니라 자기평가를 부탁드린다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① 목사님의 신앙이 자기보다 나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바꿔 말해 은연중일지라도 나는 평신도이니 목사님의 신앙보다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습니까?

* 목사의 신앙이 평신도만 못하다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평신도라 해서 자기의 신앙이 목사보다 못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목사가 평신도보다 신학적 지식이 많고 깊은 것은 당연하지만, 신앙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평신도가 목사보다 신앙이 좋은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② 이것도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내용입니다만, 성도님께서는 주의 종인 목사님을 독거노인 등의 사회적 약자보다 더 잘 섬기려고 하는 경향은 없습니까?

* 만약 그렇다면 성도님의 신앙은 수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주 예수의 종보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더 옳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 약자(작은 자)에게 한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③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된 데 대해 성도님은 목사 탓, 교회 탓은 하면서 자기 탓은 하지 않은 게 아닙니까?

* 남의 탓만으로는 교회도 목사도, 그리고 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변해야 너도 변하고 모두가 변합니다.

④ 성도님은 신앙을 지상(至上)의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까?

*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으로는 돈보다도 어느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살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렇게 살려고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런 기도, 그런 노력이 없다면 성도님은 성도라 불려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믿는다는 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많이 미치지 못할지라도 바른 신앙의 길로 가기 위해 죽게 되면 죽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가슴을 메우고 있어야 진정한 신자가 됩니다.

⑤ 예배출석과 교회봉사, 헌금 같은 것이 신앙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 예배며 봉사, 헌금 등은 소중하고 또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소중한 것도 평소의 생활이, 그러니까 일상생활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래위에 지은 집(砂上樓閣)과도 같습니다. 일상이 예배가 되고 산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요 산제사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욕을 먹는 것도, 지탄을 받는 것도 그 같은 크리스천다운 일상이 이루어지지 못한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에 아니라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네 탓이라는 사람만 있고 내 탓이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를 쇠퇴의 길로 내몰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재기를 위해 나의 채찍은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나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도려내야할 부분이 있으면 아프더라도 도려내야 합니다. 고칠 데가 있으면 힘이 들더라도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야 한국교회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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