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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난주간]그가 찔림은?

맑은샘77 2015. 3. 13. 18:44

예수가좋다오

[고난주간]그가 찔림은?

이사야 53장 4-10절

방월석 목사

 

이스라엘의 멸망을 전후로 쓰여 진 선지서들의 주제는 ‘메시야를 통한 구원’입니다. 사울왕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는 유다 왕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힌 체로 바벨론에 끌려감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는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불행한 역사로 끝나게 되는데, 이는 결국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거부하고 왕을 요구했던 저들의 불신앙에 대한 심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바벨론 땅에 흩어져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롭게 가지게 된 믿음이 바로 ‘메시야를 통한 구원’ 즉 ‘메시야 대망 사상’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메시야 대망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난 성경 중의 하나입니다.

 

‘메시야를 통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또다시 구속과, 통치의 사역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첫 번째의 약속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두 번째 약속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선지서에서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발견할 때, 구속에 대한 약속이라면 대부분이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약속이라고 보아야 하고, 통치에 대한 약속이라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지서에서 구속의 사역을 위해 오신 초림의 주님은 일반적으로 ‘고난 받는 메시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구속의 사역을 이루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 받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입니다. 내용만 보아서는 구약의 선지자가 기록한 글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쓴 글로 보일만큼, 예수님의 고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토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였지만, 저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성경 말씀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이사야 53장입니다. 이사야 53장이 고난 받는 메시야 즉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의 고난과 그 의미를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묘사한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신앙적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고난입니다(4-6).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각들이 있습니다. 먼저, 본문 4절의 말씀처럼 ‘징벌’로 해석하는 시각입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음모를 꾸몄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찮아 보이는 갈릴리의 목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으니 이것은 신성모독의 죄이고 이 죄를 지은 예수는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저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징벌’이라 강변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 시키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던 불행한 사건(happening)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지 않았다면, 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도,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자극하는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사전에 미리 막을 수 있었는데 부주의함으로 일어난 ‘불행한 사건’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통일교)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세 번째 시각은 이것을 대속의 죽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대속’이란 대신 값을 치룬다는 뜻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맛보심으로 죄의 값을 치뤄 주셨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대속의 죽음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처럼 에덴동산에도 제단이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범죄한 인간들은 제단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단에서 드려지는 희생의 제사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드려지는 희생의 제물, 소나 양과 같은 제물들은 범죄한 인간들을 대신해서 피흘려 죽음으로 죄의 값을 치루었던 것입니다. ‘대속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바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진 ‘대속의 제물’이었다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제단에서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바쳐 피흘려 죽으심으로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처음 시작되는 순간,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요 1:29). 또 십자가에서 대속의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은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대속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통해 이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10).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기도 하셨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기도 하셨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기도 하셨지만,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속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도 바로 십자가를 통해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10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셨다”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사역을 앞 둔 예수님은 두렵고 망설여지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겪게 될 고난과 형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육체적인 죽음 뿐 아니라, 하나님께 버림 받는 영적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두렵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자 다시금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길을 가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도 십자가의 길을 가길 원하십니다. 요즘 번영 신학에 물든 목회자들이 하나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만사형통하고 축복받길 원하신다고 가르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길 원하셨듯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도 십자가의 길을 가길 원하십니다. 비록 그 길이 고난의 길이고, 외로운 길이고, 많은 희생이 요구되는 길이지만, 이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듯이, 우리도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짊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몸소 경험하신 예수님은 인생의 질고를 아시는 분이십니다(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증거합니다. 간고는 가난의 고통이고, 질고는 질병의 고통을 말합니다. 멸시를 받았다는 것은 물질적, 신체적 고통 외에도 정신적인 고통을 경험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홀로 된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간고’를 겪으셨습니다. 몸소 간고를 겪으셨기에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아십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육신의 피로를 경험하셨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육신이 경험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겪고 있는 질고를 아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사랑했던 제자들의 배신을 경험했고, 로마 병정들의 멸시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경험하는 정신적인 고통을 아십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하십니다. 여기서 ‘체휼하다’는 단어가 영어로는 sympathize라고 되어 있는데, 동정한다,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몸소 인생의 질고를 경험해 보셨기에 똑같은 고난으로 고통당하는 인생들을 체휼하시고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겁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고난이 닥칠 때마다 우리의 질고를 아시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주님이 우리를 체휼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몸소 경험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아시고 도와주십니다. 사람의 고통을 육체로 겪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을 아십니다. 혼자가려고 힘들어 하지 마사고 주님과 동행하시길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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