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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플랭클의 [로고테라피의 이론과 실제]의 요약

맑은샘77 2015. 2. 24. 13:54

빅터 플랭클의 [로고테라피의 이론과 실제]의 요약!| 양사비나

『로고테라피의 이론과 實際』... 의미에의 의지

 

저자-빅터 E. 플랭클

 

들어가는 말

 ‘로고테라피’는 ‘의미를 통한 치료요법’으로서 ‘삶에 대한 낙관적인 접근방법’이다. 빅터 프랭클은 “생명은 어떤 상태에서도 의미를 가지고 있는 채로 살아있다”고 말한다. 그는 “불가피한 고통과 같은 삶의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요소들까지도 인간이 자기의 곤경을 받아들이는 태도 여하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로고테라피는 절망을 승리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보여주고자 한다. 빅터 프랭클은, 전통이 쇠퇴해 가고 있는 요즈음 “정신의학은 인간에게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간과해선 안 되며, 십계명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타당성을 잃어버린 것 같은 오늘 날, 인간은 자기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상황들에 함축되어 있는 수많은 계명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서론

 로고테라피는 변경할 수 없는 자기 운명에 처한 환자의 태도를 치료하는 것이다. 여기엔 인간관계 내지 인격적 실존적인 만남이 꼭 필요한데 이는 바로 예수님의 치유방법이기도 하다.

 

본론

제 1 부 : 로고테라피의 이론

 심리요법은 인간관과 세계관에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자신을 피조물로 여기는 한에서는 그는 자기의 창조주인 하느님의 이미지 안에서 자기의 존재를 이해하지만, 그가 자신을 창조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는 다만 그 자신의 창조주 즉 기계의 이미지 안에서 자기의 존재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로고테라피의 인간관은 ‘인간의지의 자유, 의미에의 의지, 삶의 의미’에 바탕을 둔다. 인간의 자유는 어떤 상태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어떠한 상태가 자기에게 다가오든지간에 그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인간은 어떤 최악의 상태에서도 저항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최악의 상태에서도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는 인간에게만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이 능력의 예로 강제수용소 같은 곳에서 나타나는 영웅적 행위나 유머를 들 수 있다. 유머는 신의 속성이라고까지 말한다. 유머는 인간으로 하여금 초연한 상태에서 자기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을 증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한다. 이런 영웅적 행위와 유머는 우리에게 자기이탈을 알려준다. 즉 인간이 상황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이탈 할 수 있음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로서 인간은 자신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을 어떤 인간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로고테라피에서의 logos(의미)란 종교적인 어떤 뜻을 떠나 spirit(정신)을 뜻한다. 여기서 logos은 ‘인간의 인간성’을 뜻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있을 때, 자신을 거부할 때, 자기 자신에게 이의를 주장할 때, 자신이 양심적임을 드러낼 때> 인간은 정신학적 차원으로 건너간다. 양심적이란 것은 자신을 초월하고 자신의 행동을 도덕적 윤리적인 말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독특한 인간능력을 전제로 한다. 가장 인간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실례는 <사랑과 양심>이며 이 둘은 또 다른 독특한 인간능력 즉 자기초월능력의 가장 두드러진 표현이다. 오늘날 허무주의는 인간을 「...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정체를 감추고 있다. 의미를 상실한 사람이나 의미에 좌절한 사람은 더 이상 의미를 찾지 않고 의미가 주는 결과만을 찾는다. ‘자기실현’이 인간의 궁극적 목적지이나 일차적 지향은 아니다. 인간은 ‘의미’를 성취시킬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의미를 성취시키려 하기보다 자기를 실현시키려고 한다면 인간존재의 초월성과 모순된다. 쾌락의 이유(=의미)를 상실한 사람은 그 결과가 쾌락인 원인을 준비한다. 이유(의미)가 심리학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라면 원인은 생물학적이거나 생화학적인 어떤 것이다. 쾌락, 행복, 자기실현, 절정경험, 건강과 양심의 추구에 내재하는 자멸적인 특성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고충심리학자인 글렌(John H. Glenn)은 “이상은 바로 생존의 본질이다”고 말한다.

프로이드 또한 “강한 의식 또는 확고한 이상이 없으면 인간은 좌절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자기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단지 불행할 뿐 아니라 살 자격도 없다”고 했다. 자기를 초월하고, 자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실존의 특성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그의 고백록에서 “인간의 마음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할 때까지는 쉴 수 없다” 곧 「주님, 당신 위해 우리를 내시었으니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 쉬기까지 안식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인간은 충동에 의해서 밀리고, 가치에 의해서는 이끌린다. 가치는 전 역사를 통해서 인간존재가 공유하고 있는 공통적인 어떤 의미로서 이 의미들은 우리에게 가치로서 이해된다.

빅터 클랭크는 “의미란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나 질문을 내포하고 대답을 요구하는 상황이 뜻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따라서 개개의 상황에 따른 단 하나의 의미만이 있으며 그것이 참된 의미이다. 그러므로 로고테라피는 의미를 깨닫게 할 책임은 있으나 처방을 내리지는 않는다. 또한 로고테라피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인간은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을 하고, 상황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책임이 있다. 이 때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 발견되는 것이며 찾아 얻는 어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양심의 완전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매스 미디어가 우리에게 자극의 공세를 퍼붓고 있거니와 우리는 그것들을 여과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무엇이 본질적이 아닌지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인간은 인간의 바로 그 독자성 속에서 다른 존재를 만남으로써(사랑함으로써) 삶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1,세계에 주는 것

  2,세계로부터 취하는 것

  3,그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한 예로, 고통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처해야 할 태도와 양식을 결정해야 한다. 여기 빈대약을 선전한 광고의 예가 표현하는 것을 보라. “조용히 참으라, 야단 법석을 떨지 말고, 그 운명은 너에게 지워진 것이니! 그러나 양보하지 마라, 빈대에게, 도움을 청하라 빈대약에게!” “

고통은 될 수 있는 한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받아들여져야 할 뿐 아니라 의미있는 어떤 것으로 변형되어야한다”고 로고테라피는 가르친다. ‘운명은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변경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운명이 아니다. 인간은 능히 자신을 변경시킬 수 있다. 변경시킬 수 없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가 인간을 환경과 그 환경의 영향의 희생물로 다루게 되면 그때 우리는 인간 다루기를 그칠 뿐 아니라 인간의 변화에의 의지를 못 쓰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고통에 적극적인 쪽은 성취의 차원으로, 고통에 소극적인 쪽은 절망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인간실존은 성공하려고 애를 쓰지만, <필요하다면 성공을 하게도 하고 성공을 하지 못하게도 하는 운명>에 좌우되지는 않는다. 인간실존은 자기가 선택한 바로 그 태도에 의해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의미를 발견하고 실현시킬 수 있다. 이것으로 인해 <‘성공에도 불구하고 절망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현상’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성취라는 말로 일컬어질 수 있는 현상’>이 있는 것이다. 절망을 승리로 변화시킬 수 있다. 절망과 고통이 우리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었을 때 그것들은 의미를 갖는다.

 

제 2 부 : 로고테라피의 실제

 옛날과 달리 요즘 인간은 무엇을 마땅히 해야 할 것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게 되어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을 하고 싶어 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하기를 원하는 것을 하는 동조주의나 전체주의에 희생되고 있다. 즉 실존적 공허에 빠져 내적 공허감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적 좌절의 때에 전통과 지식을 전하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보편적 가치의 쇠퇴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독특한 의미들을 발견하기 위한 인간의 능력을 계발하여 인간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수단들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의 결여인 <권태>와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결핍인 <무감각>은 실존적 좌절의 표시이다. 그렇다고 프로이드의 말처럼 “삶의 의미와 가치에 의문을 가질 때 그 사람은 병이 든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존적 공허가 노이로제의 원인이 될 수는 있지만 결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달을 때 까지 기다리는 인내심과 깨달으려는 노력을 지녀야 한다. 방어기제 등을 통한 도피를 시도하기보다 명상과 묵상을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고독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 걸은 더 나아가 인류에 대한 의식과 책임 의식을 깨달아야 한다.

로고테라피의 기법인 반성제거와 역설지향은 인간의 자기초월과 자기이탈의 능력에 기초한다. 과도한 반성 즉 지나친 주의는 예기불안이라는 현상을 야기하여 두려움에 찬 기대를 가지고 사건에 반응하게 한다. 공포는 그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경향이 있어서 악순환을 낳는다. 이 때 그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을 하도록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일어나기를 바라도록 용기를 준다면 지향의 전도가 일어나 병적인 공포는 역설적인 원의로 대치된다. 역설지향이란 공포를 자아내는 그 상황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결토록 하여 공포라는 심리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지향은 암시나 설득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역설지향은 자기비난이나 죄의식을 감소시키기도 한다.

 

※실례 1. 우울증세의 한 갈멜 수녀 일기-

 “우울증은 나의 한결같은 동반자이다. 그것은 나의 영혼을 우울하게 만든다. 나의 이상은 어디에 있으며, 일찍이 내가 위탁했던 위대성과 미와 선은 이디에 있는가? 있는 것은 오직 권태뿐이고 나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내가 마치 공허 속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살고 있다. 왜냐하면 고통의 체험까지도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마저 침묵을 지키고 계신다. 그래서 나는 죽고 싶다. 가능하다면 빨리! 그리고 내가 바로 나의 생명의 주인이라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면 나는 자살을 했으리라. 그러나 나의 신앙으로 인해서 고통은 은총으로 바뀌어진다. 삶은 반드시 성공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꾼들이 성전을 지을 때 건설 장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땅을 파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같다. 하느님은 각자의 영혼 안에 성전을 지으신다. 그분은 내 영혼 안에 기초를 파내려고 하신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분의 삽이 언제 내게 이르더라고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실례 2. 우화적 방법 : 겨자씨의 우화-

“인도에서 태어난 고타미는 아들을 낳았지만 아기가 죽자 비탄에 젖어 죽은 아기를 데리고 다니며 약을 청한다. 한 위대한 선생을 찾았을 때 그 선생은 잘 왔다며 약을 구해오라고 처방을 내린다. 즉 어떤 집이든지 고통을 받거나 죽은 사람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 몇 알을 얻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돌아다녔지만 아무데도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집을 찾지 못한다. 그녀는 결국 자기 아들만이 유독 고통을 받은 아이가 아니며 고통은 인류의 공통된 법칙임을 깨닫는다.” 사실들은 운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실들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정신이상이 나에게 바보의 옷을 입힌다 할지라도 내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원한다면 나는 나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로고테라피에서 볼 때 종교는 인간현상이다.

 

결론

 로고테라피는 심리요법과 종교 사이에 있는 경계를 넘어가지 않지만, 종교에의 문을 열어두며, 그 문을 통과하고 안하는 것은 환자에게 맡긴다. 심리요법은 정신건강을 목적으로 하고, 종교는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정신건강에 대해 종교가 끼치는 더없이 귀중한 공헌이 있다. 종교는 인간에게 다른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없는 영적 닻과 안전감을 제공한다. 궁극적 의미 즉 최고의 의미는 사유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 인간세계와 신의 세계간의 차원적 차이를 헤치고 나갈 수는 없지만,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신뢰에 의해 중재되는 신앙을 통해서는 궁극적인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에 관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분과 대화할 수는 있다. 인간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굽은 선 위에 똑바로 쓰신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하느님 차원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보다 낮은 차원에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는 완전히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발견한다는 것은 종교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인간은 궁극적 의미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가 부르는 소리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바다의 깊이를 탐색하려면 음파를 보내어 바다의 밑바닥에서 되돌아오는 반향을 잰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므로 그 반향(응답)을 기다리는 것은 헛된 일이다. 아무런 응답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부르는 소리가 수신인(무한자 하느님)께 도달했다는 증거이다. 올포트의 힌두교에 대한 언급을 보자. “시대마다 각기 다른 개인들에 의해 주장된 신개념들은 아주 다양하다. 우리가 애정을 필요로 할 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지식을 필요로 할 때 그분은 진지하시며, 위로를 필요로 할 때 그분은 이해할 수 없는 평화를 주신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그분은 구세주이시며, 우리가 인도를 필요로 할 때 그분은 성령이시다.” 의미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조건적인 의미이며, 그 의미는 고통이나 죽음도 손상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의미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이다. 실존의 본질적 무상은 삶의 의미를 더해준다. 이는 성서에 나오는 팔레스타인의 한 농부인 하바꾹의 승리의 찬송가에서 알 수 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데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주님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2013.6.8첨부파일 로고테라피의 이론과 실제.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