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아래에 속한 백성이라면 십일조 드리고 복음 안에 속한 신도라면 연보합니다. 한국교회 신도들은 대부분 구약의 십일조와 신약교회 연보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십일조가 곧 연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동일한 성경 내용이지만, 확연하게 다른 것입니다. 마치 묵은 포도주는 묵은 자루에 담고 새 포도주는 새 자루에 담는 것처럼 다른 말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이에 대한 구분을 성경대로 밝히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을 면직하거나 이단시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가 하면 십일조를 비판하는 자들은 연보 자체를 거부하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과연 십일조란 무엇이고 연보란 무엇인지를 성경대로 살피고 이를 수용하거나 비판함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지 논해 보고자 합니다.
1. 십일조란 무엇인가
구약에서 처음으로 십일조 곧 수익의 십 분의 일을 드린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이 먼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그에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복을 빌어 준 다음 수익의 십 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도망하는 길에 베델에서 십 분의 일을 드릴 것을 서원합니다. 물론 먼저 서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 유명한 야곱의 사다리로 계시하시고 그를 보호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시기로 언약하신 다음에 서원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언약하신 대로 이루어 주신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의 십 분의 일을 드리겠습니다 하는 조건적 서원입니다. 먼저 드림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로 언약하신 대로 주시면 드리겠다는 야곱의 조건적 서원입니다.
그 다음 모세에 이르러 율법으로 십일조라는 제물이 정해집니다. 이것은 죄를 속함 받는 속죄 제물이 아니라 들어서 보이는 거제 제물입니다. 12지파 중에 11지파가 십 분의 일을 드리고 그 드려진 십일조는 레위지파와 제사장의 식량이 되었습니다. 물론 성전 섬기는 일에 종사하는 자들이 먹고 다음으로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십일조의 의미는 세상을 살면서 거두어들인 재물 중 일부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재물이 곧 거룩한 제물이 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일부분이 거룩한 제물이 됨으로 드려지지 않은 나머지 재물이 모두 거룩해지고 정결함을 입게 하는 규례입니다.
십일조의 규례는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 제물에 대한 예표입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죄인으로 사는 신도들의 대표, 곧 예수그리스도가 영원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모든 신도들이 정결함을 입음에 대한 예표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 신약교회 신도들과는 상관없는 것이 곧 십일조입니다. 바로 묵은 포도주로서 묵은 자루에 담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연보란 무엇인가
연보란 신도들의 대표 되시고 대속 제물 되심으로 정결하게 하신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라고 믿는 신도들이 드리는 연보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된 신도들이 복음 전파를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마치 새 포도주는 새 자루에 담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 신도들은 아브라함의 혈통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없고, 제사장도 없으며. 제사도 없습니다. 당연히 율법에서 해방을 얻었으니 이제 십일조는 드리지 않으며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모임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것이 교회입니다.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처음 듣고 모인 신도들이 바로 사도행전이 소개하는 초대교회입니다. 이들을 보시면 율법대로 성전 제사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이기를 힘쓰고 모이면 말씀 전하고 듣고 찬송하고 기도함으로 예배했습니다.
그들을 보시면 십일조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조건 없이 교회에 연보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내 물건이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함께 나누어 통용했습니다. 이 연보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사용되었고 신도들이 먹고 마시며 또 가난한 자들을 위해 베풀어졌습니다. 교회는 날이 갈수록 신도가 늘어났고 날이 갈수록 신도들이 드리는 연보는 차고 넘쳤습니다. 제사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아무도 강조하지 않고 율법도 아니지만 신도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연보를 했습니다. 열 개 중에 골라서 하나 혹은 백 개 중에 골라서 열 개를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땅이라도 팔고 집이라도 팔아 기쁜 마음으로 연보했습니다. 오히려 인색한 마음으로 일부를 감추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복을 받기 위해 연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을 받았음으로 기뻐 자원하여 드렸던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신도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부터 율법 아래 속해 살았고 율법대로 제사하고 십일조도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 안에 들어오면서 율법적 제사 행하지 않았고 십일조 성전에 드리지 않았습니다. 정해진 금액도 없는 연보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드렸습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수익의 십 분의 일이라고 정해진 금액이 있습니다. 신약 연보는 그것이 없습니다. 마치 백지수표에 마음대로 기록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교회는 극한 가난 가운데서 연보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매주 모일 때마다 미리 미리 연보해서 모아 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어디에도 십일조 내라 복을 받을 것이다 등의 말 없습니다. 그래도 연보는 했습니다.
3. 십일조 비판 무엇인가
신약교회 연보를 마치 구약 십일조인 것처럼 가르친 교사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한국에 교회가 처음으로 들어올 때 선교사들은 십일조를 전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떠나고 후대로 오면서 부흥 운동과 함께 십일조가 연보처럼 가르쳐졌습니다. 물론 십일조는 교회 부흥을 일으키는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비판의 대상이기도합니다.
그런데 이제 또 다른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십일조에 대해 비판적인 신도들은 아예 연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연보는 제사장은 아니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연보는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데 쓰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지체 곧 성전을 자라나게 하는 복음 전승에 사용됩니다. 그리스도인이면 십일조는 아니지만 자원하는 연보는 기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부터 복음 전파, 전승, 수호를 위해 교회 확장을 위해 연보는 행하던 제도입니다.
그러나 돈이 아깝고 아까웠지만, 신도라는 신분 때문에 억지로 계산해서 십일조 내시던 신도들, 백만 원 내면 천만 원 돌려주신다는 이상하고 허황된 욕심에 현혹되어 십일조 내시던 신도들, 십일조가 율법이며 잘못된 연보라고 알게 되시면 아예 연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인색함을 합리화하고 교회 비판의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나아가서는 자신만 연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도들도 못하도록 앞장서서 막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십일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마치 종교개혁 운동하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힘든 가운데 진실함으로 연보하는 신도들은 생각도 없는 맹신자처럼 취급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십일조 드리지 않아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연보하는 것입니다. 인색함으로 합리화하거나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도 않는 것입니다.
십일조 제도 비판하시는 분들이시여.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 제도요, 성전에서 드려진 거제 제물이라는 것 아셨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신도들은 율법과 상관없다는 것도 아셨습니까? 옳습니다. 참으로 지혜롭고 성경대로 바르게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신약교회 연보에 대해 성경대로 아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부터 자원하는 마음으로 연보하던 선진의 역사도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권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혹시나 말입니다. 인색한 마음 그리고 재물을 섬기려는 욕심을 감추시고 합리화하시려고 교회 십일조 비판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치시는 것이겠지요? 그러하다면 자원하는 연보로 복음 사역에 동참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성경대로 가르치고 성경대로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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