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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답변서

맑은샘77 2013. 9. 5. 00:05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답변서

 김동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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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모든 소득의 십일조 의무를 주장하는 원고의 소장에 대한 피고의 성경적 답변서.

 

십일조가 성경 어디에 적혀 있는가?

십일조가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인정하시고 행하도록 말씀하셨는가?

오늘날 주장되는 통념적인 모든 소득의 십일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모든 신자는 십일조를 반드시 해야 하는가?

 

 

저자는 과거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 (행17:11) 십일조에 대한 성경구절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오늘날 모든 소득의 십일조가 과연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 추적해 나간다. 이 책에서 새겨낸 성경말씀과 저자의 쉽고 명쾌한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성경에 등장하는 십일조 말씀이 자연스럽게 소화되면서 오늘날 통념적인 모든 소득의 십일조가 성경적 근거를 찾기 어려우며 성도들의 의무로 주장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말씀을 통해 율법과 복음에 대한 쉽고 명징한 이해를 얻음과 더불어 성도를 피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들어가며

 

성경의 십일조

1. 족장들의 십일조

(1) 아브라함의 십일조(창14장)

(2) 야곱의 조건부 십일조(창28장)

(3) 정리

2. 토지소산과 가축의 십일조

(1) 토지소산과 가축의 십일조

(2) 정리

3. 레위인과 제사장을 위한 십일조

(1) 민수기의 십일조

(2) 이스라엘 왕조시대 십일조

(3) 느헤미야의 개혁

(4) 말라기의 십일조

(5) 불멸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6) 사역자와 십일조

(7) 정리

4.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1)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2) 율법 아래 나신 것

(3) 정리

5. 법 없는 자들

(1) 모세율법과 이방인

(2) 모세율법에 대한 여러 주장들

(3) 그리스도의 율법

(4) 정리

6. 연보

(1) 초대교회와 십일조

(2) 바울의 예루살렘 연보사역

(3) 좋은 것을 함께 하라

(4) 정리

 

정리하며

1. 성경적 근거 없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

2. 믿음의 고백

3. 교회재정과 십일조

(1) 교회의 재정적 필요와 십일조

(2) 교회에서 돈이 필요한 이유

(3) 어떻게 할 것인가?

4.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재물, 하나님의 은혜

 

참고문헌

 

 

 

<저자소개>

 

성균관대학교 철학과, 법학과를 졸업하고 법원행정고등고시를 거쳐 법원에서 일하고 있으며 한국교회개혁포럼(구 숭사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출판사 서평>

 

이 땅의 십일조, ‘이것이 그러한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반드시 감사함으로 드려야할 의무,

물질헌신의 최소한의 기준,

밥을 굶어도 먼저 해야 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인정하는 것,

제2의 복음, 축복의 통로......

 

 

자신도 20년간 교회에서 십일조 생활을 했다는 저자는 이 땅에서 회자되는 십일조에 대한 수많은 주장과 이야기들에 대해 과거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 (행17:11) 직접 성경을 열어 살펴본다. 창세기 아브라함의 십일조에서 히브리서의 십일조까지 성경에 등장하는 십일조 말씀들을 하나하나 문맥과 역사를 통해 읽어나가면서 이 땅의 수많은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주장하는 통념적인 모든 소득의 십일조가 과연 성경적 근거가 있는 것인지 추적해 나간다.

 

 

이 책에서 새겨낸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고 저자의 쉽고 명쾌한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성경에 등장하는 십일조 말씀이 온전히 소화되면서 통념적인 모든 소득의 십일조가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말씀을 통해 율법과 복음에 대한 명징한 이해를 얻음과 동시에 그 길의 끝에서 왕 되시고, 구원자 되시고, 어린양 되시고, 대제사장 되시고, 생명의 양식 되시고, 성도를 피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도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가 오늘날 모든 성도가 행하여야 하는 헌신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며 자신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바울 서신의 ‘연보’와 같이 물질로 형제와 이웃을 자원함으로 기쁘게 섬길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저자는 통념적인 모든 소득의 십일조가 이 땅에서 어떠한 이유로 등장하게 되었는지 살펴본 후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십일조가 교회수입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사실과 교회에서 돈이 필요한 두 가지 큰 이유가 전문 목회자와 교회건물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십일조 개혁과 아울러 교회개혁을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가깝게는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목회자에 대한 고정관념과 예배당 건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대안은 단순한 예배의식 공동체로 변질된 교회가 복음의 회복을 통해 초대교회가 은혜로 누렸던 가족공동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책속으로>

 

 

이 책은 성도의 십일조 의무를 주장하는 원고의 소장에 대한 피고의 답변서입니다. 십일조 의무를 역설하는 글이나 설교는 아마도 자주 듣거나 읽으셨을 것입니다. 즉, 이 글을 읽으시는 성도들은 십일조 의무를 주장하는 원고의 이유와 근거들에는 매우 익숙하리라 여겨집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십일조에 대해서 글을 쓴다면 A4용지 반장은 채울 수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독자분들께서는 재판장이 되셔서 이제 피고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들어보시고 성경과 양심에 따른 판결을 내리시면 됩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

 

 

 

이 사건은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단 한 번 있었던 사건으로 하나님의 계시적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고 이후 성경에서 아브람이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지속적으로 드렸다는 기록도 없기 때문에 이 말씀을 현대의 성도들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지속적 또는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근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도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단 한 번 말씀되었고 한 번 일어난 사건인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오늘날의 성도가 자식을 정기적으로 바쳐야 한다는 의무나 규칙으로 정할 수는 없듯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준 이 사건도 마찬가지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특정한 사건들이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영원한 원리나 규칙으로 읽혀져 세대를 초월한 모든 세대의 모든 성도가 예외 없이, 그것도 정기적으로 지켜야 하는 의무로 여겨지는 것은 합당하지 못한 결론이며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결국 성경의 해석과 적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 <족장들의 십일조> 중에서 ---

 

 

 

사람은 먹지 못하면 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땅에서 나온 풍족한 양식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 앞에서 먹음으로 땅과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되새겼고, 무엇보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웠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함께’ 먹었습니다. 한집에서 끼니를 같이 하는 ‘식구(食口)’와 함께 먹으며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람은 먹을 때 가장 늙지 않는다고 합니다. 혼자 먹는 것보다 함께 먹는 음식이 더 맛있고 식사시간이 즐겁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으며 함께 배부르고 즐거워하며 하나님 경외하기를 항상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지가 없는 레위인과 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위해 매 삼년마다의 그해의 십일조를 저축해 두고 그들이 그것을 먹고 배부르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십일조를 저축하는 양식 창고가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십일조를 포함한 구약 모세율법에 나오는 대부분의 제물과 예물, 헌물은 곡식, 가축 등 ‘먹을 것’이었고 하나님께 바쳐진 이후 남는 것은 제사장이나 백성들이 먹었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배고픈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풍성히 주어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먹을 것,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몸을 찢어 더 좋은 제물이 되시고 사람들의 죄를 감당하시고, 자기백성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 참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식사하며 주님의 만찬, 떡과 포도주를 먹으며 주님을 기억했습니다. 초대교회를 연구한 어느 노학자는 초대교회 운영의 키워드를 ‘집과 식사’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참으로 타당한 말입니다.

--- <토지소산과 가축의 십일조> 중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7장에서 십일조가 영원히 효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십일조 사건과 모세율법의 십일조법을 잘 아는 독자인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한시적인 모세율법에 따른 것이 아닌,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승계한 영원불멸의 대세사장 예수 그리스도 외에 사람 제사장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께 십일조를 바친다든가, 성도가 바쳐야 한다는 말도 한 사실이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먹을 양식이 필요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단번의 영원한 제사, 피의 구속사역을 부인하지 않는 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성전과 제사와 제사장이 없는데 그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십일조를 바치겠습니까. 하나님 우편에서 성도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이 땅위에 적법한 대제사장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히8:1상)

----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위한 십일조> 중에서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십일조는 돈이 아니라 토지소산과 가축의 십일조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십일조의 형식과 취지, 십일조 정신에 맞습니다. ‘십일조 정신’ 운운하며 자기 맘대로 돈으로 계산해서 낼 수는 없지요. 학자들도 예수님 시대의 십일조가 토지소산과 가축 등 먹을 양식의 십일조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가 예수님께서 명하신 ‘그 십일조’를 하려면 바리새인들처럼 땅에서 나는 곡물이나 채소, 가축 중에서 드려야 합니다. 돈으로 월급 받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십일조를 하려면 어려움이 많겠습니다. 아마도 돈으로 쌀, 고기 등 음식을 사서 내야 하겠습니다. 집에서 기르거나 마당에서 저절로 자라는 먹을 채소가 있으면 그것의 십일조도 당연히 해야 할 것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쪽파의 십일조, 방울 토마토의 십일조, 상추의 십일조, 풋고추의 십일조, 부추의 십일조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행하는 ‘십일조도 행하라’고 하셨으니까요.

 

 

아무튼 말씀에 순종하여 눈에 불을 켜고 집과 마당을 뒤져 십일조에 해당하는 것들을 자루에든, 상자에든 철저히 모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십일조를 걷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에 의하면 성경에서 십일조는 레위인이 걷는 것인데 주변에 레위인은 커녕 이스라엘 사람도 없습니다. 종로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십일조를 걷는다는 말은 한 번도 못 들어 봤습니다. 물론 걷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직접 가져가 바치기로 합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십일조를 가져가 바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없습니다. 십일조를 걷고 쌓아두던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 말씀대로(눅21:6) 70년경에 불에 타 무너졌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성전을 무너뜨렸나요? 로마 군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키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성도들은 십일조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지니라> 중에서

 

 

‘법 없는 자들’로 불린 로마인에게 법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근대법의 근간을 이룬 매우 훌륭한 ‘로마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 ‘로마법’의 혜택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로마법 때문에 예수님을 자신들의 손으로 재판하고 사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법 없는 자들’에서 ‘법’은 무슨 법입니까? ‘토라’ 즉, 모세율법(모세오경)입니다. 성경에서 율법은 대부분 이 ‘토라’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십일조법이 기록된 모세율법은 다른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대한민국 국민을 이루는 한민족에게는 주어진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 <법 없는 자들> 중에서

 

 

 

사람은 심지어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 없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 시대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십일조법을 지킨 것이 그 예입니다. 이들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도 아니고 사랑함도 아니고, 이웃을 사랑함도 아니었으며 오직 자기 자신들을 사랑하면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표면적인 의를 내세우고 댓가를 요구하였습니다.

 

 

성도라 이름하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율법을 지키고 다 지켰다고 하여도 목숨을, 힘을,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가 요구하는 예배, 헌금, 교육, 봉사 등 각종 의무와 규칙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내세울 것이 있게 되고 은연중에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한다며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처했던 위험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지옥판결을 내리셨습니다(마23:33) 이 죄를 극복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양심에 부끄럼 없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 <법 없는 자들> 중에서

 

 

 

율법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모세율법이든, 율법의 행위든, 의식법이든 도덕법이든 율법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못 박혔고, 폐하여졌고,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심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만드신 그리스도의 죽음만큼 하나님 공의의 표현인 율법의 권위를 세우는 것은 없습니다. 성도는 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롬3:31)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으며 동시에 율법을 폐하시고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그러나,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율법은 죄와 사망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이 율법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마5:18 등) 그리스도 밖,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정죄를 받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입니다. 가장 큰 죄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아들을 희생시켜야만 했던 하나님의 무한한 공의를 무시함과 동시에 아들을 내어주신 끝없는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계21:8) 그를 기다리는 것은 심판과 영원한 죽음과 형벌일 뿐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죽음과 형벌을 면하기 위해 사람이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 <법 없는 자들> 중에서

 

 

 

성도를 재물로 돕는 연보는 ①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②있는 대로, 형편에 따라, 수입에 따라 ③ 균등하게 함을 알고 ④ 마음에 정한대로 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즐겨내며 ⑥ 미리 정기적으로 준비하여 하는 것입니다. 위 원리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원리는 ‘자원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성도의 행동규범, 쉽게 말해서 법전으로 보려는 분들은 그 자원함조차 성도가 지켜야할 규칙, 의무규정으로 여깁니다. 성도는 자원함으로, 힘에 부치게, 즐겨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자원함으로 내라고 말했으니 ‘자원함으로 내야할 의무’가 있고, 마게도냐 교회들이 힘에 넘치게 연보했으니 성도들도 ‘힘에 넘치게 내야할 의무’가 하고, 하나님께서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으니 성도는 ‘즐겨 내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은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에 우선 단어의 뜻부터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 <연보> 중에서

 

 

 

따라서, 오늘날의 구원받은 성도가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돈을 정기적으로 교회에 내야할 십일조 의무가 있다는 십일조 주장자들의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이며 복음의 빛 없는 성경해석과 적용에 바탕을 둔 제도 내지 관습입니다. 성경 전체를 살피지 않고, 특히나 그리스도의 위대한 복음을 통하지 않은 단편적이고 자의적인 성경해석과 적용은 그것이 아무리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것처럼 보여도 권위를 가질 수 없으며 오히려 해로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세율법의 십일조와 관련이 없으며,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적 근거가 없는 십일조 주장자들의 모든 소득의 십일조에도 구속될 이유가 없습니다. 각자의 양심에 따라 마음에 정한 대로 자원함으로 성도를 도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일조든, 십일조에 전혀 못 미치든, 십이조든, 십삼조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성도 각자가 형편에 따라 마음으로 정하여 기쁜 마음으로 성도를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피로 확증하신 새 언약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정리하며, 성경적 근거 없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 중에서

 

 

 

그러나, 이 십일조는 종교개혁의 철퇴를 맞고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유럽역사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으나 청교도 등 일부 교회에서는 주일성수와 더불어 여전히 신앙의 금과옥조로 시행되었습니다. 오늘의 대부분의 한국교회도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에 영향을 받은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재정자립을 위해 도입한 선교정책에서 비롯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의 명령과 성도의 의무 헌금, 믿음의 고백으로까지 장식하며 성경에서 그 근거를 끌어와 끼워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 없는 일관성 없는 성경해석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렇게 걷힌 십일조는 많은 부분 성직자들로 불리는 목사들의 보수와 이른바 성전이라 불리는 예배당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하고, 대출금을 갚고, 건물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과거 어두웠던 교회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정리하며, 믿음의 고백> 중에서

 

 

 

본성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인색하고 자신밖에 모르던 사람이, 마음에서 우러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하게 여기고 기꺼이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피가 그의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 곧 자원함이 성도를 섬기는 원칙이 되는 것은 그 이유밖에 없습니다. 그 자원함은 결코 십일조가 기준이 될 수 없고, 십분의 일이 교회에서 정하는 헌금의 가이드라인도 될 수 없습니다. 그 십일조가 아무런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헌신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십일조 등 의무헌금이 사라지게 된다면 성도들 각자가 다른 성도의 형편과 필요에 관심을 보이고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부족한 성도의 필요를 채움으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평균케 하는 원리의 실현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보였던 초대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성도간의 자연스러운 교제였으며 세상도 그들을 알아보고 칭송하였습니다.(행2:44-47)

---<정리하며, 교회재정과 십일조> 중에서

 

 

 

 

다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돈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2006. 8. 발표된 건강한교회재정확립네트워크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교회재정현황을 공개한 개혁성향의 교회들에서 교회재정수입의 56.58%를 십일조가 차지한다고 합니다. 건축헌금과 자산변동으로 인한 수입이 13.83%에 달하는 반면 선교와 구제헌금 수입은 각각 1.16%, 0.19%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교회재정지출은 목회자 사례비 등 목회비가 20.28%(연간수입 2억 원~10억 원 규모의 교회는 30%), 내부사무관리비용이 22.28% 건물관리비용이 5.25%, 예배당 건축 등으로 인한 부채상환이 11.42%, 자산 취득, 적립이 10.23%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반면, 구제비는 3.11%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결국 교회에서 돈이 필요한 두 가지 커다란 이유가 목회자 사례비 등 목회비용(20.28%)과 교회관리 및 자산취득(49.18%)입니다. 재정을 공개하는 개혁성향의 교회들의 현황이 이 정도인데 교회재정을 공개하지 않는 대다수의 교회들의 사정은 어떠할지 짐작이 갑니다. 사실 많은 한국교회들이 예배당 건축이나 이전으로 인한 은행 빚을 안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빚이 없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두 가지 큰 재정적 필요를 위해 오래전부터 한국교회에서 십일조가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며 성경에 없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가 성도의 의무는 물론 믿음의 고백으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리하며, 교회에서 돈이 필요한 이유> 중에서

 

 

 

목회자와 건물에 대한 고정관념만 탈피해도 교회의 재정부담을 상당부분 줄일 수 있으며 그에 따른 십일조 등 정기적이고 안정적인 재정확보를 위한 헌금강조, 무리한 성경인용이나 해석, 성도들의 부담이나 갈등, 재정비리 등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함으로 복음 선포, 나눔, 빛과 소금의 역할 등 세상 속에 놓여진 교회로서의 본연의 임무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방향전환은 교회가 현재의 의식 중심의 예배공동체에서 성경의 초대교회와 같은 교제 중심의 가족공동체로 향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며, 어떻게 할 것인가>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성도가 성경에 십일조가 언급됨을 살펴서 마음으로 소득의 십분의 일 정도는 정기적으로 성도를 섬기는 일이나 주님을 전하는 일에 쓰겠다고 마음에 정하고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받을 수도’있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말씀에 대해 마음으로 감동이 와서 정기적으로 소득의 십분의 일을 연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영적으로’ 볼 때 십일조를 해야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십일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열심히 헌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마음에 정해서 하는 성도를 ‘율법주의’라든지, 이미 무익해진 것을 한다며 비판해서도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자유 안에서 자원함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다른 성도들도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도 아내와 아이들에게 십일조 의무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교회가 모든 성도들은 최소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 의무가 어떤 방식으로든 성경에서 근거되어 나와 성도를 돕는 하나님의 명령과 의무와 헌신의 기준으로 둔갑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전철을 밟는 일과 다름 아닙니다. 또한, 목사, 장로 등 책임 있는 사람이 십일조가 의무는 아니지만 ‘하나님 자녀의 도리’라든지, ‘성도의 헌금생활의 최소한의 기준’이 된다든지, ‘십일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등으로 말하는 것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비록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연약한 성도에게는 충분히 거치는 것이나 무거운 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재물,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