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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아 김기동 이단 비판 보고서 / 최삼경 목사| ♡ †

맑은샘77 2013. 7. 28. 12:22

베레아 김기동 이단 비판 보고서 / 최삼경 목사|

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1)

 

최삼경

 

서론

 

김기동의 마귀론이 한국교회에 일으킨 문제점은 무엇인가?

 

Ⅰ. 김기동은 누구이며 베뢰아 아카데미는 무엇인가?

 

이단연구에는 두 가지 자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현상학적 연구요, 또 다른 하나는 신학적 연구 내지 성경해석학적 연구이다. 신학적 성경해석학적 연구가 이단논쟁의 핵심이지만 현상학적 연구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상과 사상은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김기동 씨가 누구인지 살피려는 것은 그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가 목적이 아니요,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영등포 소재 성락침례교회의 담임목사요, 베뢰아 아카데미 원장인 김기동 씨를 귀신 쫓는 목사로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그는 1938년 6월 25일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64년 봄에 서울로 오기까지 주로 예산에서 살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에 다니지 않았고 1957년 10월에 예산 감리교회에 처음 등록하였다고 한다. 그의 학력은 1970년 명지대학을 졸업하고, 1972년 대한신학교를 졸업했고, 1979년에 대한신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가 말하는 자신의 신앙경력은 다음과 같다. 


 교회에 등록한 다음 날, 이웃 장로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여 개구리 소리 같은 방언을 했으며, 처음으로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독특한 귀신체험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1981년 충남 예산군 광시면에 사는 최병묵 씨의 부인이 심장병으로 죽었을 때 염을 마친 시신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려 살렸던 것을 시작으로 수십 명의 죽은 자를 살렸다고 하며(1979년 6월 1일까지 10명을 살렸다고 함), 또한 수십 만 명의 귀신을 쫓아 질병을 고쳤다고 하며(85년 당시 40만 명이었음), 현재 성락교회의 교세는 4만 명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베뢰아 아카데미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가 1979년에 12명을 중심으로 자신이 깨달은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한 모임이 베뢰아 아카데미가 되었는데(베뢰아란 이름은 사도행전 17:11에서 따온 이름임) 현재는 수십기의 졸업생까지 배출시켰다고 한다. 베뢰아 아카데미는 주 1회 2시간씩 2년간 공부를 하는데 김씨의 말에 의하면 통일교인들도 더러 와서 배운다고 자랑하고 있으며 한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는 이 베뢰아 운동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자랑하였는데(85, 11) 그가 속했던 기독교 한국 침례회 총회에서 1987년 11월 16일에 이단으로 규정받고 자기를 지지하던 자들을 중심으로, 미국 남침례회 총회와는 관계가 없는 기독교 남침례회란 이름으로 새로운 교단을 만들게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베뢰아 아카데미 학생들은 생각밖에 많다. 문제는 그 교단에 속한자 뿐만 아니라 기성교회에 속한 자들이다. 김씨의 마귀론에 근거하여 기성교회에 목회하는 목회자들도 반드시 경계되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돌이키기를 촉구하며, 참고로 그와 같은 사상의 사람들 몇과 단체를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우선 신사동 소재 그레이스 아카데미의 서울대 국악과 교수인 한만영 씨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김씨와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없는 다른 단체이다. 또한 인천 소재의 한국 예루살렘교회 이초석(본명 이춘석)씨와, 마산 소재의 산해원 부활의교회 이태화 씨,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 벧엘교회 김요한 씨, 은혜한인교회의 김광신 씨도 똑같이 경계해야 할 사람들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Ⅱ. 본 글의 취지와 방향

 

 이단을 정죄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의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되며, 자료는 분명하고도 객관적이어야 하며, 비판기준은 반드시 역사적이요 정통적인 교리에서 나와야 한다.

 이단자들은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완전히 정죄되기까지는 정통교회와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통교회와 교리상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여 표면적으로는 정통교회 속에 있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단으로 정죄되면 교리적인 면이 아닌 자신들의 부흥을 시기하여 생긴 감정적인 조치였다는 주장을 하면서 그 화살을 피할 수 있는 한 피하려 하는 것이 상례이다. 예컨데 구원파란 이단(기독교복음침례회)의 교주 권신찬 씨의 경우 초기에는 정통교회와 교리적인 차이가 없는데 감정적인 문제로 인해 이단으로 정죄된 것으로 주장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 김기동 씨가 내적으로는 기성교회나 기성신학자나 기성교회 목회자들을 공격한 흔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내 놓고 베뢰아의 마귀론을 정통교회 교리와는 다른 복음임을 천명하며 가르치지는 않았다. 이 점은 현재 김씨를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하고 있는 자들도 그 교리의 기준을 어느 정도는 정통교리에 의존하고 있는 점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어떤 형태로 나올지 그 귀추를 지켜보아야 한다. 김기동 씨의 교리체계로 보면 정통교회가 오히려 이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단을 정죄할 수 있는가? 어떤 권위로 이단을 규정할 수 있는가? 혹자는 교단만이 이단을 정죄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교단적으로 이단을 정죄하는 것은 개인적인 감정이 배제될 수 있고 권위가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고 옳은 일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종교회의를 통해 이단을 정죄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교단도 얼마든지 감정적으로 이단을 정죄했음을 알아야 한다. 단체의 감정도 개인의 감정범위를 못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회의에서 이단을 규정하기 전에 개인적인 이단논쟁이 앞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개인이냐 단체냐라기 보다는 그 비판기준이 성경적이냐 또는 역사적인 기독교에 근거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그 권위가 핵심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한 것을 총회적으로 연구보고한 내용과 일치시켰다. 가능한 한 필자 개인의 주관적인 입장을 피하려 하나 피할 수 없을 때는 그 점을 명시하여 글의 객관성을 유지토록 하겠다.

 

 비판의 기준만 객관적이어도 안 된다. 비판의 근거도 객관적이어야 한다. 아니 객관적이어야 한다기 보다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때로 사실이지만 객관적인 증거가 약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객관적으로 확실한 증거만 사용하겠다. 왜냐하면 그를 옹호하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논쟁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 이다.

 

 우선 일차적인 자료는 책이다. 김기동 씨가 쓴 책들이 무려 스물 다섯 권 정도된다. 그 중에서 그의 마귀론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책 네 가지가 있는데 마귀론 상, 중, 하와 '성령을 알자'이다. 그는 마귀론 상권을 '마귀론'이라 칭하고, 중권에는 '미혹의 영이란' 부제를 붙였으며, 하권에는 '귀신이란' 부제를 붙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권발행연도가 85년 10월 15일로 제일 먼저요, 상권은 85년 11월 27일 발행되었으며, 하권은 86년 9월 25일에 발행되었다. 발행처는 모두 도서출판 베뢰아로 되어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자료가 하나 더 잇다. 그가 가르친 베뢰아 강의 테이프이다. 물론 테이프는 말로 했다는 점에서 글만큼의 책임성이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단들은 이단성을 교묘하게 숨기는 명수들이기에 글보다 테이프는 더욱 더 정직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예컨데 후론하겠지만 김기동 씨의 삼위일체론은 이단으로 정죄된 완벽한 양태론이다. 그런데 그 점이 책보다 테이프에 더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점이다. 본인이 입수한 벽여 개가 넘는 테이프는 83년 봄부터 85년 봄까지 2년간 강의한 베뢰아 아카데미 9기생 테이프이다(앞으로 테이프의 고유번호와 함께 T.P.라는 약자를 사용하겠다). 필자는 먼저 가능한 일차적 자료인 책에 의존하고 그리고 보충적인 자료로 테이프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이단의 교주가 회개하고 돌이킨 경우는 한국교회 역사에 없다. 전략적이요, 형식적인 거짓된 회개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회개의 문이 있다. 김씨가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자신의 잘못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지적될 때 회개하고 돌이키리라 믿는다. 그런 점에서 그를 정죄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만 이글이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며 글을 쓴다.

 

 먼저 밝히고 가야할 점이 있다. 김기동 씨는 사탄이라는 말과 마귀라는 말과 귀신이라는 말을 각각 의미로 사용한다.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할 때 사탄이요,  인간을 대적할 때 마귀라는 것이며, 귀신은 제 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 사후의 영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이를 묶어 마귀론이라 한다는 것을 밝혀둔다.

 

 본 글의 진행은 다음과 같이 하겠다. 본론에서 김씨의 마귀론을 소개 비판하고 결론에서 성경적으로 마귀가 무엇인지 밝히도록 하겠다. 본론은 네 가지로 나누어 소개 비판하려 하는데 제1장, 계시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제2장, 신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제3장, 창조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제4장, 마귀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이다.

 

 Ⅲ. 성경적 마귀론을 자극하는 베뢰아의 마귀론

 

 진리는 힘과 비례한다고 믿는 자들에게 4만여 명의 교세와, 수천 명의 베뢰아 졸업생과, 축사현상으로 질병을 고쳤다는 수 십만명의 사람들은 김기동 시를 진리의 사람으로 인정하기에 충분한 수치이다. 김기동 씨와 그의 제자들로 인하여 일어난 한국교회의 혼란은 상상보다 큰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오래 전부터 복음적인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성경적 마귀론이 정립되기를 강력히 호소해온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것이다. 오직 긍정적인 면으로 사용되느냐, 부정적인 면으로 사용되느냐가 다를 뿐이다. 구약의 바로도 하나님께 사용되었고, 신약의 가룟 유다도 사용되었다. 단지 부정적인 면에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김기동 씨를 통해 성서적 마귀론을 연구하도록 자극하게 된 것은 분명 부정적인 면에서의 그의 공로이다. 그동안 교계나 학계에서 마귀론을 정립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으며 이제라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을 다행한 일로 여김이 공통적인 목소리이다.

 

 교회사를 돌이켜 볼 때 언제나 이단에 대한 변증의 필요가 신학을 낳게 하였다. 그러기에 아리우스의 반삼위일체론이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을 낳게 했고, 어거스틴의 신학은 펠라기우스에 의해 자극되었다. 이처럼 이단은 정통교회의 신앙적 교리적 약점을 자극하고 보완 수정하고 견고히 하는데 공헌하게 된다.

 

 그렇게 볼 때 정통교회는 마귀론에 있어서 성서적 정립을 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00년 동안 꾸준히 발전하고 보완되어 온 신학의 진보가 엄청난데 마귀론이나 종말론에 있어서는 아직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마귀론에 대한 바른 정립이 안된 것은 한국교회 만이 아니라 세계교회가 동일한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성경이 마귀론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요, 둘째는 정통교회는 성경 앞에서 비교적 겸손하고 신중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 점에 대한 이단의 자극이 정통교회에 없었던지, 있었다면 그 자극을 피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단은 진리를 말하나 진리는 목적이 아니요, 수단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부분을 오히려 확대하고 적은 가능성을 과장하여 교리체계를 세우는 것이 상례이다. 한마디로 성경 앞에 겸손하지도 신중하지도 않은 자들이 이단이다.

 사실 김씨의 마귀론이 비성경적이라는 생각은 한국교회에 오래전부터 싹터왔다. 72년부터 시작한 베뢰아 아카데미에 대하여 이단으로 규정하기까지 무려 15년이나 걸린데는 정통교회가 성경에 대하여 겸손하고 신중했던 덕을 그가 본 셈이다.

 

 어쨌든 김씨의 마귀론이 일으킨 한국교회의 피해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보다 내적으로 더 심각하다. 한국교회는 김씨에 의해 자극되어 시작된 마귀연구에 더욱 적극적 관심을 기울여 성경적인 마귀론이 정립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Ⅳ. 김기동 씨의 마귀론에 대한 개괄적 이해

 

 상상 밖으로 김씨의 마귀론을 중심한 교리체계는 복잡하고 방대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은 일관성이 없는 부분이 많아서 그것을 선명하게 캐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그의 방대한 사상을 함축적으로 집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단이란 그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여 분석해 줄 때 구체적인 비판을 하지 않아도 그것 만으로 이단논쟁의 임무를 대부분 완성한다고 본다. 그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몇 가지 언어들의 개념이 개괄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그의 사상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언어는 같아도 그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사상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본 장에서 김 씨의 마귀론을 먼저 개괄적으로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본 장은 김씨의 마귀론을 간결하게 요약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비록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본론에서 구체적으로 소개됨을 기억하여 개괄적 이해에 도움을 얻기 바란다.

 

 김씨는 자신의 마귀론을 이해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니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 마귀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고 한다. 이를 직접 살펴보자. "그러기에 누구든지 예수를 아는 사람은 마귀를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알려면 마귀를 알아야 되며 그래야만 예수의 하신 일이 어떠한 일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른다면 마귀를 모르고 마귀를 모른다면 예수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는 많이 아는데 마귀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는 예수를 모른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목적 없이 혼자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아는 분량만큼 인간을 알고 마귀를 알며 그리고 죄악이 무엇인가를 잘 알게 될 때 성경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마귀론 상 pp. 14~15).

 

 구체적인 비판은 후에 하겠지만 오늘날 예수는 많이 알고 있으나 마귀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예수를 모른다는 말과 같다는 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겠는가? 기성교인을 지칭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통교리와 다른가? 김씨의 마귀론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마치는가? 표면적인 목적과 실질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이단논쟁이 시작되었는가? 왜 이단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는가? 다음에 이어지는 본론에서 더욱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가며 더욱 세밀한 비판을 가하겠으나 먼저 본장에서 바른 문제의식을 가지도록 하자.

 

 김씨의 예수를 알려면 마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은 비성경적인 것이지만 분명 김씨를 알려면 그의 마귀론을 알아야 함에는 틀림이 없다. 필자가 보기에 비성경적이요 비정통적인 교리를 가지고도 그를 추종하는 사람이 많은 점은 그에게 두가지 주관적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틀린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주관적인 면에서의 장점은 있는 법이다. 그 첫째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 둘째는 그의 축사현상으로부터오는 신비적인 힘 때문이다. 어쩌면 후자가 전자보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더욱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씨의 마귀론은 넓은 의미에서 신비주의 범주에서도 분석 비판해야 한다. 경험을 강조하고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는 자들은 전형적인 신비주의자이다. 이 점을 다시 비판하겠으나 또한 그가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마저도 정통교리와는 전혀 다르다. 교회사적으로 가장 많은 이단논쟁을 불러 일으킨 양성(신성과 인성) 문제에 있어서 어느 하나도 정통교회의 교리와 같지 않다.

 

 그럼 먼저 창조론을 살펴보자. 


 김씨의 창조론에 있어서 이단사상을 보여주는 내용은 여러 가지인데 그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창조와 선한창조가 무너진다는 점이요, 인간타락의 책임이 하나님께로 돌려진다는 점이다.

 

 그가 말한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이미 천사가 타락했기 때문에 이 타락한 천사를 멸하기 위해 만든 곳이 바로 이 우주입니다"(김기동의 마귀론 상 p.64)라는 이 말을 살펴보면 창세기의 만물 창조 전에 사탄이 타락했으며 이 우주는 곧 마귀가 지배하는 음부로서 그 마귀를 멸하기 위해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

 

 김씨가 우주라고 할 때는 새가 나는 공중하늘과 별들의 하늘, 즉 궁창을 합한 것으로서 원래 그는 하늘을 지구의 하늘(sky)과 둘째, 우주공간의 하늘, 즉 궁창(space)과 셋째, 하나님의 하늘(heaven)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마귀가 처음 셋째 하늘에서 쫓겨날 때가 요한계시록 12:7~10이요, 둘째 하늘에 갇힌 때가 창세기 1:8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창조 둘째 날 궁창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없는 것은 그곳은 사탄마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아도 이 우주는 마귀를 멸망시키기 위해 창조된 것을 알게 한다고 하는데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이 둘째 날 궁창창조 문제로부터 많은 교인들이 미혹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 창조론에서 창세기 1:27,28의 인간과 창세기 2:7의 인간이 다르다는 이중아담론은 간과할 수 없는 그의 이단사상이다(이 점은 본론 3장에서 구체적으로 취급했다).

 

 이제 그의 신론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김씨의 신론은 삼위일체론에서부터 정통교회와 다르다. 한마디로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론이다. 김씨는 삼위일체를 가리켜 "성부는 하나님의 본질이시오,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본영이십니다. 그러니까 본질로서는 아버지라 하고 본체는 곧 형상으로서는 아들이라하고 영으로는 성령이라 하는 것입니다."(성락교회 베뢰아 사람 7권, 88년 7월호, p.40)라고 하였는데 본질, 본체, 본영이란 말이 이해되는가?

 

 또한 후론하겠으나 김씨는 예수님의 신성도 인성도 모두 부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씨는 성경론에서도 완전한 이단이다. 그는 성령충만을 천사충만으로 본다. 그리고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은 모두 천사로서(마귀론 상 p.62) 창세기 1:2의 "하나님의 신"도 성령이 아니라 천사를 가리킨다고 한다(Ibid., pp.61~62).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에는 천사에 의해 이끌림을 받았기에 양자의 영이 없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Ibid., p.57).

 

 사도생전의 오순절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천사가 임한 것이라 하며(Ibid., p.133), 그러니 우리는 천사를 잘 부릴 줄 알아야 한다(Ibid., p.129)고 한다. 정통교인들에게는 참으로 낯선 이론일 것이다. 김씨에 의하면 성령은 완전히 허수아비 신이 되어버리는데 김씨는 성령론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이단자가 되고 만다.

 

 이제 끝으로 그의 사탄, 마귀, 그리고 미혹의 영에 대해 알아보자. 

 

천사가 타락하여 사탄과 마귀가 되었다는 말은 정통교회와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귀신과 미혹의 영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한다. 베뢰아의 마귀론은 사실상 그 초점이 이 귀신에 있고 귀신 쫓는 축사현상에 있다. 귀신은 제 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의 사후의 영으로서 제 명의 남은 기간동안 공중에 돌아다니며 인간을 괴롭혀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은 모든 질병의 원인이요, 모든 사고의 원인이요, 모든 중독의 원인이요, 모든 범죄의 원인이요, 모든 자살의 원인이라고 한다(마귀론 하, pp.170~174). 그 중에도 특히 귀신을 질병과 연결시켜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운동으로만 질병이 나을 뿐이지 약으로는 결코 질병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대표적인 주장이요 교리이다. 그동안 이것이 그의 장점으로 나타났지만 이것이 그의 모든 이단사상이 집약된 보루가 된다.

 

 그런데 이보다 정통교회 교인들에게 더 생소한 점이 있다. 소위 미혹의 영이란 것이다. 대부분 처음에 이 "미혹의 영" 문제에 개념이 파악되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이 미혹의 영이란 가변된 천사를 가리키는데, 즉 가변된 천사 미혹의 영의 도움이 없이는 귀신이 단독으로는 우리 몸에 못들어 온다는 것이다(마귀론 하, pp.54~61).

 

 그런 점에서 미혹의 영은 그의 교리체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에게 가변된 천사란 말이 더욱 생소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에게 천사를 파송했는데 그 천사들이 자기의 우두머리를 통해 가변되기도 하고 하나님에 의해 가변되기도 한다(마귀론 상, p.137)는 것이다. 이 하나님에 의해 가변된 천사는 성도 가 불의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할 때 가변시켜 미혹의 영이 되게 하는데(Ibid., p.139) 한 번 가변된 천사는 절대 다시 환원되지 않는다고 한다(마귀론 하, p.61). 그런데 마귀론 상권에서는(p.137)하나님에 의해 가변된 천사는 성도의 불의를 따라 가변된다고 했는데(왕상 22:19~23; 사 66:4,5; 겔 14:9,10) 하권에서는(p.61) 하나님께 과잉충성할 때 가변되어 미혹의 영이 된다고도 하였다.

 

 그렇게 볼 때 필자가 이를 분류해 보자면 천사가 가변되는 경우는 자기 우두머리를 따라 가변되는 경우와 하나님에 의해 가변되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에 의해 가변되는 경우는 하나님께 과잉 충성할 때, 그리고 지키고 있는 인간이 불의할 때(예컨대 신자가 혈기를 자꾸 부리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할 때) 가변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데는 김씨가 이론을 점차 수정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변된 천사인 미혹의 영은 우리 인격을 지배하는데(마귀론 중, p.70)이를 이기려면 미혹의 영의 숫자보다 돕는 천사의 숫자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마귀론 상 p.141). 그래서 성락교회 교인들은 천사를 많이 보내 달라고 결사적으로 기도하고 있다.

 

 끝으로 알고가야 할 것이 있다. "인격"이란 말과 "항구적 존재"란 말의 개념이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마귀론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하고 자기 주관적인 체계를 복잡하게 세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무슨 소리인지 알 길이 없다. 이 부분을 모르면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달라지고 모순되더라도 그것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하게 된다. 필자가 본장을 기록하는 실질적인 목적이 이 사상을 이해시키고자 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베뢰아 졸업생도 이 부분을 객관적으로 선병하게 이해하는 자가 별로 없었다.

 

 김씨는 영은 항구적 존재라고 한다. 그는 영을 항구적 존재라고 함은 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면에서 이런 자기만의 용어를 만들어 쓰는 것이다. 직접 인용해 보자. 


 "사람들은 죽음이라 할 때 육체가 없어지기에 아주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한 항구적인 존재가 바로 영입니다. 천사를 사는 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항구적으로 살 수 있다는 데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면 빛으로 살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마귀론 상, pp.30~31).

 

 그는 영은 오직 내세가 더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라고 한다. 


 "몸과 혼 할 때, 여기에 영이 있다고 하여 더 이상의 다른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세가 더 있다는 것뿐입니다. 영원한 존재라는 것은 항구적 가치가 있다는 것 이상 다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영적인 요소를 앎으로 '내가 항구적 가치를 지니고 있구나! 그러면 죽은 후 내세가 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하여 영생에 들어가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격에 영적인 요소가 더 첨가됨으로 영원한 존재 가치를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Ibid., p.83).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영 자체가 신이요, 신은 천사를 말하는데 사람의 영은 천사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라고 했다(T.P.35-1). 그는 인간 삼분설을 주장하는데 영은 항구적 존재요, 혼은 인격이요, 몸은 육체인데 사람은 기능적으로 혼이 인격인데 실제로는 몸과 합해져야만 인격이 된다는 것이다(마귀론 상, p.80; 마귀론 하, p.62).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 육체가 깨어지면 혼은 영에 잠재되어 버리므로 항구적 존재가 되어 인격이 아닌 것이다. 혼은 몸과 함께 있을 때만 인격이 될 수 있고 몸이 없으면 인격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짐승의 경우 인격이 있는가? 라고 할 때 짐승은 혼과 몸이 있지만 그 혼은 각혼을 가졌기 때문에 인격이 못된다고 하는데 독자들은 각혼이란 말에 이해가 잘 안될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천사는 인격이 아닌가란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그는 이 점에 대해 천사는 육체가 없어도 완전한 인격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마귀론 하권에서 말했는데(p.62) 상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모순되는 말을 했다.

 

 "천사는 몸은 있으나 보이지 않는 형상으로서 인격이며 사람은 몸을 가진 인격입니다"(p.80).


 "천사는 몸은 있으나"란 말은 천사가 몸을 입고 나타나는 경우를 말하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형상으로 인격이며"란 말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천사의 인격이나 사람의 인격은 같으며 또 하나님의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마귀론 상, p.80)라 하고 있다. 그리고 귀신, 즉 제 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 사후의 영은 오직 몸에만 들어와 질병을 일으킬 뿐이지 영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리송한 점을 하나 더 지적해 보자.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며(요 1:1) 말씀은 영이기 때문에(요 6:63) 예수님의 육체는 곧 영과 같은 존재로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의 영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의 육체는 인격이 아니라고 한다.

 

 "내 말이 영이라 할 때 영은 인격이 아닙니다. '영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는 똑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인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영으로서 항구적 존재입니다"(T.P.9-2).

 이 얼마나 사탄적이요 기독교의 이름은 가졌으나 기독교가 아닌 반 기독교적인 소리인지 다음에 비판하겠다.

 

 

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2)

 

최삼경

 

본론


김기동의 마귀론은 왜 이단인가?

 

제Ⅰ장

 

 
계시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필자는 이단논쟁을 계시론에서 시작해서 계시론에서 끝내고 싶다. 신앙생활 자체가 말씀에서 시작하고 말씀에서 완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Ⅰ. 성경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불과하다는 베뢰아.


 이단이 성경을 보는 자세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경계시만 충분한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요, 둘째는 성경계시 외에 이와 대등한 또는 이상의 자기계시를 가진 이단이다. 전자는 오직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함으로 이단이 된 자들인데, 세분하자면 표면적으로는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면서 실질적으로 다른 계시를 가지고 있는 이단은 이에서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데 분명히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는 이단들마저도 가능한 성경만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려한다.

 실례를 들어보자. 통일교인에게 원리강론은 성경 외의 계시오, 성경 위의 계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표면적으로 성경을 경전으로 받고 있으며 원리강론은 성경에 대한 주석서라고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이단은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또 다른 계시를 들고 있다. 또한 한 손으로는 성경으로 강조하고 또 다른 손으로는 성경을 경시하고 부정한다.

 이제 베뢰아의 계시론이 위의 사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자.
 김기동 씨는 한편으로는 성경을 대단히 강조한다. 1년에 성경을 42번 통독했다고 하고 61년에는 75독, 72년에는 108독 했다고 한다. 그가 성경을 강조하는 면을 먼저 살펴보자.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충분히 갖게해주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가 우리에게 있음을 뚜렷이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압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많은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우리에게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며 믿음의 모든 능력을 보증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김기동, 영원한 삶, 서울, 1982년, p.125).

 성경은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고 했다. 성경을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고까지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알고 성령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성경을 모르면 예수를 모르고, 예수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을 모르면 성령 또한 모른다"(김기동, 성령을 알자, 서울, 1986, 서문에서).

 이제 김씨의 다른 손을 보자. 한 손으로 강조한 성경이 무엇에 의해 무너지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제 성경으로는 예수님을 다 알지 못한다는 말과 성경은 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같다는 말에 유의하자.

 "성경도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는 이들이 느낀 글들을 모은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보고 과거에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리라 하고 성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기록의 좁은 그릇 안에서만 머물고 있기에 이보다 더 큰 많은 능력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보다도 더욱 많습니다. 성경에도 이미 밝혔듯이(요 21:25) 성령의 역사를 다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록되었으나 성도들의 부활은 아직 남았습니다. 현대의학의 고민이고 큰 문제인 암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없으나 이에 대한 성령의 역사는 성경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경보다 풍부하고 풍성합니다. …성령의 활동은 성경의 테두리를 초월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성경이란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옴 같이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그 능력과 역사 가운데서 지극히 적은 부분이 비추인 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성경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알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더욱 알고 그 날에 가서 그를 더욱 알고 영원히 살면서 영원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심히 따지기보다 성령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 더욱 옳습니다."(김기동, 영원한 관계, 서울, 1983, pp.68-69).

 성경에 대하여 말할 때는 성경이 강조되나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말할 때는 성령을 강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경의 가치를 경시하고 있다. 성경의 좁은 그릇 안에 머물면 더 큰 능력들을(성경을 넘어서는)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이 그렇고, 성령의 역사는 성경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그렇고, 성경이란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것 같다는 말이 그렇고, 현재 성경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알지 못한다는 말이 그렇다.

 이같은 말은 사실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사역까지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말처럼 성령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김씨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는 것 같이 보인다. 즉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이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역사와 모순될 수 없고 성경과 다른 성령의 역사가 있을 수 없음을 원칙론적으로 인정하는 것같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현재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는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성령의 역사보다는 그 폭이 넓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구태여 그의 말로 꼬집자면 성경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만 매여 있으면 문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성령의 빛밖에 경험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이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말이다.

 왜 이런 주장을 하게 되는가? 한마디로 그의 체험 때문이다. 그의 체험과 성경의 관계를 찾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강조하는 것 같으나 경험의 문제를 말할 때는(자신의 경험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고있기 때문에) 성경의 능력과 가치를 제한해야 하고 심지어 성경으로 성경을 폐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경험주의요 신비주의의 길이다.

 성경을 66권으로 제한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해서 성경이 아니요 영감으로 기록된 것만 성경이다. 바울은 고린도서 외에 개인적인 편지를 고린도에 써 보낸 일이 있으나 영감된 글이 아니었다(고전 5:9).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성경을 66권으로 제한하셨을까? 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사복음서는 침묵하고 있을까? 왜 세상에 둘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수님의 행적(요 21:25)을 기록하지 않으셨을까? 왜 사복음서는 헤아릴 수 없을 예수님의 기적들을 35건으로 제한하여 기록했을까? 더욱이 왜 성경은 귀신에 대해 많은 부분을 침묵하고 있을까?

 김씨의 말처럼 마귀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면 정녕 성경은 마귀에 대해 더 정확하고 확실한 지식들을 전해 주었어야 했을 터인데 왜 그렇지 않을까? 김기동 씨의 말처럼 66권 성경으로조차 어떤 경험을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따지게 되면 성령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영원한 관계, p.69)면 어떻게 우리는 성경 속에서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

 더욱이 김씨의 귀신론과 같은 교리는 교회사에 없었고 예수를 아는데 마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구원론을 주장한 초대교회 교부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예수를 알고 믿었을까? 김씨의 말처럼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이 새로운 역사인 베뢰아 운동은 왜 이제 나타났어야 했을까? 그렇다면 김씨의 마귀론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불빛보다 더 밝은 성경 밖의 계시로 보아야 할까? 베뢰아의 가르침은 과연 성령을 제한하지 않는 성경 위의 계시일까?

 예컨대 성경은 천국과 지옥의 존재는 확실히 밝히고 있지만 우리가 더 알고 싶은 많은 부분을 침묵하고 있다. 그렇다면 천국지옥 계시를 위해 누구의 경험을 첨가시켜야 할까? 「내가 본 천국」의 저자 펄시 콜레의 경험일까? 「다가오는 미레의 저자 이장림 씨의 경험일까?

 김씨가 계시론에서 이단의 뚜껑을 열게된 것은 자기 경험을 성경과 일치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이다. 그는 성경은 해석을 하면 안된다고 하는 기상천외의 자가당착적 말을 하고 있지만(마귀론 상, p.10) 그는 자기경험의 합리화를 위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그릇 해석하게 된 것이다. 그가 성서란 가늠자를 통해 경험이란 가늠쇠와 맞추어 총을 쏘면 목표물에  맞는다는 도식(Ibid., p.10)은 얼핏 보기에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그릇된 도식이다. 성서는 모든 경험을 비판할 수 있는 완전한 진리이다. 경험을 통해서만 진리를 보여주는 불완전한 진리가 아니다. 성서는 그것 자체가 진리임은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아도 하나님이심과같은 이치이다.

 여기까지에 김씨가 계시론에서 보인 이단사상은 그를 옹호하는 다른 신학적 기준에 의해 반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경험을 나타내고 그것을 성경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그의 시도는 피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이단사상을 낳게 되었다.

 

 

Ⅱ. 김씨의 설교도 성서적 가치를 지닌다는 베뢰아

 

 김씨는 성경과 성서를 구분하다. 성경은 가감할 수 없는 것인데 이는 계시이기 때문이요, 성서는 가감할 수 있는데 이는 증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은 율법과 복음인데 율법은 모세오경이요 복음은 공관복음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이기, 민수기, 신명기)과 공관복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여덟 권은 성경으로 가감할 수 없으나 나머지 58권은 가감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의 간증이나 설교도 먼 훗날 증거로서 성서가 될 수 있다는 망령된 말을 한다. 이는 그의 테이프 24-1에 잘 나타나 있다. 직접 인용해 보자. 말로된 것을 그대로 옮기면 불필요한 말이 많기 때문에 수식어는 생략했으며 줄인 말은 괄호 속에 넣었다.

 "신의 계획을 가리켜 경륜이라고 합니다. 이는 피조물과 의논없이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신적 작정이라 합니다. 이는 피조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요? 율법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기록한 책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직접 돌판에다 이렇게 쓰셨지요? 율법 대개 구약에서는 모세오경이라고 하지요. 오경 자체가 모세가 고의적으로 성경을 위해서 기록했지요?"

 "아주 좀 냉정하게 율법을 성경이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생애가 누가복음까지 삼복음, 공관복음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외에는 성경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욥기가 있다고 합시다. 또는 열왕기나, 역대기나, 다니엘서나 또는 많은 이런 책들이 있는데 욥기를 말하면 하나의 어떤 가정 이야기인데 그러나 이런 가정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율법을 증거합니다. 율법을 시인합니다."

 "율법을 시인해 주는, 율법을 증거하는, 율법을 보호하는 그러한 글을 가리켜 성서하고 합니다. 어느 역사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그 역사 이야기가 그런 역사를 통해서, 그 기록한 글이 이 내용 중에 아주 다분히 율법을 지지하는 면이 있을 때 이는 거룩한 글이 될 수 있어요. 그를 성서(라 해요)."

 "오늘날 설교집이나 간증집, 이런 것도 수백 년 후에는 성서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수 있어요. 지금도 이런 소리를 하면 욕을 먹으니까 말 못해서 그렇지요. 그것도 성서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어요. 다 여러분의 설교도 마찬가지로 (그렇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증거나 그들의 글이 성경을 지지할 수 있는, 다분히 지지하는 그러한 내용의 글을 가리켜 성서라 합니다."

 "신약에 있어서 예를 들면 사도행전이나 기타 그런 편지들이 그것은 증인들에 의해서 그 예수님의 생애를 지지하는, 시인하는 다분한 내용이 들어있다 이거야. 이를 성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 성경은 가감할 수 없는 것이 성경이예요. 가감할 수 없어요. 예수님의 생애도 가감할 수 없어요. 영원히 가감할 수 없지요. 그것 뿐이니까."

 "그러나 성서는 확대할 수 있고 얼마든지 책을 더 늘려갈 수도 있다 이거야. 줄일 수도 있고 더 많은 책이 막 추가될 수 있다 이말이야. 성경이라고 하는 부분은 결코 가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부분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가감할 수도 있다 이거야. 책을 그보다 더 추가할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을 줄여버릴 수도 있고 하는 부분을 가리키고. 그것은 인간들이 신앙으로 우리 신앙으로 증거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이야기 듣고도 더 생각하면 성경이 얼마나 간결하고도 얼마나 뚜렷한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비판할 필요가 있겠는가? 없다고 여긴다. 소개하는 것만으로 앞에서 보인 계시론의 숨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을 약화시켰듯이, 성경과 성서를 구분하는 이단적 교리체계를 세운 것은 자신의 글을 성경적인 수준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에서 나왔음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종교개혁자의 말을 결론으로 삼자.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멎는 곳에서 멎자.


제Ⅱ장

 
신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김씨는 이 신론에서 이단이 되기에 필요충분한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이를 증명하겠다. 베뢰아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다. 둘째, 베뢰아는 예수님의 양성을 모두 부인한다. 셋째, 베뢰아의 성령은 허수아비다.

 

Ⅰ. 베뢰아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다.
 그동안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김씨를 따르는 추종자들과 그를 옹호하는 자들은 삼위일체론 문제에 대단한 반발을 보였다. 워낙 김씨가 삼위일체를 강조하고 삼위일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그가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김씨가 강조하고 믿는 삼위일체는 이단으로 정죄된, 시베리우스가 "동일한 본체인 세 형태"라고 주장하던 사역적 양태론인 것이다. 즉 세 분 하나님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성부는 하나님의 본질이요,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본영입니다. 그러니까 본질로서는 아버지요, 본체 곧 형상으로서는 아들이라 하고 영으로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베뢰아 사람 제7권, 1988년 7월호, p.40).

 성령을 알자(베뢰아 도서출판, 1986)란 책에서, 또는 강의 테이프마다 같은 말이 수없이 반복된다.
 "성부는 하나님의 본질이시며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본영이십니다. 본질이란, 영이라는 말이 아니고 누가 하나님이시냐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본질로서는 아버지 되시고, 보이는 곳에 나타나신 분, 곧 피조물들이 그를 확인하여 그의 존재가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본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형상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고 영이십니다. 그래서 본영으로서 성령이 되십니다. "

 "이는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 할 때 그 하나님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기에 아버지이시며 이 분이 나타나셨을 때는 본체이시며 영으로 오셨을 때에는 본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나 영들이 많기에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실 때는 아버지이시고 우리 안에 계실 때는 성령이십니다."(성령을 알자, pp. 72-74).

 위의 말은 비교적 무슨 소리인지 선명하게 이해가 안될 것이다. 단지 인격이 하나요 나타난 모양에 따라 다르다는 사역적 양태론에 그 초점을 맞추며 다음 글을 보라.

 "하나님은 곧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예수 안에 있을 때 아버지가 되십니다(요 14:8). 아버지가 성도 안에 있으면 성령이 되십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는 성령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삼위의 각각 개체의 인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장소에 따라 불리워지는 이름이 다릅니다. 이는 곧 세모꼴을 어디서 보나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서로 각각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은 오직 하나입니다. 각각 개체의 인격으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얼굴을 보는 방향에서 다르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곧 성령님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자기가 자기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입니다."(T.P.9-2)

 이보다 완벽한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은 없다. 김씨를 옹호하는 어떤 자의 글을 보아도 김씨의 위의 주장을 양태론적 삼위일체가 아니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직 자료의 신빙성 문제에 대한 시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테이프를 들어보면 더욱 선명한 양태론주의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하신 기도는 예수님과 하나님은 인격이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라는 말은 이 때문에 나온 말이다. 절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예수님이시고 성령은 성령이시다. 김씨의 말처럼 아버지가 성도 안에 있을 때 성령이 아니라 성령은 성도 안에 있든지 성도 밖에 있든지 성령이시며, 또한 성령이 아들 안에 있을 때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든지 아버지이시다.

 그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임을 보여주는 자료는 너무나도 많다(T.P.9-2, 29-2, 성령을 알자 등). 김씨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이단이라 하며 여호와 증인을 실례로 들어 설명했다. 김씨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에게 쏜 이단 정죄의 화살이 결국 자신의 심장에 박히고 만 것이다.
 
Ⅱ. 베뢰아는 예수님의 양성을 모두 부인한다.

 김씨는 표면적이고 이론적으로는 인성을 인정한다. 아니 인성만 인정할 뿐이다. 그런데 그 인성마저도 정통교회 사상과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이 땅에 오신 후에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신이라고 하면 오히려 이단이라는 것이다. 정통교회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고 사람을 살리시는 등의 기적을 통해 신성을 주장하는 반면, 김씨는 그것은 우리 인간도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김씨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주장하는 성경적 증거는 바로 요한 2서 1:7이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요이 1:7).
 먼저 김씨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신성을 살펴보자.
 테이프 9-2번의 내용을 가능한 그대로 적되 불필요한 수식어 는 생략했으며 줄임말은 괄호 속에 넣었다. 이어지는 29-2번이나 19-2번도 같은 방법으로 기록했다.

 "육체가 영이니까 영이 육체가 된 것이니까 썩지 않는 몸이니까 예수는 부활했더라도 그 상처, 못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오지만 인간은 부활 때 상처(가 즉) 얼굴이 얽었든간에, 무슨 못으로 찔렸든, 칼로 긁혔든간에 상처가 없지요. 그것은 상처는 흙으로 돌아갈, 그것은 흙이 상처를 가지신 것이지 영이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오직 영원히 상처를 가지신 이는 한 분 밖에 없어요. 그분 한 분 밖에 (없어요). 영원히 영원히 한 분밖에 없다, 이 말이예요."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이 그가 바로 성령이예요. 그래서 성령이 예수 안에 있을 때는 아버지가 되시지요.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내가 너희 안에 있다. 그가 우리 안에 있을 때 또는 성령을 우리 안에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의 영은 내가 너희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내가 너의 안에 (있다)' 할 때 바로 이 육신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가 바로 우리 안에 있을 때,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내 말이 생명이요 영이라고 했는데 생명이 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와 있을 때는 이는 보혜사예요. 증거하시는 이란 말이예요. 보혜사, 변호사라. 변호사, 증거하시는 자라. 그러나 우리가 사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는 것이예요(계 5:11)."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내 살을 먹어 너희가 영생이 있고 내 피를 마시는 너희에게 생명이니라. 예수의 피가 성령이 아니예요. 예수의 살이 성령이 아니예요. 영신(영의 몸이란 뜻: 필자 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피를 흘린 것입니다. 영신입니다. 곧 예수님의 우리 안에 있는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곧 예수의 몸이요 말씀이시며 영이시란 말이예요. 그리스도 영, 여기에서 대개 많은 사람들이 혼돈하는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누구시냐? 성령이시다. 성령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에서 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사람이 하나님이다.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임 : 필자 주)."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곧 그 안에 있는 이가 하나님 아버지시다. 우리 안에 있는 이가 곧 성령이시다. 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자꾸 인격을 따로 보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아주 복잡하게 되고 (있습니다)."

 위의 "예수님은 영이 육신이 된 영신이라고 한 점과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하면 사람이 하나님이시라"는 항에 주의하며 다음 내용을 보자.
 이는 테이프 29-2의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다. 하나님의 아들. 그러나 그가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버지 안에 있지요. 우리 어린아이가 엄마 품 속에 있는 것과 똑같지요. 똑같애요. 그래서 우리가 아들 할 때는 영적 존재로 생각하는데요(영적으로 생각지 말라는 뜻 : 필자 주) 아들 할 때는 반드시 사람으로 오신 이를 말해야 되지. 그래야 인격이 되니까. 하나님의 아들 할 때요? 육신으로 오신 이가, 사람으로 오신 이가, 사람이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이신 그가 육신으로 오심으로 아들의 인격이 세상에 현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아들이신데, 성령이 아들 안에 있을 때 아버지라고,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할 때 영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사람으로 오신 이를 말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끝으로 다음의 결정적인 내용을 들어보자. 이는 테이프 19-2번이다.
 "예수의 생애는 신의 생애가 아니고 사람의 생애입니다. 물 위를 걸은 것은 사람이신 예수가 걸은 것입니다. 사람이 걷는 것이니 보편적인 것입니다. 무덤이 열리기 전까지 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느 한 부분이 신이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김씨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면을 책으로부터 살펴보자.
 김씨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이 성령에게 존칭어를 쓰셨는데 이는 예수님은 사람 인자가 되셨기 때문에 성령을 자기와 같은 수준에서 말씀하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성령을 말씀하실 때마다 '내가 가면 그가 오시리니' '오실 때에' '오시면' '너희와 함께 계시면'하여 존칭을 쓰셨습니다. 이처럼 주님도 성령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존칭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자신보다 더 높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기에, 곧 피조물과 함께 하시어 피조물이 수태되는 것같이 사람 몸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땅에서 식물을 먹고 피곤하여 저녁에는 주무시며, 죽임을 당할 때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곧 인자로 계셨기에 그 동안은 성령을 자기와 같은 수준에서 말씀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일체 되시지만 인자 예수가 받은 영광보다 성령은 더 크신 영광을 받아야 할 분입니다."(성령을 알자, p.13)

 예수님이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신이 아니라는 말은 결국 신성을 부정한다는 말인데 정통신학을 한 자라면 이것만으로도 이단이 되고도 남음을 알 것이다. 교회사적 변증은 인성문제까지 취급한 후에 하도록 하고 간단한 성경적 변증을 먼저 해보자.
 도마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김씨의 말에 의하면 도마는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했으니 이단이 될 것이다. 또한 김씨에 의하면 바울도 이단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도 이단이 되어야 한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 5:20).

 그러면 이제 그가 그렇게 강조하는 예수님의 인성 속에 나타난 이단사상을 정리해 보자.
 요한2서 1:7에 의해 예수님은 인간이심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지만 신성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이단이다. 그런데 그가 주장하는 예수님의 인성마저도 역사적 기독교와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요한복음 1:1,14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이 말씀은 요한복음 6:63에 의해 곧 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을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로서 영은 항구적 존재이니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의 영과 같은 수준으로서 인격이 아닌 항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T.P.9-2).

 이같은 사상의 맥락에서 다음 책들의 글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말씀이며 이는 진리요 생명이며 세상에 비치는 빛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말씀은 동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생명과 빛도 동격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내가 빛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라 말한 것입니다"(요 1:14).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은 말씀으로 하는 일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패배를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 곧 빛 때문인 것입니다. 귀신도 이 진리와 생명과 빛 때문에 쫓겨나는 것입니다"(마귀론 상, p.23).

 "그러므로 사람은 생령이 아담이며 예수는 육신이 아담인 것입니다. 같은 아담인데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아담이 된 것이며 사람은 영이 생령이 되었을 때 아담이 된 것입니다. 곧 사람은 올라갔고 주님은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람은 항구적인 가치가 부여됨으로써 생령인 아담이 되었고 예수는 종의 형상을 입음으로써 아담이 된 것입니다. 같은 아담이지만 예수님의 육신과 우리의 영의 수준이 같기에 예수님의 육신의 죽음은 사람의 영의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은 신령한 것이기에 썩지 않을 것이 순간에 몸으로 부활하여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장하지 마라' 부활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화장을 하든지 않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영이시기에 그 육신의 상처가 그대로 영원해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어 살다가 죽었다 할지라도 영이 절름발이가 아닌 이상 온전한 상태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Ibid., pp.90-91).

 "예수님의 말씀은 영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영입니다. 그의 흘리신 피는 영입니다"(베뢰아 사람 9권, 1989년 3월호, p.44).

 

 이제 비판해 보자.


 먼저 김씨는 요한2서 1:7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인성만 인정하면 이단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오직 그 당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만 인정하던 가현설주의자(도케티즘)에 대해서 요한이 한 말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지 않고 영으로 오셨고 영으로 죽으셨고 영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인성을 qwjd해도 이단이지만 반면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해도 이단인 것이다. 바로 아리우스가 예수님의 신성을 제한하다가 니캐아 종교회의 때 이단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양성문제는 중요하다. 초대교회 종교회의 대부분은 바로 이 예수님의 양성문제를 중심한 이단논쟁이었음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유사하나 하나님이 아리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된 때가 니캐아회의였으며(325년), 그리스도의 인성을 제한하던 아볼리나리스가 이단으로 정죄되던 때가 콘스탄티노플회의요(381 년), 그리스도의 양성이 완전히 독립되었으나 승천할 때 합해진다는 네스토리우스가 정죄된 때가 에베소회의요(431년), 그리스도의 양성을 부정하던 유디게가 정죄던 회의가 칼케돈회의(451)였다.

 그렇게 보면 이 양성 중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어느 하나만 주장하든지, 어느 하나를 제한하든지, 아니면 둘 다 부정하든지, 둘을 혼합시키든지, 둘을 분리하든지 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비혼합적이요, 비분할적이요, 비준리적이요, 비변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김씨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있는데 그나마 주장하는 인성도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육체는 항구적 존재로서 인격이 아니라고 하니 그리스도의 인성은 분명 우리와 같은 인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인성은 죄성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우리와 같은 인간인 것이다(고후 5:21; 히 4:15).

 이 점에 대한 신조들의 내용을 직접 살펴보자.
 먼저 니캐아 신조의 내용이다.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온 우주 앞에 나셨고, 참 신이시며, 참 빛이시며, 참신 가운데 신이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다음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이다.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대에 앞서서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며, 피조자가 아니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시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된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양성문제에 있어서 특히 신성문제에 있어서 더욱 선명해지고 분명해진 것은 아다나시우스 신조이다. 살펴보자.
 "…바른 신앙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이시며, 인간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부의 본질에서 나신 신이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으며, 인간으로서는 성모 마리아의 본질로부터 나셔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칼케돈 신조에서 조금만 더 살펴보자.
 "그는 하나님으로서 또한 사람으로서 완전하시며, 그는 실제로 하나님이시며 또 실제로 사람이시며, 합리적인 영혼과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신성에 관한한 그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타고 나셨고 또 그의 인성에 관한한 그는 다만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우리는 이 한 분의 유일한신 그리스도-성자, 주, 두 가지 본성을 타고 나신 독생자를 인정하며, 이두 가지 본성이 혼성되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거나, 두 다른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 양성의 영역과 기능에 따라 각각 대립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김씨가 예수님의 양성문제에 있어서 이단의 화살을 피해 갈 역사적 성경적 길이 있는가? 한마디로 없다.

 

 

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3)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Ⅲ. 베뢰아의 성령은 허수아비이다.

 김씨의 성령론은 "성령을 알자"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이책을 통해 그의 삼위일체는 양태론적 삼위일체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그가 이해하는 성령론은 정통적인 성령론과는 하늘과 땅처럼, 동과 서처럼 먼 것이다.

 그는 구약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인간 속에 내주하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양자의 영인 성령이 없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고 한다.

 "구약시대에는 모두가 천사에 의해 이끌림을 받았기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양자의 영이 없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지 않았습니까?"(마귀론 상, p.57)
 그런 점에서 예수 이전에는 성령의 내주가 없었다고 한다.

 "예수 이전에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성경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권능을 입어' '감동함을 입어'하여 위에 입었다는 뜻이지 '내주'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승천하신 다음 오신 성령에 대하여는 '성령이 너희 안에 오시리라',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하여 모든 사람 속에 '내주하리라'는 말로 나옵니다."

 "…과거 선지자들도 성령을 힘입었고, 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함을 입어'라고 했으나 그들은 성령의 권위로 외투를 입고 있듯 힘입었던 것이지 내주하여 임하신 것은 아닙니다"(성령을 알자. pp.95-96).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은 모두 천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신, 하나님이 보내신 영들은 천사들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이 아닙니다."(마귀론 상, p.112). 그래서 창세기 1:2에 "하나님의 신"도 천사를 말한다고 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나 모세에게 나타난 여호와가 천사였던 것같이 하나님의 신이 그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천사가 수면 위에 운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신은 모두 천사를 말합니다"(마귀론 상, p.62).

 그의 성령론 역시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에 근거하여 이해할 때 잘 이해되는데 결국 김씨는 성령의 편재성을 부정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도 성령 받고 우리도 성령 받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지만 성령이 예수 안에 계실 때에는 어느 장소에도, 어느 사람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늘로 가신 다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교회 안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성령을 알자, p.96).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기 전에는 성령은 예수 안에 계셨으니 다른 사람에게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볼 때 성령의 편재성이 와전히 부정되고 있다. 그러나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비로소 교회에 성령이 오셨다는 말은 성령의 편재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스스로 모순되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교회에 성령이 왔다는 말은교회에 성령이 오신 후에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 속에는 성령이 분명히 안계신다는 말이 된다.

 다시 상기하여 보자. 성령이 예수 안에 계실 때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성령이 된다는 김씨의 말을 따르게 되면 구약에서의 성령이 내주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안계셨다는 말이 되고, 신약의 예수님이 승천하신후 성령이 교회 안에 계신다는 말은 아버지가 우리 속에 오셨다는 말이니 하늘에는 아버지가 안계신다는 말이 된다.

 그는 심지어 성령이 임하지 않아도 예수를 인정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성령을 알자, p97) 오직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되는 것 같이 교회가 성령을 받을 때부터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한다(Ibid., p.97). 그래서 성령이 없어도 구원은 받으나 공생애는 아니요 사생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령을 받아 공생애의 삶을 살지 않으면 면류관은 없다고 한다(Ibid., p.98).

 이처럼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엄격하게 따지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시대의) 성령의 사역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충만함을 입어" 태어났다는 말도 성령의 내주가 아니라고 하게 되었고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에 의해서 성령이 예수 안에 계실 때는 어느 누구의 속에도 성령이 없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속에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성령은 하늘에도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보다는 성령은 한 분인데 어떻게 모든 사람들 속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갑 속에 성령이 있으면 을 속에 성령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김씨는 성령의 역사를 모두 천사의 역사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비록 김씨는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다는 말을 하지만 사실은 천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며 권능을 받는다고 할 때의 성령을 권능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한번 움직이면 그의 주변을 경호하는 수행자들이 많이 수행하며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가만히 있어도 수행자들과 경호원들은 계속 일하듯이 성령이 임하시면 이러한 권능들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있으면 자연히 수행자가 따르는 것입니다"(마귀론 상, p.113).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지배를 받는 자들은 천사가 수종들려고 보냄을 받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라는 말은 '천사를 얻고'라는 말로, 신약시대의 권능은 천사와 동격입니다"(Ibid., p.111).

 김씨는 천사의 숫자에 따라 능력있는 성도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귀신도 천사가 쫓고(T.P.21-2) 인격형성도 천사가 하며(마귀론 중, P.67) 가변된 천사, 즉 미혹의 영, 모든 행동과 생각도 천사가 주장하고 관리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비판해 보자.
 한 마디로 김씨의 삼위일체론은 구약에는 일신론이요 신약에서만 삼위일체론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나마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론이다.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있기 전에는 예수가 있을 수도 없으며 그러기에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 본래 이름이란 말이 가능했고(김기동, 보이지 않는 벽, 서울, 1982, p.185) 구약에는 성령이 인간 속에 내주한 일이 없었으며 그러기에 구약에 나온 하나님의 신은 모두 천사란 말은 자연스런 결론이다. 왜냐하면 성령이란 아버지가 인간 속에 있을 때만 성령이라는 그의 정의를 볼 때 구약에는 성령이 인간 속에 내주한 일이 없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우리 속에 내주한 일이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구약에 성령이란 이름조차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구약의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면 스스로 모순될 뿐이다. 더욱이 창세기 1:2의 하나님의 신마저도 천사로 볼 수밖에 없음은 하나님의 신을 성령으로 보면 그가 내린 성령에 대한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가 우리 속에 있을 때만 성령이신데 수면위를 운행할 그런 신은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사람의 영 자체가 신이요, 사람의 영은 천사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라고 한 점을 볼 때(T.P.35-1)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을 천사라 했고 사람의 영(귀신을 포함해서)은 하나님의 신이기 때문에 결국 정통교회가 보는 성령, 즉 하나님의 신은 천사나 귀신 수준으로 바꾸어 버림은 자연스럽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록 그가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이론적으로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천사의 역사로 설명하여 누가 보아도 성령은 허수아비 같은 인상을 못 벗어나는 이유 또한 삼위의 양태론적 이해와 성령의 편재성을 부정하는 자세에서 나온 체계없는 이론일 뿐이다. 그가 "성령이 예수 안에 계실 때에는 어느 장소에도, 어느 사람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성령을 알자, p96)는 말을 깊이 분석해 보면 성령의 편재성을 부인함을 알 수 있게된다. 혹 그가 신약시대의 성령의 편재성을 억지로 주장하더라도 구약의 신은 삼위 하나님이 아니요 그나마 이해하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마저도 신약에만 국한될 뿐이다.

 

제Ⅲ장

 
창조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창조론만큼 중요한 교리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현상이든 그 의미를 찾을 때마다 근원부터 살펴야 하는 학문적 습관과 당연한 방법론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은 모든 교리의 근원인 창조론에서부터 달라진다. 그리고 가장 많은 이단 사상을 숨길 수 있는 숲 또한 창조론이다. 더욱이 우리는 창조론에서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많은 부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호기심을 정통신학에서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이단 사상으로 채울 위험이 큰 것이다.

 김씨의 창조론을 살펴보자.
 먼저 그가 말하는 창조목적은 마귀를 멸하기 위함이라기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천사가 타락한 시기는 천지창조 전이 될 수밖에 없다(마귀론 상, p.64). 그 증거는 이렇다.
 그는 세 가지로 하늘을 구별하여 가르치는데 지구 가까이에 지구의 하늘(sky)이 있고, 그 다음에 궁창의 하늘(space)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하늘(heaven)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타락한 마귀를 하나님의 하늘에서 내어 쫓아 궁창에 가두신 때가 창세기 1:8이요, 그 마귀가 셋째 하늘로 내려온 때가 요한계시록 12:7-10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하늘과 궁창의 하늘 사이는 물벽이 있는데 그 물벽이 창세기 1:2의 그 물벽이요 거기 있는 하나님의 신, 즉 천사는 마귀가 하늘나라에 못들어 오도록 지키는 천사라고 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을 수종드는 종으로서 지음을 받았는데 그가 하나님을 반역했기에 하나님은 계획전으로 그 천사를 멸하기 위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천사가 인간보다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만물을 지을 때에 천사도 함께 있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할 때의 그 신은 성령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교도소를 지키는 교도관은 법무장관의 지시 하에 그 교도소를 지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운행한다는 것은 곧 천사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법무장관이 직접 총을 메고 나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교도관을 파송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영원한 결박으로 지키신다는 뜻입니다"(마귀론 상, pp.61-62).

 그리하여 첫째 날 만든 빛은 어둠의 세력인 마귀에 대한 심판의 시작이라고 한다.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이미 천사가 타락했기에 이 타락한 천사를 멸하기 위해 만든 곳이 바로 우주입니다. 성경은 여기에 흑암과 먼지와 안개가 가득하더라 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우주를 만드실 때 창조한 사실이 없으나 이미 과거에 있었던 것이며 이러한 우주 안에 그를 영원한 결박으로 가두신 것입니다. 천지창조는 그 다음에 구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1의 태초는 만물의 태초로 이 우주 안에서 이루어진 태초입니다. 그곳이 어둠과 먼지와 안개로 가득했기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것입니다. 이 빛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우주 안에만 있는 시한적 존재입니다. 이러한 피조물은 어느 때인가는 없어질 것들입니다."

 "이러한 계획은 하나님이 천사를 만드셨을 때 그들의 배타적인 부분, 곧 그들이 지위를 떠났을 때의 만약을 위해 사전에 그러한 준비를 하셨을는지도 모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빛이 있으므로 인류가 있게 되고 인류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곧 인자가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귀론 상, pp.64-65).

 여기에서 소위 성도들에게 가장 미혹이 되는 둘째 날 궁창 창조시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없는 이유인데 거기에 마귀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상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중을 만드셨으나 좋았더라 하지 않으신 것은 마귀가 거할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형무소를 만들어 놓고 놓았더라 하겠습니까?"(마귀론 상, p.66).

 그리하여 하나님은 마귀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대적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합법적인 권리를 받았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사탄으로 마귀가 되게하여 그 사람을 대적하도록 방향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합법적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곧 마귀라는 불법을 합법화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에 시험하는 자라고 주님께서 합법적인 신분이기에 그가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은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면 매일 시험에 빠져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마귀론 중, p.23).

 비판을 하기 전에 창조론에서 한 가지 더 소개해야 할 중요한 이단사상이 있다. 소위 이중아담론이다. 이 사상은 마귀론 상권 79페이지에서부터 95페이지에 잘 나타나있다. 간단히 설명해 보자.

 창세기 1:27의 남자와 여자는 몸과 혼만 가진 존재인데 창세기 2:7의 아담은 영과 혼과 몸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이다. 1장의 인간은 사람이라 하고, 2장의 인간을 아담이라고 한다. 직접 인용해 보자.

 "창세기 1:27의 '하나님이…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할 때의 이 남자와 여자는 지금 말하는 인격적인 사람이라기보다는 남자와 여자라는 곧 암컷과 수컷이라는 하나의 자웅을 구분하는 이치로서의 표현입니다. 이때 많은 자손을 얻어 번성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육체는 생물학적인 유전은 가져왔지만 영적인 유전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사람 자체가 여섯째 날 모든 동물을 만드심 같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들 역시 몸과 혼을 합해 완전한 인격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이 있는 동안 이들에게는 도덕이 잇고 윤리가 있었으며 또 문화도 있었습니다. 다만 영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 죄 지은 자들은 내세가 없는 자들이기에 더 행복할는지 모릅니다"(마귀론 상, p.81).

 이 2장의 아담은 충만한 수의 사람들(영이 없는 짐승과 같은)중에 뽑혔으니 굉장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말은 생 또는 삶(육+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여 땅에 충만하라 명하심으로 이들의 임무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명하심으로 이들의 임무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몇몇 사람중에서 한 사람으로 뽑힌 것이 아니라 땅에 충만한 수 중에서 뽑혔으니 굉장한 사람입니다. 몸으로서의 혼, 곧 인격인 아담을 하나님은 생령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마귀론 상, p.84).

 이제 하나씩 비판하겠다.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하려한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비친 베뢰아의 이단사상. 둘째, 하늘 문제 속에 비친 베뢰아의 이단사상. 셋째, 이중아담론에 비친 베뢰아의 이단사상.

 

Ⅰ.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비친 베뢰아의 이단사상
 우선 그가 보는 천사의 타락시기부터 문제가 된다. 성경은 전혀 천사의 타락시기를 말하고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하나님이 절대창조만은 무너뜨릴 수 없는 절대적인 사상이다. 성경의 가르침이 그렇고 역사적인 기독교의 전통이 그렇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천사의 타락시기를 말하려면 겸손하게 가능성 정도만 비쳐 말해야 하며 그것도 하나님의 절대창조와 선한 창조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복음적인 학자들은 천사의 타락시기를 창조 후로 보는데 공통적이다.

 그 다음에는 창조목적이 잘못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된 일이다. 그런데 마귀를 멸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노리개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계획적으로 마귀를 멸하기 위해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과, 마귀는 불법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불법을 합법화 하도록 하는 권리를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은 악하며 인간타락의 책임이 하나님께 돌아가 버리는 무서운 사상을 가지게 된다.

 

Ⅱ. 하늘 문제 속에 비친 베뢰아의 이단사상
 우선 김씨가 주장하는 세 가지 하늘이 있는데 우주(궁창의 하늘과 지구의 하늘을 합하여)와 천국의 하늘이 물벽으로 구분되며 이 우주는 결국 사탄이 지배하는 음부라고 하는 사상은 그의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하늘과 궁창의 하늘은 물벽으로 나누어 졌다고하여 그 선이 선명한데 반해 지구의 하늘과 궁창의 하늘은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보니 궁창은 마귀의 감옥으로 만들었으며 천지창조 둘째 날 궁창 창조에 만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란 말이 없다고 하는 그의 이론은 잘못된 말이지만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 버렸다.

 궁창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마귀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가르친 베뢰아 강의에 보면 바로 넷째 날 만든 해와 달과 별들이 궁창에 있다고 했다(T.P.3-1,2). 이는 그가 과학자들의 말을 빌려 우주, 물벽과 물벽의 지름을 백만 광년이라고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궁창에 마귀가 있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은데 마귀의 감옥 속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은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 둘째 날 창조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음은 궁창이 마귀의 감옥이기 때문이라고 한 김씨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비판해 보자.

 ① 창세기 1:1의 창조에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다.
 김씨는 창세기 1:2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영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김씨에 의하면 창조 자체가 마귀를 위해 창조한 세상이니 그렇게 해석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기에 1:의 창조를 가리켜 어둠과 먼지와 안개로 가득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했다는 것이다(마귀론 상, P. 65).

 본문의 "혼돈"과 "공허"는 단지 사람이 살 수 없는 조직되지 못한 자연적인 상태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며 더욱이 "흑암"은 자연적인 어두움일 뿐이지 영적 어두움이 아니다. 하나님은 빛도 만드셨지만 어두움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사 45:7).

 ② 1:4의 "어두움"에 대해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다.
 1:2의 "흑암"도 사탄에 의한 어두움으로 본다면 자연히 1:4의 "어두움"도 사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김씨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음이 이상하다. 이 "어두움"또한 자연적인 어두움을 가리킨다.

 만일 자연적인 어두움마저 사탄적인 것으로 본다면 김씨는 자기방에다 밤이 되면 수만 볼트의 전깃불을 가능한 한 많이 켜 놓고 자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김씨에게는 자연적인 어두움이 곧 영적인 어두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도 만드시고 어두움도 만드셨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시 104:20)라고 했다. 그런데 창세기 1:4에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빛에만 해당되고 어두움에 대하여는 말하고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③ 1:27,28의 인간창조에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없다.
 위 두 가지는 해석적인 입장에 따라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남는다. 그러나 인간창조 문제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음은 해석할 길이 없다. 25절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은 땅의 짐승에 대하여 한 말이지 인간에 대하여 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마저도 마귀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는 것이가? 그렇게 본다면 모든 창조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김씨의 이론을 따르면 어차피 창조는 마귀를 멸하기 위한 창조였으니까 말이다.

 ④ 1:31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이 모순된다.
 이 본문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에서 궁창창조는 예외인간? 1:2의 "흑암"도 1:4의 "어두움"도 1:26, 27의 인간도 예외인가? 오직 궁창창조 하나만 예외가 있더라도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이란 말은 모순되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경계시를 잘못하신 것이다.

 ⑤ 궁창창조 후에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 대신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이 있다(1:7).
 "그대로 되니라"란 말은 누구의 뜻대로 되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는 말이다. 김씨도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믿는 줄 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뜻하는대로 원하시는대로 만드신 것이 둘째 날 궁창이다.

 본문에 "그대로 되니라"란 말이 다른 곳의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을 대신한다. 그리고 1:31의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은 이 궁창까지 포함한 모든 것이다.

 

Ⅲ. 이중아담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이중아담론이 이단적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김씨 자신일 것이다. 그가 1983년 자신이 속했던 침례교 총회에 이중아담론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한  각서를 보아 알 수 있다(물론 후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그 교단에서 1987년 11월에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이 항은 인간론의 측면에서 별개의 장으로 취급될 수 있으나 본항에서 취급하겠다. 이 이중아담론과 베뢰아의 인간론은 "마귀론"상권 사람의 인견(pp.79-95)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하나님의 이중 인간창조문제를 비판하고 인간의 인격문제는 후에 취급하자.
 김씨는 1장의 인간은 혼과 몸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로 단지 동물의 자웅을 칭하는 용어로 보고 2장의 인간은 혼과 몸 외에 영을 받아 수많은 1장의 사람들 중에서 뽑힌 개화딘 인간이라고 한다(마귀론 상, p.79). 그러므로 그는 히브리 원문에 보면 창세기 1:27의 남자와 여자가 2:8의 인간과 다름을 잘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히브리 원문을 보면 창세기 1:27의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가 영적인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동물적인 자웅을 구분하고 있는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말은, 생 또는 삶(육+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여 땅에 충만하라 명하심으로 이들의 임무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몇몇 사람 중에서 한 사람으로 뽑힌 것이 아니라 땅에 충만한 수 중에서 뽑혔으니 굉장한 사람입니다. 몸으로서의 혼, 곧 인격인 아담을 하나님은 생령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령은 아담 하나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와의 영도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아담 하나를 만들어 아담에게서 분리되었다가 다시 합하여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부터 시작했으나 아다믄 충만한 수의 사람 중 하나를 뽑아 경건한 자녀를 얻기 위해 분리시킨 것입니다"(마귀론 상, pp.84-85).

 원래 이단은 거짓말의 명수이다. 김씨는 원문을 들면서 결정적인 거짓말을 했던 경우가 두 번 있는데 그 한 번이 바로 이중아담론이다. 이는 실수로 인한 거짓말이 결코 아니다. 실수로 인해 거짓말을 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럴 가능성이 신학적으로나 어학적으로나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1:27의 인간이나 2:8의 인간이 경우 히브리 원문은 똑같이 '아담'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본 상 그렇게 말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오직 고의적인 거짓말을 하여 미혹하려는 경우와 원어도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무지와 교만의 가능성 외에는 절대로 다른 가능성이 없다.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이단들은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해 성도들이 모르는 원문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데 구원받은 자는 의인이라 해야하며 죄인이라 하면 반드시 지옥에 간다고 하는 구원파 이단의 경우도 그렇다(특히 박옥수파의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5에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했다고 말하면 원문에는 과거시제로 과거에 죄인의 괴수였다고 했기 때문에 현재 죄인의 괴수라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원문에는 과거시제가 아닌 현재시제로 되어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단들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다.

 1장의 인간과 2장의 인간은 똑같은 인간이다. 2장의 인간도 1장의 인간처럼 하나님 형상을 가진 인간이요, 1장의 인간도 2장의 인간처럼 생령을 가진 인간이다. 단지 2장은 1장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창조의 모습을 가르치는 것이다. 2:4의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의 "대략"이란 말은 히브리어 "톨도트"란 말로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하는 단어이다.

 만일 1장 창조와 2장 창조를 다른 창조로 보면 많은 문제점들이 생긴다. 1장의 인간은 에덴동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는 말이 되며 에덴동산을 위한 창조가 따로 있게 된다. 그 이유는 2:8에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한 것을 보아서 에덴동산을 따로 창조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1장에는 에덴이란 말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김씨가 말하는 1장의 동물과 같은 인간(동물의 자웅을 칭하는 것과 같은 인간이니까)에게 하나님 형상을 주셨다는 말이 설명되지 않는다. 27절과 28절을 보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단지 동물과 같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었다고 한다면 김씨는 하나님 형상에 영적 요소를 배제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성품과 같은 하나님 형상을 주었다는 것도 모순되는 말이 된다. 더욱이 그런 인간에게 만물을 정복하고 다르시라는 특권을 주었음도 모순된다. 그보다 영적 요소가 없는, 영적 요소가 배제되는 하나님 형상이란 무엇인지 설명할 길이 없다. 이는 하나님 형상에 대한 전통적인 교회의 이해와 완전히 배치되는 이단적 해석이다.

 본 항에서 김씨의 인간론 문제를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론에서도 이 점이 핵심이 되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 베뢰아의 인격 문제를 같이 취급하여 비판하겠다.


제Ⅳ장
마귀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김씨는 마귀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한가? 자신의 마귀론은 성경에 근거했으며 또한 경험에 근거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마귀론 상, pp.9-10) 얼마나 성경에 접근하고 있으며 얼마나 성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리고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경험과 성경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의 경험 앞에 성경은 얼마만한 의미가 있는가?

 그의 계시론에서 밝힌 것처럼 이미 그의 설교나 학설은 성경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본장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소개비판 하겠다.

Ⅰ. 김씨가 사탄과 마귀에 대해 내린 정의의 오류
 베뢰아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탄과 마귀는 창세전에 하나님께 혁명을 일으킨 천사(마귀론 상, p.37)로서 원래 동격인데 사탄은 하나님을 대항할 때를 가리키고 마귀는 인간을 대적할 때 부르는 명칭이라 한다.

 "사탄과 마귀는 동격으로 사탄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하여 단수입니다. 사탄은 흑암에 갇히기 전 자기 지위를 떠나 하나님께 도전할 때를 말하며 이는 혁명가라는 뜻으로 타락한 자의 신분을 말합니다. 임금을 반역했을 때에 혁명가가 되듯 사탄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반역을 일으켜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반역한 원수일 뿐, 권세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주 안에 들어와서 이를 주관하는 자로 권세의 대명사입니다"(마귀론 상, p.151).

 그래서 그는 성경에 사탄을 대적하라고 한 일이 없다고 거듭거듭 말한다. "우주를 창조하기 이전, 하나님을 반역하고 대적하는 자의 신분을 사탄이라 하며 우주를 창조하고 사람을 창조한 후부터 마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사탄을 대적하라는 말은 없습니다"(마귀론 중, p.23).

 즉 사탄은 창조 전, 하나님을 도전할 때 가진 이름이요, 마귀는 우주 안에 들어와 인간을 주관하는 합법적인 불법자라고 한다.

 그의 말이 옳은지 살펴보자.
 우선 사탄마귀의 타락시기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타락의 시기를 창조 전으로 잡는 것은 하나님을 불법자로 만들어 버렸으며 인간은 불법적인 합법자 마귀를 멸하기 위하여 피조된 이용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의 시기를 창조 후 하와가 유혹받기 전 어느 시기로 보는데 복음적인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김씨가 사탄은 하나님을 도전할 때 사탄이라고 한 말과 인간을 대적할 때 마귀라고 한 말은 전혀 성경적으로 무근한 말이다. 김씨는 너무나도 무책임하게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키는데 이든 이단의 속성이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탄과 마귀에 대한 정의이다.

 사탄이란 말은 신구약에 56회 , 구약에서는 명사형태로 28회, 동사형태로 6회 정도 사용되고 있는데 김씨의 말처럼 창조 전에 하나님을 대적할 때만 사탄이거나 창조 후부터는 인간을 대적할때는 마귀라고 하는 말은 전혀 무책임한 말이다.

 김씨 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마 4장) "사단아 물러가라"(10절)는 말은 모순된다. 첫째, 그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인간이신데(하나님이 아닌), 인간 예수를 대적하는데 왜 "사단"이라고 했는가? 둘째, 창조 후에는 마귀에게 맡겨진 일인데 왜 마귀가 아니고 사단인가?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할 때(23절), 김씨 말에 의하면, 베드로가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에 사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니다. 분명히 김씨가 주장하는 인간 예수를 대적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김씨의 말이 옳다면 결국 모든 사단의 역사는 직접·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사상을 완전히 뒤엎을 몇 가지 경우를 더 들어보자.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값을 속였을 때 베드로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3절)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가리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으며(고후 12:7),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2:31에서 시몬에게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라고 하였다. 그의 말로하면 이는 사단이 아니라 마귀가 되어야 한다.

 이 점은 구약에서도 같다. 욥기 2:7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틀림없이 사단이 욥을 쳐서라고 했다. 분명히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욥을 대적했다.

 그보다 스가랴 3:1을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기에서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에서 그는 누구인가? 틀림없이 여호수아이다. 인간 여호수아를 대적하는데 마귀가 아니고 사단이었다.

 이제 인간을 대적할 때 마귀라는 그의 말을 살펴보자. 역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실 때(마 4장)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고 하였다. 김씨의 말로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니까 인간 예수를 시험하였으니 마귀가 맞는데 그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한 것은 모순된다. 그러나 마귀를 사단이라고 한 것을 보니 하나님을 대적하든 인간을 대적하든 사단이요 마귀인 것이다. 그리고 김씨의 주장처럼 베드로가 예수님께 책망을 들을 때 하나님께 대적했으므로 사단이라고 한 것이 사실이라면(마 16:23)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때야말로 더욱 사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마귀니라"(요 6:70)라고 하셨다.

 그의 말에 의하면 천사장 미가엘과 모세의 시체로 싸울 때 그 원수를 가리켜 "마귀"라고 했는데(유 1:9) 천사를 대적할 때는 마귀인지 사탄인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볼 때 성경에서 사탄과 마귀라는 용어가 구별된 의미로 사용됨에는 틀림이 없으나, 사탄과 마귀를 같은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계 12:9; 20:2). 김씨의 마귀론은 그 출발부터가 성경을 잘 살펴보지도 않은 채 무책임하게 엮어 놓은 이단체계임을 알 수 있다.

 

Ⅱ. 귀신은 제명에 죽지못한 불신자의 사후의 존재라는 말의 오류
 김씨의 모든 신학의 초점은 바로 이 귀신의 존재와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현상을 맞추어져 있다.
 먼저 인간수명문제를 생각해 보자. 김씨는 인간의 평균수명이 노아 이전에는 천 년 가까이도 살았는데 노아 때 120년으로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그가 노아 이후부터 120년이 인간의 수명이라고 가르쳤는데 언제부터인가 이제 평균수명이 고정되지 않은 것으로 설명을 하는 것 같다.

 "창세기 6:3에 인간이 세상에 머무는 연수의 한계를 120년이라 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천 년 가까이 살았는데 노아 홍수 이후부터 사람의 수명이 줄어들었습니다. 곡식을 심으면 다 고르지 않고 위로 올라오는 것도 있고 내려가는 것도 있듯이 하나님이 인간의 연수를 120년이라 하신 것은 평균수명이기에 다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곳은 더위와 영양부족으로 설흔 네 살이 최장수인 곳도 있습니다"(마귀론 상, p.180).

 그런데 그가 실례를 들어 설명할 때 80세를 자연수명으로 설명하기도 하고(Ibid., p.180), 또한 100세를 자연수명으로 예를 들기도 한 것을 볼 수 있다(Ibid., p.187). 어쨌든 자연수명을 다 채우고 죽은 불신자의 영은 무저갱으로 가고 그렇지 않고 제명에 죽지 못한 영은 제 수명이 차기까지 귀신으로 활동하며 몸에 붙어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수명이 백살인 을이라는 사람이 암으로 60살에 죽었다고 합시다. 그는 자연수명에서 60살에 죽었기에 아직 40살이 남아 있습니다. 이때는 무저갱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음부에서 자연수명이 차기까지 40년간을 마귀와 그 사자들과 함께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Ibid., p.187).

 그래서 100살이 제명인 자가 2살에 죽으면 98년간 인간을 괴롭힌다는 것이다(Ibid., p.187). 그리고 귀신이 들렸다가도 자연 수명이 다 되면 자연히 귀신이 떠나 무저갱으로 간다고 한다(Ibid., p.188).

 비판해 보자.
 "제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란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한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인간의 수명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마 10:29). 만일 인간의 수명을 하나님이 정하시고 또 하나님이 죽게하여 남은 생명을 귀신으로 일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 편에서 스스로 모순된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작정을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수명은 하나님이 아닌 운명론적으로 정해졌을 것이며 그러하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도전이다. 이 점에 대한 김씨의 성경적 증거를 찾을 길도 없으며 또한 구체적 논증을 본 일이 없다.

 이제 귀신은 과연 불신자의 사후의 영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자.
 그는 8,000명을 상대로 하여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의 존재임을 밝혔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나는 죽은 불신자의 영혼이다"라고 한 자가 7,995명이요, "나는 천사다"라고 한 자가 2명이요, "나는 신자였으나 후에 배교했다"는 자가 2명이요, "나는 신자였으나 자살했다"는 자가 1명이라고 했다(마귀론 하, p.146). 이 귀신은 인간의 몸 속에서는 인격을 나타내지만 인간의 몸 밖에 나가서는 항구적 존재인 영으로 있다고 한다.

 이를 살펴보자.
 "성경은 '귀신 들려'라 하며(마 8:16,28; 막 9:25) 사람 몸안에 귀신이 들어 잇을 때에는 '소오마'(헬)라 하며 인격으로 나타냈으며 '귀신이 나가더라'하여 육체에서 귀신이 떠나게 될 때에는 '퓨뉴마'(헬)라 하여 인격이 아닌 영으로 다루었습니다."

사람몸+귀신=인격(소오마)
(X)+귀신=영(퓨뉴마)
 "인격은 몸과 혼은 함께 말하면 영은 하나의 항구적 존재이기에 귀신 들린 사람이라 할 때의 귀신이란 말은 '인격을 지닌 귀신이 들려'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육체가 없어지면 영 안에 인격이 잠재해 버려 그 기능이 나타나지 않기에 영이라 말합니다. 귀신도 사람과 같아 몸을 떠나면 그 인격이 영 안에 잠재해 버리기에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영으로서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은 사람 몸 안에 들어와서만 역사하지 몸 밖에서는 역사하지 않습니다"(마귀론 상, pp.167-168).

 그가 귀신이 몸 밖에서는 인격이 아니라는 말에 대한 비판은 다음에 따로 하겠으나 먼저 그가 원어를 말하며 결국 성도들을 속였던 두 번 째 거짓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마태복음 8:16, 28과 마가복음 9:25을 들어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몸 안에 있으면 '소오마'(몸이란 뜻임)가 되고 귀신 자체는 '퓨뉴마'(영이란 뜻임)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성경에는 그런 일이 없다 .단지 동물의 몸이나 인간의 썩을 몸과 육체를 가리켜 '소오마'라고 했으며 귀신이 몸 속에 있을 때 '소오마'라고 불리워진 경우는 성경에 단 한번도 없다.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존재라는 김씨의 주장은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하나의 학설이라고 하기도 하고(마귀론 상, p.179), 성경에서 명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라 하기도 하고(마귀론 하, p.140), 그러나 성경은 귀신의 정체에 대해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를 보여 준다고 하기도 한다(Ibid., p.140). 그리고 학문적으로 뒷받침 하기가 어려움을 인정하고 이론이기에 표현에 약간의 무리가 있다고 전제하기도 한다(마귀론 상, p.9). 그러나 그가 말하는 성경적 증거만 살펴보자. 그가 제시하는 성경적 증거는 일곱 개가 된다. 사도행전 16:16, 이사야 8:19, 사무엘상 28장의 신접한 여인 사건, 고린도전서 10:20-22, 시편 106:28, 29 마가복음 6:14-16, 마태복음 16:13, 14이다(마귀론 하, pp.141-145).

 하나씩 소개하며 비판해 보자.
 모두가 다 적은 가능성을 확대하여 해석했을 뿐이며 결정적으로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의 영임을 밝히고 있는 부분은 없다.

 첫 번째 성구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지라"(행 16:16).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에서 점하는 귀신의 정체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이사야 8:19을 제시한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여기에서 문제는 '죽은 자'에 대한 해석이다. 이 '죽은 자'가 바로 신접한 자나 마술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점하는 귀신들을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순된다. 이 신접한 자와 마술사 속에 있는 귀신은 비록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 하더라도 죽은 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귀신 자체가 항구적 존재이다. 항구적 존재는 죽을 수 없는 것이다. 신약 에베소서 2:1에 우리 성도를 가리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다. 단지 성경은 영적 생명이 없는 자르 죽었다고 한다. 이 점은 누가복음 9:60에서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장사하게 하라는 말의 두 번째 "죽은 자"에서도 같은 의미이다.

 세 번째로 그는 사무엘상 28장의 사울왕의 경우를 든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 갔을 때 그 영인이 한 노인을 올라오게 하였는데 사울이 사무엘인 줄 알고 땅에 대고 절하였다는 것이다(삼상 28:13, 14). 그런데 김씨가 강조하는 점은 사울왕이 그 신을 본 것이 아니고 신접한 여인만 보았다고 한 점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사울왕 자신이 그 신을 본 것이 아니고 신접한 여인이 신접한 방법으로써 그 신을 불러 올렸고,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을 그 신접한 여인만이 복 있었다는 것입니다(삼상 28:13)"(마귀론 하, p.142).

 그런데 이때 나타난 사무엘은 사무엘이 아닌 이 신접한 여인의 술법에 이하여 끌어 올려진 다른 사후 존재라고 한다(Ibid., p.143). 왜냐하면 그 사무엘이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삼상 28:19)는 예언은 참 예언일 수 없다고 한다.

 "사무엘의 사후 형편과 사울의 사후 형편이 같은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죽어 거룩히 장사되었고(삼상 25:1), 사울은 자살하여 (삼상 31:4) 그 시체는 저주받아 더럽게 처리됐습니다(삼상 31:7-13). 결코 거룩한 자의 죽음과 타락하고 자살한 자의 죽음을 동일시 할 수 없습니다"(Ibid., p.143).

 비판해 보자.
 김씨가 그 사무엘이 참 사무엘일 수 없다는 데는 정통적인 신학자과 의견이 같다. 그런데 김씨가 사울은 그 신(사무엘)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는 문제가 있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항구적인 존재일 뿐, 육신을 입고 있는 사울이 인격이 아닌 사후의 존재를 보았다는 말이 그의 귀신론의 체계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울은 분명히 그 신이 노인이라는 것도 알았고 겉옷까지 입고 있음을 알았고, 더욱이 15절에서 들려온 그 음성은 사무엘의 음성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말처럼 모습은 볼 수 없었다면 소리는 들을수 있는가? 귀신은 반드시 몸에만 들어오고 몸에 들어 올 때만 인격인데 어떻게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또한 모순되는 것은 자신은 8,000명을 상대한 경험 속에서 귀신의 말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서 본문의 사무엘의 "내일…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은 사실일 수 없다는 점이 모순된다. 김씨의 주장은 이같이 모순투성이다.

 네 번째 성구는 고린도전서 10:20-22이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그는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입니다"(Ibid., p. 144)라는 짧은 한 마디로 위의 귀신이 사후의 존재라고 비약해 버렸다. 자시의 전제를 하나님 말씀의 전제로 삼은 것이다.

 다섯 번째 성구는 시편 106:28, 29이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앞의 이사야 8:19에서와 같이 '죽은 자'를 귀신이라고 한다. 필자도 위의 두 번째 성구에서와 같은 모순점을 지적할 뿐이다.

 여섯 번째 성구는 마가복음 6:14-16이며, 일곱 번째 내용은 마태복음 16:13, 14이다.
 여섯 번째 성구는 헤롯왕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목 베인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했다는 내용이다. 일곱 번째 성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 그런 사상이 너리 퍼져있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의 사람들이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 또는 악한 자들의 영이라고 생각했음을 부인하지 못하면서도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Ibid., p.145).

 과연 위의 두 성구가 초대교인들이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귀신이라고 믿었다는 말이 될 수 있으며, 아니 그렇게 믿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말이 될 수 있으며, 아니 그렇게 믿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그 신앙이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겠는가? 구체적 변증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위의 입곱 개의 성구를 살펴 보았으나 어느 것 하나 성경이 그의 사상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렇게도 중요한 계시라면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언급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4)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Ⅲ. 모든 질병이 귀신에서 온다는 말의 오류
 김씨는 귀신의 사역을 다섯 가지로 지적했다(마귀론 하, pp.170-174). 귀신은 모든 병의 원인이요, 모든 사고의 원인이요, 모든 중독의 원인이요, 모든 범죄의 원인이요, 모든 자살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모든 병의 원인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질병은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운동에 의해서만 고침을 받는다고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한마디로 김씨는 모든 질병의 원인을 귀신이라고 단정하는데 더욱이 예외도 없는 진리로 본다. 한의학 6,000년, 양의학 3,000년에 병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모든 병의 원인은 귀신에게서 온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사람이 벙어리 되고 귀 먹는 것은(막 9:25) 그 사람이 벙어리 되고 귀 먹는 것이 아니라 벙어리 되고 귀 먹은 귀신이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자체가 병든 것이 아니라 귀신 자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모든 질병이 귀신에게서 온다는 주장을 할 뿐 아니라 의학이나 약으로는 어떤 질병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연스런 논리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병이 과로로 생겼다고 볼 때 자연히 과로를 피하면 병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귀신에게서 온다고 볼 때 오직 귀신을 쫓아내야만 병이 물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의학이나 약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은 귀신이 약에 의해 쫓겨날 수 있다는 말이 되어 버리니 그렇게 주장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약은 병을 고치지 못한다. 병을 첨가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저항력있는 병균을 투입함으로써 병의 단위를 높여 줄 뿐이다. 제약회사는 인류의 보건과 생명을 위하여 고심하면서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마다 크게 공헌한다. 그리고 학계는 물론이려니와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푸짐하게 받는다.

 그러나 얼마가서는 그 공헌한 바가 무색케 되고 투약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하고 자기들이 양식시킨 병균으로부터 도전을 받아야 한다.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어야 하는 이러한 방식이 제약회사를 성장시켜 갈 수 있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제약회사들은 늘어가고 비대해 가는 동안 사람들의 신체는 마치 각 제약회사들의 경쟁하는 실험장같이 어처구니 없이 낡아져 가고 있는 것이다. 병이 사라져 간 것이 아니다. 병균의 단위는 투약 때마다 올라간다. 마치 약은 사람 몸에 먼저 들어가 있는 선배균을 죽이고 대신 자신이 군림하는 것이다. 제약회사의 난립은 인류에겐 희소식 같은 예방공해라고 보아 과언이 아니다"(풀빛목회 86, 1·2. p.57).

 오히려 약은 귀신으로 낮은 단위의 병균을 포기하고 대신 높은 단위의 새로운 병균을 확보하게 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약의 투약이나 의술의 사용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귀신이 만든 질병을 치료하는데 약이나 의술을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직접 들어보자.

 "그러나 투입한 먼저 병균을 이긴 저항력있는 균이 후에 때에 맞추어 발병하게 되면 전보다 더 큰 병고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은 병의 원인이 되어 병균을 생산 파송하는 귀신을 제거함으로써 깨끗하게 한다. 어떤 병은 대수술을 치른 후에도 재발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귀신이 그 몸에 잠재되어 있는 한은 병은 계속 재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이 있다. 귀신을 추방한 후에 수술하는 방법, 수술즉시 추방하는 방법이다. 귀신을 추방한 후에 잠재한 병균을 멸하기 위한 투약 방법과 투약 직후 귀신을 추방하는 방법은 무리는 아니다. 귀신이 사람의 몸에서 떠난 다음에는 균만으로써는 인체 내에서 스스로 견디기가 힘들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병균은 모두 사멸되고 만다"(Ibid., p.57).

 김씨는 죄와 병은 불가분리로 생각한다.
 "죄는 보이지 않는 병이요, 병은 보이는 죄악입니다. 이것을 철저한 신앙관으로 삼아야 합니다. 몸이 상할 때 병을 짊어지셨고 죽으실 때 영혼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죄와 병은 구분시킬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다 해도 병이 있으니 죄가 있다는 말이요, 보이는 병은 내게 죄악이 있다는 말입니다"(T.P.46-1).

 모든 질병은 귀신에게서 왔다는 말과 그러기에 의약은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김씨의 이론은 그의 귀신론의 자연스런 결론일 수밖에 없지만 이 이론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일반인에게 이해가 안될 뿐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이론으로 보이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일단 하나의 전제를 해 놓고 반증을 하기로 하자. 틀림없이 질병의 일부는 귀신에 의한 것임을 성경이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모든 질병이 귀신 때문이라는 이론가 더욱이 의약은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말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비판해 보자.
 첫째, 김씨의 행동에 모순이 있다. 모든 질병은 귀신에 의한 것이니 자연히 축사로만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이론은 논리적인 필연적 결과이다. 그런데 1984년 7월에 서울 기독병원(전 베데스다 병원)을 김목사 동생 김호동 목사를 인수했다가 10억이나 되는 손해만 보고 84년 11월에 손을 떼게 되었는데(현대종교 86, 3, pp.78-79) 그 사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교리적인 타당성을 묻는 것이지 윤리적인 약점을 묻는 것은 아니다. 약은 병을 더 심하게 할 뿐인데 무엇 때문에 병원을 인수했었는지 이해가 안된다. 혹시 김목사 마음 속에도 모든 질병이 귀신에게서 온다는 표면적 주장과 내면적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둘째, 모든 질병이 귀신 때문이라면 귀신은 우리의 구원문제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된다. 김씨의 말에 의하면 신자도 귀신에 들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1985년 11월 18, 19일에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 한 강연에 의하면 성락교인도 중에 병원에 입원한 작 하나도 없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과연 성락교회 교인 중 병원에서 치료받은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것인가?

 신자도 병이 들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신자가 귀신에 들려 질병에 사로 잡혀 있으면 구원을 받는냐 받지 못하느냐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여기에 대해 직접 언급한 부분은 본 일이 없으나 그의 논리적 결과로는 구원은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 바울마저도 지옥에 가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에서 육체의 가시 즉 사탄의 사자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평생 그 가시(육체의 질병 즉 사탄의 사자)를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씨도 아마 질병에 걸릴 것이다. 김씨를 모함하는 자의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간이 나쁘다는 소문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의 말처럼 죄는 보이지 않는 병이요, 병은 보이는 죄악이라면 모든 죄인은 병이 들 것이요 김씨도 죄인임에 틀림없으니 김씨도 병에 들 수밖에 없다고 고백해야 정직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5:23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는 말에 대하여 김씨는 바울이 모든 것을 안다고 결론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풀빛목회 1986, 1·2. p.56). 즉 바울의 지식을 불완전한 것으로 해석했다. 바울이 적어도 귀신에 의한 질병의 요인을 모르고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하였다는 말이 기독교 정통신학에서 타당한 말일 수 있는가?

 이미 앞서 계시론에서 밝혔지만 바울서신은  가감할 수 있는 성서라고 한 점을 볼 때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주장이다. 이 디모데전서 5:23의 해석과 같이 바울을 격하시켜 바울은 병들 수 있어도 김씨는 병들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김씨도 병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러면서도 수술(의학)을 질병치료의 하나의 방법론으로 인정하는 점이 더욱 모순된다. 김목사의 말에 의하면 일단 귀신이 몸 속에서 병균을 부리는 것처럼 되어있다. 병균과 귀신은 다르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귀신없이 병균만으로서는 인체 내에서 스스로 견디기 힘들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병균은 모두 사멸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세운 방법론이란 이런 것이다.

 "귀신을 추방한 후에 수술하는 방법, 수술 즉시 추방하는 방법이다. 귀신을 추방한 후에 잠재한 병균을 멸하기 위한 투약방법과 투약 직후 귀신을 추방하는 방법은 무리가 아니다."
 이 말은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말을 하게 된 저의가 베데스다 병원 인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한 통로를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후에 다시 병원을 인수한다거나 병원을 건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그의 교리적 결론은 역시 수술이나 투약만으로는 질병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수술 후에 귀신을 추방하는 방법이나 귀신을 추방한 후 수술을 하는 방법이란 모순 중에 모순이다. 귀신을 쫓는 축사현상 앞에 수술이나 투약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귀신만 사라지면 병균 혼자서 인체에 있을 수 없고 시간만 지나면 병균이 사라진다고 했지 않은가? 그것도 수술 가능성이나 투약의 가능성이 있는 질병이 따로 있다고 억지로 끼워 맞추면 김씨의 이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의 경우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이론이 아닌가?

 왜 이같은 비논리적이고 필자가 보기에 부정직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가?
 이 점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면 들수록 더욱 그러하다. 의약으로 고칠 수 있는 확실한 병의 경우 의약으로만 치료하려는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를 설명할 길이 없고, 불치병의 경우 축사와 의약의 균형 있는 치료와 그 타당성을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

 넷째, 모든 질병이 귀신으로부터 기인된다고 보는 것은 모든 역사를 귀신이 역사로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에게는 무지도 있을 수 있고 실수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질병 이전의 그 실수나 무식마저도 귀신이 주장한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김씨는 성도가 믿음을 지속시키는 것만이 귀신을 이길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믿음 안에 있는 성도도 생활 속의 실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예컨데 수렁에 빠질 수도 있고 넘어져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 이상으로 귀신이 섭리를 인정해야 된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마저도 귀신에 대한 공포 속에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귀신의 주권이 서로 대등한 것처럼 인식되지 않는가?
 다섯째, 귀신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모호하다. 질병의 원인도 불행의 원인도 귀신이다. 축사 시에도 귀신과 대화하는 것으로서 환자의 의지는 배제하고 있다. 인간의 책임이 무엇인가?

 

Ⅳ. 미혹의 영에 대한 오류
 서론에서 간단히 밝혔지만 먼저 미혹의 영에 대해 분명히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 마귀론 중권은 그 부제가 미혹의 영이듯이 미혹의 영에 대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번호를 붙여 간결하게 설명해 보겠다.

 ①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수호하는 천사를 파송했다(마귀론 상, p.137).
 ② 이 천사가 가변되는 것을 미혹의 영이라 한다(Ibid., p.138).-가변된다는 말은 선한 천사가 변하여 악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③ 그런데 귀신이 우리 몸에 들어올 때 단독으로는 들어올 수 없고 반드시 미혹의 영의 도움으로만 들어온다(마귀론 하, p.54 이하)
 ④ 그래서 성경에 유혹이란 말은 모두 미혹의 영이란 뜻이다(마귀론 상, p.137, 중 p.64).

 ⑤ 이 가변된 천사, 미혹의 영은 한번 가변되면 절대로 다시 환원될 수 없으며(마귀론 하, p.61),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우리 주변에 따라 다린다(마귀론 상, p.142).
 ⑥ 이 미혹의 영이 인간의 인격을 지배한다(마귀론 중, p.70).
 ⑦ 그런데 능력있게 살려면 가변된 천사의 수보다(미혹의 영의 수보다) 천사의 수가 많아야 하며(마귀론 상, p.141), 천사가 가변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마귀론 중, p.74).
 ⑧ 천사가 가변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요, 좁게 세 가지가 된다. 첫째는 천사가 자기 우두머리를 따라 같이 가변되는 경우요, 둘째는 하나님에 의해 가변되는 경우이다(마귀론 상, p.137).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변시키는 경우는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하나님께 과잉충성 할 때와(마귀론 하, p.61)둘째, 성도가 불의할 때 성도의 불의를 따라서 가변된다(마귀론 상, p.137).
 ⑨ 그가 가변된 천사를 위해 사용되는 성구들은 다음과 같다: 삼상 16:14, 19:23, 왕상 22:19, 사 66:3, 4, 겔 14:9, 살후 2:11, 12, 롬 1:28(마귀론 중, pp.62-67). 그런데 마귀론 상권(p. 137)에서는 위 성구 중 3개만 들었다 : 왕상 22:19-23, 사 66:4, 5, 겔 14:9, 10.

 비판해 보자.
 제일 먼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천사문제를 살펴보자. 그가 인간을 섬기라고 보낸 천사가 신자에게만 주어졌는지 불신자에게도 주어졌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가 "인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사람들에게 천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는(마귀론 중, p.59) 불신자도 포함되는 것 같은데, 곧 천사를 가리켜 성도를 섬기라고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고 한 것을 볼 때(Ibid., p.59)는 불신자는 제외되어 있다.

 더욱이 마귀론 상권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천사가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p.130). 여기에서 모순이 생긴다. 우선 태어날 때에 천사가 배치되었다는 말은 분명 잘못된 말이다. "태어 날때"를 "예수를 믿을 때"로 바꾸든지 "예정된 사람들에게는"이란 말을 첨가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분명 김씨는 불신자는 천사가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더 큰 모순이 생긴다. 불신자의 질병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질병은 귀신이 일으키고, 귀신은 인격이 아닌 항구적 존재인 사후의 영일 뿐이니 반드시 미혹의 영의 도움으로만 우리 몸에 들어온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인격이 아닌 항구적 존재인 사후의 영이 불신자의 몸에 들어갈 수 있는가? 불신자에게는 천사가 없으니 가변된 천사, 즉 미혹의 영도 없을 것이요, 미혹이 영도 없으니 불신자에게는 귀신도 못들어 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는 분명히 자기모순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점은 그가 미혹의 영에 대하여 든 성구 중에 로마서 1:28에서도 잘 나타난다(마귀론 중, pp.66-67). 인간으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어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돕는 천사로 가변시켜 유혹으로 역사하는 것을 가르친다고 하였다(Ibid., p.67).

 그런데 이 로마서 1장은 신자에 대한 말이 아니다. 불신자에 대한 말이라는 점이다. 또한 천사가 없는 불신자의 성격형성은 무엇으로 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격형성은 오직 천사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아홉가지 미혹의 영에 대한 설명은 모두 가설에 불과하며 그것도 거짓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그가 제시한 성구들에 대해서만 변증하겠다.

 그가 제시한 사무엘상 16:14과 19:23은 모두 사울왕에 대한 것이다. 16:14의 말씀은 이렇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19:23의 말씀은 이렇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14절에서 "여호와의 신"은 사울이 타락하기 전, 즉 천사가 가변된 후라고 한다(마귀론 중, p.62).

 23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가변된 천사 미혹의 영이라고 한다. 그 스스로의 모순점 들을 살펴보자. 김씨는 마귀론 하권에서는 사울왕은 구원받지 못한 인간으로 보았다(p.143). 즉 자살한(삼상 31:4) 시체는 저주받아 더럽게 처리된(삼상 31:7-13) 자로서 사울이라고 한다. 김씨의 말에 의하면 사울은 죽어서 결코 사무엘처럼 될 수 없고 즉 귀신이 될 수밖에 없든지 아니면 무저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생긴다. 미혹의 영과 귀신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성도의 구원문제에도 그렇다. 미혹의 영이 있던 사울은 귀신을 초청하여 질병에 들었다는 말이 성경에 없다. 또한 미혹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까지 하여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김씨는 천사의 인간의 육체에 못들어 간다고 하면서(마귀론 하, p.63) 또한 영에도 못들어 간다고 하면서 미혹의 영은 인간을 지옥에도 보내는가? 미혹의 영의 힘은 하나님의 구속의 권능보다 커져 버리고 말지 않는가?

 다음에는 열왕기상 22:19-23까지의 말씀이다. 본문의 "거짓 말하는 영"이 바로 가변된 천사, 미혹의 영이라 하는데 이 또한 선한 천사를 가변시켜 사용한다는 말은 전혀 없다. 에스겔 14:9, 10에서 선지자들의 마음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면 하나님께서 유혹하시어(미혹의 영을 말함:필자 주) 그들의 영을 가변시킨다는 말은(마귀론 중, p.64) 이사야 66:3, 4에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능하면 유혹으로 역사하시어(미혹의 영을 말함) 유혹을 택해 준다는 말도(Ibid., p.64)다 가변된 천사를 가리키는 내용이 전혀 아니다. 기타 그가 제시한 어떤 성구도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김씨가 주장하는 미혹의 영에 대한 이론만큼 큰 이 시대의 미혹의 영이 없을 것이다.

 

Ⅴ. 인격에 대한 오류
 본 항은 인간론에서도 취급할 수 있는 항이지만 본 항에서 따로 취급하는 것은 모두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씨가 이 인격이란 말을 모호하게 사용하여 더욱 성도들을 혼돈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항에서도 간결한 이해를 돕기 위해 번호를 붙여 설명하겠다.

 ① 김씨는 인간의 영은 항구적 존재로 인격이 아니며 좁은 의미에서는 혼이 인격인데 실제로는 혼은 몸과 함께 인격이 된다고 한다(마귀론 상, p.80, 하, p.62).
 ② 그런데 인격의 주체인 몸이 죽을 때는 혼이 영에 잠재해 버리므로 항구적 인격이 된다(마귀론 상, p.83).
 ③ 그러면서도 사람의 몸이 없어지면 인격이 나타날 수 없어 영에 잠재해 버리므로 인격은 존재하나 그 기능 지·정·의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마귀론 상, p. 167).
 ④ 또한 천사는 몸이 없어도 인격이라고 한다(마귀론 하, p. 62). 반면에 몸은 있어도 보이지 않는 현상으로서 인격이라고 한다(마귀론 상, p.80).

 ⑤ 김씨는 하나님은 또한 비록 세 인격이 아닌 한 인격이라고는 하나 인격이라고 한다(T.P.9-1, 성령을 알자 등).
 ⑥ 그리고 예수님의 육체는 영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마귀론 상, P.89)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은 인격이 아니다(T.P.9-2)라고 한다.
 ⑦ 그리고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기 때문에 인격이 아니며 남의 몸에 들어갈 때만 인격이 나타난다(마귀론 하, PP.62-63)고 한다.
 ⑧ 귀신은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몸에 들어올 때 반드시 가변된 천사, 즉 미혹의 영이 도움으로만 들어오게 된다고 한다.
 이미 독자들은 위에 열거된 그의 사상이 서로서로 모순 투성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의 궤계가 얼마나 교묘한지 알 수 있다.

 비판해 보자.
 우선 김씨는 인격이란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든지 두 개의 기준을 가지고 인격이란 말을 쓰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쉽게 귀신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필연적 논리적 귀결이다. 그가 쓰는 인격이란 말이 의미는 두 가지가 된다.

 하나는 육체를 가져야만 인격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즉 인격의 "사람 인(人)"자 때문에 사람과 같은 존재를 가리킨다고 보기 때문에 육체를 입어야만 인격이라고 하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와 책임을 가진 존재를 가리켜 인격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그 자신이 인격의 기능인 지·정·의를 말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기준을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 모순 투성이가 도어 버렸다.

이를 살펴보자.
 첫째, 몸을 가져야만 인격이라고 생각할 때 오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는 말과 미혹의 영의 도움을 입어야만 우리 몸에 들어 온다는 그의 이론을 설명할 때만 그의 논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많은 모순을 낳는다. 귀신은 절대로 인격이 아니어야 하고 그 귀신은 인격적 기능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마귀론 상, p.167) 반면 또한 귀신은 인격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마귀론 하, pp.124-135)고 하는 모순된 소리를 했다.

 더욱이 그가 귀신 자체는 영으로 인격이 아니라고 하면서 귀신 자체가 몸도 없이 의지를 보이고 대화하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마 12:43, 44). 그런가 하면 귀신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미혹의 영의 도움이 없이 우리 몸에 못들어 온다는 그의 이론이 파괴되고 말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가 천사의 몸이 없어도 인격이라고 하였지만(마귀론 하, p.62) 천사는 영인데 어떻게 인격이 될 수 있겠으며 그보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이신데(약 1:17) 어떻게 인격이 될 수 있겠는가?

 둘째, 지·정·의를 가진 그리고 책임을 가진 존재가 인격이라고 보는 경우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생긴다. 처음에는 김씨가 인격을 전자의 의미로 받아 들인다고만 생각했는데 그의 글을 읽어 본 후 후자의 의미로 인격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항구적 존재라는 영의 문제이다. 영은 인격이 아니며 오직 항구적 가치만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한 그의 말이 모순된다(마귀론 상, p.83) 영자체가 인격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귀신은 몸을 입기 전에도 인격으로 존재하니 대화도 가능하며 미혹의 영의 도움 없이도 몸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고의든, 무지든 인격이란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네 가지로 나누어 하나씩 문제점을 지적해 보겠다.

1. 사람의 인격
 김씨가 인간을 영·혼·육의 삼분설을 취하면서 그 인격의 주체를 혼으로 잡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야만 창세기 1장의 인간과 2장의 인간이 다르다는 이중아담론이 가능하고 귀신의 존재에 대한 설명과 축사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세운 교리이지만 사실 인간의 인격은 영혼 자체만으로(이분설을 취하여) 가능한 것이다 .

 몸이 없어도 다른 모든 천사들이나 신들이 영만으로 인격인 것과 같이 인간도 영혼만으로 인격이 되는 것이다. 혼을 인격의 주체로 보는 것은 구원의 핵심이 혼이 되어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이 혼에 의해 움직여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격을 지배한다는 천사가 실질적으로 하나님보다 더 큰 영향력과 힘을 가지게 된다.

2. 귀신의 인격
 귀신이란 말 자체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기 때문에 이는 인격이 아니란 말이 된다. 그렇게 볼 때 귀신 그 자체는 죽을 수도 없어질 수도 없다는 말이 되고 만다. 그런데 "죽은 자"라고 표현한 것이 "귀신"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은(마귀론 하, p.141, 144)귀신이란 본질에 대한 표현으로서는 맞지 않게 된다. 죽은 것은 몸이지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혼이 영에 잠재할 때는 인격이 아니고 몸에 들어올때는 인격이 된다는 말은 귀신은 아무런 의지가 없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미혹의 영의 도움을 입어 몸에 들어와 질병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전혀 의지가 없는 비인격체인 귀신이 어떻게 몸에 들어오겠는가? 차라리 미혹의 영이 귀신을 강제로 몰아 넣었다고 해야 김씨의 논리가 맞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김씨의 마귀론의 핵심이 귀신이 아니다. 미혹의 영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천사의 인격
 천사는 육체가 없어도 인격이란 말은 천사의 인격과 사람의 인격이 다르다는 전제에 의해서만 가능한다. 천사의 영과 인간의 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몸은 있어도 보이지 않는 형상으로 인격이란 말은(마귀론 상, p.80)구약에 천사가 몸을 입고 나타난 경우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형상"이란 말이 모순된다.

 이 형상이란 개념을 내적인 성품으로서의 형상이라면 천사가 몸을 입었든지 안입었든지 형상일 것이요, 형상이란 개념을 외적인 모습으로 생각했다면 천사가 몸을 입었을 때는 보이는 형상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형상"이란 말은 네모난 삼각형같이 모순된 말이 된다.

4. 예수님의 인격
 그의 말에 의하면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인격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몸을 입고 오신 인간으로서 신이라고 하면 이단이 되고 그의 몸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요(요 1:1), 그 말씀은 곧 영이기 때문에(요 6:63) 영은 인격이 아닌 항구적 존재이니 예수님의 육신은 인격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의 육신이 인격이 아니라고 할 때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위에서 지적한 인간의 몸을 중심해서 생각하는 인격의 범주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몸은 영이니 인격이 아니라는 논리는 자연스런 것이다. 천사는 몸이 없어도 인격이며 예수님은 몸이 있어도 왜 인격이 아닌가? 이 해괴망칙한 인격론이 어디에 있겠는가? 왜 이런 말이 생겼다고 독자들은 생각하는가? 한마디로 그의 귀신의 존재와 축사운동 때문에 생긴 비성경적인 이론이다.

 마귀는 그 본질이 거짓말쟁이이다(요 8:44). 위에서 밝힌 것처럼 김씨의 마귀론이 성경을 떠난 것만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유익정도나 숫자와 아무 상관없이 사탄의 역사이다. 우리는 쉽게 김기동씨의 마귀론은 마귀신학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많은 평신도들은 영의 세계를 두려워 한다. 마귀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그래서 오늘날 신비주의는 많은 사람을 모으는 나팔같이 사용되지만 또한 이단을 위한 문이 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요 1:12).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 곧 영생을 얻었다(요 3:16). 그리고 아들을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롬 8:38, 39).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요한계시록을 보며 어떤 징계와 저주가 나올지라도, 어떤 환난이 나올지라도, 어떤 혼란이 나올지라도 우리는 주의 권능으로 능히 이길 것이며 보호될 것이니 오히려 감사하고 감사해야 하는 줄로 믿는다. 이것이 말씀의 권능을 믿는 성도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권능을 믿는 성도이다.

 

결론

 
귀신은 타락한 천사이다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성서적 마귀론은 신학의 많은 숙제를 남기고 있다. 이제 신학계의 적극적인 관심이 모아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필자가 결론적으로 이 항을 만든 것은 적극적인 면에서 성서적 마귀론을 정립하겠다는 뜻보다는 많은 연구의 가능성을 남겨 놓자는 것이며 김씨의 마귀론의 표면적 실제적 핵심이 귀신이란 점에서 이 부분에 대한 성서적 접근을 하자는 적이다.

 그동안 학계에 나온 마귀론 중에서 복음적인 면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마귀론을 메릴 엉거(Merrill. F. Unger)가 쓴 성서적 마귀론(Biblical Demonology)이다(정학봉 역, 요단출판사, 1981). 그러나 이 책에서도 많은 연구점을 남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마귀에 대해 많은 부분을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성서적 마귀론, pp.22~23). 그러나 또한 마귀론 연구의 핵심은 다른 어떤 인간의 자연주의적 이론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분명한 답을 주는 것이 성경이 되어야 한다(Ibid., pp.44~43).

 먼저 김씨가 귀신론을 중심해서 정통교회를 향해 내어놓은 도전을 살펴보자.
 김씨는 귀신이 제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의 사후의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귀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통신학에서는 귀신 또한 타락한 천사로 보는데 이는 성경적으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귀신은 결코 불신자의 사후 존재가 아니요, 마귀와 함께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모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성서적 증거도 없습니다"(마귀론 하, p.62).

 그가 그렇게 말하는 논리의 근거는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도 많은 귀신들이 있어서 질병을 일으키느냐고 하는 것이다. 김씨 자신의 주관적 논리의 근거는 이렇다.

 천사나 마귀는 절대로 우리 몸에 못들어 오는데(Ibid., p.63) 만일 들어간다면 A속에 있으면 B속에 마귀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T.P.9~2). 그러니 질병을 일으키는 것은 귀신이요, 그렇게 많은 질병들을 이 우주 안에서 일으키는 귀신들은 많을 수밖에 없고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고 할 때 잘 믿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점이 성경과 다르다. 성경에 보면 사탄과 마귀가 인간에게 들어 온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13:2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으며 누가복음 22:3에서는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라고 했다. 심지어 사도행전 5:3에서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하였다.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할 때만 사탄이라고 하는 김씨에게 위의 말씀중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가니"란 말은 이중으로 불가능한 말이다.

 또한 마귀가 A란 사람 속에 있으면 B라는 사람 속에 없다는 말은 영의 세계를 모르는 말이다. 그러면 마귀가 A라는 사람을 대적하고, 유혹하고, 올무를 놓는다면 B라는 사람을 대적할 수도, 유혹할 수도, 올무를 놓을 수도 없어야 할 것이다(약 4:7; 딤전 3:7).
 한마디로 귀신은 사탄과 마귀와 같이 타락한 천사이다. 엉거는 타락한 천사를 활동하는 계층과 묶여있는 계층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탄의 처음 반역에서 그가 비천한 천사들을 많이 끌어들인 것을 알 수가 있다(마 25:41; 게 12:4 참고). 이들 타락한 천사들은 두 계층으로 나누이는데 (1) 자유스럽게 활동하는 계층과 (2) 묶여있는 계층이 있다. 이들 자유스럽게 활동하는 계층은 그들의 재왕인 사탄의 지도하에 하늘에서 왕래하고 있는데 이들 타락한 영들에 대해서만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어있다. 그들 '귀신의 왕 바알세불'(마 12:24)이라고 불렀고 '마귀와 그 사자들'(마 25:41), '용과 그의 사자들'(계 12:7)이라고도 불렀다. 이들 사탄의 왕국의 통치하에서의 감금되지 아니한 악령들은 그의 사자와 신하들이며(마 12:26) 그의 세력을 실제적으로 어디에나 있게 할 만큼 수없이 많은데 바로 이들이 귀신들인 것 같다"(엉거, 마귀론, p.88).

 분명히 귀신이 타락한 천사들이란 증거는 "마귀와 그 사자들"(마 25:41)과 "용과 그의 사자들"(계 12:7)을 그 결정적 증거로 들 수 있다. 더욱이 사탄의 최초 반역시 그보다 못한 수많은 천사들이, 모든 천사의 삼분의 일 가량되는 천사들이 그곳에 가담하였다(겔 28:18; 계 12:4). 이렇게 귀신을 정의하는데 성경적으로 아무 모순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탄, 마귀 또는 귀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인의 후손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의 머리가 상하였으며(창 3:15), 하늘에서 떨어졌으며(눅 10:18), 사탄의 권세는 무너졌다(고전 15:55 이하). 이제 마지막 심판이 남아 있을 뿐이다(계 20:10).

 아무리 그들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지라도(고후 11:1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만으로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강할지라도 우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 6:10) 승리할 것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7)고 찬송하고 찬송하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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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경 목사가 쓴 <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기독교문화협회刊, 1990년 9월10일 발행)를 전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