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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說敎)란 무엇인가?

맑은샘77 2013. 7. 6. 15:56

설교(說敎)란 무엇인가?| 박종태목사 | 2012.09.05. 00:08

설교(說敎)란 무엇인가?


Ⅰ. 이끄는 말
Ⅱ. 설교란 말의 뜻
Ⅲ. 설교의 내용
Ⅳ. 설교의 목적
Ⅴ. 설교의 형태
Ⅵ. 설교의 구분
Ⅶ. 설교의 특성
Ⅷ. 맺는 말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17:2-3)



Ⅰ. 이끄는 말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특징 중의 하나가 설교(說敎)이다. 그것은 종교 개혁운동이 주로 설교를 통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 시대는 예배가 의식(儀式) 중심이었기 때문에 설교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때였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의식 중심의 형식적인 예배 행위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 결과 개혁교회의 예배는 설교가 그 중심이 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교회 예배는 설교 중심에서 다시 의식 중심의 예배로 바뀌어지면서 설교의 비중(比重)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가 흘러갔다. 그동안 설교의 순수성은 지켜지지 못하고 변질되어 왔다. 지나온 시대의 사상적 변천에 따라 설교의 내용이나 형태가 바뀌어 왔고, 오늘에 와서는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정치 강연, 도덕적 부패를 힐책하는 윤리 강연, 철학적 사상이나 이념(理念)에 대한 사상 강연, 사회 생활에 필요한 교양 강좌 등이 교회 안에서 설교라는 명목으로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교회사적 측면에서 볼 때, 현대를 설교의 혼란시대(混亂時代)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 만큼 설교의 형태나 내용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혼잡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는 교회의 혼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현대 교회의 혼란은 현대 설교의 혼란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설교의 혼란은 성도의 심령을 혼란하게 하고, 그 결과는 교회의 혼란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개혁교회에 있어서 설교의 비중은 참으로 큰 것이며, 그 중요성 역시 아무리 강조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 진리 수호의 구체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속에 성경 진리가 설교 없이 그냥 보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진리는 건전하고 바른 성경적 설교를 통하여 널리 전파되고 자라나는 후대들에게도 전파(傳播)되어야 굳게 지켜지는 것이다. 건전한 설교를 회복하는 것은 건전한 교회를 이루는 지름길이다. 설교의 회복이 없이는 현대 사조(思潮)의 탁류에 밀려 쓰러져가는 교회를 견고하게 세울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설교가 아닌 것을 설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태로는 급류에 떠내려가는 현대 교회를 건지지 못한다. 오늘날 뜻있는 교회 지도자라면 누구나 교회 개혁의 당위성(當爲性)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해야 할 교회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너무도 간단하고 분명하다. 바로 그것은 설교의 개혁으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참으로 성경적인 건전한 설교란 무엇인가? 이 과제는 개혁의 당위성을 절감하는 현대 교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Ⅱ. 설교란 말의 뜻

설교(Preaching)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특유한 것은 동사 ‘케루세인’( )이라는 단어로서 ‘포고자로서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하나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는 주요한 단어로는 동사 ‘유앙겔리제스다이’( )라는 단어인데 ‘기쁜 소식을 알리다’ 또는 ‘복음을 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결합동사로서 ‘케루세인 토 유앙겔리온’( )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복음을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 용어들은 모두가 신약성경에서 여러 번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설교라는 말의 뜻을 설명한다면 ‘기쁜 복음의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설교자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설교라고 알고 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즉 설교라는 것은 설교자가 어떤 인간의 철학적 지식이나 사상 또는 윤리나 도덕 등이 아닌 신ㆍ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좀 더 간단하게 요약을 한다면 ‘말씀 선포’라는 내용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의 내용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말씀이라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너무나 다양하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설교의 내용에 대한 연구가 요구된다.


Ⅲ. 설교의 내용

성경적인 바른 설교는 그 내용이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설교라는 말이 ‘말씀 선포’라는 뜻으로 이해된다면 설교의 내용이 말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설교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자가 말한다고 해서 말하는 모든 것이 다 설교의 내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신ㆍ구약성경의 내용을 선포하는 것만이 진정한 성경적인 바른 설교이다.

신약시대 교회는 대부분 설교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신약성경에만 국한(局限)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자료로 사용하는 정도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주일 낮 예배 설교는 가능하면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도 했다.

그것은 설교할 복음의 내용이 주로 신약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고, 구약에는 비교적 율법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선입견(先入見)에 의한 오해이다. 그러나 구약성경도 신약성경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동등한 설교의 내용이다.

(행2:14-21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주제(主題)에 의하여 총정리 된다.
그 뜻은 전능자는 약속대로 이루시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복을 언약하셨다. 그런데 아담은 타락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했어도 아담과의 언약만은 반듯이 이루어 주시는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여 주시려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복을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어 주셨다. 이같은 섭리를 통하여 전능자이신 하나님은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계시해 주신 것이 바로 구약성경이다.

(출3:15-16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설교자가 전해야 하는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복을 주셨음으로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고 증거 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복은 복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복음이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복을 주셨다는 것을 전하는 소식이라면 복은 설교자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설교자가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행13:16-23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 오십 년간)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멸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신약성경 내용은 구약성경이나 하등 다름 없는 설교의 내용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언약하신 복을 성취해 주셨다는 내용의 말씀이다. 그 내용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주제에 의하여 총정리 된다. 그 뜻은 자기 백성은 죄에서 구원할 자가 기름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첫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기로 언약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둘째 아담인 예수를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로 보내 주셨다. 이같은 섭리를 통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언약 자손으로 오신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임을 계시해 주신 것이 신약성경이다.

(행13:24-41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 자손이신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리스도는 복음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말은 언약 자손인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말이다.
복음이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다는 것을 전하는 소식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설교자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모두가 설교자가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행2:33-36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Ⅳ. 설교의 목적


설교에 있어서 그 목적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그것은 설교의 목적에 의하여 설교의 내용과 성질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올바른 설교는 그 목적의 순수성이 유지(維持)될 때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설교를 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한다면 설교자로서의 치명적(致命的)인 결함이 아닐 수 없다.

인본주의 학자들은 설교의 목적이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데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같은 주장은 설교에 대한 견해를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자들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설교는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한 정치 강연이나 도덕사회 실현을 위한 윤리 강좌가 같은 성격을 가진 설교가 아닌 설교를 말한다. 그러므로 사회 정의가 설교의 근본적인 목적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설교의 근본 목적이 달성될 때에 수반(隋伴)되는 부수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정통 보수파 교회에서는 대부분의 설교가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 영혼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설교를 살펴보면, 그 경우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 큰 무리를 대상으로 씨 뿌리는 비유(譬喩)를 통하여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신 일이 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비유로 말씀하시는 까닭을 물었을때, 예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이 되었으나 저들 즉 큰 무리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선지자의 예언대로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답변하셨다.

(마13:1-5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삽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 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여 복음의 효능의 양면성(兩面性)을 밝힌 바가 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에 대한 복음적 설교는 택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지만 불택자들에게는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성경적인 설교의 근본 목적은 타락되어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데 있다.

(호6:1-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겔6:1-7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작은 산과 시내와 골짜기를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너희 제단이 황무하고 태양상이 훼파될 것이며 내가 또 너희 중에서 살육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이스라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너희 해골을 너희 제단 사방에 흩으리라 내가 너희 거하는 모든 성읍으로 사막이 되며 산당으로 황무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태양상들이 찍히며 너희 만든 것이 다 폐하며 또 너희 중에서 살육을 당하여 엎드러지게 하여 너희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설교자는 성경 계시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하여 가르쳐 주려는 목적으로 설교를 한다.
이러한 근본 목적에 의한 설교의 결과는 다양(多樣)하게 나타나게 된다. 어떤 자는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며, 어떤 자는 마음이 더욱 강퍅(剛愎)해져서 도리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고,

어떤 지역에서는 많은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사회정의가 어느 정도 실현되기도 하고, 어느 경우는 그와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기도 하는 부수적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의 근본 목적이 인간의 구원에 있다거나 사회정의 구현(具現)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그 속성을 계시된 성경으로 가르쳐 주는데 있다.
이같은 주장은 설교의 내용에 대한 설명과도 잘 조화를 이룬다.


Ⅴ. 설교의 형태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시행되고 있는 설교의 형태(形態)들에는 본문설교, 제목설교, 강해(講解)설교 등이 있고, 그 외에도 일부에서 선호(選好)하고 있는 예화설교나 간증설교 등과 같은 것들이 있다.

본문설교는 성경에서 본문을 길지 않게 두서너 절을 골라서 정한다. 그리고 그 본문 안에서 주제를 정하고 설교의 내용도 본문 내용의 진행 과정에 따라서 작성한다.

(행8:29-36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 설교 형태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많이 선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복음의 내용을 왜곡(歪曲)시킬 소지나 위험성이 언제나 내포되어 있는 설교 형태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성경 전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한 부분만을 바르게 이해하기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해의 소지가 너무도 다분하기 때문이다.

제목설교는 적당한 양의 성경 본문에서 제목만을 정하고 설교 내용은 설교자가 자유롭게 구상해서 논리를 전개하는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설교 형태는 비교적 자유주의 신앙 노선을 따르는 설교자나 소위 부흥사로 자처하는 교회의 신종(新種) 지도자들 계층에서 많이 선호하는 유형의 설교이다. 이 설교는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정립되지 못한 설교자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진리를 왜곡시킬 위험성이 가장 많은 유형의 설교이다.

강해설교는 성경 내용 그 자체를 풀어서 전달하는 설교 형태인데 가장 건전하고 바른 유형의 설교이다. 그 구체적인 설교 방법은 성경의 전체 내용의 논리적 흐름을 따라서 본문을 우선 문법적(文法的)으로 이해를 시키고, 다음으로는 역사적 내용을 파악하게 한 다음에 신학적인 의미를 통해 본문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행17:2-4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

이 설교는 일반적으로 아주 어렵고 힘든 설교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성경 본문 내용의 통일성이나 일관성(一貫性)을 찾기가 어려운 데 있고 그 결과로 종합적인 신학체계를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강해설교의 필수적(必需的)인 요건은 신ㆍ구약성경 전체 내용의 논리 흐름을 따라 어느 한 부분을 바르게 강해할 수 있어야 한다.

기타 예화설교나 간증설교는 설교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무리가 가는 유형의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내용 자체가 성경과는 전연 무관한 경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형의 설교는 대부분 건전하지 못한 교회 안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Ⅵ. 설교의 구분


앞에서는 현대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설교의 형태들을 그 유형별로 알아 보았다. 이제는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설교에 대한 종류를 그 성질에 따라 구분해 보려고 한다.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속에 나타나는 설교는 예언자적(豫言者的) 설교, 사도적(使徒的) 설교, 교사적(敎師的) 설교로 구분이 된다.

예언자적 설교는 주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모세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적인 설교를 일컫는 말이다. 이 설교의 특징은 하나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전하는 설교의 내용을 주로 하나님께 직접 받아서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는 데 있고, 그 설교 내용 자체가 대부분 예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데 있으며, 그 예언적 설교 내용이 곧 구약성경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그래서 구약성경 그 자체 내용이 대부분 선지자들의 예언적 설교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적 설교는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것인데, 주로 예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의 설교를 일컫는 말이지만 예수님의 설교까지를 포함해서 지칭(指稱)하는 말이다. 이 설교의 특징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이나 많은 무리들에게 설교를 하실 때에 비유나 여러 교훈을 비롯해서 사도들이 직접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으로 설교 했다는데 있다. 이같은 특징은 구약시대의 예언자적 설교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현대 신약교회의 교사적 설교와도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 설교이다.

교사적 설교는 사도시대 이후, 곧 신약성경 계시가 완성된 이후에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은사(恩賜)를 받은 목사나 전도자들의 설교를 말한다. 이 설교의 특징은 설교의 내용이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신ㆍ구약성경에 국한된다는 데 있고, 더 이상 하나님의 직접적(直接的)인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적 설교는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해 주시고 예수님을 비롯해서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계시해 주신 신ㆍ구약성경만을 풀어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교회 설교자인 목사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이나 신약시대 사도들처럼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아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약교회 시대에는 목사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는 성령의 감화나 조명(照明)은 있으나

(행16:11-14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직접적인 설교 내용에 대한 성령의 계시는 없기 떄문이다.


Ⅶ. 설교의 특성


결론을 맺기 전에 성경적인 바른 설교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돕기 위해서 그 특성에 대하여 알아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설교의 특성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으나, 그 내용이 포함하고 있는 대표적인 몇 가지의 특성만을 밝혀 본다면 절대성(絶對性)과 계시성(啓示性)과 단순성(單純性)을 지적할 수가 있다.

설교의 절대성은 그 내용이 신적(神的)이라는 의미나 불변성이라는 의미 등을 포함하는 말이다. 성경적인 바른 설교의 내용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변하지 않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정치나 교육이나 도덕이나 철학 또는 사상 등의 강연 내용과 근본적으로 성질을 달리하는 부분이다. 분명한 차이점은 성경적인 설교는 신적이라면 일반적인 강연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전자가 불변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가변적(可變的)인 것이라는 점이다. 전자가 절대적이라면 후자는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설교의 계시성은 그 내용이 계시의 당사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주신 것이라는 의미를 표현하는 말이다. 성경적인 바른 설교는 그 내용이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존재와 속성을 확실하게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가 사색하거나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는 학술 강연과는 그 성질이 원천적으로 다른 계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성경적 설교만이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성경적인 설교 내용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라면 일반적인 학술 강연은 하나님께로부터 피조되어진 만물이나 섭리되어진 사건 등에 대한 미숙(未熟)한 증거이다.

설교의 단순성은 그 내용의 구조가 다양하거나 복잡하지 아니하고 아주 단조롭고 순수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설교의 내용이 아주 다양하고 복잡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바른 설교는 그 내용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학술 강연과 같이 그 주제가 다양하거나 내용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아주 단조롭고 순수한 단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앞장에서 설교의 내용에 대하여 언급한 바와 같이 설교의 근본 원천이 되는 성경 내용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을 증거하고, 신약에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ㆍ구약성경의 두 주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시다는 하나의 주제로 정리가 된다.

그리고 이 주제는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시려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내어 주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신ㆍ구약성경 전체는 결국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시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성경적인 설교는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는 단조롭고 순수한 주제만을 증거하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Ⅷ. 맺는 말


지금까지 시작하는 말과 함께 설교라는 말의 뜻을 비롯해서 설교의 내용, 목적, 형태, 구분, 특성에 관하여 알아 보았다.
설교라는 말이 “기쁜 복음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결론적인 정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의한다면, 건전한 성경적 설교는 설교자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인 신ㆍ구약성경을 내용으로 해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할 목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성경 내용을 자세히 풀어서 모든 자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건전한 성경적 설교는 지상교회의 유일한 임무인 진리수호(眞理守護)의 유일한 수단이다. 진리가 수호되는 곳에만 건전한 교회가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교회의 설교에 대한 개혁은 역사의 무거운 요청이다.